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
소위 우리가 말하는 ‘식’(識)은 분별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식은 바로 내적인 근거와 외적인 근거 사이의 분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 눈과 모양들, 그리고, 귀와 소리들 등등.
이 상황의 미묘함이 이와 같다. 바로, 이 분별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관계성을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의 탄생은 곧 무지의 탄생,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이 무지가 주어지면서, 거기에서부터, 세가지 요소들이 지속되어지는 가능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 눈, 모양들, 그리고, ‘눈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 바로, 이 셋이 일으키는 것이 ‘만남’ (phassa : contact : 觸) 인 것이다.
‘이 셋이 만남으로써’. 세가지를 셋으로 간주하는 것을 암시하는, 이것이 가장 근저가 되는 인정이다 – ‘만남의 개념’의 발생.
이것은, 논리가에게는 매우 예리한 문제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은, 눈과 모양들 때문에 ‘눈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눈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이 일어난 연 후에는, 거기에 관계성을 잊어버리려는 경향 -- 무시하려는 – 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번째 요소인 – 중간치인 – 바로, 그 분별인, ‘눈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식이 조건적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명백히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눈, 모양, 그리고, ‘눈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 이 셋이 진정한 것으로 간주되어지면서, ‘만남’의 무대가 마련되어지는 것이다 – ‘이 셋이 함께 일어나는 것이 만남이다’ 라는 구절이 정당화되어지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함께 일어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버리는 것 또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 발생적이다.
무지를 그 밑-바닥으로 하면서, 이 세가지가 함께 하고 있는 한은, 거기에 만남이 발생하는 것이다. 거기에 ‘만남’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그 세번째 요소인, ‘눈을 통하여 일어나는 생각’은 바로 나머지 둘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났다는, 그 사실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 냐냐난다 스님, 있는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