八正道(여덟가지 성스러운 도)/正見

바른 견해[正見 sammā diṭṭhi]-비구 보디 지음|전병재 옮김

Dhammarakkhita 2012. 11. 27. 10:29

바른 견해[正見 sammā diṭṭhi]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은 하나하나 차례로 밟아 올라가야 하는 계단 같은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유를 들자면 팔정도는 여러 가닥으로 꼰 밧줄 같은 것으로, 그 밧줄이 최대한 힘을 받기 위해서는 그 모든 가닥 하나하나의 협력이 필요하다. 공부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면 이 여덟 가지 항목 서로 도우며 동시에 드러난다.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는 길을 열어나가는 데 어떤 순차를 밟아나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수행에 임하는 입장에서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들을, (1)‘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가 만드는 도덕적 연마의 묶음[戒蘊], (2)‘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 만드는 집중의 묶음[定蘊], (3)‘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가 만드는 지혜의 묶음[慧蘊] 세 단계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묶음으로 분류하고 보면 그 셋은 더 높은 도덕적(moral) 훈련, 더 높은 의식(consciousness)훈련, 더 높은 지혜(wisdom) 훈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세 가지 훈련의 순서는 도정의 전체적 목적과 방향에 의해서 결정된다. 팔정도가 지향하는 최종적 목적, 즉 고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무지[無明]를 발본색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렸기 때문에 무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훈련단계야말로 마땅히 이 도정의 극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지혜훈련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의 기능을 일깨우게 기획된 것이다. 지혜는 물론 점차 열려온다.

그러나 아무리 희미한 수준의 것일지라도 통찰이 섬광을 발하려면 동요와 산만함이 제거되어 집중을 이룬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집중은 도정의 두 번째 묶음인 정(定)의 공부, 즉 지혜의 개발에 필요한 적정(寂靜)과 차분함을 가져오는 한결 높은 식(識)의 공부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이 집중되어 통일되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선하지 못한 성향들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 불선한 여러 성향은 우리의 주의력을 잡다한 관심거리로 분산해버리기 때문이다. 불선한 성향들이 몸과 말을 통해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드러나도록 방치해 두는 한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여섯 가지 기능들[六根]이 번뇌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수행의 초장부터 이들의 활동을 철저히 제어할 필요가 있다. 이 과업은 도덕적 훈련[戒行]이라는 도정의 첫 번째 묶음에 의해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정은 집중[定]의 기반으로서의 계(戒), 혜(慧)의 기반으로서의 정(定), 그리고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직접적 도구로서의 혜(慧), 이 세 단계로 뻗어나간다.

 

팔정도 항목들의 배열이 삼학(三學)의 계․정․혜 세 묶음의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를 내용으로 하는 지혜가 삼학에서는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도정에서는 이 두 요인이 첫머리에 놓여 있다. 성전(聖典)이라면 엄정한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할 터인데 왜 팔정도에서는 이 두 가지가 맨 마지막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서두에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배열은 조심성 없는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방편상 신중하게 고려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즉, 예비적 형태의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의도[正思]가 공부 시작 단계에서는 삼학에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박차로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른 견해’는 수행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제공하고, ‘바른 의도’는 수행을 위한 바른 방향 감각을 제공한다. 물론 이 두 가지 이런 예비적 역할만으로 그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계와 정의 수련으로 순화되면 더 뛰어난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에 이르게 되고 그때는 더 높은 지혜 공부에 걸맞게 된다.

‘바른 견해’는 팔정도 전체를 이끄는 여타 모든 항목의 선도자이다. 바른 견해를 통해 우리는 출발점과 목적지, 그리고 수행이 진행되면서 통과하게 되는 순차적인 이정표들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바른 견해’라는 기반이 없이 수행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모하게 덤비다가 길을 잃게 될 위험을 무릅쓰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이는 마치 지도를 들여다보거나 경험 있는 운전자의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무데로나 무턱대고 자동차를 몰고 가려는 경우와 같다. 자동차에 성급하게 올라 출발을 서두르다 보면 갈수록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자면 대충이라도 그 방향과 거기로 가는 길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져야 한다. 도의 수련과정에 있어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수행은 어디까지나 바른 견해가 만들어주는 이해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른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진실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핵심적 쟁점에 관해 우리 평소에 어떠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가가 어떤 이론적인 확신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비추어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의 태도, 우리의 행위, 삶을 대하는 우리의 방향 감각 전체를 지배한다. 견해라는 것은 애당초 우리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믿는 바를 희미하게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견해가 선명한 것이든 아니든, 말로 표현된 것이든 아니든 그 영향은 지대하다. 견해는 우리의 지각을 특정 체계로 조직화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에게 해석해 주는 관념의 틀로 결정화(結晶化)한다.

 

따라서 이들 견해는 행동의 조건이 된다. 우리가 무엇인가 선택하고 목표로 삼고, 그리고 그 목표를 이상으로부터 현실로 전환하려 노력할 때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이들 견해가 도사리고 있다. 행위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겠지만 사실은 그 행위 그로 인한 결과는 그들의 원천이 되는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견해 무엇이 진실이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 즉 ‘존재론적 개입’을 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바른 견해와 바르지 못한 견해의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바른 견해는 진실한 것과 상응하는 반면, 바르지 못한 견해는 진실에서 벗어나 거짓이 확하게 자리 잡도록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종류의 상반되는 견해가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행동노선으로 치달아 결국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치신다. 만약 우리가 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그 견해가 흐릿한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고로 귀결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바른 견해를 채택하면 그 견해는 우리를 바른 행위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그런 행위에 의해서 고로부터의 해방 쪽을 향해 방향타를 조종하게 될 것이다. 비록 이 세계에 대해 우리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개념화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해로울 것도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과정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불건전한 마음상태를 일으키는 데 잘못된 견해만큼 책임이 큰 요인도 없고, 건전한 마음상태를 일으키는 데 바른 견해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생류(生類)의 고[不善法]를 일으키는 데 잘못된 견해만큼 책임이 큰 것도 없고 생류의 낙[善法]을 증진시키는 데 바른 견해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증지부》1법집 17경)

 

가장 넓게 보면 바른 견해[正見]는 부처님 가르침 전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범위는 법 그 자체의 범위와 맞먹는다. 그러나 실(實)수행을 위해서는 두 가지 바른 견해가 특히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하나는 세속의 굴레 속에서 기능하는 견해, 즉 세속적 정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으로부터 해탈로 이끄는 수승한 정견, 즉 출세간적 정견이다. 세속적 정견은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향상을 관장하는 법칙으로서 높은 단계 또는 낮은 단계의 생으로 태어나는 원리 및 세속적 고락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출세간적 정견은 해탈에 필수적인 원칙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생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신적 향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생과 사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궁극적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바른 견해

 

세속적인 바른 견해에는 업의 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포함된다. 여기서 말하는 업은 물론 행위의 도덕적 효력을 말한다. 이를 다시 정확하게 규정지은 바에 따르면 ‘업의 귀속에 대한 바른 견해(kammassakatā sammādiṭṭhi)’가 되는데 이를 설명하는 표준적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자 자기 업의 상속자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고 자기 업으로 지탱된다. 선악 간에 어떤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도 경전에 나온다. 예컨대, 남에게 무엇을 주거나 보시를 하는 등의 덕스러운 행위는 도덕적 중요성을 띤다는 것, 선행과 악행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수반한다는 것,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 재생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체득한 높은 깨달음에 기초해서 법을 설하는 사문이나 브라만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경 구절들이 있다.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바른 견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열쇠가 되는 용어인 업(業 kamma)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업’이라는 용어는 행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그런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의욕이 빚는 행위, 그 중에서도 도덕적 측면이 관건이 되는 의욕이라는 의미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의욕이야말로 행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와 의욕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다. 업을 분석하는 한 경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내가 업(kamma)이라 부르는 것은 의욕[思 cetan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의욕이 생겼기에 사람은 몸[身], 말[口], 뜻[意]으로 업을 짓는다.”고 언명하셨다. 업을 의욕 내지 의지작용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결국 업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마음의 욕구․성향․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신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의욕은 몸이나 말, 또는 뜻[意]의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이 셋을 세 가지 ‘업의 문[業門 kammadvāra]’이라 부른다. 몸을 통해 표현되는 의욕은 신업(身業)이며, 말을 통해 표현되는 의욕은 구업(口業)이고, 생각․계획․사상․기타 정신적 작용이 밖으로 표현되기 이전 상태의 의욕을 뜻으로 짓는 의업(意業)이라 한다. 따라서 의욕이라는 한 가지 요인은 그것이 드러나는 경로 여하에 따라서 세 가지 형태의 업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업에 대한 이런 정도의 개괄적 뜻풀이만으로는 ‘바른 견해’를 갖기에 부족하다. 바른 견해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첫째, 업에는 윤리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선업과 불선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둘째, 구체적으로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아는 것, 셋째, 이런 업이 솟아나오게 되는 근원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경에 나오듯이 “고귀한 제자가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알고 그 불선업의 뿌리를 알고, 또 무엇이 선업인지를 알고 그 선업의 뿌리를 알면, 그는 곧 ‘바른 견해’를 가진 것”이다.

 

(i)이런 점들을 정리해 보면 먼저, 업은 불선한(akusala) 것과 선한(kusala) 것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선업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정신적 계발에 방해가 되는 것, 나와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반면에 선업은 도덕적 면에서 권장할 만한 것, 정신적 계발에 도움이 되는 것, 나와 남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ii)선․불선, 이 두 가지 경우 각각에 해당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부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열 가지씩 선택하여 이를 열 가지 불선업 및 열 가지 선업이라 부르셨다. 이 열 가지 중 세 가지는 몸으로, 네 가지는 말로,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뜻으로 짓는 업이다. 열 가지 불선업의 과정을 그것이 표출되는 문(門)에 따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업(kāyakamma)

1. 생명을 해침[殺生]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함[偸盜]

3. 감각적 쾌락 면에서의 그릇된 행위[邪淫]

구업(vacīkamma)

4. 거짓말[妄語]

5. 말전주[兩舌]

6. 거친 말[惡口]

7. 쓸데없는 말[綺語]

의업(manokamma)

8. 탐심[貪]

9. 악의[瞋]

10. 그릇된 견해[癡]

 

이 열 가지 불선업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열 가지 선업이다. 다시 말해 앞의 살생에서부터 쓸데없는 말까지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고 탐심과 악의에서 헤어나고, 바른 견해를 견지하는 것, 이 열 가지가 선업이다. 설령 앞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직 마음에서 그칠 뿐 명백한 외적 행위를 수반하지 더라도 이들을 신체적, 언어적 선업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런 마음상태가 몸과 말의 기능을 제어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ii)업은 앞에서 ‘뿌리(mūla)’라고 부른 그 기저 동기들에 입각해서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며, 이 기저 동기에 따라 이에 수반되는 의욕의 도덕적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업은 그 뿌리가 선한지 불선한지 여하에 따라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불선한 것이 되기도 한다. 선업과 불선업의 뿌리는 각각 세 갈래이다. 불선의 뿌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탐욕(lobha), 진에(dosa), 치암(moha)의 세 가지 번뇌이다. 이들 번뇌로부터 비롯된 행위는 모두 좋지 못한 업이 된다. 세 가지 선의 뿌리는 이와 반대의 것으로서 옛 인도 어법대로 부정의 접두사 ‘a[無]’를 붙여 무탐욕(alobha), 무진에(adosa), 무치암(amoha)으로 표기되는 것들이다. 이 세 가지가 어휘상으로 부정적 형태를 띠고 있어도 그것은 이 세 가지 번뇌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수반되는 덕성까지도 포함한다. ‘무탐욕’은 (욕심)버림[出離], 초연함, 관대함을 내포하고 ‘무진에’는 자애, 연민, 친절을, 그리고 ‘무치암’은 지혜를 내포한다. 이 세 가지 뿌리에서 나오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 선한 업이 된다.

 

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어떤 행위의 윤리적 성질 여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 효능에 있다. 우주에 편재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어 이 법칙의 작용으로 일체의 의욕이 빚는 행위는 응보적 결과로 끝을 맺는다. 이 결과를 업보(vipāka) 또는 과(果 phala)라 한다. 행위와 그 과보를 잇는 이 법칙은, 불선한 행위는 고통을 가져오고 선한 행위는 행복을 가져온다는 단순한 원리로 작용한다. 과보는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금생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업은 여러 생에 걸쳐서 작용할 수도 있고 여러 겁을 잠재해 있다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욕이 빚는 행위를 할 때마다 그 의욕은 식의 흐름에 흔적을 남기고 이 흔적은 잠재력으로 저장된다. 저장된 업이 숙성을 도와주는 조건들을 만나면 잠재 상태에서 깨어나 어떤 결과를 촉발시켜 원래의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를 가져오게 한다. 이런 과보는 금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다음 생, 또는 그 다음의 어느 생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업은 재생의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존재 형태를 결정할 수도 있고, 한 생애 속에서 행복과 고통, 성공과 실패, 발전과 퇴보 등 다양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업이 성숙하든 선업은 좋은 결과를, 불선업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법칙에는 변함이 없다.

 

이 원칙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세속적인 바른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된다. 일단 이런 견해가 확립되면 다른 다양한 형태의 잘못된 견해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잘못된 견해들을 그 즉시로 배제할 수 있다. 즉, 금생의 내 행위가 미래의 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확실히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금생에서 끝나고 우리의 의식은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는 허무주의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또 이 견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선과 악, 정과 사를 구분하기 때문에 선악을 개인적 의견의 단순한 발로나 사회 통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는 윤리적 주관주의와도 상반된다. 또 이 견해는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제약이 있기는 해도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이 언제나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라 내려질 뿐이고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환상이며 도덕적 책임 역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결정론적’ 노선과도 상반된다.

 

업과 그 과보를 바로 살펴보라는 ‘바른 견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오늘날의 사고경향과 상충되는 면 없지 않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바른 견해’에 대한 가르침은 선과 악, 정과 사의 문제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 좋고 나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상투적 의견들을 초월하는 심오한 문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한 사회 전체가 무엇이 도덕적으로 바른 가치인지에 대해 혼란에 빠질 수 있고, 그래서 심지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특정 행위를 옳다고 손뼉을 치고 그와 다른 행위를 그르다고 비난한다 해서 그 도덕적 가치가 진정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며 따라서 가변적일 수 없다. 행위의 도덕성 여부는 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조건에 매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어떤 행위를, 또는 그 행위를 이루는 배경인 도덕규범을 평가할 도덕성의 객관적인 기준은 엄존한다.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 기준이야말로 담마[dhamma 法]가 담마 되는 소이(所以)이다. 의욕이라는 모태에서 행위가 나오며 행위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 그리고 행위와 그 결과간의 상응성은 근본적으로 의욕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법의 타당성에 초개아적 기반이 되는 것이며 담마가 진리와 정의로움에 대한 객관적 법칙이 되는 소이인 것이다. 여기에 신과 같은 재판관이 있어서 상벌을 통해 전우주적 상황전개를 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행위 그 자체가 원래 띠고 있는 도덕적, 비도덕적 성격으로 인해 그에 알맞은 결과를 발생시키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업과 그 과보에 관한 바른 견해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는 도덕적 업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저명한 정신적 스승들의 말씀을 받아들여 알고 있는 수준일 것이다. 비록 스스로 확인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더라도 업의 원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전히 정견으로서의 일면은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견해는 이해하는 일, 특히 사물의 전 체계[法界]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준의 견해 그 자체로도 ‘정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욕이 빚는 행위가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만큼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셈이 된다. 뿐만 아니라 행위가 갖는 업력(業力)에 대한 바른 견해는 우리 이해범위 저 너머에 있는 순전히 믿음의 대상만은 아니다. 이 업의 원리는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사실이 될 수도 있다. 깊은 정신집중의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볼 수 있는 초감각적 투시력인 ‘천안(天眼 dibbacakkhu)’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계발할 수 있다. 이 특수 기능이 발달하면 그 눈을 살아있는 존재의 세계로 돌려 업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 알 수 있다. 이 천안의 능력을 갖게 되면 존재들이 죽었다가 그 업에 따라 어떻게 재생하게 되며, 그들이 선업이나 악업의 숙성으로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직접적 지각을 통해서 스스로 바로 볼 수 있게 된다.

 

 

더 높은 바른 견해

 

업과 그 결실에 대해 이처럼 바른 견해를 갖게 되면 도덕적으로 건전한 행위를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 따라서 윤회의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해탈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 모처럼 업의 원리를 수용했음에도 막상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 세속적 성취에 한정시켜버리고 만다. 결국 선한 업을 짓는 동기가 지금 여기에서 번영과 성공을 가져올 선업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즉, 사람으로 행복하게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천상세계에서 천복을 누리는 데에 목표를 두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업의 인과논리 안에는 업과 보의 윤전(輪轉)을 초탈하고자 하는 의욕을 일으키는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 윤회라는 존재질서로부터 완전히 해탈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깊고 차원이 다른 안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세계에 속하는 존재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형태의 윤회적 존재가 본래 가진 결함과 그 결함이 안고 있는 고의 성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낳는 그런 안목이어야 한다.

 

해탈로 인도하는 이 출세간적 바른 견해는 곧 사성제(四聖諦)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올바른 이해가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으로 등장하는 바른 견해, ‘성스러운 바른 견해’라는 이름 그대로의 바른 견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바른 견해의 내용을 사성제와 연관시켜 명백하게 규정하셨다.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집기(集起)’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소멸’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이해이다.

 

팔정도 수행은, 사고와 성찰의 방식을 통해서 어슴푸레하게 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 사성제의 개념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어 궁극적 깨달음과 동등한 수준의 명철함을 통해서 사성제의 진리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될 때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고를 종식시키는 길의 시작과 완성 모두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고(苦)’, 즉 존재라는 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본래적 불만족성에 관한 진리이다. 이 ‘고’는 모든 형태의 삶에 본유하는 무상, 고통, 그리고 영속적 불완전성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고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이 고이며, 늙음이 고이며, 병듦이 고이며, 죽음이 고이며,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이 고이다. 즐겁지 못한 것과 마주치는 것이 고이며, 즐거운 것과 떨어지는 것도 ‘고’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역시 고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五取蘊]이 고이다.

 

위의 마지막 구절은 주의해서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는 포괄적인 언명이다.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五取蘊]’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분류적 접근방식에 의해 규명한 결과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결국 우리 존재라는 것은 물질적 형상[色], 느낌[受], 지각[想], 정신적 형성들[行], 의식[識], 이 다섯의 한 벌로 이루어졌으며, 이 모두가 집착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다섯이고, 그 다섯이 곧 우리다. 무엇을 자신이라 여기든, 무엇을 자신의 자아라고 우기든, 그 무엇은 결국 이 다섯 쌓임이라는 한 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쌓임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생각, 감정, 관념, 성벽(性癖) 속에서 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우리의 세계’다. 이렇게 해서 다섯 쌓임이 바로 ‘고’라는 부처님의 언명은 사실상 우리의 모든 경험, 우리의 전 존재가 고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쌓임을 두고 꼭 ‘고’라고 단언해야만 했을까? 부처님은 다섯 쌓임이 모두 ‘고’인 이유는 그들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순간순간 변한다. 생겨났다 꺼져버린다. 또 그들 배후에 따로 이 변화를 겪어내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존재의 구성요소들 항상 바뀌고 있고 영속하는 어떤 핵심도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요소들 속에는 우리가 안전판으로 삼기 위해 붙들어 둘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있는 흐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속을 구하는 욕구에서 붙들고 있다 보면 고에 함몰될 뿐이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고의 원인’을 적시하고 있다. 부처님은 고로 귀결되는 일련의 마음의 때[垢] 중에서 ‘갈애(taṇhā)’를 가장 파급 효과가 큰, 주된 ‘고의 원인’으로 집어내셨다.

 

이것이 고의 집기(集起)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반복되는 존재를 낳고, 즐김(nandi)․욕망(rāga)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그리고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곧 이 갈애이다. 이른바 감관의 즐거움을 구하는 갈애[欲愛], 존재를 구하는 갈애[有愛], 무존재를 구하는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이 인과 관계를 역으로 뒤집은 것이다. 갈애가 고의 원인이라면 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갈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이 갈애의 완전한 시듦이요, 그침이며, 놓음이요, 버림이며, 벗어남이요, 초연해짐이다.

 

갈애가 제거되었을 때에 오는 완전한 평화 상태가 열반, 곧 모든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로, 이는 우리가 금생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의 멸에 이르는 길’, 열반의 실현으로 가는 길을 드러내 보인다. 이 길이 곧 성스러운 팔정도 바로 그것이다.

 

사성제에 관한 바른 견해[正見]는 두 단계로 발전한다. 첫 단계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바른 견해(saccānu-

lomika sammā-diṭṭhi)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꿰뚫어보는[廓撤] 바른 견해(saccapaṭivedha sammā-diṭṭhi)이다. 진리에 수순하는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우리들 삶 속에서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해는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공부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런 연후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진리들[四聖諦]을 깊이 숙고해 나가면 그 이해가 더욱 깊어져서 드디어 그것의 진실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도 진리를 아직 투철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했다 해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개념의 문제에 그칠 뿐 여전히 미흡하다.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명상수행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첫째 지속적 집중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고, 그런 연후에는 통찰력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통찰력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참다운 특성들을 판별하려는 목적으로 ‘다섯 쌓임[五蘊]’을 관할 때 생겨난다. 이러한 관법 공부가 절정에 달하게 되면 마음의 눈은 ‘다섯 쌓임’을 구성하는, 조건에 매인 현상들을 떠나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열반 쪽으로 옮겨 간다. 통찰력이 깊어지면 열반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시선의 옮김’의 결과 마음의 눈이 열반을 볼 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그 모두를 한꺼번에 꿰뚫어보는 일이 일어난다. 열반, 즉 고를 넘어선 상태를 보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오온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그리고 오온이 단지 조건에 매인 것이며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고(苦)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열반이 실현됨과 동시에 갈애는 멈춘다. 이때 비로소 갈애가 고의 진짜 원천이라는 사실이 이해된다. 열반을 보게 되면 존재가 빚어내는 소란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또한 팔정도를 수행함으로써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팔정도가 정말로 고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사성제를 꿰뚫어 볼 수 있는[廓撤] 바른 견해는 팔정도 수행의 시작 단계가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바른 견해, 즉 우선 배워서 알고 숙고를 통해서 강화되는 바른 견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이 바른 견해가 생기면 우리는 수행, 다시 말해 계․정․혜 삼학의 공부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수행이 무르익으면 지혜의 눈이 저절로 열려서 진리를 꿰뚫게 되고 마음은 고(苦)의 굴레에서 해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