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혜조스님]행복론에 대한 두번째 법문
행복론
오늘날 우리나라는 경제사회적인 면에서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각계에서 매우 우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나라의 소위 잘사는 사람들은 정말 호화롭게 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최상위 계층의 부류들은 차치하고라도, 서울의 경우 강남권과 부촌 그리고 각 도시의 특정 영역에서 사는 사람들은 전 세계의 어떤 선진국과 비교하여도-그들의 최상류층을 제외하고는-모든 부분에서 최상의 상태를 그야말로 누리며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하여 하층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실로, 절망적이며 앞으로도 그런대로 살아질 것 같은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현실입니다. 또한 과거에는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부류들도 경제적인 면에서의 희망이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삶에 대하여 행복한가를 물으면 그들은 대체로 마땅히 자기 삶의 질에 만족하며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 중 과거의 중산층에 속한 부류들도 조건이 지나치게 어려운 경우가 아니면 그들 또한 그런대로 행복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그 행복은 본질적으로 취약합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상황 안에 조건들 가운데 하나가 갑자기 무너지면 행복감은 여지없이 내려앉고 맙니다. 그리고 외면적인 형평으로 보아 그렇게 불평할 것이 없다고 하여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들 마음속에 불안함과 분노와 바람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정말 전혀 희망도 품을 수 없이 못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바램이 더욱 많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의 척도를 물질적인 조건의 풍요로움에서 오는 약간의 안정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물론 현대인의 삶의 양식이 철두철미하게 소유양식의 삶에 중독 되어 있는 성향에서 나온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행복’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고통과 대비되어 긍정적으로 경험되는 일시적인 소강상태로 여기고 있습니다. 프로이드도 “엄밀한 의미로 우리가 행복이라 부르는 것은 절박한 요구의 갑작스런 충족의 결과이며, 그것은 그 특정상 우발적 현상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행복이란, 극한처럼 보이는 고통의 상황이 갑자기 전환되어 그 극한 고통이 멈추어 버린 그 자리를 뛰어넘어 있습니다. 내가 오른 손에 10키로나 되는 책 보따리를 들고 간다고 합시다. 5분만 가면 오른 손과 팔뚝이 아파올 것입니다. 그 아픔은 점점 더해져서 못 견딜 것 같습니다. 비가 온 뒤라 땅이 질퍽해서 책 보따리를 내려놓지도 못합니다. 왼 손에도 조그마하지만 물건 하나가 쥐어져 있어 손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괴롭습니다. 그럴 적에 누군가가 와서 왼손의 물건을 받아 주어서 오른 손에 있던 책 보따리를 왼 손으로 옮기는 순간, 나는 살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행복을 느낍니다. 이러한 행복도 분명 행복의 한 조각임에는 분명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지속 가능한 행복이어야 하고, 내적 충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온・평정・평안・평화가 깃들 수 있습니다. 평온・평정・평안・평화가 스며들어 있지 않은 행복은 행복의 그림자이요, 행복의 조각일 뿐입니다. 그것은 자유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에서 과연 지속 가능한 행복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우리 대부분은 지속 가능한 참 행복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으로 잠재적으로 인식되어, 아예 그러한 행복을 포기하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행복은 너무나 이상이며 동화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신화와 같은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내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서양문명은 더욱 그것의 불가능을 삶 속에 깔라놓게 하였습니다. 파스칼은 “최고로 발전된 학문과 지혜들도 대중이나 개인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능력을 시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불가능에 대한 믿음은 대체로 ‘원죄’사상과 ‘본체’사상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지닌 지극히 불완전한 실체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자체적으로 완전으로 가기에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실체・본체란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구원을 완전한 본체로부터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원죄 개념을 프로이드는 심리학에 끌어들입니다. “문명과 문명의 근간 요소들인 도덕, 과학, 종교, 기술발전 등은 유아성욕과 공격본능에서 비롯된 개인의 근본적인 갈등들에 대한 방어책이라고 규정하고, 이 갈등에 대한 억제와 억압이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이 불안은 문명을 낳는 에너지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현대의 지성인들로 하여금 선의와 관용에서 나온 모든 행위를 부정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결론짓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타락한 것이라는 이러한 원죄사상을 근간으로 한 본체사상은 삶에 대한 우리의 안목을 비관주의로 물들게 하여, 자율과 자유의 주체의식을 박탈하고 나아가서는 진정한 참 행복 추구의 토대 자체를 회의하게 만듭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우리는 영원하지도 않고, 고정적이지도 않고, 유일하지도 않고, 스스로 그렇게 된 자기 원인도 없는, 본체성이 없는 존재로서 내면에 도덕적, 소유적 완전함과 불완전함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으나, 주체적 앎・이해・깨달음에 의해서 도덕적, 소유적 불완전함을 제거하여 완전함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탄 왕국의 중심주에 위치한 붐탕 지방에 한 불구의 몸을 한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을 외곽에 있는 대나무로 지은 매우 작은 오두막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집 밖에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방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서만 생활하며, 작은 호스를 통해 소변을 보고, 오두막은 흐르는 시냇물 위에 말뚝을 박아 수상 가옥처럼 지어졌는데, 마루판에 구멍을 내어 그리로 변을 처리합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쁨이었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평온하고 순박하고 온화하고 꾸밈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하면 그는 아무 것도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작은 오두막에서는 종종 마을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이나 노인, 남자 또는 여자들의 방문객은 그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오거나 얘기를 나누러 찾아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서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로부터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옵니다. 마을에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대개 그를 찾아옵니다.
이 남자는 자기 안에서 행복을 발견했고, 그 무엇도 그에게서 그것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삶도 죽음도 그에게서 그것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지속적인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분명 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러한 예를 꼭 불교 수행 혹은 종교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흔치는 않지만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지금 여기에서 마주할 수 있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일전에 읽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헨리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스코트 니어링의 평전>, <간디 평전> 등에서 그들의 내적 자유에 대해서 감동적으로 공감하였습니다. 그들이 불교 수행을 통하지 아니하더라도 이성과 냉철한 사유로서 내적 자유와 가까이하며 평화를 깃들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지속적인 행복 누림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삶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삶의 한가운데에 가져온다면 지속적인 행복을 향하여 훨씬 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나한테는 가족과 직업이 있고, 대부분의 시간을 현자나 스님네들이 사는 여건과는 너무나 다른 속세에서 살고 있는데 그 속에서 어찌할 수 있겠는가?”라고 수행에 성실하게 임하지 못하는 이유를 합리화 합니다. 그런 생각을 지닌 사람에 있어서, 여건과 시간이 그들의 명상 수행을 방해하고 있는 것 아니라, 실은 그들의 명상 수행에 임하는 절실한 필요의식의 결핍이 명상 수행을 방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삶의 중요한 실재적인 부분을 포기하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수행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단지 시간 죽이기에 불과한 허다한 행위에 무의미한 의식과 연관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그 시간을 수행에 우선적으로 할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인생에서 진정한,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겠다는 것에 자신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두어야 하겠다는 의도를 지니는 것입니다. 참 행복이란 입재 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쾌락과 기쁨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평온・평정・평안・평화가 깃든 내적 자유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항상 얼마간의 시간을 성실하게 수행에 할애하여, 수행 속에서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 생각들이 일어나는 과정을 관찰하여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러면 어두운 생각이건 기쁜 생각이건 생각들의 연막이 지나가고, 고요하고 평온한 순수한 상태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의 푸른 평원처럼 펼쳐지는 상태를 관조하는 건 참으로 아름답고, 즐겁고, 행복한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러한 내적 알아차림의 성찰을 통해 생각들이 일어나는 양식을 이해하게 됨으로써 부정적인 성향의 정신적 독소의 먹이가 되지 않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은 진정한 환희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점차적으로 마음의 평온, 평정을 지닐 수 있게 되어 일상생활에서 정서적인 면으로나, 직장 혹은 직업 생활에서의 상대와의 관계에서나 선선하고 성숙하게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정신의 기능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비롯되었던 모든 불안감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좀 더 자연스럽게 사랑이 토대가 되어 마음을 열며 익명의 사람들과도 혼쾌히 더불어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명상 수행은 바쁜 삶의 틈 속에서 억지로 짬을 내어 취하는 휴식이 아닙니다. 수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해로 눈을 돌리는 삶의 양식입니다. 내면 깊숙히 숨어 있는 자신의 문제점・결점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앎의 양식입니다. 내적 자유를 향한 소유양식의 삶이 아닌, 존재의 방식입니다. 그리하여 필요함에서 점점 자유로워지는 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가난 속의 풍요, 비워 있음 속의 충만을 배우게 됩니다. 마침내 지속 가능한 행복을 매우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삶의 누릴 것입니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바라는 것도, 기다리는 것도, 희망할 것도, 부족한 것도 없게 되어 완전히 행복합니다.
행복한 ‘나’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신심을 지니고 성실하게 정진하십시다.
싸두 싸두 싸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