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法印/無常

무상(無常, anicca)

Dhammarakkhita 2012. 11. 28. 14:41

1. 무상(無常, anicca)

 

삼법인(三法印)의 개념은 불교의 해탈관을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토대를 이루는 것이다. 삼법인이란 현상계에 속하는 모든 사물의 보편적 속성이다. 즉 이는 아니짜(anicca), 둑카(dukkha), 아나따(anattā)이다. 아니짜란 무상, 덧없음 또는 변천성이며, 둑카란 불만족스러움, 고통스러움, 괴로움 또는 아픔이며, 아나따란 무아, 영구적 자아의 부재, 혹은 비실체성이다. 참다운 통찰(vipassana)과 깨달음에 이르려면 형성된 모든 사물과 과정(saṅkhāra) 내지 모든 현상(dhamma)이 가지고 있는 이들 세 보편적 특성을 관조해야 한다. 이 세 가지 근본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야말로, 불법(Buddha Dhamma)이 제시하는 최고의 영적 완성을 성취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다.

삼법인 중 그 첫 번째인 무상, 즉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덧없는 변천성은, 경전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교설이다. 불법에 따르면, 그것이 신이건 인간이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유기물이건 무기물이건 간에 영구불변하거나 고정 영속하는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은 변천한다는 이 불교의 개념, 다시 말해 불교의 무상의 법칙은 유명한 ‘제행무상(諸行無常, sabbe saṅkhārā aniccā)’(『중부』Ⅰ권, 228쪽)으로, 좀 더 일반적으로는 ‘행은 실로 무상하다(aniccā vata saṅkhārā)’라는 어구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 두 어구는 형성된 모든 사물이나 과정이 변천․무상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연구나 어떤 신비적 직관의 결과가 아니라 관찰과 분석에 의해 도달한 체험적 판단이다.

이는 편견없는 사고에 바탕한 것이며, 따라서 순수한 경험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증지부』의 「대품」(大品, 4법수, 100경)에서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비구들이여, 형성된 모든 것[行, 有爲, 상카라, saṅkhāra]은 무상하며, 형성된 모든 것은 불안정하며, 형성된 모든 것은 안락과 만족의 원인이 되지 못하니, 우리는 이 형성된 모든 것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넌더리를 내고 그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이니라.”

 

여기서 ‘형성된 모든 것-상카라’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이어지는 교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비구들이여, 지금부터 수십만 년 후에 제2의 태양이 출현하면서 그 뜨거운 열기로 인해 비가 내리지 않게 되고, 모든 초목이 시들어서 말라죽고 냇물과 작은 강들이 말라붙을 때가 올 것이다. 또 제3의 태양의 출현과 더불어 갠지스나 야무나와 같은 큰 강들도 말라버리고, 모든 호수뿐 아니라 큰 바다조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메루(수미산) 같은 큰 산, 아니 이 광활한 대지마저도 거대한 우주적 대참극 속에 김을 뿜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불바다를 이루게 될 것이다. (……) 비구들이여, 이렇듯 형성된 모든 것(상카라, saṅkhāra)은 무상하며, 불안정하며, 안락을 꾀할 거리가 못되니, 그 무상한 본성을 성찰하여 그에 대한 집착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이 가르침으로 미루어보아 ‘상카라’라는 말이 얼마나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상카라’란 말은 자연스럽게 발전 또는 진화한 결과로 존재하게 된 모든 사건, 모든 현상을 다 포괄할 뿐 아니라 그것들이 조건지어져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조건지어 지면서 언젠가는 끝이 나서 다시는 볼 수 없게 사라져가게 될 운명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존재(being)란 없고, 다만 끊임없는 생성[有, becoming, bhava]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은 이전의 원인들이 빚어내는 소산이며, 따라서 의존관계에 의해 생겨난[緣已生, paṭiccasamuppanna] 산물이다. 이전의 원인들 자체도 영속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똑같이 부단하게 생성되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시간적으로 단지 앞서는 측면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동적 과정들이 연쇄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이해해야 하며, 창조되거나 형성된 모든 것은 다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뜻이지 그 자체의 성질 외에 바깥에 있는 제3의 그 어떤 힘에 의해서 창조·형성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일체 사물을 ‘함께 형성된 것(saṅkhata)’으로 간주한다. 이 문맥에서 ‘함께 또는 더불어 형성되었다’는 말은 선행적 조건에 의존하여 일어나거나, 혹은 생성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계에서 경험되는 모든 것이 선행적 조건, 혹은 과정에 의존하여 일어나고 생성되었으며 또 모든 것은 소멸될 운명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상응부』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생성된 모든 것은 사라질 성질의 것이다(yaṁ bhūtaṁ taṁ nirodhadhammaṁ)’(2상응, 49경). 이 법칙은 미물에 대해서나 대범천(大梵天)과 같은 최강의 신에 대해서나 똑같이 적용된다. 『장부』의 열한 번째 경에서는 범천일망정 자신을 영원한 존재로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리스 데이비스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물이건 사람이건 한 개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이미 주변과 별개로 불거지게 되었다는 뜻이며, 일단 주변으로부터 튕겨나면, 불안정하고 일시적이어서, 반드시 사라져가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천신들의 경우에는 수십만 년을 살 수도 있으나 어떤 곤충의 경우에는 단지 몇 시간을, 그리고 어떤 화학물질의 경우에는 단지 몇 초간밖에 지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시작이 있자마자 바로 그 순간에 종말은 시작되는 것이다.”

 

「미국에서의 강의」에서

 

이 무상법의 윤리적 의의는 『장부』의 열일곱 번째 경인 「대선견왕경」(大善見王經, Mahā-Sudassana Suttanta)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제자 아난다에게 과거의 유명한 왕인 대선견왕의 영화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가 소유했던 많은 도시와 보물, 궁전에 대해서 그리고 얼마나 많은 코끼리와 말과 수레, 여인 등을 거느렸으며, 그가 이룩한 제왕으로서의 위업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죽는 광경에 대해 말씀하신 후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으신다.

 

“보라, 아난다여. 이 모든 것들[有爲法]이 지금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채 잊혀지지 않았느냐. 이렇듯 아난다여, 모든 상카라, 유위의 현상계는 무상하구나. 아난다여, 상카라는 믿을 것이 못되는구나. 아난다여, 이것만 봐도 그러한 상카라에 대해 염증을 내고, 넌더리내어,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장부』 Ⅱ권, 198쪽)

 

부처님께서 형성된 모든 사물과 조건지어진 과정들을 무상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규정하셨을 때,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신 것은 ‘인간’이라고 하는 이 특수한 과정들의 무더기(saṅkhārapuñjā)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일차적으로 해탈의 길을 제시한 대상이 바로 인간이었으며, 그런 점으로 보아 그 분께서 주로 관심을 기울인 대상도 인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요 문제는 인간의 참된 본질을 알아내는 일이었으며 불법의 놀라운 독창성도 바로 이 분야에서 이룬 위대한 발견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인간 본성에 관해 내리신 결론은 그 분의 무상에 대한 일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 즉, 인간이란 몇 가지 요소들의 복합이며 지속적인 인격체로 보이는 것도 실은 간단없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의 집합으로 사실 하나의 지속적 생성(bhava)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을 물질성[色], 느낌[受], 지각[想], 형성력[行], 의식[識]의 다섯 쌓임[五蘊]으로 분석하셨다. 세존께서는 경전에서 이 각각의 쌓임들이 무상하고 불안정한 것임을 거듭거듭 역설하셨다. 『장부』가운데 유명한 「대염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에서 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범주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본성을 가진 것임을 관(觀)하도록 가르치신다.

 

“물질성은 실로 이와 같다. 그것이 비롯되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실로 이와 같다. 다른 네 쌓임, 즉 느낌, 지각, 형성력, 의식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장부』 Ⅱ권, 301쪽)

 

사실, 영적 삶의 최고 극치는 여섯 가지 감각적 접촉영역[六入]의 허망한 성질을 올바로 인식한 결과로 온다고 한다. 『중부』의 백두 번째 경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난다.

 

“실로, 비구들이여, 이것이 구경평화에 이르는 온전한 길이니 여래는 이에 대하여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던 것이니라. 그것은 바로 감각적 접촉의 여섯 영역에 대한 여실(如實)한 이해이며, 그들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며, 그들의 평온함과 고통스러움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며, 집착없이 그들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대한 여실한 이해이다.”

(『중부』Ⅱ권, 237쪽)

 

윤회를 연속시키는 원인, 달리 표현하면, 생성(bhava)을 지속시키는 것은 이들 여섯 가지의 감각적 접촉의 영역이며, 그래서 이들이 유위법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위법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빠알리 경전에 자주 반복되는 문장이 있다.

 

“실로 형성된 모든 사물은 생성, 소멸하게 마련이다. 태어난 것은 죽음에 이른다. 생성의 종식이야말로 지복(至福)이니, 그것이 평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