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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과 자식농사

Dhammarakkhita 2012. 12. 3. 17:29

업과 자식농사 - 주경 큰스님(강릉 성원사 회주)업의 실체와 소멸 ‘업(業)’이라는 말은 불자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업’에 대해 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냥 추상적으로 ‘업이 된다.’ ․ ‘업을 짓는다.’하는 식으로 말들은 하지만, 업의 실체까지를 알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그럼 어떻게 할 때 업이 되고 업을 짓게 되는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우리의 마음이 움직일 때 업이 만들어집니다. 마치 가만히 잘 타고 있는 촛불을 바람을 일으켜 흔들면 그을음이 생기듯이. 우리의 마음 또한 한 생각을 일으켜 동요하게 되면 그을음이 생기게 됩니다.한 생각을 일으켜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할 때 마음이 응결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때 묻지 않는 근본 마음에 동요가 생겨나고 집착이 붙을 때 그을음이 생겨나고 마음이 굳어집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부스러기가 생겨납니다. 나는 마음이 굳어지면서 생겨나는 이 마음의 부스러기를 ‘응념체(凝念體)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바로 업이요 카르마(Karma)입니다. 응념체인 업! 이렇게 마음이 움직일 때 만들어진 응념체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집착의 농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업은 두터워지고 집착의 농도가 옅으면 옅을수록 업은 가벼워집니다. 또한 생각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응념체의 색깔도 달라집니다. 탐심을 낼 때 만들어지는 응념체의 색깔 , 진심을 낼 때 만들어지는 응념체의 색깔, 치심을 낼 때 만들어지는 응념체의 색깔이 모두 다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진한 먹구름 같은 것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업이란 심한 악취가 나기도 합니다. 우리가 법당으로 들어가 영단 앞으로 가면 이상한 냄새나 미쾌한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영가들의 업의 악취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집착으로 굳어진 업은 반대로 계(戒) ․ 정(定) ․ 혜(慧) 삼학(三學)을 닦으며 아주 좋고 자비로운 생각을 낼 때에는 이 응념체가 밝은 빛으로 화하게 됩니다. 업(業)은 우리가 분별을 일으킬 때마다 생겨납니다. 이때의 분별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눈을 감았다가 딱 뜨는 순간, 분별은 저절로 일어납니다. ‘내가 생각을 일으켰구나’ 하는 인식을 하기도 전에, 눈으로 대상을 보는 순간 마음이 번개와 같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앞에 놓인 찻잔을 보자마자 ‘저것은 찻잔이다’는 생각과 함께 뒤따라 식(識)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경계를 대했을 때 일어나는 분별이나 집착의 농도가 짙으면 짙을수록, 주관인 나와 객관인 대상이 서로 끌어당기는 힘인 인력(引力)이 더욱 강해지고, 업도 그에 따라 더욱더 두터워지는 것입니다. 특히 복을 닦기는커녕 화를 내고 욕심을 낼 때 만들어진 먹구름 같은 응념체가 많이 쌓여 있는 사람의 경우에는, 끌어당기는 인력이 그 만큼 더 강하기 때문에, 자기 주변의 먹구름을 자꾸 끌어 모으게 됩니다. 그래서 복이 없는 사람은 같은 행자 노릇을 하고 같은 군대생활을 해도 다른 사람보다 꾀죄죄하고 옷도 빨리 더러워집니다. 반대로 항상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좋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있더라도 더 훤하고 더 밝아 보입니다. 또한 화를 많이 내고 욕심을 많이 내는 사람은, 먹구름 같은 것들이 어깨에 있는 풍문혈(風門穴)을 타고 들어와서 몸으로 내려갑니다. 욕심이나 화냄과 싸이클이 맞는 먹구름이 수도 없이 많이 몸 안으로 들어와, 담이 걸리거나 온 몸을 아프게 만들다가, 가래침이나 대소변으로 나가기도 하고 각질로 떨어져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하게는 우리의 응집된 마음의 부스러기가 암(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생명체인 이 마음에서 화내고 욕심을 낼 때 떨어져나간 마음의 부스러기를 해소시키지 못하고 꾸준히 방치하다가 불확정적으로 응집이 되면, 그것이 똘똘 뭉쳐져서 ‘암 덩어리가 몇 cm되었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생각이 달라지면서 긍정적으로 변하면 낫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확산되면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轉移) 되기도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우리의 업은 우리의 마음이 움직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따라서 내가 지은 업은 설령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할지라도 반드시 내가 다시 받아야 합니다. 이 업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피해갈 수 없는 ‘나’의 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자비광명(慈悲光明)입니다.자비광명이라야만 업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부정과 긍정이 아닌 ‘절대긍정’의 마음이라야 합니다. 조건 없는 긍정이어야 합니다. 이때라야 밝은 자비광명이 나오게 됩니다. 『원각경』에서는‘자능여락이요. 비능발고[慈能與樂 悲能發苦 ]’라고 했습니다. 곧 ’자‘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요, ’비‘는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는 마음이요, ‘비’는 ‘정말 안 됐다. 어서 좋아져야 할텐테....’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때 우리 몸에서는 집착이 없는 고진동이 일어나고 밝은 빛이 나오게 되며, 이렇듯 긍정하는 마음․복덕이 있는 마음에서 나오는 자비광명의 밝은 빛이라야 내 업을 능히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자비의 마음을 일으킬 때 우리 몸에서 고진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업장이 소멸될 때에도 고진동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정진할 때 일어나는 진동은 업장이 소멸되면서 일어나기도 하고, 명증정 명득정(明證定 明得定)우리의 업의 집합으로 손떨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계가 일어날 때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은 절대 금물입니다‘아! 내가 공부가 조금 되었구나’하는 그런 아만심일 때 더욱 떨림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진참회(眞懺悔)를 해 보십시오. 기도를 하면서 지극히 참회를 하게 되면, 몸에서 벌레나 뱀 같은 것이 떨어져 나오는 꿈을 꾸거나 그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때의 뱀이나 벌레들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바로 우리의 사악한 마음이 만들어낸 형상인데, 진참회를 하면 이러한 것들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진을 할 때 하혈이나 설사를 하기도 하고, 헛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또 몽식(夢識)으로 일어나기도 하고, 청소를 하거나 집안 정리를 하는 경계는 우리의 업이 소멸되어가는 것입니다. 자연, 진참회를 하고 나면 몸이 홀가분해지고 피도 맑아지고 식(識)도 맑아집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나 풍문혈(목과 어깨사이)이 굳어 있는 사람이나 풍(風)이 온 사람들은 특히 진참회를 많이 하면 좋습니다. 진참회를 하면 건강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염불하면서 마음으로 진참회를 하면 업이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업과‘치제걸이(次第乞已) 업과 삶의 관계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우리가 음식물을 섭취한 영양분이든 형이상학적인 마음이든, 모든 것들은 굳어지면 형이상학적인 물질로 변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굳어지면 번뇌의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몸이 달리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몸은 곧 내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만들어질 때는 어떠한 프로그램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인가? 사전에 특별히 입력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지금의 내 마음대로 만들어집니다. 지금 내가 고운 마음․착한 마음․선량한 마음으로있으면 만들어지는 세포 또한 곱고 아름다워집니다. 반면에 욕심 내고화내고 어리석은 마음이면 지금 만들어지는 세포도 거칠고 둔탁해집니다. 그러므로 업장 소멸에 앞서, 업이 만들어지는 바로 ‘지금 이 자리’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법화경』의 법사공덕품」에 의하면, 계행만 잘 지켜도 업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법화경을 사경하고 읽고 남에게 전하면 팔백개 눈의 공덕과 천이백개 귀의 공덕 , 팔백개 코의 공덕, 천이백개 혀의 공덕, 팔백개 몸의 공덕, 천이백개 뜻의 공덕을 입어, 이 공덕으로 육근을 장엄하고 청정하게 한다. 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안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안과 밖에 있는 일체중생의 업을 다 보게 되며, 아래로는 아비지옥에서 위로는 유정천까지 다 보게 된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욕심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계행을 잘 지키게 되면, 능히 업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한 생각 일어날 때 마음이 굳어지고 마음의 부스러기가 생겨나며 지금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업을 이루기도 하고 악업을 이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업(善業)일지라도 업은 업이라는 것이요, 그 업이 결국은 생사윤회의 싸앗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탐․진․치의 생각에서 벗어나서 맑고 밝고 고운 마음으로 살아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마침내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지(不動地)의 경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옛 스승은 “내가 중생을 제도해야 하는데...”라는 그 생각 때문에 성불을 못 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중생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베풀어야 할 텐테...’라는 그 마음 때문에 성불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중생을 생각하는 선업일지언정 한 생각이 일어난 이 업으로 인해 윤회의 씨앗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쓰되 씀이 없이 써야 된는 것입니다.아무런 번뇌망상 없이 ‘그렇겠지...’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 그냥 되어져야 합니다. 열심히 정진하되, 구경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일 때 우리 몸에서는 광채가 나옵니다. 조건 없는 긍정, 절대긍정의 마음에서 자비광명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악업을 짓지 말라’는 것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선업을 지으라’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업을 짓되 마침내는 구하는 바 없는 무소구행(珷所求行)의 자리에 도달해야 합니다. 무소구행이 아니라 오로지 ‘내가 해탈해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해탈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한 생각 일어나는 그 자체가 바로 윤회의 업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불자들은 성불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이 성불인가? 보시․지계․인욕행 등의 육바라밀을 실천하여, 우리의 마음이 자꾸 맑아지고 부드러워져서 업과 번뇌의 때가 다 떨어져나가 없어진 것이 성불입니다. 선업을 짓더라도 선업에 집착을 하면 그로 인해 윤회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결국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 이것이 해탈입니다.왜 마음이 움직입니까? 업이 붙어서 자꾸 마음이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그렇다면 선업도 짓지 말라는 것인가? 아닙니다. 선업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착을 하지 않고 선업을 지으면, 업식이 맑아지고 또 맑아져서 마침내 맑아질 것도 어두워 질 것도 없는 자리에 저절로 도달하게 되며,그 자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 불자들은 선업을 짓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첫 부분인 제1 법회유인분(法會由因分)은 바로 이것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45년 동안 한결같이 행하신 것을 여기에서 함축성 있게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특히 ‘차체걸이(次第乞已) ’,곧 ‘차례대로 밥을 빌어 마치시고’ 라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부잣집만 찾아가거나 살림이 넉넉하지 못한 집을 무시하는 일 없이, 어떤 집이든 평등한 마음으로 차례대로 찾아가 공양물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입니다. ‘차례대로 밥을 얻으라’는 것은 옳고 그른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충성 충 (忠)’자는 마음이 가운데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려면 간절한 마음 ‘정성 성(誠)’자가 받치는 것과 같이, 간절한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은 고요해지고 몸에서 밝은 광채인 척력(斥力)이 생깁니다. 마음은 움직이면 때가 생겨나고 굳어지게 됩니다. 굳어진 그 업을 소멸하는 방법은 선업을 짓는 것이요, 항상 긍정하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선업은 업을 소멸하는 길이요 성불로 향하는 길이지만, 구경에는 이 선업 마져도 떨쳐버려야 성불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지만, 진리는 진리로 분명하게 말해야 합니다. 선업은 해탈로 향하는 길이지 해탈은 아닙니다. 차제걸이! 바로 이 마음이라야 해탈 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식농사 이제 업과 관련시켜 우리의 삶 중에서 가징 소중하게 여기는 자식농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불교에서는 업과 관련하여 4종난득(四種難得)을 이야기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남자로 태어나기 어렵고, 정법을 만나기 어렵다.” 이 4종난득 중 첫 번째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비 어머니들은 이 소중한 인연에 각별히 마음을 써야 합니다. 마음을 밝고 곱게 쓰면 얼마든지 곱고 지혜로운 영혼을 태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훌륭하고 영리하고 복 있는 아이를 낳는 방법을 예비 부모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사실상 자식농사를 잘 짓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처럼 자꾸 사회가 혼란해지고 심성이 굳어지는 세상에서, 훌륭한 아이를 낳는 방법을 교육받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국가적으로도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종자계량은 정부가 나서서 서둘러야 합니다. 내가 예전에 방송에 나가 자식농사에 관한 얘기를 하였더니 버스 두 대에 꽉 찰 만큼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었습니다. 그 중에 문교부 차관을 지낸 분이 있었는데 자기가 ‘현직에 있으면 이를 채택할텐데’ 라고 했을 정도로 아주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번에 「법공양」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내용을 보고, 지혜롭게 이를 잘 응용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훌륭한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①우선 젊은 부부들이 적어도 3개월이나 6개월 정도의 기간동안 아기를 가질 마음의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동안 교양서적도 많이 읽고 항상 좋은 말을 하고 깨끗한 음식을 골라 먹으면서 몸과 마음을 곱게 써야 합니다. 특히 몸이 유연해지도록 절을 많이 하면 마음도 따라서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집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등, ‘나’라는 라디오의 다이알을 자꾸 좋은 주파수로 끄집어 올리는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②이렇게 준비를 하다가 6개월이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3개월만이라도, 생리에 맞추어서 아기를 갖는 날을 정해놓고, 그 날이 되면 더욱 마음가짐을 좋게 해야 합니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합방의 시간인데, 인시(寅時)가 넘어야 합니다. 보통 새벽 3시부터 인시라고 하는데 3시 10분이 되면 이 지구의 자기장(磁氣場)이 열립니다. 그때가 되면 아주 알맹이가 작은 고진동의 에너지가 파동을 칩니다. 어떻게 그 것을 알 수 있는가? 나의 가풍은, 때로는 눕기도 합니다만 원칙적으로 앉아서 자는 것입니다. 새벽 3시 10분이 지나면 많은 기운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피부가 김빠진 물파스를 바른 것처럼 시원해지고 머리부터 내장까지 아주 시원해집니다. 우리가 추울 때 찬물을 마시면 싸한 것처럼, 미세한 느낌으로 인해 온 몸이 시원해집니다. 그 시각이야말로 아주 밝은 기운과 맑은 에너지가 돌고 있는 것입니다. 참고로 여러분이 알아두어야 할 것은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은 죽은 줄 모르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극악(極惡) 극선(極善)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수년 또는 수십 년을 돌아다닙니다. 여름의 기압이 낮을 때는 업이 두터운 영혼들이 많아 돌아다닙니다. 여름에 비가 오면 땅에서 안개가 올라오듯이, 밤 9시부터 새벽3시까지의 해시․자시․축시에는 기운이 아주 둔탁합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이 시간에 정진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 때 돌아다니는 영혼들이 태속으로 들어오면 아이들이 태어나 경기(驚氣)도 많이 하고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기압이 낮을 때 임신을 하게 되면 산모가 임신중독증이 올 수도 있고 저능아나 신체부자유한 아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축시가 지난 3시 10분경이 되어 맑고 시원한 기운이 돌때 합방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있는 성원사에는 그렇게 교육 받고 태어난 아이들이 여럿 다니고 있습니다. 아주 영리할 뿐 아니라 어른 같이 속이 꽉 차 있습니다. 무릇 자식농사를 함에 있어서는 이렇게 해서 아기를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태교(胎敎)는 그 다음입니다. 그 종자의 인성이 반듯하면 교육이 부족하다 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③태교를 할 때는 하루에 몇 번이고 수시로 아기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가야, 오늘 절에 가서 법문을 들었더니 마음이 참으로 좋더구나. 너는 어떻더냐?” “엄마가 오늘 다른 사람을 미워했단다. 너는 그러면 안 된다. 엄마도 앞으로는 안 그럴게.” 이런 식의 대화를 해야 합니다. 아기는 지금 엄마의 태속으로 들어와 자타(自他)등의 판단능력을 기르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마음을 남김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아기와의 대화는 참으로 필요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④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꼭 모유를 먹이는 것이 좋습니다. 만약에 모유가 나오지 않아 우유를 먹이더라도, 그때는 반드시 가슴을 열어 아기의 볼을 가슴에 닿게 한 다음 우유를 먹여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마음이 안정되어 심성(心性)이 넉넉해집니다. 요즘 젖병에 우유를 담아 아기를 눕혀놓고 먹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빨아먹는 아이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뭔가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할 것이며, 허전한 마음으로 자란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문제가 생기기 쉽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종자계량은 국가 차원의 시급한 과제입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비부부들을 교육시키면 참으로 훌륭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들을 순수한 성품으로 곱고 아름답게 잘 기를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속이 담뿍담뿍 들어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정부가 채택하여, 전국의 중소도시나 읍 단위로 교양센터를 만들어 교육을 시켰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덧붙여서 출산 후에 몰아서 주는 3개월의 휴가를 아기를 갖기 전에 한 달, 아기를 가지고 한 달, 그리고 아기 낳고 한 달, 이렇게 세 번으로 나누어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훌륭한 종자를 선택하는 것이 가정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⑤어린아이들의 교육은 주입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세 살짜리 아이들을 업고 영어를 가르치러 다니는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은 정말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태권도, 피아노, 영어 등 학원 교육으로 아이들을 혹사시키거나 아이들의 마음이 거칠고 난폭해져서 반항하는 아이가 늘어나는 것입니다.더욱이 어느 정치가의 ‘능력이 있으면 됐지 도덕성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는 말이 뉴스를 통해 방송된 것을 보았을 때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곱고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을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샌드위치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맑고 순수한 성품을 잘 길러주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에게 항상 참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참는 공덕이 계를 지켜서 수행하는 공덕보다 훨씬 수승하다.”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만족할 줄 아는 마음[知足常足 知足之哫]’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만족을 모르면 끝도 없이 불만만 터뜨리고 항상 불안해야 합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부터 한 가정의 부모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물질이나 지식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찌 이세상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난폭해지고 굳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간다면 아이들의 심성이 점점 더 굳어져서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쪼록 이런 교육풍토가 하루 빨리 바뀌고 변하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로 어느 부모에게 있어서나, 자식 농사 잘 짓는 것은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의 실체와 윤회를 이해하고, 훌륭한 아기를 낳는 법에 대해 교육받는 이는어렵고 중요한 “자식농사 수행”에 있어 첫걸음부터 바른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전생의 업을 갚고자 자식이 되어 이제 업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부모․자식의 관계를 맺고 잘못된 길로 흘러가는 예를 들어 업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중생들은 자기가 전생에 만들어 놓은 업을 뒤집어쓴 채 그 업에 맞는 몸을 찾아 들어갑니다.내가 무안군의 해운사에 머물며 법무부 교화위원을 맡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마을의 한 청년이 아버지인 김처사를 자기 집 마당에서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죽인 청년이 어느 생에선가 죽임을 당하였거나, 죽은 아버지가 청년에게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준 일이 있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나의 은사이신 청화스님께서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셨던지, 사건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볼 것을 권했습니다. 마을로 간 나는 자초지종을 듣게 되었습니다. “김처사는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 애지중지하며 정성을 다해 길렀지요. 아들 또한 예의바르고 착실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동네에서도 칭찬이 자자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스물 다섯 살이 되었을 무렵, 아마도 아들의 정신상태가 약간 이상해지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김처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아들이 좀 이상하다’며 걱정을 내비치기도 하였는데, 결국은 바깥출입을 일절 못하게 하였고 심지어는 친구들이 찾아가도 ‘몸이 안 좋다’ 는 핑계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몽둥이를 들고 아버지에게 달려들면서 소리쳤습니다. “네 놈이 감히 나를 쳐?” 아들은 김처사에게 몽둥이를 휘두르며 원한 섞인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이 놈이 술만 먹으면 나를 괴롭혀! 술만 먹으면 나를 못살게 굴어!’ 그러면서 사정없이 아버지를 때려 결국 숨지게 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청년의 사촌에게서 집안의 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김처사가 서른 살이 되었을 무렵,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멀쩡하던 김처사는 술만 먹었다 하면 아버지께 온갖 폭언과 폭행을 일삼으며 행패를 부렸고, 아들의 행패를 보다 못한 아버지는 몇 년 후 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결국 자살을 했던 아버지가 그 한을 풀지 못하여, 김처사의 아들로 태어나 전생에 아들이었던 아버지를 죽이는 참담한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마침 사건을 담당했던 판사가 우리 절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기에, 나는 판사를 찾아가 한 마디 건넸습니다. “너희가 생각하기에는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죄가 없고 살인을 저지른 사람에게 모든 죄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살인한 사람에게 죄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죽임을 당한 사람 역시 죄가 있다는 것을 참작해야 한다.” 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릇된 업을 지은 사람에게 모든 책임이 있겠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이 저지른 악업으로 인해 남에게 상처를 주게 되면, 결국 그 원결은 언젠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나무에는 고통과 괴로움의 뿌리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나무가 무성해지면 무성할수록 그 괴로움의 뿌리도 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간사입니다. 이러한 세상살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앞서서 해야 할 일은 계행을 잘 지키며 맑고 밝은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전생에 지어놓은 업을 뒤집어쓴 채 잘못된 인연을 계속 이어주는 몸을 찾아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수십 년 전 내가 향일암을 갔을 때 만났던 어느 보살과 죽은 아들과의 인연을 소개하겠습니다. 1987년, 해제철이 되어 걸망을 매고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할 때의 일입니다. 그 해 나는 강화 보문사에서 시작하여 오대산 상원사,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등 전국의 큰 절을 두루 다니며 기도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향일암을 찾아갔습니다. 향일암에 도착해보니 멀리 공주에서 왔다는 성지순례단의 보살들이 있었습니다. 법당을 향해 반배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 보살들 중에 유난히 나의 눈에 띄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보살이 유별나게도 크고 진한 까치집 같이 생긴 ‘룡(龍 )’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나의 눈에만 보인 것입니다. 나는 그 보살에게 청했습니다. “보살님, 일행과 함께 돌아가지 말고 기도나 좀 더 하다가 가십시오.” 보살은 행색이 볼품없었던 나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일행들과 함께 가버렸습니다. 저녁공양을 하고 예불과 기도를 하기 위해 법당으로 갔더니 그 보살이 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보살님, 간다더니 왜 아직 남아있지요?” “스님께서 기도하고 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목탁을 칠 테니, 끝날 때 까지 절을 하십시오.” 그렇게 6시부터 시작된 기도는 어느새 새벽 1시를 넘어섰고, 보살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였지만 열심히 나의 목탁소리에 맞추어 절을 했습니다. 2시 경이 되었을까 보살이 ‘욱!’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토하시오” 라고 하자 몇 번을 더 헛구역질을 하더니, ‘욱!’ 하면서 간과 비슷한 핏덩어리를 토해냈습니다. 물론 그 핏덩어리도 또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보살에게 더욱 부지런히 절을 할 것을 권하였고, 보살은 열심히 절을 하며 두세 번 더 토를 하였는데, 그 붉은 핏덩이의 색은 점차 더 옅어졌고 얼굴도 환해져 매우 편안해 보였습니다. 새벽 도량석이 시작되자 기도를 끝내었는데, 아침이 되자 보살이 다시 찾아와 울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보살에게는 총명하고 효심 깊은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들이 얼마나 잘 하였던지 부모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980년의 광주사태 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아들이 죽었고, 보살 내외는 한없는 슬픔과 그리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같은 꿈을 계속 꾸었는데, 아들을 쏙 빼닮은 남자 아이가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