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혜조스님] 자아의 허구에 대한 법문
2006. 3월 집중수행 입재 법문
자아라는 허구
우리들의 삶에 있어 문제는 ‘고통’입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삶을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은 자기 자신의 ‘자아개념’과 관계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자아 개념 사이의 허구적 구조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실제의 ‘고통’으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고 할 때 이 ‘나’의 정체성 개념에는 대략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외형적으로는 다르지 않게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 다릅니다. ‘나’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⑴ 정신물리학적 복합체로서의 나
⑵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 자신(personality, 인성)
⑶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ego)
⑴의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 경험적으로 지각되는 생물체・생명체에 대한 일상적인 용어의 자기 자신・개인을 의미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나는 지금 숨쉬고 있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프다>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라고 표현되는 그러한 존재로서의 ‘나’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러한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미 실체적인 ‘나’, 즉 ‘자아’가 아닙니다. 이 정신・물리적 복합체로서의 생명체는 각각의 부품들이 집합되어 자동차를 구성하듯이, 각 요소들의 집합으로 전체를 구성하지만 그것들은 개별적인 요소들의 단순한 집합이 아닙니다.
여기 한 토막의 밧줄이 있다고 합시다. 밧줄은 가느다란 실이 집합되어 그것이 서로서로 꼬여져 단단한 강도를 이루고 있는 결과로서의 존재물입니다. 밧줄은 밧줄이라는 단일체로서의 존재체가 아니라 한 가닥의 실이 단순하게 여러 개 모여진 것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꼬여진 인연화합이 수반된 관계성의 결과로서의 존재입니다. 정신・물리적 복합체, 즉 생물체로서의 ‘나’라는 존재는 이와 같습니다.
⑵의,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 자신(personality, 인성) 이라는 ‘인성’ 개념에는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실체적인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너’와 구별되는 어떤 사회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나’에 대한 생각은 자기 자신의 정신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칩니다. 이러한 ‘인성’으로서의 ‘나’는 어떤 것은 좋아하고 어떤 것은 싫어하는 개성을 지니게 되어 타자와 구별되어 차별성을 지닌 존재자입니다.
다른 사람과 토론할 때, 우리가 화를 내는 경우는 대개 토론 주제에 있어서 상대의 다른 견해 때문이라기보다는 상대가 자기 자신의 차별성을 건드리며 자신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려 할 때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를 무시하거나 얕보는 사소한 말 한 마디도 잘 참지 못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형용 언어가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붙여졌을 때는 비교적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품고 있다면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그 이미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 이미지가 손상 받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인성(personality)'이라는 말은 ‘가면’을 뜻하는 라틴어 'persona'에서 왔다는 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배우는 가면을 ‘통해(per)’ 자신의 역할이 ‘울려 퍼지게(sonat)’ 합니다. 배우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남자인 경우 누구나 군대를 다녀와야 합니다. 군대에서는 일체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부유한 정도, 사회적 지위, 명성 등이 차별화 되지 않고 그냥 동일한 가치를 지닌 ‘인간’으로만 상대됩니다. 따라서 서로가 개인 직업이 무엇이며, 재산이 얼마며,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지위가 어떠한지는 일단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서만 대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먼 훗날 사회에서 만나게 되면 대개의 경우 과거 군대생활에서의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평등성에 기반을 둔 진솔한 감정은 소멸됩니다. 부대적인 무수한 이름표들이 인간관계를 변질시키고 맙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신의 ‘가면’을, 다시 말해 가장으로서, 회사 사장으로서, 혹은 회사 간부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덮어 쓰고 대인관계를 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진솔하게 인생살이의 대인관계를 갖기보다는 우리의 이미지를 관리하기 위해 가식적으로 행동합니다.
⑶의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ego)로 나아가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외형은 변화하였으나 항상 동일자로서의 ‘나’인 ‘자아’가 내면에 있다는 것을 상정하고, 그것을 일각도 의심하지 않고 그것을 견고하게 지키기 위하여 삶을 살고 있습니다. 특히 서구 문명 의식이 우리 삶의 안방을 차지하고 난 후로는, ‘자아’를 인격체의 근본 요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아를 제거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아가 없는 ‘나’는 성립하지 않는다”
“무기력한 자아는 심각한 정신이상의 한 징후 아닌가?”
이처럼 우리는 굳건한 자아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아’ 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자는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으로서 분열되고, 허약하고, 결함이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강하고, 반항적이고, 적응력 강하고, 투지 넘치는 인격체를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확고한 자아에 대한 믿음이 우리 문명과 문화를 형성해 왔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활기찬 ‘자아’가 없으면 별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여 삶이 끔찍할 정도로 지루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창조성과 모험정신이 결핍된 것이고, 개성도 없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혹은 묵시적으로 ‘자아’를 상정시켜놓고 그것의 실재성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탄탄한 자아의식을 안고 삶을 살아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 신뢰와 혼동한 것입니다. 자아는 다만 덧없는 속성들, 즉 권력, 성공, 미모와 육체적 힘, 지적 재주, 타인의 견해 등을 바탕으로 구축된 허상의 날조된 신뢰를 제공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상황이 변하고,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커지면 자아는 분개하고 일그러지고 흔들거립니다. 자기 신뢰가 무너지고, 오직 실망과 고통만이 남게 됩니다.
불교에서는 정신적 혼돈인 무지를 존재의 사실을 명확히 보지 못하게 가로막아,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에 대한 이해를 흐려 놓는 베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혼돈의 근본은 개인의 정체성 개념, 즉 자아와 관계된 개념입니다. 이 습관의 힘에 의해 형성된 개념적 ‘자아의식’은 각자가 그것을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자기 존재의 핵으로 여깁니다.
우리의 경험이란 지속하는 의식・정신적 흐름의 ‘내용’에 다름 아닙니다.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신의 흐름에 ‘자아’라는 딱지를 붙이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으며, 자기 자신을 ‘자아’와 동일시하고 자아의 상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자아’와 ‘내 것’이라는 개념에 강하게 집착하는데, 이 ‘내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 욕망이나 타인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렇게 해서 자아와 타인이라는 개념이 우리 머릿속에 고착됩니다. 그리고는 반감을 야기하는 욕망이나 증오, 질투, 자만 혹은 이기심 등과 같은 다른 모든 정신적 번뇌의 바탕이 됩니다.
어디선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그대의 팔을 맞혔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연히 그대는 오랫동안 불쾌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고통은 금세 사라져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그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를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자아’가 입은 상처입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내’가, 다시 말해서 나의 ‘자아’가 왜 돌멩이에 당해야 하는가? 하는 의식이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자아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호하고 만족시켜야 하는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한낱 개념으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렇게까지 고통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실재적이고 독자적인 자아라는 이 의식은 자기중심주의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자기 자신은 항상 타인보다 더 중요하다고, 다시 말하면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에서 윗사람이 그대가 싫어하는 동료를 혼내고, 당신이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꾸짖고, 그런 다음 그대를 나무랐다고 합시다. 첫 번째 경우에 그대는 흐뭇해하거나 웃을 것이고, 두 번째 경우에는 그저 그럴 것이고, 세 번째 경우에는 고통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이유에서 이 세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의 안위가 다른 사람의 안위보다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는 자기중심주의는 자기 자신이 전적으로 타인보다 더 중요하다는 차별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면 과연 ‘자아’란 것이 실제로 실재하는 존재자인가를 검토해 보겠습니다.
나의 ‘자아’라고 할 때, 나는 몸과 마음이라는 요소로 구조화 되어 있습니다. 먼저 ‘자아’란 우리 육체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몸이란 뼈와 살과 피와 기관들의 조합입니다. 그러면 자아는 뼈 속에 있는가?, 피 속에 있는가? 살 속에 있는가?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그 속에 있는 ‘자아’도 같이 떨어져 나가는가? 만일 몸의 각 부분이 토막토막 잘려져 나간다면 자아는 어느 순간부터 사라지기 시작하는가? 그러나 이 경우에도 자아의식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할 능력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자아’를 인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몸속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얼마 전 대한민국이 세계축구대전, 야구대전에서 4강을 하였을 때 국내외 사람들은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랑스러운 것은 나의 몸이 자랑스러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아’는 의식・정신・마음속에 실재하는 것인가? 누가 나의 몸을 밀었을 때 나는 떠밀렸습니다. 떠밀린 것은 나의 의식인가? 아닙니다. 나의 몸입니다.
또한 우리의 의식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의 연속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연속하여 스쳐 지나가 버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가 버린 것은 실체인 자아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식 안에도 자아는 없습니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한다는 사실은 엄밀하게 들여다보면 자아의 존재에 대해 아무 것도 입증하지 못합니다. 이 ‘나’라는 것은 매순간 바뀌는 유동적인 우리의 정신의 현재 상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제로 무언가를 지각하거나, 그것에 대한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그 무언가가 존재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신기루나 환상도 우리는 분명히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아가 의식 속에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자아는 몸과 의식을 이루는 부분들과 구조들의 연속성들의 총합일까? 여기서 우리는 소유주 또는 본질로 간주되던 자아 개념에서 벗어나 보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넘어가기 시작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아’란 대상에 대한 지각과 감각, 정신적 이미지들과 감정들 그리고 개념들을 통합한 관계의 총체와 결부된 정신적 혹은 언어적 명칭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란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관념일 뿐인 것입니다.
‘자아’란, 우리가 ‘너’와 구별짓는 ‘나’, 다시 말해 현재 순간의 경험을 자기 자신 존재의 연속체인 ‘인성’과 관계 맺을 때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체로서의 ‘나’의 복잡한 총체를 단순화시켜, 그것을 실체로 만들고 놓고 그것이 지속한다는 결론을 짓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몸은 일초 동안에 30만개의 세포가 소멸되어가고, 또한 일초 동안 30만개의 세포가 새롭게 생겨나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로서, 찰나에도 똑같은 적이 없는 미립자들의 소용돌이로 지각한다면 ‘자아’의 ‘나’에 대한 개념을 놓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사실 내 몸과 현상의 총체에 대한 일상적 지각은 근사치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모든 것이 매순간 변한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아와 세계를 물화(物化)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무존재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망, 허상으로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불교에서는 자아에 “독자적이고 항구적인 존재자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물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것처럼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망상과 같은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를 갖지 못한 채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붓다는 이 실상을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유성처럼, 신기루처럼, 불꽃처럼
마술처럼, 이슬처럼, 물방물처럼
꿈처럼, 번개처럼 혹은 구름처럼
일체만물을 그렇게 보라
이상과 같이 살펴 본대로 타인과 구별되는 ‘나’,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란 허상이며 관념일 뿐, 실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우리는 훨씬 쉽게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이란 이러한 내용을 개념적인 이해로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아에 대한 확실한 이해의 과정이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자유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