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지금 여기서 수행을 두번째 법문

Dhammarakkhita 2016. 12. 18. 11:52

입재 법문 때 “수행은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다림에는 삶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다리는 것이 실현되기 전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한 준비, 삶의 연습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다린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 실존하고 있는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되어 있을 ‘나’의 허상을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므로, 대상 혹은 일과 ‘지금, 여기’ 있는 ‘나’의 실존과 관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의 삶이 아니고 단지 삶의 연습, 삶을 살기 위한 채비의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살기 위한 준비’는 필요 없습니다. 삶에는 준비과정이 없습니다. 그 어떤 삶의 준비과정도 진정한 수행과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삶을 위한 준비 과정을 놓아버리고 지금 하고 있는 모두가 ‘바로 삶’이 되게 살아야 합니다.

 생활하는 모든 과정이 그 자체로서 온전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자체가 그대로 수행의 순간이며, 담마의 성품이 드러나는 순간이고, 깨달음의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모든 순간순간이 다 소중하고, 다 본래성품을 발현하는 순간이 됩니다.

 그랬을 때 우리 삶의 그 어떤 순간도 우리를 괴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모든 순간이 다 삶의 의미를 지닌 순간이므로, 그 순간은 온전한 순간이고,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깨달음의 순간이므로 거기에는 삶에 대한 의미 충만과 충족이 있습니다.

 매 순간 순간에 일어나는 일들을 온전한 삶의 목적으로 알아, 무언가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보지 않으며, 삶과 수행을 분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이 그대로 수행의 순간이 되고, 나아가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중에 가족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여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고 합시다. 그래서 시장 가서 재료를 사고, 재료를 장만하여, 음식을 만듭니다. 저녁 때 가족이 다 모이기를 기다립니다. 가족은 각자가 사회 활동 공간에서 나름대로 사건이 생겨 다 모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가족에게 음식을 먹이겠다는 그것 자체에 삶의 목적을 두었다면 그대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설사 가족이 다 모였다고 하더라도 가족이 맛있게 먹어주지 않았다면 그대는 또한 괴로울 것입니다.

 사실, 그대는 가족에게 음식을 먹이는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 말아야 했었습니다. 음식의 재료를 사기 위하여 시장이나 수퍼에 갔을 때 재료를 보고, 만지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일어나는 세계를 분명히 알아차리며 이해하는 것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했습니다.

 또한 재료를 구입하여 돌아와서 음식을 만들 때 역시, 재료를 손질하며 재료와 그대 자신이 관계를 맺어 재료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음식을 만들 때 만드는 과정 그 자체에 관계를 맺어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야 했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먹을 때 역시, 그대가 해야 하는 것은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어 즐기고 에너지를 얻기를 바라는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 그 이상은 아닙니다. 각자가 얼마나 음식을 맛있게 먹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뿐 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재료를 사기 위하여 시장에 가는 것도, 재료를 고르는 것도, 흥정을 하는 것도, 재료를 장만하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도, 음식을 먹는 것을 관망하는 것도 다 그대의 삶이 되며, 그것들은 그대로 수행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이 목적이 되어 버렸을 때, 음식을 사러 가는 것이나, 장보는 일이나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음식을 다 먹고 설거지 하는 과정이 짜증스럽고 별로 소중하지 않은 과정이 되어버립니다. 그랬을 때 그 한 과정을 위한 준비의 과정은 다 삶에서 허비됩니다. 얼마나 많은 삶의 부분이 삶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실제로 삶의 많은 부분들을 헛되이 버리고 있습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은 어느 한 순간도 더 중요하다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순간들이 그대로 소중하고, 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존재가 낱낱이 똑같이 의미 가득한 것들 입니다.

 직장으로 가는 과정의 순간은 덜 소중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순간은 더 소중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에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집안일을 하는 것은 덜 소중하고, 수행을 하는 시간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분별적 사고방식은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모든 것의 가치는 동일합니다. 다만 상황에 따른 유용성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일단 주어진 대상에 대하여 의미에 무감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의 의미는 자신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대상에 내가 관계를 맺으면 그것은 의미를 드러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대상이 의미를 드러내게 하려면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어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하는 ‘깨달음’이 수련을 열심히 하여 언젠가 얻게 될 어떤 것이라면, 지금의 ‘깨어있음’은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지금 깨어있는 것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미래의 깨달음이 목적이 된다면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은 깨달음의 준비, 연습뿐인 것이 됩니다. 그러나 ‘깨달음’과 ‘깨어있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뭔가 어떤 것을 위한 준비, 연습, 과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모든 행위가 그대로 목적이어야 하고, 똑같이 소중한 깨달음의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준비나 연습, 그리고 과정은 다 빼버리고 오직 목적만이 있도록 하는 것, 오직 순간만이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이고 수행자가 살아야 할 길입니다.


그러면 어떤 행위를 하든, 삶의 준비가 아닌, 삶 그 자체가 되기 위한 수행의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실천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실천 항목에 주목해야 합니다.


 첫 번째는 대상이 변화할 때, 변화하는 대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임’을 실천 수행해야 합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집착이란 항상 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항상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체의 조건지어진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제행무상’의 진리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대상, 일 등은 반드시 변화합니다. 내 마음도, 상대방의 마음도 변화하고, 나의 몸도 변화하고, 나의 사랑도 변화하며, 나의 소유물들도 변합니다. 조건지어진 존재는 오직 변화한다는 그 진리만이 변화하지 않을 뿐입니다.

 변화하는 것이 진리라면 변화하게 그대로 내버려 두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수행자가 사는 삶의 방식은 자기 자신과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있은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수행의 시작이며 끝입니다.

 두 번째는 집착하는 대상과 마음을 ‘놓는’ 실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조건지어진 존재는 항상 변화하는데, 그 존재는 어떤 근거로 변화하는가. 이 조건지어진 존재들은 인연 따라 나툽니다. 인연이란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에 의하여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살이에서 이 인과응보의 법칙을 빗겨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현실은 분명 내가 지은 원인의 결과인 것입니다.

 누가 나를 욕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그 전에 행했던 행위의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장에 욕 얻어먹는 것은 괴롭지만 그것은 과거에 행한 악업의 결과를 받음으로써 그 업장을 녹여가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괴로운 일도 총체적으로 보면 반드시 부정적이지만은 않습니다. 괴로운 일은 과거 악업의 과보를 받는 일이지만 내 업장은 괴로움을 받은 만큼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좋은 일이 있기만을 바랄 것도 없습니다. 인과법에 복권과 같은 대박이란 없습니다. 내가 과거에 지어 놓은 복을 지금 받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좋은 일만 자꾸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저장된 복을 자꾸 까먹는 일이고, 공덕의 창고를 비우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나쁜 일이라고 거부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이라고 더 받고자 애쓸 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저 꼭 필요한 일이 인연 따라 필요할 때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싫다고 거부할 것도, 좋다고 애착할 것도 없이 그저 시비 분별을 다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좋은 것은 더 얻지 못해 안달하고, 싫은 것은 버리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변화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하기를 바라며 붙잡아두려 합니다. 그렇게 얻음과 버림에 집착하고, 그 집착의 대상을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면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하는 대상을 얻었을 때 행복해 하고, 집착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괴로워합니다.

 기쁨이나 괴로움은 원인에 다른 결과임을 분명하게 깨달아, 모든 바램을 다 놓아버려야 합니다. 바램은 너무 무겁습니다.


 세 번째는  ‘알아차리기’, ‘바라보기’를 실천 수행해야 합니다.


  ‘놓음’의 수행은 ‘받아들임’의 수행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모든 집착을 놓으라고 하니까 수행에 발을 들여 놓은 자들은 집착을 놓으려고 애쓰나 집착을 놓지 못해 괴로워합니다. ‘놓음’이 또 다른 괴로움을 가져온 셈입니다. 이치를 개념적으로나마 이해를 하고 그 이치에 따라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의식은 하는데 그 실천이 잘 안 돼서 괴로운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애쓴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갈구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못했을 때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집착을 없애기 위해 애쓰지 마십시오. 어떤 노력도 하지 말고, 어떤 분별도 하지 말고,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하지 말고, 다만 집착하고 있음과 집착하는 대상을 ‘알아차려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그대로 아무런 분별없이 알아차려서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다만 바라보기만 하는 것 그것이 곧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랬을 때 ‘놓음’이 찾아들게 됩니다.


 또한 ‘알아차려서 바라본다’는 말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과거도 미래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 완전히 깨어있게 됩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살지만 본래 괴로움을 품고 있는 대상은 하나도 없습니다. 괴로움은 다만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마음의 허상일 뿐입니다. 마치 새끼줄을 보고 뱀이라고 놀라 괴로워하는 양상과 마찬가지입니다. 뱀인 줄 알고 소스라쳐 물러나 가만히 보니 움직이질 않아 자세히 보니까 그것은 새끼줄이었습니다. 그래서 괜히 놀랐다고 생각하며 그 새끼줄을 들어보니 그것은 삼줄이었습니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이와 같이 이중의 허상을 대상으로 일어난 구조와 동일합니다.

 그러니 괴로움을 없애려고 애쓸 것 없습니다. 괴로움의 대상을 제거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대신에 괴로움을 만들어낸 허상의 대상을 알아차려서 바라보기만 하면 괴로워하는 마음의 작용은 그칠 것입니다. 그리고 곧 그것이 허상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괴로움의 근원적 뿌리가 제거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 네 번째는 모든 존재는 ‘무아’임을 알고 삶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본래 ‘나’란 없습니다. 붓다께서 모든 존재의 본래의 성품은 ‘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인무아’와 ‘법무아’가 그것입니다. ‘인무아’는 인간에 있어서 ‘자아’라는 실체란 없다는 의미이고, ‘법무아’란 일체 존재에 있어서 ‘본체’, ‘실체’라 할만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제법무아의 진리를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나’로 살지 않고 ‘담마’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로 살아선 안 됩니다. ‘내’가 산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라는 아상을 가지고 ‘내 것’을 늘려나가려는 ‘아집’에 얽매여 살면 안 됩니다. ‘나’라는 관념, 내가 살고 있다는 관념,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 됩니다.

 ‘나’가 없다면 괴로울 주체가 없기 때문에 괴로울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만 버리면 그대로 담마라는 말입니다.

 흔히들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깨달은 자’는 없고, 다만 ‘깨달음의 행위’, ‘깨달음의 현상’만 있는 것입니다.

 다섯 번째는 ‘보시 바라밀’을 실천 수행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의 삶을 위해서는 안으로는 인식의 오류를 걷어내어 지혜를 증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만 밝혀서 끝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지혜’와 함께 ‘복덕’을 증장시키는 일입니다.

  이 ‘지혜’와 함께 ‘복덕’을 증장시키는 일이 바로 ‘보시 바라밀’의 수행입니다. 이것은 이타적인 ‘베풂’을 말합니다. 그것은 복덕을 증장시키는 수행이며, 사랑과 연민의 실현입니다. 베풂이 없는 지혜나 지혜가 없는 베풂은 모두가 절름발이에 불과합니다.

 지혜만 있고 자비롭지 않다면 그 지혜는 잘못된 쪽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비만 있고 지혜가 없다면 집착으로 기울리든지 아니면 돕는다는 것이 도리어 상대방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게 되기도 합니다.

 이 지혜와 자비는 사실 같은 진리의 다른 표현입니다.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고정화된 실체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라는 절실한 자각이 지혜라면 그러한 실천이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늘 ‘대상’과 관계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가 불행의 한가운데 있는 한 절대로 ‘나’만 행복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내가 필요함을 느낄 때 그것을 충족시켜 만족을 얻는 것처럼, 다른 사람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충족시켜 줌으로써 그 사람도 만족하게 되고 나 또한 그 사람의 불만족이 제거된 것에 기뻐합니다. 이러한 베풂이 보시입니다. 사랑과 연민의 실천적인 토대가 보시행입니다.


 이 다섯 가지의 삶의 실천 안에 연기법, 인과응보의 법, 무상・고・무아의 삼법인, 공성, 사성제, 사념처의 관, 무분별, 무소유,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 보시 등의 붓다 가르침의 모든 법에 대한 실천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상기한 일체 법의 다른 표현, 다른 방편일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돌아가시면 위빠싸나 수행이라는 삶의 방식을 토대로 이 다섯 가지를 꾸준히 실천하며 여러분들의 삶의 목적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평온과 평화 속에서 점점 의미 충만한 삶을 살며 대자유를 향하여 나갈 것입니다.

 

 

                                                               사두사두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