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스크랩] [혜조 스님] 죽음에 관한 세번째 법문

Dhammarakkhita 2016. 12. 18. 11:27

Ⅱ. 서양의 생사관

 

1. 중세 기독교의 생사관

서양의 중세철학은 대략 서기 1세기에서부터 그리스・로마・히브리(유대) 3대문화의 계통으로 형성된 철학 사상입니다. 이들은 지자(智者)를 중요시 하는 그리스문화와 성인을 중요시하는 로마문화, 그리고 믿음을 중요시하는 히브리문화가 서로 결합되어 탄생된 종교철학입니다.

 

- 기독교 신학철학

  중세 철학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기독교 신학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출현으로, 구약시대의 무서운 율법의 하나님, 즉 히브리민족의 하나님을 온 인류의 신으로, 징벌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전환시켜 전 인류의 종교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신약시대의 사상은 도덕과 종교를 결합시켜 만물 가운데 인간의 영혼을 가장 가치 있는 인격체로 부상시켰고, 신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은 신의 자녀로 부상시켜 기독교의 가장 깊은 핵심을 완성시켰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창조했을 때 영원한 생명으로 만들었는데, 아담과 해와의 원죄의 대가에 의해 인간은 죽음이라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죽음의 징벌로 말미암아 영육이 분리됩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 비록 육신은 소멸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영혼은 신의 심판을 받아 여전히 사후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후세계의 천당이나 지옥은 시간적 개념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의 영역이므로 인간의 죽음은 생명의 끝남이 아니고, 다른 차원의 생명의 시작인 것입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이 죽은 다음 사후에는 천당과 지옥 그리고 연옥 이 세 곳 중 어느 하나에 가게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천당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한 자만이 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써 존재하는 영생의 복락이고, 지옥은 하나님을 반목하거나 따르지 않은 자들이 가는 곳이며, 연옥은 설사 하나님을 믿었어도 잘못 믿은 자들이 구원을 받기 전까지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페라기우스(Pelagius)의 생사관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부(敎父)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지성과 종합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사람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성(聖)아우구스티누스그라 부릅니다. 그는 15-6세에 방탕하여 17살 때 아들을 가졌습니다. 그 후 뜻하지 않게 부친과 모친 그리고 아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생애를 지낸 후 32세에는 카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성실히 하여 4년 뒤에는 주교신부가 됩니다.

젊어서 그는 항상 이원론적인 영육의 갈등・선과 악・자유와 운명의 갈등 등으로 깊은 고민에 빠져 그것의 실마리를 찾고자 수도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실수와 실연과 실패의 과정 속에서 그의 사상은 성숙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사상적 기틀은 자기 마음 안에서의 신앙적 경험과 플라톤 철학사상과 기독교 사상의 접목으로 형성된 것입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 신앙과 지식을 엄밀히 구별하였습니다. 그는 신의 은총의 선행(先行)을 강조하였습니다. 즉 인간이 신으로 향하며 악을 물리친다는 것, 신을 알게 된다는 것, 신을 믿게 된다는 것 등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의 덕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의 타락은 인간을 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며 교만하므로 신은 아담을 도와주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담의 의지는 약화되었고 정욕의 충동에 지배되었습니다. 아담의 죄는 인류 전체의 죄이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회복은 신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은총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창조적인 역사(役事)이며, 인간의 마음속에 신앙과 소망과 사랑을 넣어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생(新生)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예정설(豫定設)을 주장합니다. 구제는 초월적인 소관이며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관계없이 신에 의하여 미리 예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타락된 결과 초월적인 신의 힘을 통해서만 구제된다는 것입니다. 초월적인 신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계시(啓示)를 통해서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의 신학철학의 궁극적 목적은 존재와 신 그리고 심령의 평안입니다. 이 삼자는 바로 마음에서 현현되므로, 그것들은 마음안에서 찾아집니다. 절대신은 존재 그 자체이며, 그것은 평안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과 존재와 평안은 바로 심령 안에서 분리될 수 없는 일체입니다. 이 일체가 마음 안에서 나타날 때에 바로 인간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모두 선(善)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선에 결함이 있는 것이 악인데, 그 악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사악함에서 나온 선의 결함이라고 말합니다. 악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① 무능, ② 교만, ③ 세속입니다. 이 중에서 무능은 육체의 악의 근원이고, 교만은 영혼의 악의 근원입니다. 이 두 가지 악은 인간의 육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의 의지가 약해짐으로 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는데 인간이 그 자유의지를 잘못 남용하여 선의 결함인 악인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두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하나는 이기적인 자아 혹은 소아(小我)를 버리고 신에게 귀의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인 자아만을 애착하고 신을 믿지 않는 부류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악을 지향할 경우는 후자에 속하고, 선을 향할 경우는 전자에 속하게 됩니다.


그는 인간은 원래 신으로부터 받은 자유의지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인생과정을 체험하는 가운데 자신을 찾기 시작하고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태어남과 죽음, 즐거움과 고통, 성공과 실패를 함으로써 결국은 마음을 통하여 정신적 안식처를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신과의 결합이며, 그것으로 생명의 행복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생명은 영생이며, 그가 추구하는 행복의 대상은 영생의 행복입니다. 영원히 죽음을 벗어난 영생의 행복을 얻는 방법은 신과의 합일입니다. 신의 존재는 바로 인간의 깊은 내면에 존재하며, 신을 찾는 지름길은 바로 내심의 귀의라고 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영육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성경에서 신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영육으로 결합시켰다는 내용과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토대로 한 인성론을 바탕으로 인간은 육체를 갖는 영혼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죄악의 근원이며 최후에는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에 반해 영혼은 육체와는 달리 형체를 갖지 않으며, 본래 스스로 명확한 앎을 갖고 있다고 보니다. 그러므로 선천적인 앎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육체가 죽어도 영혼 그 자체는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며 소멸되지 않으므로 정신적 생명의 실체입니다.


  이에 반하여 페라기우스(Pelagius)는,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선과 악을 선택할 능력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화해 상태에 들어갈 수 있고,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의 은총으로 인하여 인간이 선(善)을 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재적인 능력으로 선을 택하여 죄를 이겨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행동을 선택할 수 있으므로 아담에서부터 내려온 원죄의 개념은 성립할 수 없으며, 아담에게 소급시킬 수 있는 것은 영혼의 죄가 아니라 신체적인 죄라는 것입니다. 신체는 개인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지는 조직이며 죄의 유전과 관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선행을 할 때, 신이 부수적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인간의 선의지(善意志)가 선행하면 신의 은총은 그 뒤를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사관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인성(人性)의 회복으로, 신성만을 추구하는 신과의 합일이 아니라 인간 내심의 귀의로써 참다운 영생의 행복에 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들 주장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하는 것은 신의 일방적이고 타율적인 구원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인 생명의 가치를 중요하게 제시한 점입니다.

 

- 에크하르트의 생사관

에크하르트는 스콜라철학 전성기 때 중세기의 이성적 신비주의의 기초를 세운 범신론적 신비주의 사조의 대표적인 교부입니다.


그의 사상은, 우선 신은 만물을 창조했고 만물 또한 신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바로 만물이고, 만물이 곧 신입니다. 신이 존재함으로써 바로 세계가 창조되었고 세계는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신과 만물은 하나이고 신과 인간 역시 하나라고 말합니다.

우주만물은 세 가지 등급의 존재인데, 첫째는 존재이고, 둘째는 생명이고, 셋째는 영지(靈智.intelligence)라고 합니다. 이 가운데 영지의 존재가 만물의 최고봉인 인간입니다. 그리고 만물은 인간을 통하여 근원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만이 신과 하나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신의 부분을 갖고 있으며, 신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교량적 매체가 바로 내면의 자각임을 일깨웠고, 내면의 자각을 위해서는 인간 내면의 신비의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진실한 존재가 되는가에 있습니다. 사유 방법으로 묵상을 통하여 인간의 진실한 존재를 찾는 방법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신은 본래 진리로써 진실한 존재 그 자체이므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내면에서 진실한 존재인 신을 만날 수 있는가가 관건입니다.

그는 인간을 육체와 혼(魂)그리고 영(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자아를 상등과 하등으로 구분 지었습니다. 상등 자아는 인간의 본질을 의미하고 신성의 자아로 신과 통할 수 있는 내면세계를 말합니다.


진실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려면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삶의 자아를 완전히 망각해야만 비로소 신과 결합된 진정한 삶의 자신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과 진정한 자아의 결합은 바로 자연적이면서 초월적인 관계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보다 자기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따라서 선(善)하게 <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하며, 행해야 할 일의 수나 종류를 강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당신의 작업의 토대가 되는 비본적인 것을 주시하여야 한다’ 고 말하면서, 우리의 존재야말로 실재이며, 우리는 움직이는 정신이며, 우리 행동의 추진력이 되는 성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존재는 생명이며 활동이며 탄생이며 재생이며 유출(流出)이며 생산성이므로 존재는 소유의 반대이며, 자아구속, 자기중심주의 반대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존재를 <끓는>과정, <낳는>과정,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그 자체 밖으로 자꾸흐르는>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능동성을 나타내기 위해 <달린다>는 상징을 사용합니다. ‘평화를 향해 달려 들어가라. 달리는 상태, 평화 속으로 끊임없이 달려 들어가는 상태에 있는 사람은 성스러운 인간이다. 그는 끊임없이 달리고 움직이며, 달리면서 평화를 추구한다’고 표현하면서 능동적이고 활달한 사람은 <가득 참에 따라 늘어나므로 결코 가득 채워지지 않는 그릇>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있어, 죽음 또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정체가 없습니다. 죽음의 과정을 달리며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서양철학적 측면의 생사관


가. 고대 그리스철학에서의 생사관

 

- 아리스토텔레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고 영혼은 영원하며 불멸이라고 보았습니다. 플라톤은 인간 노력의 목적 추구가 이데아의 관념세계를 향한 것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관념세계가 아니라 ‘덕성’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이성적인 영혼을 근본으로 자신의 이지적인 생활을 완성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혼론」에서 생명의 본질은 바로 영혼이고, 영혼은 육체의 형식인(形式因)이면서 동시에 목적인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내적인 목적을 달성시킴으로써 행복을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지적인 생활을 일러 선(善) 혹은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이지적인 생활을 주도하는 것이 바로 심성의 영혼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행복을 추구하는 성품을 지니고 있는데 그 가치가 바로 덕 혹은 선입니다. 인간은 후덕한 선을 지녔을 때 비로소 행복을 얻습니다.


그는 인간 삶의 의미를 모든 사람이 함께 공생, 공존하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모두 함께 행복해짐을 인생의 최대목적으로 본 것입니다.


나. 근대철학에서의 생사관

 

- 데카르트

그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은 ‘의심’입니다. 그는 천주교인이지만 그의 철학은 종교적 신앙이나 방법론에서 벗어나 이성을 통한 분석에서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근본원리를 발견하려고 하였습니다.

더욱이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단정 짓고, 다만 의심하는 나 자신, 사유하는 주체만큼은 의심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단언하며 ‘나’의 실재를 인정합니다

삶의 문제에 대해 이성을 근본으로 한 인식론에서 출발하여, 인생의 도덕적 문제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로 제시하였습니다. 인간의 정신작용에는 인지작용 이외에 의지작용이 있다. 인간에게는 본래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인간은 원래가 자유이다. 다만 자유는 인간의 본성이 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격정은 일종의 영혼・심령의 정서이고, 육체로 인하여 감정이 일어난 것이므로, 격정 그 자체는 선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 도덕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 지나친 격정을 반드시 절제해야만 심령이 자유롭게 된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얻는 데 있고, 그 행복은 각자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것으로 현실 생활에서 영혼의 만족을 얻어야만 내세의 영혼이 보장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유덕한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선행을 하거나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런 인생의 완성을 자족이라고 했고, 이지적인 삶의 인생이라고 보았으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최고의 실체인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가 결합한 심물이원론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유작용을 영혼 혹은 심령이라고 합니다. 영혼과 육체는 내적인 통일성이 없고 영혼과 육체는 서로 직접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해 인간의 육체를 기계론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영혼은 선천적인 개념으로 육체감각세계의 직접영향을 받지 않으며, 인간의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에 불과한 것이고, 영혼은 영원불멸한 것이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 버클리

영국의 경험주의 가운데 주관유심론자입니다.


만약 인간의 마음이 없다면 지각되어지는 사물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세상 만물의 존재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다만 세상의 만물은 마음 이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객관적인 외부의 사물을 사실 우리는 알 수 없고 다만 일반관념으로 사물을 지각하고 판단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로는 관념세계가 있고, 아래로는 감각세계가 있다. 관념세계 가운데 가장 높은 존재는 하나님이고 그 다음이 인간이다. 인간은 영혼과 육신으로 결합되었고, 영혼은 관념세계에 속하고, 육체는 감각세계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에 있어 육체적 감각의 현상세계를 관념세계의 복사본, 즉 허상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감각적으로 추구하는 물질적 욕망을 허망하게 생각하고, 정신적인 삶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세상의 삶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감각적인 현상세계가 인간의 영혼이 천상의 관념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교량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인생의 삶은 관념세계의 영원한 진리를 찾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는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예술적으로 정신세계를 승화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특히 진정한 종교적 신앙의 계시는 천상인 내세의 세계로 인도하므로 인간의 죽음은 영혼이 육신의 감각세계를 떠나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두려울 게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칸트(1724-1804)

그의 비판철학의 중요한 체계는 세 항목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1비판은, ‘순수이성비판’으로 본체계에서 지식론까지의 문제를 논증하였고,

제2비판은, ‘실천이성비판’으로 도덕의 문제를 논증하였고,

제3비판은, ‘판단력비판’으로 미학과 목적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처럼 칸트의 비판철학체계는 지식론과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학, 인류학 등 철학의 전반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의 비판철학은 인간문제를 중심으로 한 인간존재의 본체론입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가 얻은 삼대 관념은 영혼・세계・신입니다. 이 관념들은 모두 다 관념계에 속한 것으로 비감각적인 실재입니다. 이성의 비판으로 얻는 결과는 세계에 대한 두 가지 획인데, 하나는 경험세계인 현상계이고, 다른 하나는 선험세계로, 본체계라고 하였습니다. 경험세계는 인간의 경험을 통한 인식범위에 속하고, 선험세계는 인간사유의 범위로써 경험으로 인식되는 세계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인식대상은 현상이고, 인간의 사유대상은 본체계가 됩니다.

선험세계는 감각세계가 아닌 관념이며, 관념은 비실재가 아니고 초실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의 최고 관념인 영혼・세계・신은 모두 형이상학의 제일 기본적인 관념입니다.

(칸트가 비록 선험적 방법론을 사용해 봤지만 물자체, 즉 영혼이든 신이든 세계이든 이 최고의 관념들은 모두 인간의 순수이성의 능력으로는 미칠 수 없다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냈고, 이는 역시 형이상학의 문제로 남게 되었다)


칸트는 인간의 마음을 최고도덕의 근원으로 삼았고, 도덕의 원칙(실천이성의 원칙)은 인간 내면의 자동적이고 자발적인 실천이성의 형이상학을 확립한 것입니다. 그의 비판철학의 목적은 경험론도 지식론(관념론)도 아닌 새로운 형이상학의 본체론을 확립한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선험적 경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도덕률은 사회의 규범이라든가 혹은 신의 의지라든가 이런 타율의 원칙이 도덕적 원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윤리학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자율의 선량한 의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실천이성의 대상은 바로 최고의 선이고 동시에 인간의 자유가 필요함을 주장합니다.


윤리학의 입장에서 자유는 임의적인 자유가 아닌, 타인의 행복을 위한 선의 도덕적 자유로서 의무적인 실천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인간은 두 가지 세상에 속해 있는데, 하나는 현상세계에 속하므로 인간은 감각세계에 의해 외부의 자연규율과 사회규범에 따라야 하고, 다른 하나는 본체계의 일원으로써 지성의 자유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대립의 세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로, 지성의 세계가 바로 감각세계를 포용하는 것으로, 인간 본성이 현실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것이며, 양심의 기능이 바로 인간의 이중인격성을 배제시킨다고 하였습니다.


종교를 최고선의 개념인 도덕률로 정의하였습니다. 도덕률만이 자유・불멸(불사)・신의 존재를 보장하며, 종교 역시 도덕률에서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공포가 신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양심 역시 신의 개념에다 포함시켜, 양심이 바로 종교를 발전하게 하는 조정자라고 합니다. 그는 교회에 나가 우상을 숭배하는 것도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도덕과 종교는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독교의 도덕적 원리 자체인 신학의 타율을 부정하고 순수실천이성 자율을 주장합니다.

생명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며, 행복의 주체가 바로 도덕의 주체성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도덕이 곧 진리이므로, 인간이 인생에 있어 신의 존재를 찾고, 영혼불멸을 찾고, 자유의지를 찾는 것도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의 문제에 대해 그의 정신은 이미 육체에 대해 초월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모두 죽음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감성의 정(情)에 의해 지성의 만능을 부정하고 의지를 긍정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자유롭지 않으며, 의지만이 착함과 악함, 옳음과 그름과 참됨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의지를 완전한 자유라고 보았습니다. 자유의지에 의한 진정한 인간의 주체를 ‘도덕’이라고 강조합니다.


다. 현대철학의 생사관

현대철학의 의식은 대략 1850년 이후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독일관념철학의 거장 헤겔의 관념철학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철학사조입니다.


- 니체(1844-1900)

니체의 철학은 형이상학의 종결이면서 생명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비판하고 반대합니다. 그는 기존의 철학, 종교, 문화, 교육, 윤리도덕 등등 전통적인 사회의 윤리규범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새로운 가치관과 생사관을 성립케 합니다. 그는 ‘생명’과 ‘영원윤회(영원회귀)’ 개념을 체계화시킵니다.


니체사상의 대전제는 무신론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반대하며, 인간의 생명을 긍정하고 인류생명의 가치와 생존의 의미를 새롭게 주장합니다. 그는 「권력의지」에서, ‘생존’의 의미를 자신으로부터 죽음을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활동이라고 말하는데, 니체가 말하는 생존・생명의 특징은 일종의 창조력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력의 생명 혹은 생존・세계의 역량은 줄어드는 것도 느는 것도 아니며, 멈춤 없이 영원히 윤회하며 회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과 만물의 생명은 무한한 시간 가운데 끊임없이 움직이며 순환하는 가운데 정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장구한 시간의 윤회 속에서 인류의 생존과 사망의 조건을 구비하여 정비해 감으로써 인간의 고통과 쾌락・원수와 친구・희망과 절망・옳음과 그름이 각각 원래의 진정한 자리로 환원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하나님은 이미 죽었다.” “초인이 탄생되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초인은 능히 자신을 극복한 사람으로, 모든 역경으로부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죽었다.”라고 한 것은 기존의 전지전능하신 구원의 타력 신은 죽었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도덕은 신에 의존하고 인간을 나약하게 만드는 노예도덕이므로 인간은 응당 새롭게 자주도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신이 죽음으로서 지금의 우리는 희망을 갖고 초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니체의 신을 대신한 초인의 개념은 생명에 대한 열정의 긍정을 뜻합니다. 일체 생명은 영원한 윤회 속에서 생성・파괴・죽음을 통하여 원래의 근원으로 환원하도록 약정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초인은 자신의 운명 속에서 새로운 운명을 창조하는 사람으로 공포와 두려움으로부터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초인은 죽음을 극복하여 환희로 바꾸어 죽음에 대해 영원히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누구든 자신에게 유용하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전통적인 가치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내고 규정한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동양의 문화권에서는 도덕윤리로서 인의예지를 가장 가치 있게 보는 것에 비하여 서양문화권에서는 행복과 즐거움에 더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칸트 윤리학의 의무론에서는 행복과 쾌락이 아니라 도덕을 최고의 가치로 보고 있습니다. 니체는 이처럼 가치의 절대적 표준이 없다, 절대적 가치의 표준이 없다면 절대적으로 진정한 평등도 없다고 말합니다. 종래의 사회 문화의 가치관을 부정하면서 가치는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삶과 진정한 인간은 어떤 사람일까. 그자는 초인입니다. 초인은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우선 진정한 철학의 정신은 낡은 습관성을 고치게 하여 생명의 태도로 전환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새로운 생명이란, 자신을 긍정하는 역량이며, 곧 인간의 의지력・권력의지입니다. 또한 이 의지력은 창조의 생명입니다.

다시 말하면, 개체의 생명은 서로 다른 존재방식인데, 인간은 원래 의지의 자유를 갖고 태어났고 인간 행동의 시작이 바로 자유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을 느낄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는 진실로 생사의 깨달음을 느낄 때 참으로 자기 생명의 창조의 힘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생명은 생명의 창조력입니다. 욕망・비극・다양성・무궁한 변화・우연성을 모두 생명의 원동력으로 긍정하고, 이것들은 인격을 승화시키고 인생을 전환시키는 창조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비극・고통 그런 난관의 역경을 초월한 자가 바로 초인입니다.

또한 역량의 힘이 바로 삶을 독립하게 하는데, 초인은 자기 자신의 생명력을 성립시키고 자아생명을 긍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역량을 긍정하는 것은 자신을 창조하는 가치이며, 그것을 ‘권력의지’라고 말합니다. 이 권력의지는 남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역량을 긍정하는 힘, 충만한 활력 혹은 충만한 지력의 능력을 말합니다. 또 권력의지란 비판의 역량이고 창조의 힘이며 이것은 일체 가치의 전환점이다고 말합니다.

권력의지의 대상은 남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권력의지의 목표는 자기의 차이를 긍정하여, 남과 다른 인생의 성취에 있습니다. 이러한 초인은 생명의 영원윤회 속에서 권력의지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니체는 인간 내면의 자책감이 바로 고통의식을 만들어 내지만, 고통은 바로 반응의 역량이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많이 당할수록 극대화된 고통은 내면화로 전환되는 힘이 된다. 다시 말해서, 고통은 생명 혹은 인생의 힘으로 바뀌는 계기가 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니체는 고통은 정신의 진면목이고, 강렬한 내면의 친밀감이며, 또한 생명이라고 단언합니다.

인간은 고통을 느낄 때 비로소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통을 깨닫고 비로소 고통을 벗어날 때, 고통은 자신의 근원이 되고, 생명의 힘으로 전환되고, 가치를 지니며 진정한 인생의 희열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자신을 승화시키고 일체 죄악감에서 벗어나 해탈을 시작하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초인, 즉 진실로 깨어 있는 사람만이 생명, 문화, 종교, 도덕을 창조하고, 새로운 창조의 가치를 개발해 열린 세상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삶은 제일 진실한 생명의 능력을 발휘하고 생사를 초월하는 지혜가 열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청 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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