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hammarakkhita 2016. 12. 18. 11:33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을 자신의 온갖 욕구와 열정들의 실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바램들이 실현 가능한 것으로 세뇌 받고 있지만 현실은 그것은 다만 이상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설령 실현 된다고 해서 행복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실현한 후 곧이어 새로운 욕망들이 생겨나거나, 아니면 무기력 상태에 이르거나, 권태에 이르거나 심지어는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그것을 오직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욕구불만으로 귀착시키고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욕구가 실현됨으로써 도리어 행복의 방향과는 정반대인 방탕과 타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바램을 실현하지 못하여 어떤 고통을 만났을 때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하여 본능적으로 바깥으로 눈을 돌립니다. 우리는 임시변통의 해결책을 찾는 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생각되는 외적 조건들을 끌어 모으는 일로 한평생을 보내 왔고, 현재도 그러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 바깥에서 행복을 찾고 있으나, 사실 행복은 근본적으로 내적인 상태입니다. 행복의 원천이 우리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영원히 거기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에는 한계가 없고, 세상에 대한 우리의 통제력은 제한적이고 일시적이며, 그리고 대개의 경우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란 내적 실현의 사태이지, 외부로 향한 무한한 욕망들의 실현이 아닙니다. 사실, 내적 평화와 지혜가 없다면 행복에 필요한 그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아서, 희망과 의심, 흥분과 권태, 열정과 무기력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삶을 야금야금 탕진하기 십상입니다. 진정한 행복의 실현이란 항시 우리 내면에 깃들어 있는 잠재된 본성을 드러내는 것, 아니 일깨워내는 것일 뿐입니다.

   행복이 내적 조건에 달린 것이라면 그 조건을 알아보고 갖추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몫이 됩니다. 행복은 우리에게 대상으로부터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불행 또한 대상으로 말미암아 부과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순간 대상과 내적 충족의 선택의 기로에 있으며, 나아갈 방향을 선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몫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것도 모자라 대학원을 나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또다시 몇 년 동안 직업교육을 받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운동을 하며, 안락한 생활과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대부분의 시간과 노력을 바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질을 결정짓는 건 내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우리의 내적 조건을 개선하는 데는 그만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일까요?    어떤 묘한 망설임이나 두려움 혹은 무기력이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막는 것일까요?

   기쁨과 슬픔, 욕망과 증오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의 이해, 내면의 이해라는 이 의미 깊은 탐구 앞에서 어째서 우리는 그토록 망설이는 것일까요?

우리는 대상에 대한 욕망이라는 밑 빠진 독을 채우는데 시간을 보내느라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발견하게 해주는 방법들과 존재방식을 깨우치는 일을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자신의 내면에서 행복을 발견해주는 방법들과 존재방식을 깨우치는 일이 마음 통찰 수행입니다. 이 일에 우리 삶의 어마어마한 부분을 걸어야 우리는 이 고귀한 삶을 의미충만하게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행복의 외적 조건들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참 행복을 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이루하는 데 사용하는 서툰, 맹목적인 혹은 극단적인 여러 가지 방법들 중에서도 가장 무익한 방법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내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고통 받는데 어떻게 내가 행복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하게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고통 받는 것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존재가 들어나는 것처럼 생각되어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구의 희열, 야비한 기쁨일 뿐입니다.

   타인들의 행복을 이루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을 이루는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타인의 행복이 같이하는 나의 행복만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타인의 행복을 염려한다면 타인을 사랑하여야 합니다.

   인생의 목표는 오늘날의 사회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의 사랑 속의 행복이 아니라,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을 수반하는 매순간의 행복이어야 합니다. 참된 행복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근본적 선의에서 옵니다. 선의는 언제나 베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랑이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시도 계산도 없는 사랑입니다. 착한 마음에서 나오는 변함없는 소박과 순수 입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신뢰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조건 없이 주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의 부정적인 성향을 명확하게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의 부정적인 성향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을 알고 이해해야 하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늘 말하여 왔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을 지닙니다. 첫 째는 자기 자신의 부정적인 성향의 실상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일반적으로 ‘나’라고 표현되는 ‘자아’는 허구임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둘은 실은, 동일한 본질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자아’의 허구성, 즉 이 ‘무아’의 본성을 깨닫는 것이 참 행복으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요, 유일한 길이요, 궁극의 길이요, 최상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몸과 마음 통찰의 수행입니다. 이것 없이는 자기 자신도 타인도 사랑할 수 없기에 우리는 이 생에서 이것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시대였습니다. 부처님의 시봉인 아난다 테라가 편치 못한 얼굴을 하고 성문을 향하였습니다. 그 때,


“아난다, 어디를 그렇게 걸어가는가? 너의 얼굴색이 편치 못하구나?”

마마시라는 법납이 높으신 한 비구께서 정면으로 다가오며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은 법사로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아난다는 도저히 비켜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스님, 불편한 이 얼굴을 미루어 보시어 제자의 마음 속 고통을 살펴보아주십시오”

“아난다여, 모든 고통의 뿌리는 ‘자아’인 ‘나’를 집착함으로서 생긴다. ‘나는 아름답다’, ‘나는 예쁘다’, ‘내 재산이다’, ‘나는 권력이 있다’고 하는 등 ‘나’라고 집착하는 일이 너무나 많이 있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을 세간에서 말하는 대로 알기가 쉽다. 그러나 법의 편에서 생겨나는 ‘나’라는 집착들은 그처럼 쉽게 알거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음알이라는 것은 눈을 아주 가늘고 섬세하게 얽어서 덮은 백태일 뿐이다.”

“그 백태들이 덮여 씌운 모습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난다여, 그 백태들이 덮혀서 그렇게 얼굴이 일그러진 것이 아닌가? 자기 스스로 자기의 허물을 보지 못하면 치료할 수가 없다”

“제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치료해 주십시오”

“좋다, 아난다여, 잘 듣고 놓치지 않게 두 손으로 꽉 잡아 두어라. 너의 얼굴을 일그러지게 한 것은 ‘나’라는 집착 바로 그것뿐이다. ‘다른 이들은 의지할 곳, 머무를 곳, 담마를 각자 얻었다. 나야말로 어떤 법도 얻지 못했다.’ 이렇게 나와 남을 구분하는 마음 때문에 혼자서 뛰쳐나온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좋다. 아난다, 계속해서 귀를 기울여라. 아난다라고 부르는 이름의 이 몸을 자세히 보라. 색, 수, 상, 행 식 등 이렇게 다섯 모임이 영원한가? 영원하지 아니한가?”

“물론 항상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그 영원하지도 아니한 것, 그것들이 행복인가? 고통인가?”

“물론 고통입니다.”

“변해서 무너지고 사라져서 영원치 못하고 고통인 이 다섯 가지 덩어리를 ‘나(자아)’라고 볼 수 없다. 이 다섯 가지 덩어리는 나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 그러나 ‘나’라는 집착은 이 오온과 떨어지지 않는다. 이 다섯 무더기를 원인으로 해서 ‘나’라는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비유로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리라. 잘 단장하여 치장한 젊은이들과 처녀들이 자기 얼굴이 비친 모습을 거울이나 깨끗한 물 속에서 바라본다. 거울과 물 속에 나타나는 얼굴 모습은 거울과 물이 원인이 되어 나타나기는 했지만 거울도 아니고 물도 아니다. 거울과 물도 역시 그 얼굴은 아니다. 그와 같이 아난다라고 부르는 이름, 명칭만으로 만 정해 놓은 이 오온, 다섯 가지 덩어리를 원인으로 해서 ‘나’라는 집착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나’는 오온도 아니고, 오온도 역시 ‘나’가 아닌데 오온을 ‘나’라고 집착한다. 그 ‘나’로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깨닫고 싶어한다. ‘나’가 아닌 법을 ‘나’를 앞에 두고 찾는 한, 고통과 만나야 할 것이다. 아난다여”

“그렇습니다. 제자가 이해하였습니다.”

나라는 집착의 백태를 스스로 보도록 하여 치료해 주신 스승님의 은혜에 공손히 큰 절을 세 번 올렸다.

“바른 길을 이르기 위해서 ‘나’의 힘이란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나’의 힘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나’를 앞에 두고 가던 그른 길을 계속해서 가지 않을 뿐, ‘나라는 것이 없다’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나’라고 집착해야할 일이 없는 세계 안에서, 죽을 때까지 ‘나는 법을 얻지 못했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뜨거운 번뇌가 없는 원래 그대로의 조용한 비구들의 행복은 ‘나’ 아닌 지혜로 즐길 뿐이다. 보아서 아는 지혜를 본 다음에 수행을 함께하라. 아난다여”

   마마시 스님은 조용히 사라지셨습니다.


   이번 집중수행에서 이 ‘자아’의 허구, 즉 본체, 실체의 허구를 보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그 법을 이해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놓아버리면 자신은 점점 겸허해지면서 자기를 들어내려는 마음이 점차적으로 물러나 지극히 단순해지며 매우 하잘 것 없는 것으로부터 깊은 의미와 관계성과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늘 어떠한 대상과 관계하드래도 평온과 평정 그리고 평화 속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내는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는  행복의 극치 한가운데에 있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