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ammarakkhita 2012. 12. 6. 16:08

바른 이해 (正見)

4.1.1 네 가지 고귀한 진리에 대한 앎

비구들이여, 바른 이해란 무엇인가 ?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아는 것,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아는 것, 이것을 바른 이해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DN II, 311-2.

4.1.2 온전함(善)과 온전치 못함(不善)에 대한 앎

벗이여, 고귀한 제자는, 온전치 못함[不善]과 온전치 못함의 뿌리[不善根]에 대해서 알고 있고, 온전함[善]과 온전함의 뿌리[善根]에 대해서 알고 있다. 벗이여,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고귀한 제자는 바른 이해가 있는 것이며, 진리(法)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청정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며, 이 정법(正法)에 이른 것이다.

 

벗이여, 온전치 못함과 온전치 못함의 뿌리란 무엇인가 ? 온전함과 온전함의 뿌리란 무엇인가 ?

 

먼저 온전치 못함이란 무엇인가 ?

<신체 행위(身業)>

 

(1) 생명을 해치는 것은 온전치 못함이다.

(2)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은 온전치 못함이다.

(3) 잘못된 성적인 관계는 온전치 못함이다.

<언어 행위(口業)>

 

(4) 거짓말하는 것은 온전치 못함이다.

(5) 남을 이간시키는 말은 온전치 못함이다.

(6) 거치른 말은 온전치 못함이다.

(7) 꾸며서 하는 말은 온전치 못함이다.

<마음의 행위(意業)>

 

(8) 탐욕은 온전치 못함이다.

(9) 악의는 온전치 못함이다.

(10) 삿된 견해는 온전치 못함이다.

 

벗이여, 이것들을 온전치 못함[不善]이라고 한다.

이 열 가지 법을 온전치 못한 행위의 길이라고 한다.

벗이여, 온전치 못함의 뿌리[不善根]란 무엇인가 ?

탐욕[貪]이 온전치 못함의 뿌리이고, 성냄[瞋]이 온전치 못함의 뿌리이며, 어리석음[痴]이 온전치 못함의 뿌리이다.

벗이여, 온전함이란 무엇인가 ?

<신체 행위(身業)>

 

(1)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2)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3) 잘못된 성적인 관계를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언어 행위(口業)>

 

(4)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5) 남을 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6) 거치른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7) 꾸며서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온전함이다.

 

<마음의 행위(意業)>

 

(8) 탐욕이 없는 것은 온전함이다.

(9) 악의가 없는 것은 온전함이다.

(10) 바른 견해는 온전함이다.

벗이여, 이것들을 온전함[善]이라고 한다.

이 열 가지 법을 온전한 행위의 길이라고 한다.

벗이여, 온전함의 뿌리[善根]란 무엇인가 ?

탐욕이 없음[無貪]이 온전함의 뿌리이고, 성냄이 없음[無瞋]이 온전함의 뿌리이며, 어리석음이 없음[無痴]이 온전함의 뿌리이다.

{中部} 9『正見經』MN I, 46-7.

4.1.3 법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에 대한 앎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가 물질적 현상(色)은 영원하지 않다(無常){괴로움(苦)이다, 영원한 실체가 없다(無我)}라고 본다면, 감수작용(受)은 ..., 표상작용(想)은 ..., 형성작용(行)은 ..., 인식작용(識)은 영원하지 않다(無常){괴로움(苦)이다, 영원한 실체가 없다(無我)}라고 본다면, 그에게는 바른 이해가 있는 것이며, 이처럼 바르게 보아 싫어해서 멀리하게 된다. 따라서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해) 즐기는 마음을 소멸했기 때문에 탐욕이 없어지고, 탐욕이 소멸했기 때문에 즐기는 마음이 없다. 즐기는 마음과 탐욕의 소멸에 의해서 마음은 자유로워지고 잘 해탈한다.

{相應部} XXII, 51 『喜盡』SN III, 51.

4.1.4 부적절한 질문

말룽키야풋타여,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자. 만일 세존께서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세존에게서 청정한 삶(梵行)을 닦지 않으리라.

세계는 영원한가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가.

세계는 끝이 있는가 아니면 끝이 없는가.

영혼(생명)은 육체와 동일한가 아니면 영혼과 육체는 별개의 것인가.

여래(tathaagato)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며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아니면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래가 그 사람에게 미처 다 설명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이 잔뜩 묻어 있는 화살에 맞은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그를 외과 의사에게 데리고 가려고 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알지 못하면 나는 이 화살을 뽑지 않을 것이다. 즉, 나에게 활을 쏜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바라문인가, 무사인가, 평민인가, 노예인가. 이름은 무엇이고 어느 종족의 사람인가. 그의 키는 큰가 작은가 아니면, 중간 정도인가. 이 모든 것들을 미처 알기도 전에 그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말룽키야풋타여,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하자. 만일 세존께서 다음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세존에게서 청정한 삶(梵行)을 닦지 않으리라. 세계는 영원한가 아니면 영원하지 않은가 운운.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여래가 그 사람에게 미처 다 설명하기도 전에 그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말룽키야풋타여, 세계는 영원하다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아니면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라는 견해를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 태어남이 있으며, 늙음이 있으며, 죽음이 있으며, 슬픔, 비탄, 통증, 비애 그리고 절망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苦)의 소멸이 바로 이 생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임을 나는 알게 되었다.

{中部} 63 {말룽키야풋타小經} MN I, 431.

 

자신의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貪瞋癡라는) 화살을 뽑아라.

{숫타니파아타} Sn 592.

4.1.5 다섯 가지 족쇄

아난다여, 여기 가르침을 듣지 못한 범부, 성인(聖人)들을 만나지 못한 사람, 고귀한 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 고귀한 법에 있어서 잘 인도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법을 잘 알지 못하고, 고귀한 법에 있어서 잘 인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유신견(有身見; 五蘊과 自我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견해. 간단히 말하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이, 영원한 자아라고 하는 견해)에 결박되어 있으며, 유신견에 의해 정복되어 있어서, 유신견에서 벗어나 있는, 있는 그대로[如實]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 또한 그의 마음은 회의적인 의심(疑)에 결박되어 있으며, ... 계금취견(戒禁取見;어떤 계율이나 금지사항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지킴에 의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에 결박되어 있으며, ...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愛慾)에 결박되어 있으며, ... 악의(惡意)에 결박되어 있으며, 악의에 의해 정복되어 있어서, 악의에서 벗어나 있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알지 못한다.

{中部} 64 {말룽키야풋타大經} MN I, 433-4.

4.1.6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

사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법들을 모르고 사유할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모르는 사람은, 사유할만한 가치가 있는 법들을 사유하지 않고, 사유할만한 가치가 없는 법들을 사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를 한다.

 

'나는 과거생(前生)에 존재했었을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었을까. 나는 과거생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생에 어떻게 존재했었을까. 나는 과거생에 무엇이었고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나는 미래생(來生)에 존재할 것인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미래생에 무엇으로 존재할 것인가. 나는 미래생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나는 미래생에 어떻게 존재하며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가.'

 

또한 바로 현재에도 다음과 같은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도대체 나는 있는 것인가 아니면 없는 것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이 존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中部} 2 {一切漏經} MN I, 7.

4.1.7 자아에 대한 여섯 가지 견해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로부터, 그에게는 다음의 여섯 가지 견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생겨난다.

 

1. '나에게는 자아(아트만)가 있다'

2. '나에게는 자아(아트만)가 없다'

3. '나는 자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4. '나는 자아에 의해서 자아가 없음(無我)을 지각한다'

5. '나는 무아에 의해서 자아를 지각한다'

6. ' 나에게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 저기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의 과보를 감수하는, 자아가 있는데, 바로 그 자아는 영원하고, 지속적이며, 무한하며, 변하지않는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영원히 똑같은 상태로 남아있을 것이다.' 라고.

{中部} 2 {一切漏經} MN I, 8.

비구들이여, 만일 자아가 있다면, 나의 자아에 속한 것도 있을 것이다라고 할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존자여, 만일 자아가 있다면, 자아에 속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비구들이여, 자아에 속한 것이 있을 때, 나의 자아가 있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비구들이여,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도 진실로 그리고 실재로 발견할 수없다면, '그것은 세계이다, 그것은 자아이다, 그것은 죽은 후, 상주(常住)하는 것, 견고한 것, 영원한 것, 불변하는 속성을 지닌 것, 영원히 그대로 머물 것이다'라고 하는 견해의 근거는 비구들이여, 정말로 어리석은 것이 되지 않겠는가.

{中部} 22 {蛇喩經} MN I, 138.

4.1.8 이치에 맞는 사유

하지만, 비구들이여, 성인으로 알려져 있는, 배움이 있는 고귀한 제자들은 성인의 가르침을 알고 있으며, 고귀한 가르침에 의해서 잘 인도 받는다. 그들은 무엇이 이치에 맞는 사유이며, 무엇이 이치에 맞지 않는 사유인가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사유한다. 그는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사유한다. 그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사유한다. 그는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이치에 맞게 사유한다.

{中部} 2 {一切漏經} MN I, 8-9.

4.1.9 수타원- 성인의 흐름에 들어선 사람

이러한 (이치에 맞는) 사유에 의해서 세 가지 족쇄가 사라진다. 오온을 영원한 자아라고 보는 자아에 대한 환상(有身見), 회의적인 의심(疑), 단순한 의례나 금기에 대한 집착(戒禁取見).

{中部} 2 {一切漏經} MN I, 9.

이러한 세 가지 족쇄가 사라져버린 비구들을 수타원-성인의 흐름에 들어선 이, 파멸되지 않는 이, 결정된 이, 깨달음이 이르는 이라고 한다.

{中部} 22 {蛇喩經} MN I, 141-2.

 

* 열 가지 족쇄

중생들을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매어놓는 열 가지의 족쇄가 있다.

 

(五下分結)

(1) 有身見-오온(五蘊)을 영원한 자아라고 보는 견해

(2) 회의적인 의심

(3) 戒禁取見-계율이나 금기에 대한 집착

(4) 감각적 쾌락에의 욕망

(5) 악의(惡意)

 

(五上分結)

(6) 色界에 대한 욕망

(7) 無色界에 대한 욕망

(8) 我慢-'나'라고 하는 마음

(9) 들뜸

(10) 無明-어리석음

* 聖人 - 고귀한 사람들 ; 사향사과(四向四果) 또는 사쌍팔배(四雙八輩)

 

(1) 수타원 ; 흐름에 들어선 성인 - 예류 (預流)

중생들을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매어놓는 열 가지의 족쇄 가운데에서 처음의 세 가지 족쇄 {(1) 有身見-오온을 영원한 자아라고 보는 견해, (2) 회의적인 의심, (3) 戒禁取見-계율이나 금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사람을 '수타원 (소타판나 Sotaapanna) - 흐름에 들어선 이' 라고 한다. 즉 열반에 이르는 흐름에 들어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2) 사타함 ; 한 번 되돌아오는 성인 - 일래(一來)

열 가지 족쇄 가운데, 네 번째 (감각적 쾌락에의 욕망)와 다섯 번째 (악의) 족쇄를 약화시켜, 거치른 형태의 탐욕과 성냄을 극복한 성자를 '사타함 (사카다가미 Sakadaagaami) - 한 번 되돌아오는 이' 라고 한다. 즉, 죽은 후에 욕망의 세계(欲界)에 오직 한 번 더 태어나서 그 곳에서 아라한의 깨달음에 이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3) 아나함 ; 되돌아오지 않는 성인 - 불환(不還)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욕망의 세계(欲界)에 존재들을 묶어 놓는, 처음의 다섯 가지 족쇄(五下分結 ; 유신견, 의심, 계금취견, 탐욕, 성냄)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자를 '아나함 (아나가미 Anaagaami) - 되돌아오지 않는 이' 라고 한다. 이 들은 죽은 후에 인간의 세계를 포함한 욕망이 지배하는 세계인 욕계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고, 미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에 다시 태어나서 그 곳에서 최상의 목표인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다.

 

(4) 아라한; 완전한 성인 - 응공(應供)

열 가지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인을 '아라한(Arahat) - 완전한 이' 라고 한다. 아라한에게는 존재를 욕계에 묶어두는 번뇌인 五下分結 뿐만 아니라, (6) 色界에 대한 욕망, (7) 無色界에 대한 욕망, (8) 我慢-'나'라고 하는 마음, (9) 들뜸, (10) 無明-어리석음이라는 五上分結(존재를 색계 내지는 무색계라는 보다 차원 높은 세계에 묶어두는 번뇌)도 완전히 제거되어 있다. 아라한에게는 아만심과 어리석음 그리고 안정되지 않은 들뜬 마음이 없다.}

 

앞에 말한 네 부류의 성인들은 각각 '도(道 Magga ;깨달음에 이르는 길)'와 '과(果 Phala ; 깨달음)'로 나뉘어진다. 즉, 수타원도와 수타원과로 나뉘어진다. 따라서 여덟 부류의 네 쌍의 성인(四雙八輩)들이 있게 된다.

 

'도'란 그에 상응하는 '과'에 들어서기 직전의 한 순간의 체험을 말한다. '과'는 '도'의 결과 즉시 뒤따르는 의식의 순간을 의미한다. 이 '과'의 체험은 상황에 따라서, 살아있는 동안에 수 없이 반복되어 일어나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불교사전} Buddhist Dictionary의 'Ariya-puggala(聖人)', 'Sotaappanna(수타원)' 등을 참조.]

<*역주:위 내용은 도와 과에 대한 남방불교의 설명이다. 도(道)와 과(果)는 원인과 결과를 말한다. 즉 수타원도는 원인이며 수타원과는 그 결과이다.. 도를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체험이라 한다면, 과는 그 순간적인 체험의 다음 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이라는 결과를 말한다. 여기서의 道는 단순한 수행방법이라기보다는 깨달음의 체험의 순간을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이 도의 체험이 있은 직후에 果가 이루어진다. 이 도와 과는 순간적으로 繼起한다>.

4.1.10 두 가지 正見

(1)세간의 바른 견해(世間正見)

 

세간의 바른 견해는 다음과 같다. 탁발과 공양을 베푸는 것은 쓸모 없는 일이 아니라는 견해. 선행과 악행 둘 다 결실과 과보가 있다는 견해. 이 생(生)이 있는 것처럼 다음 생도 있다는 견해. 부모가 있어 태어나는 생명이 있는 것처럼 (부모 없이 죽은 후에) 즉시 태어나는 (천상의) 존재도 있다는 것이 단지 말 뿐만은 아니라는 견해. 이 세상에는, 때가 없고 완전한 수행자와 종교인이 있어, 그들은 스스로 이해한 이 생과 다음 생을 설명할 수 있다라는 견해. 이러한 견해를, 세간적인 결과와 좋은 결실을 가져다주는 '세간의 바른 견해'라고 한다.

(2) 출세간의 바른 견해(出世間正見)

 

하지만 (수타원, 사타함, 아나함, 아라한의) 도(道)와 결합되어 있는 지혜, 통찰, 바른 이해가 있다. 즉 마음은 세간적인 것에서 고개를 돌려 추구하고 있던 성인(聖人)의 도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견해를, 세간적이지 않은, 출세간적이며 도와 결합되어 있는 '출세간의 바른 견해'라고 한다.

[* 이처럼 두 가지의 팔정도가 있다. 두 가지의 팔정도란 아직 성인의 첫 번째 계위인 수타원이 되지 못한 범부가 닦는 세간의 팔정도와 성인이 닦는 출세간의 팔정도이다.]

4.1.11 바른 이해(正見)와 다른 덕목과의 관계

잘못된 이해(邪見)를 잘못된 이해라고 알고, 바른 이해를 바른 이해라고 알면서, '바른 이해'(첫번 째 덕목)를 닦는다.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고 바른 이해를 일으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 바른 노력(正精進 ; 여섯번 째 덕목)을 닦는다. 깨어있는 마음으로 잘못된 이해를 극복하고, 바른 이해를 지닌 상태에서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때, 그는 바른 마음챙김(正念 ; 일곱번 째 덕목)을 닦는 것이다.

 

따라서 바른 이해를 포함해서 항상 짝을 이루어 동반되는 세 가지 덕목이 있다. 바른 이해,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이 그 세 가지이다.

『中部』117『四十大經』MN III, 71-8

 

4.1.12 모든 견해에서 자유로워짐

어떤 이가 '고타마 붓다는 어떠한 견해를 취하십니까?' 라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답을 듣게 될 것이다. '여래(如來)는 모든 견해를 없애버렸다. 왜냐하면, 여래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물질적 현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현상의 발생이다. 이것이 물질적 현상의 소멸이다. 이것이 감수작용(受)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이 감수작용의 소멸이다. 이것이 표상작용(想)이다. 이것이 표상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이 표상작용의 소멸이다. 이것이 형성작용(行)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이 형성작용의 소멸이다. 이것이 인식작용(識)이다. 이것이 인식작용의 발생이다. 이것이 인식작용의 소멸이다. 따라서 여래는 모든 견해, 모든 어림짐작, 나라고 하는 모든 견해, 나의 것이라는 견해, 나라는 잠재적 번뇌를 깨버렸고, 떠났으며, 멸했으며, 버렸고, 제거했으며, (사견이나 잠재적 번뇌가) 생겨나지 않아 해탈을 얻었다고'. *

『中部』72『악기바차고타經』MN I, 486.

<역주 : 이 경에서는 여래는 오온(五蘊)의 생멸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보고 알기 때문에 '자아' 또는 '나의 것'이라는 모든 사견에서 벗어나 해탈해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4.1.13 존재하는 현상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

비구들이여,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모든 형성된 것은 변하는 것이다(諸行無常). 즉, 물질적 현상(色)은 변하는 것, 감수작용(受)은 변하는 것, 표상작용(想)은 변하는 것, 형성작용(行)은 변하는 것, 인식작용(識)은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정해진 것이며, 법으로서 확정된 것이며, 법으로 결정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모든 형성된 것은 괴로움이다(一切皆苦). 즉, 물질적 현상(色)은 괴로움이며, 감수작용(受)은 괴로움이며, 표상작용(想)은 괴로움이며, 형성작용(行)은 괴로움이며, 인식작용(識)은 괴로움이라는 사실은 정해진 것이며, 법으로서 확정된 것이며, 법으로 결정된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가 이 세상에 나타났거나 나타나지 않았거나 모든 존재하는 현상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諸法無我). 즉, 물질적 현상(色)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감수작용(受)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표상작용(想)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형성작용(行)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인식작용(識)은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은 정해진 것이며, 법으로서 확정된 것이며, 법으로 결정된 것이다.

『增支部』III 134. AN I, 286.

 

[* 위에서 말하는 '형성된 것(sa"nkharaa; 行)'이란 말은 모든 조건 지워진 것, 만들어진 것(有爲法)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육체적·정신적인 요소를 말한다. 하지만 '법(dhamma; 法)이라는 말은 보다 넓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조건 지워지지 않은(無爲) 현상인 열반까지도 의미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 때문에 모든 존재하는 현상(法)이 영원하지 않고, 변하기 쉽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같은 이유로 모든 형성되어진 것(諸行) 뿐만 아니라, (형성된 것이 아닌 無爲法을 포함한) 모든 존재하는 현상도 영원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음(無我)을 말하는 것은 올바르다.]

영원하며, 지속적이고, 항상 하며, 변하지않는 물질적 현상(色),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인식작용(識), 이러한 것들을 이 세상의 어떠한 현인도 알지 못하며, 나도 또한 그러한 것들은 없다고 말한다.

『相應部』XXII 94. 『華』SN III, 139.

올바른 견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그 무엇을 자아라고 간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增支部』I 15. AN I, 27.

 

4.1.14 자아에 대한 견해(我見)

아난다여, '감각적인 느낌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인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무덤덤한 느낌이 그 세 가지이다. 이 세 가지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것을 당신의 자아라고 여기겠는가.' 이 세 가지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한 가지를 경험하고 있을 때는 다른 두 가지 느낌은 없다. 세 가지의 감각적인 느낌은 변하기 쉽고(無常), 조건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되어 파괴되기 쉽고, 시들어버려 단절되기 쉽다. 이 세 가지의 감각적인 느낌 가운데 어느 하나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이 느낌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느낌이 사라진 후에는 자신의 자아도 사라져버렸다고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의 삶에서 자신의 자아가 변해버리기 쉽고,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뒤범벅되어 있으며, 생겨났다가는 소멸해버리는 것으로 이미 간주해 버린 것이 된다.

 

아난다여, 만일 어떤 사람이 감각적인 느낌은 자신의 자아가 아니며, 감각적인 느낌에 의해서는 자신의 자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자 그럼 당신에게서 감각적인 느낌이 없는 곳이 있다면, 그때 당신은 이것이 나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아난다여,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할 지도 모른다. '감각적인 느낌은 정말로 나의 자아는 아니다. 하지만 감각적인 느낌에 의해서 자아에 다가갈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느끼는 주체는 나의 자아이며, 나의 자아가 느끼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감각적인 느낌이 모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고 가정해보자. 자 느낌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후, 어떤 느낌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이것이 나의 자아이다"라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말할 수 없습니다.'

{長部} 15 {大緣經} DN II, 66-7.

'눈(眼)이 자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눈에는 생겨남도 소멸함도 있음이 확인된다. (눈이 자아라고 주장한다면) 자아에는 생겨남도 소멸함도 있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눈(眼)이 자아이다'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못하다. 요컨대 눈은 무아(無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형태나 색깔(色)은 무아이며, 눈의 의식(眼識)은 무아이며, 눈의 접촉(眼觸)은 무아이며, (눈의 접촉에 의해 생긴) 느낌(受)은 무아이며, (느낌에 의해 생긴) 갈애(渴愛)는 무아이며, 내지, 마음(意)은 무아이며, 마음의 대상(法)은 무아이며, 마음의 의식(意識)은 무아이며, 마음의 접촉(意觸)은 무아이며, (마음의 접촉에 의해 생긴) 느낌은 무아이며, 갈망은 무아이다. *

{中部} 148 {六六經} MN III, 282-3.

<역주 :이 경전은 이른바 여섯 감각기관(六)根과 감각대상(六境), 여섯 가지 의식(六識)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접촉(六觸), 감각적 느낌(六受), 갈망(六愛)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기법(緣起法)의 체계가 생멸 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에는 자아가 없다는 무아의 입장을 밝힌 경전이다.>

비구들이여, 배움이 없는[無聞] 범부는 (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四大]에 의해 이루어진 육신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이 마음을 자아라고 여기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비구들이여, 이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육신은 1년 동안 지탱되며, 2년 동안 지탱되며, 3년, 4년 5년, 또는 10년, 길게는 100년 이상이나 지탱된다. 하지만 마음(心), 의(意), 의식(識)이라고 불리는 것은 하루 밤, 하루 낮 동안에도 하나가 생겨났다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생겨났다가는 사라지는 끊임없는 생멸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相應部} XII 62. {無聞經} SN II, 96.

<역주 : 순간 순간 변화하는 마음보다 육체를 자기라고 보는 것이 낫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결국 이 육신도 끊임없이 생멸 하는 것을 파악하면, 육신이 자아라는 견해도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 어떤 물질적인 현상(色)이라도,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내적인 것이건 외적인 것이건, 거치른 것이건 미세한 것이건, 저열한 것이건 뛰어난 것이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이 물질적 현상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나가 아니며,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에 의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相應部} XXII 59. {五比丘經} SN III, 68.

[* 오온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앎이 있을 때, '자아'이니 '나의 것'이니 하는 견해가 없어진다.

무아(無我)를 보여주고 존재의 비실체성(空)을 말하기 위해서 {청정도론}에서는 다음의 게송을 인용하고 있다.]

 

괴로움이 있을 뿐, 괴로움을 받는 자는 없다.

행위(業)가 있을 뿐, 행위를 하는 자는 없다.

열반이 있을 뿐, 열반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道가 있을 뿐, 그 道를 가는 자는 없다.

{淸淨道論} XVI, Vism 513.

 

 

4.1.15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자아

(세존이 묻는다)

칫타(Citta)여, 만일 사람들이 그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당신은 과거에 존재했었습니까? 당신은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까? 당신은 미래에 존재할 것입니까? 당신은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까? 당신은 현재 존재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까?]라고.

 

(칫타는 답한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할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었습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미래에 존재할 것입니다. 나는 미래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현재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세존이 다시 묻는다)

그러면 칫타여, 말일 사람들이 그대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당신에게 과거의 자아의 획득이 있었을 때, 바로 그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이었습니까? 미래의 것은 허망한 것이었습니까? 현재의 것은 허망한 것이었습니까? 당신에게 미래의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 바로 그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이겠습니까? 과거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까? 현재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까? 당신에게 현재의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 바로 그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입니까? 과거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까? 미래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까?]라고.

 

(칫타는 답한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와 같이 질문을 받는다면 다음과 같이 답할 것입니다.

 

[나에게 과거의 자아의 획득이 있었을 때, 바로 그 자아의 획득만이 그 당시 진실이었습니다. 미래의 것은 허망한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나에게 미래의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 바로 그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입니다. 과거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현재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나에게 현재의 자아의 획득이 있을 때, 바로 그 자아의 획득만이 진실입니다. 과거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 미래의 것은 허망한 것입니다]라고.*

『長部』9 {포타파다經} DN I, 200-201

 

<역주 : 붓다와 칫타 테라와의 이러한 대화 후에, 붓다는 '자아를 획득한다' 즉 자신의 자아를 얻는다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의 표현(세속적인 진리)이라고 한다. 하지만 진실의 입장에서 보면, 자아는 없고(無我) 존재하는 것은 단지 조건에 의해서 생성했다가는 소멸해 가는 정신적·물질적 현상(名色) 뿐이다. 과거·현재·미래에 걸쳐서 불변하는 자아라고 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각 시점에서 이해하는 자아도 결국은 끊임없이 생성·소멸해 가는 마음과 육체의 결합체라고 이해해야 한다.>

 

4.1.16 연기와 법

연기(緣起)를 보는 자, 그는 법(法)을 본다. 법을 보는 자, 그는 연기를 본다.*

『中部』28 {象跡喩大經} MN I, 190-1.

 

<역주 : 위의 經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조건에 의존된 발생의 의미를 지닌 연기라고 하는 진리를 보는 자, 즉 마음과 육체을 위시로 한 여러 가지 현상들의 상호의존적인 발생관계를 깨닫는 자는 괴로움의 생존에서 벗어나는 진리로서의 법(法)을 즉 구원의 진리(salvic truth)인 열반을 얻는다. 열반으로서의 법을 깨달은 자는 다름 아닌 연기의 이치를 깨달은 자이다. 연기의 이치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진리가 아니라 바로 한 순간 한 순간의 마음의 일어남과 몸의 움직임에서 확인되어지는 진리이며, 이처럼 자신의 마음과 육체에서 직접적으로 이해하고 체득한 연기법에 대한 파악은 바로 자신의 마음과 육체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심신을 떠나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은 자기 집의 뜰에 매화를 두고 봄을 찾아 밖으로 헤메이는 것과 같다.>

 

4.1.17 '자아'는 언어적인 표현에 불과

칫타여, 예를 들면 소에게서 우유가, 우유에서 요구르트가, 요구르트에서 생버터가, 생버터에서 버터가, 버터에서 크림(제호)이 생겨난다. 우유가 있을 때, 그것을 요구르트라거나 생버터라거나, 버터라거나, 크림(제호)이라고는 부를 수 없다. 바로 이와 같이, 과거의 나의 자아가 있었을 때, 미래와 현재의 나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현재의 나의 자아가 있을 때, 과거와 미래의 나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며, 미래의 나의 자아가 있을 때, 과거와 현재의 나의 자아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과거의 자아, 현재의 자아, 미래의 자아라고 하는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세간의 호칭이며, 세간의 언어이며, 세간의 관용어이며, 세간의 개념이다. 여래는 (애욕과 사견에) 집착함이 없이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한다.*

『長部』9 {포타파다經} DN I, 201.

 

<역주 : 4.1.15의 경문에 이어지는 부분. 일상적인 의미에서 쓰이는 '자아'라는 용어를 여래는 그대로 사용하고 있지만 자아가 영원한 실체라고 하는 사견에 사로잡힘이 없이 자아에 대한 애착이 없이 사용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무아를 이야기하는 불교에서도 '자아'라는 언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예 ;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라) 이는 무아설에서 부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실천의 주체로서의 자기 자신(현재의 마음과 몸)을 의미한다. 이때에도 영원하며, 불변하는 자아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4.1.18 오온에 대한 무지

물질적 현상(色), 감수작용(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인식작용(識)을 (실체가 없음 또는 무아임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이 다섯 무더기(五蘊)의 발생과 소멸 그리고 그것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여래(如來)가 사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견해에 빠지기 쉽다.*

『相應部』XLIV 4. {生起經} SN IV, 386.

 

<역주 :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실재인 오온(五蘊)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이해가 없는 이들은 여래의 사후 존재여부에 대한 이런저런 사견에 빠진다는 말이다.>

 

4.1.19 두 가지 극단과 중도(中道)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jiiva; 영혼]이 육체와 같다는 견해[斷見]를 고집한다면, 그는 고귀한 삶[梵行]을 영위하지 못 할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생명은 육체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견해[常見]를 고집 한다면, 이런 경우에도 역시 고귀한 삶은 불가능하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조건에 의한 발생(緣起)이라는 중도(中道)를 보여주었다.

『相應部』XII 35. 『無明緣』SN II, 61.

 

4.1.20 조건에 의한 발생(緣起)

 

어리석음[無知, 無明]을 조건으로 해서 업의 형성작용[行]이 있다. 업의 형성작용을 조건으로 해서 의식현상[識]이 있다. 의식현상을 조건으로 해서 정신적·육체적인 존재[名色]가 있다. 정신적·육체적인 존재를 조건으로 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이 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조건으로 해서 감각적인 접촉[觸]이 있다. 감각적인 접촉을 조건으로 해서 느낌[受]이 있다. 느낌을 조건으로 해서 갈망[愛]이 있다. 갈망을 조건으로 해서 집착[取]이 있다. 집착을 조건으로 해서 생존의 과정[有]이 있다. 생존의 과정을 조건으로 해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해서 늙음과 죽음[老死],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이 있다. 이와 같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생겨난다. 이것을 '괴로움의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聖諦)라고 한다.

『相應部』XII 1. 『法說』SN II, 1.

 

 

어떠한 천신도 범천도 이 생사의 윤회를 만든 자는 아니다.

조건에 의존된, 갖가지 현상들(諸法)만이 펼쳐지는 것이다.

『淸淨道論』XIX, Vism 603.

 

하지만 비구들이여, 어리석음(無明)이 사라지고, 앎(明)이 생겨난 비구는 선한 업의 형성작용[善業]을 쌓으려고 애쓰는 것도 없고, 선하지 않은 업의 형성작용(惡業)을 지으려고 애쓰지도 않으며, 흔들림이 없는 업의 형성작용을 쌓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相應部』XII 51.『思量』SN II, 82.

 

[* 행(行, sa"nkhaaraa)이라는 말을 여기서는 업의 형성작용(karma-formation)이라고 번역해 보았다. 왜냐하면, 조건에 의존된 발생(緣起)의 맥락에서 행(行)은 업의 성격을 띠는, 선하거나 선하지 않은 의도 또는 의도적인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업[karma, kamma]을 말한다.

 

위 경전에서 제시된 세 가지 업은, 모든 존재 세계 또는 모든 의식 세계에서의 업의 행위를 의미한다. 선한 업의 형성작용[善業]에 의해서는 색계(色界)까지 도달할 수 있으며, 흔들림이 없는 업의 형성작용[aane~njaabhisa"nkhaaraa]*에 의해서만 무색계(無色界)에 도달할 수 있다.]

<*역주 : s.v. CPD>

 

어리석음[無知, 無明]의 남김 없는 소멸에 의해 업의 형성작용[行]의 소멸이 있다. 업의 형성작용의 소멸에 의해 의식현상[識]의 소멸이 있다. 의식현상의 소멸에 의해 정신적·육체적인 존재[名色]의 소멸이 있다. 정신적·육체적인 존재의 소멸에 의해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의 소멸이 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소멸에 의해 감각적인 접촉[觸]의 소멸이 있다. 감각적인 접촉의 소멸에 의해 느낌[受]의 소멸이 있다. 느낌의 소멸에 의해 갈망[愛]의 소멸이 있다. 갈망의 소멸에 의해 집착[取]의 소멸이 있다. 집착의 소멸에 의해 생존과정[有]의 소멸이 있다. 생존과정의 소멸에 의해 태어남[生]의 소멸이 있다. 태어남의 소멸에 의해 늙음과 죽음[老死], 슬픔, 비탄, 고통, 비애, 절망의 소멸이 있다. 이것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의 소멸이다.

『相應部』XII 1.『法說』SN II, 1-2.

 

4.1.21 업 - 윤회의 원인

 

벗들이여, 실로 어리석음(無明)에 가리우고, 갈망(愛)에 속박된 중생들은 여기 저기서 즐거움을 찾아 헤메인다. 따라서 새로운 윤회의 생존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中部』43『有明大經』MN I, 294.

 

비구들이여, 탐욕(貪)에서 비롯된 업, 탐욕에서 생겨난 업, 탐욕을 원인으로 하는 업, 탐욕을 조건으로 하는 업, 성냄(瞋)에서 비롯된 업, 성냄에서 생겨난 업, 성냄을 원인으로 하는 업, 성냄을 조건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痴)에서 비롯된 업, 어리석음에서 생겨난 업, 어리석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러한 업이 있는 사람이 태어나는 곳, 그 곳이 그 업이 무르익는 곳이다. 그 업이 무르익을 때, 현재의 삶[現生]이던지, 다음 생[來生]이던지, 아주 먼 후생이던지간에, 그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增支部』III 33. AN I, 134.

 

4.1.22 업의 소멸

 

벗들이여, 실로 어리석음(無明)이 없어짐에 의해,, 앎(明)이 생겨남에 의해, 갈망의 소멸에 의해서 새로운 윤회의 생존은 없어진다..

『中部』43『有明大經』MN I, 294.

 

비구들이여, 탐욕 없음[無貪]에서 비롯된 업, 탐욕 없음에서 생겨난 업, 탐욕 없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탐욕 없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 성냄 없음[無瞋]에서 비롯된 업, 성냄 없음에서 생겨난 업, 성냄 없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성냄 없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 없음[無痴]에서 비롯된 업, 어리석음 없음에서 생겨난 업, 어리석음 없음을 원인으로 하는 업, 어리석음 없음을 조건으로 하는 업이 있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벗어남에 의해서, 마치 타라수 나무의 뿌리가 끊어져 다시는 싹이 나지 않는 것처럼, 윤회의 생존이 없어진다.

『增支部』III 33. AN I, 135.

 

이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사문 고타마는 단절론자(斷切論者)이다. 단절을 위해서 법을 설한다. 단절이라는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친다'라고. 비구들이여, 나는 실로 단절을 말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단절, 수많은 악하고 선하지 못한 법들의 단절을 나는 말한다.

『增支部』VIII 12. AN IV, 183.

 

[* 조건에 의한 발생(緣起)은 모든 정신적·육체적인 현상의 상관성에 대한 가르침으로, 무아설과 함께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닫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초석이 되는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인격이니, 사람이니, 동물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다양한 육체적·정신적인 생명의 과정들은 맹목적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의 산물임을 연기의 가르침은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연기설은 윤회의 생존과 괴로움이 어떻게 조건에 의존되어 있는가를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러한 조건들의 제거를 통해서 이러한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연기설은 사성제 가운데 두 번째의 괴로움의 발생의 진리(苦集聖諦)와 네 번째의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苦滅聖諦)를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다. 연기설은 바로 이 두 진리를 바탕에서부터 설명하면서, 이 두 진리에 대해서 확고한 철학적인 틀을 제공해 주는 방식으로 그 의미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

 

다음의 표는 12 연기의 고리들이 어떻게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쳐있는가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다.]

 

<12 연기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三世兩重因果>

 

 

1. 무명(無明) 과거존재

2. 행(行) 업의 과정 (5원인;1, 2, 8, 9, 10)

 

3. 식(識)

4. 명색(名色)

5. 육입(六入) 현재존재

6. 촉(觸) 윤회의 과정 (5결과;3, 4, 5, 6, 7)

7. 수(受)

8. 애(愛)

9. 취(取) 업의 과정 (5원인;1, 2, 8, 9, 10)

10. 유(有)

11. 생(生) 미래존재

12. 노사(老死) 윤회의 과정 (5결과;3, 4, 5, 6, 7)

 

 

8-9와 함께 1-2의 고리는 다섯 가지 윤회의 업인(業因)을 내포하고 있으며, 업의 과정을 의미한다.

 

11-12와 함께 3-7에 이르는 고리는 다섯 가지 업과(業果)를 내포하고 있으며, 윤회의 과정을 의미한다.

『無碍解道』에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다섯 원인이 과거에 있어서,

다섯 결과가 현재에 생겨났다.

현재, 다섯 가지 원인이 있으면,

미래에 다섯 가지 결과가 생겨날 것이다.

<『淸淨道論』XVII, Vism 579에서의 인용>

 

자세한 설명은 『불교의 기초』Fundamental of Buddhism 3장과 『불교사전』Buddhist Dictionary 참조.]

 

4.2 바른 사유(正思惟)

비구들이여, 바른 사유란 무엇인가. 감각적인 욕망이 없는 마음가짐[出離], 나쁜 의도[惡意]가 없는 마음가짐, 남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는 마음가짐, 이것이 바른 사유이다.

『長部』22『大念處經』DN II,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