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고령화 사회에서
이번에는 한 2회에 걸쳐서 고령화 사회에 대한 문제들에 대하여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요즘 우리 사회는 부정적인 면으로만 가득하여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사회가 심각하게 겪고 있는 양극화 문제, 농업문제, 교육문제, 부동산문제, 환경문제, 남북문제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에 깊이 관련되어 있는 문제들로서 우리 삶의 근본 토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자식 낳아 기르는 사람치고 할 수만 있다면 어디 외국으로 이민 갈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 없고, 치솟는 부동산 가격은 성실하게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많은 사람들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화가나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들 눈을 마주치기 싫어하는 것 같고, 말을 건네기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몇 사람만 모이면 서로들 자연스럽게 세상을 얘기 하고, 넋두리를 내놓으며 인간적으로 삶을 얘기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인간다운 면은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특정 대상을 지정하지 못한 민중의 분노는 때로는 정부를 향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보다 더 약한 대상들이나 때로는 가족들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성폭행과 금품갈취 나아가서는 대량살육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증오와 분노가 섬뜩하게 느껴집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기조 위에서 위생, 보건, 의료에 대한 의식과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평균 수명이 엄청나게 늘어난 관계로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고령화 시대란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비율이 14%를 넘으면 고령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라 일컫습니다. 우리나라는 200년도에 이미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고, 2018년에는 고령사회로, 2026년도에는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때까지 산업, 경제, 교육, 의료, 문화,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을 모방하며, 따라잡기에 온 힘을 기울이며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고령화 문제 해결에 대한 모델은 전 세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형상으로 거의 최초로 맞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자체의 힘으로 그 복안을 마련하여야만 하는 처지에 몰려있습니다.
그럼 사회가 고령화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
첫째, 노후의 생계비 확보가 일차적으로 문제가 될 것입니다. 노후의 생계 대책으로는 먼저 연금제도를 떠올릴 수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연금제도가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둘째, 세대 갈등의 심각성이 일어날 것입니다. 고령화 되다보니 선거에 대한 결과가 고령 세대에 편중되어 일어날 것이므로 젊은 세대와 고령 세대의반발과 저항에 따른 갈등이 심각하게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고령 세대의 생계비 부담의 많은 부분을 젊은 세대가 부담하게 됨으로서 젊은 세대의 경제 부담이 무거워지므로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넷째, 노후 인생의 목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너무나 많은 여가와 에너지를 어떻게 소비하면서 삶의 의미를 충당할 것인가?
다섯째, 고령화는 여성문제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고령화 하나만 놓고 본다면 사실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은 못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작금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태를 해결해 줄수 있는 실마리를 고령 세대로부터 이끌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출산의 조건 속에서의 고령화입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의 평균수명은 남자 51세, 여자 53세이었으며, 2002년에는 남자 73세, 여자 80세이었으며, 2020년에는 100세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출생률은 어떠한가를 봅시다. 1960년대 6.0(인구대체율), 1984년에는 2.2, 2002년에는 1.17입니다. 이것은 세계 최저입니다. 2003년에는 1.19, 2005에는 1.4?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출산율이 낮은가?
이러한 상황에서 선진국을 능가하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은 단순히 보육문제로 인한 출산회피가 아니라, 여성들의 출산파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피를 나눈 생명을 어찌 이 불확실한 삶의 한복판에 하나 더 보태기를 주저하면서 내 대에서 끝내자고 마음먹는 심정일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냉철하게 한번 들여다봅시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정부’에서나 지금의 ‘참여정부’에서나 동일하게 ‘지속 성장’과 ‘안정’을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방을 촉진하고, 각종 규제 완화, 기술혁신, 신성장 동력 발굴, 경쟁력 증대를 적극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면을 추진시키기 위해서 ‘돈벌이’가 안 되는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당장의 부가가치가 높은 부분에 총력을 쏟아 넣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돈벌이’는 곧 경쟁을 조건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와 사회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국가 경쟁력, 기업경쟁력, 개인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우리가 할일이라고 언론과 대중매체 그리고 학교교육을 통해 줄기차게 전파하며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국민소득 2만불 시대를 지향한다는 지금 사람들의 심정은 과거 우리가 가난했던 그 어느 때보다 가파릅니다. 절벽 위에 내몰린 사람들처럼 언제 벼랑 아래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이 팽만해 있습니다. 경쟁에서 지면 언제 짤릴지, 언제 길거리에 앉을지 모릅니다. 이 집단적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이성을 잃어버리고 양심이 마비된 것 같습니다.
치열한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인간적 품위」를 잃어버리고, 진실한 삶에 대한 「냉소주의」만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삶을 향유하는 훈훈한 마음과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부를 지닌 자도 삶을 전쟁을 치르듯 숨가쁘게 보냅니다. 돈벌이도 품위 없게 하고, 소비도 품위 없게 합니다. 여가도 품위 없게 즐기고, 예술도 품위 없게 소비할 뿐입니다. 자연히 사랑도 품위 없게 합니다. 품위는 돈으로도, 경쟁으로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다운 삶의 의식과 여유로부터 베어나오는 것입니다.
얼핏 보기에는, 거리에 넘쳐나는 젊은 남녀들은 영양상태가 좋아 보이고, 겉모습의 패션 상태도 세련되어 보이고, TV나 인터넷을 통해 보는 타인의 삶은 건강하게 자유로워서 여유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내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 사회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안전망이 확보되지 않은 사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하고 영문을 모른 채 화가 나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더 가난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만이 유일한 자아실현의 길이라고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 혼자 그 대열에 포함되지 않은 것 같으니 자아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위기위식을 느끼며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한 것입니다.
소유를 토대로 하는 자본주의 경쟁 경제는 정보와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공격함으로써 시장을 확대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받고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반응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휘둘립니다. 욕망의 무한 확대와 재생산 구조 속에서 이를 실현할 길 없는 사람들은 화려한 진열장을 보면서 절망과 한숨으로 소외당합니다. 이렇게 쉴새 없이 자극만 받고, 충족은 되지 않는 욕망은 쉽게 공격성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출산율이 정상적이라면 도리어 경이로운 일일 것입니다.
이 사회의 교육의 현황은 학교교육만으로는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 믿는 학생, 부모는 전무한 것 같습니다. 가계비의 사교육비 부담 비율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몇 일전 뉴스에서는 부유층과 서민층의 사교육비 차이가 전자는 86만원 정도에 비하여 후자는 9만원 정도로 8.6배나 난다고 합니다. 이 나라는 유난히도 자식 교육열이 높은 나라입니다. 사교육비를 투자한 만큼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것이 곧 바로 좋은 직장을 얻는 것으로 직결됩니다. 그리하여 부자는 대를 이은 부자로 가난한 자는 절대적으로 대를 이어 가난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를 갖추지 못한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출산하리라는 기대는 불가능합니다.
이제는 여성들이 가부장제에 괄목할만한 저항을 하며 자유롭게 됨에 따라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 활동을 하며 사회참여에 적극적인 의욕을 보이는 여성일수록 아이를 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직장과 사회에서의 양육, 보육의 제도가 너무나 열악하여 출산의욕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지속성장’과 ‘안정’을 위한 대책 마련으로 중요한 부분에 토목, 건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토목, 건설의 나라입니다. 전 국토를 도로와 방파제, 아파트로 채울 요량인 것만 같습니다. 국민총생산 중에서 건설사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선진국인 경우는 8-13% 수준인데 비하여 이 나라는 24%를 넘어 30%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이 ‘부수고 짓는 일’ 과정에서 천식과 호흡기질환이나 폐암 등을 유발하는, 그래서 ‘조용한 살인자’라고 부르는 ‘PM10’이라는 대기오염 물질이 OECD의 평균보다 무려 2배에 해당하는 오염도를 보이면서 서울은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요즘 어린이들이 아토피 질환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자업자득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석훈 박사는 “서울을 긴급 탈출하라, 서울 떠나지 않으면,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대단히 위험하고 무모한 짓‘이라고 경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경주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환경적으로 안정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학에 있는 후배로부터 들은 얘기로는 정신적으로 문제를 지닌 애들이 예상 외로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유의식과 소비의식의 팽배로 인하여 대도시를 떠나기를 불안해 합니다. 더욱 도시만 비대해져 갑니다. 도시 안에서의 여러 가지 문제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이런 사회 정황에서는 결코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출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순히 출산 장려금을 지급한다고 해서 이 난국을 타개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사회생활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삶의 질이 변화되고, 거대한 국책사업으로 양육과 보육의 바람직한 사회제도가 근본적으로 마련되어야만 저출산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입니다.
이제 고령화 문제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근간에 우리나라의 기업에서 임금 상승으로 국제 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기업이 임금이 싼 외국으로 생산시설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업에서 몸담고 있었던 고령의 육체 혹은 정신 노동자들은 양질의 노동력이 이미 구축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와는 달리 고임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미 부의 절대적 필요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임금의 양 보다는 일하는 기회, 그 자체를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양질의 인력을 계속 연장하여 정년 전의 임금의 절반 정도로 지급하여도 그들은 얼마든지 받아들이고 일을 할 것이며, 젊은 노동자들 역시 그들은 이미 조직의 인선에 영향을 끼치지 않으므로 거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농림부가 농업을 포기하고 ‘농촌개발부’가 되어가면서, 2004년 3월에 발효된 ‘농림어업인의 삶의 질 향상 및 농어촌 지역 개발 촉진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법률과 지금 국회에 상정된 농지법 개정안의 법제도를 통하여 ‘6헥타르 정책’을 추진하면서, 1만 8천평 정도를 가진 7만 가구의 대농에게 우리의 농업을 맡기고 나머지 농토는 개발의 광풍 속으로 밀어 넣기 위해서 농민들이 농사를 포기하도록 하는 데 10년간 119조를 투자할 예정입니다. 기계 농업과 화학농에 의존하게 될 대농을 위한 일부 농토만 남겨두겠다는 정책과 많은 부분은 수입에 의존하겠다는 정책입니다. 그리고 농촌은 관광 농촌으로 도시와 수입의 격차를 줄이겠다는 발상입니다.
우리의 식량 자급율이 25%(쌀을 제외하면 12%정도이다)도 안 되는데 비해 미국은 133%, 영국 99.6%, 프랑스 194.5%, 독일 123%, 캐나다 162% 등 우리가 선진제국이라 인식하는 나라들은 거의 100% 내외의 식량자급률을 확보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또 선진국의 그들은 농촌에 막대한 지원을 해주며 자국 농산물 생산을 독려 하고 있습니다. 선진국들은 지구의 온난화로 농경지가 점차 사막화되어 가고, 냉해의 피해가 극심하며, 자연 재해가 비일비재하면서 농산물이 국가간의 무기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하고 있다는 것에 비해 우리는 도리어 핸드폰을 팔아 외국에서 농산물을 수입해 해결하겠다는 발상이 너무나 무지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외에 논이 지니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이점은 담수 효과와 땅 표면 온도를 낮추어 준다는 것입니다. 지표 온도가 올라가면 지하수의 고갈 사태뿐만 아니라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납니다.
또한 음식의 관점에서 보면 ‘안전성을 신뢰할 수 없는 음식재료’를 만들어 내는 데 어마어마한 예산을 투자하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화학조미료에 마비된 혀를 가진 국민들은 별 문제의식이 없거나 수동적입니다.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있지만, 거대 식품자본은 ‘친환경 농산물’이라는 그 정체도 불분명한 상품으로 그 수요를 흡수하면서 또다시 자신들의 이윤 획득의 기회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소비자는 어디서 생산되었는지도 모를 ‘친환경 농산물’을 대형 활인매장의 선반에서 장바구니에 집어넣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현재 우리나나에서 공급될 수 있는 유기농은 전체 농산물 공급의 2%뿐입니다.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 공급하고 이를 소비하겠다는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한 생협이라는 틀 속에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지 발전시켜 온 우리나라의 유기농 종사자들이 현재 만들어낼 수 있는 양은 그뿐입니다.
농촌 문제가 우리 생존에 있어 아무리 심각하게 끌어 올라도 젊은 인력들이 농촌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령화 시대에 농촌을 지킬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고령화의 인구들에 의존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도시 생활의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생활에서의 여유를 간절하게 찾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인구가 농촌의 문제 해결을 위한 대목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령화 시대를 맞아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생물종 중에서 번식 능력을 넘기고 생존하는 생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번식 능력을 지나 생존하는 종으로는 인간, 침팬지, 고래 정도입니다. 특히 인간은 존재의 목적이 유전자의 번식에 두지 않습니다. 인생 그 자체를 즐기려 합니다. 그러한 특종인 인간인 우리가 이제 평균 연령이 얼마 있지 않으면 100세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100세를 살 수 있다고 해서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될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오래 산다는 것은 홍복임에는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 보다는 ‘어떻게 사는냐’가 사실은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100년을 아무 의미 없이 삶의 도도한 흐름 속에 떠내려 가며 그냥 수동적으로 ‘살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필경 유쾌한 일도, 행복한 일도 아닐 것이며 오히려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시한부 환자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투자는 회수하기 힘들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효율성을 둘러싼 회의 논란에 부닥치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해 자원을 사용하는 것을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죽기 전까지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삶은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입니다. 태어날 때 이미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시간의 가치는 평등하다는 의미입니다.
공자는 “마흔에 불혹이며, 오십이면 지천명, 육십에는 이순, 칠십에는 종심하여 하고픈 대로 하여도 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논어 위정편에서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현대를 우리는 이와는 전혀 달리 노욕(老慾)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된 일차적인 이유는 개인 개인의 목이지만, 기득권 자들에 의해서 형성된 사회의 도도한 흐름에 개인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삶의 역학적인 상관관계의 구조로 볼 때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실이 지닌 모순적인 면을 비판하며 자신이 전환되어 가야 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단순한 단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50-60까지는 자녀 교육과 독립을 위한 헌신의 생애기간이 됩니다. 그러면 인생살이가. 크게는 3분절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0세까지는 사회에 진출하기 위하여 자신을 공부하고 익히는 생애, 30-60까지는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생애, 60 이후의 삶은 제 3의 인생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우, 초반의 생애는 부모의 도움을 받아 자신을 성실하게 연마하고, 중반기의 생애는 가족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60 이후,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정년 퇴직 이후의 삶인데 이 삶이 과거의 경우와는 내용이 달라져야 합니다. 인생의 중반까지의 삶과는 달리 이 삶은 온전하게 자신을 위한, 사회 봉사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의 중, 장년층들은 그동안 학교와 사회에서의 교육을 통하여 정치권과 기득권 층 그리고 수구세력들로부터 그들의 전도된 이념, 가치관, 술수에 세뇌당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세계관 등에서 오해와 편견 그리고 미혹의 관념을 형성한 채 삶을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잘못된 관념을 통하여 산 그 인생관을 통한 인생이 진정한 행복을 향한 삶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령이 된 이제부터라도 모든 분야에 걸쳐서 새로운 앎, 새로운 이해를 위한 공부를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 언급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순들이 확연히 보일 것이며, 보이면 자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의 일부가 드러날 것입니다.
다음은 자신을 위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부분 사람들은 과거 사회의 여러 가지 사회적 제약으로 인하여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서 활동도 하지 못하면서 인생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이제는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공부하고 그것을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닌 장점은 무엇이며, 단점은 무엇이고 또한 자신의 문제점・약점은 무엇인가에 대한 공부입니다. 이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수행입니다. 이 부분에서 진전이 있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과 연민의 감정이 피어오르며 더불어 사는 의미를 깨달으며 기꺼이 사회에 헌신하는 삶으로 전환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사회는 점진적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속 가능한 사회란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사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사회인데, 사실 이 둘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게 되는 사회에서는 살림살이의 근본구조가 ‘돈의 논리’가 아니라 ‘삶의 논리’에, ‘이윤의 논리’가 아니라 ‘필요의 논리’에, ‘소유의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논리’에 맞추어지게 되어 주위를 배려하면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령이 되어서야 비로서 이러한 궤도에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젊어서부터 사물의 본질을 오해와 미혹 없이 꿰뚫어 보는 지혜를 갖추며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초, 중, 장년의 인생 각각의 순간순간이 의미가 충만한 삶이 진행되면서 성숙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고령이 되면 실로 완숙된 삶으로 접어들어 이 생이 실로 살 가치가 있는 충만된 인생을 살고 이 세상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이는 말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 가장 유용한 방법은 수행입니다. 수행 속에서 삶을 합시다.
싸두 싸두 싸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