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心念處] 묘원법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心念處]
1. 마음이란 무엇인가?
1) 마음은 비 물질이다
마음에 대한 분석은 우리들의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대한 분석은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얻어야 모든 번뇌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 마음이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현상을 바르게 보는 지혜가 나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삽니다. 정신과 물질을 사념처 수행에서는 몸과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음은 물질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물질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음이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은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같지 않고 각각의 기능을 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은 정신의 영역이 있고 물질은 물질의 영역이 있어서 상호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정신은 물질이 아니고 물질은 정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내 몸과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순한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일 뿐입니다. 몸과 마음을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라고 알 때 자아가 없는 하나의 개체로써 이해합니다. 이처럼 정신과 물질이 각각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의 실재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분리해서 알아차릴 때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 몸과 마음에 대한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기 때문에 물질처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물질과 함께 있으면서 물질을 이끕니다. 비물질인 마음은 보이지 않지만 실재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추론적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한 진실은 지혜가 있는 자에 의해서만 그 모습이 밝혀질 수 있습니다. 만약 지혜가 없다면 마음에 대한 잘못된 추론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대한 진실이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마음이 항상 하다는 것과 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인간은 많은 고통 속에서 나고 죽는 것을 거듭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마음이 항상 하다면 죽어서 몸만 바꾼다는 환생이 되기 때문에 무상의 진리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하면 자아가 있다는 것으로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내 마음이라는 견해로 인해 집착을 해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마음이란 공기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공기가 있어서 살지만 공기가 있는지 알기 어려운 것처럼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물질을 이끄는 마음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잘못된 견해가 생겨서 어리석게 살아야 합니다. 모든 생명의 윤회가 바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괴로움이 바로 마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데서 온 결과입니다.
몸과 마음을 장님과 앉은뱅이로 비유합니다. 몸은 저 스스로 볼 수 없어서 장님이라고 하며, 마음은 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서 앉은뱅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몸이라는 장님과 마음이라는 앉은뱅이가 서로 동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은 물질로써 아는 마음이 없으면 대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가고자 하는 의도만 있지 실제로 움직여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흔히 몸과 마음을 하나의 동일체로 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기능을 하면서 함께 있습니다.
2) 마음은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한다
마음을 세 가지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행위를 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둘째는 도구의 측면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고 한다’라고 정의합니다. 셋째는 행위 그 자체 입장에서 보는 마음입니다. 이때는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라고 합니다. 이상 세 가지 측면에서 보는 마음들의 공통점은 모두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라고 알아야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조건에 의해 나타난 모든 것을 아는 기능을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마음이 하는 가장 순수한 기능입니다. 마음이 그 자체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능에 기인한 것입니다.
마음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구분합니다. 마음은 오온의 식(識)이며, 마음의 작용은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입니다. 이때 오온의 식은 단지 아는 마음일 뿐이며 정작 앞에서 모든 일을 꾸미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의 기능입니다. 수(受)는 느낌이며 상(想)은 인식, 지각, 표상, 기억을 뜻하며, 행(行)은 마음의 형성력, 의도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마음의 작용이 한 일을 단지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기능을 할 뿐입니다.
대상과 접촉했을 때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마음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압니다. 그리고 대상에 대한 표상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압니다. 또 대상에 대한 의도가 일어났을 때 마음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처럼 마음은 수, 상, 행이 일으킨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는 기능을 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여서 아는 마음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대상을 안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행위에 속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단순한 기능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이 대상을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거나 괴로워한다거나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일으킨 여러 가지 일들을 마음이 단지 받아들인 것입니다.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그 순간 다시 마음이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상상을 했을 때도 마음이 단지 이것을 압니다.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위를 했을 때도 마음이 단지 이것을 압니다. 이처럼 마음은 대상을 아는 단순한 기능을 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그 자체는 청정하지만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좋아하는 마음이 되고, 나쁜 느낌이 일어나면 싫어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과 같아집니다.
마음은 대상을 알기만 하지, 알아서 어떻게 반응하거나 무엇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 뒤에 괴로워하는 것은 수(受)라고 하는 느낌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상상하는 것은 상(想)이라고 하는 지각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어떤 의도를 내는 것은 행(行)이라고 하는 마음의 의도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안 뒤에 이러한 수, 상, 행의 작용이 일어나면 그것을 다시 마음이 압니다. 이것이 마음의 실제입니다.
마음은 하늘과 같습니다. 하늘에는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뜨고, 구름이 있고, 바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아무 조건 없이 이것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기능을 합니다. 마음도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땅과 같고 나무와 같은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땅과 나무도 무엇은 되고, 무엇은 안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마치 마음처럼 그냥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아는 기능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마음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마음만을 제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함께 알아차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효과입니다. 마음이 단지 대상을 알기만 한다고 했을 때 이는 성자의 마음입니다. 아라한과 붓다의 마음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인데 이때의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알기만 하는 청정한 마음입니다.
3) 마음은 매순간 변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변합니다. 변한다는 것은 항상(恒常) 하지 않은 것으로 무상(無常)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질도 매순간 변하고 마음도 매순간 변합니다. 조건에 의해 일어난 것은 반드시 조건에 의해 사라집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몸이 한순간에 한 번 변할 때 마음은 열일곱 번 변합니다. 이렇게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을 찰나생 찰나멸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일어난 순간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면서 연속적으로 흐릅니다. 이러한 의식흐름을 의식의 연속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지혜로 보지 않으면 모두 하나의 같은 마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미들이 떼를 지어 가는 것을 멀리서 보면 하나의 직선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마리, 한 마리의 개미가 모여서 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매순간 먼저 있던 마음이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난 마음도 즉시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마음은 생명이 있는 한 연속적인 현상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마음은 있지만 매 순간 변하는 마음이라서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마음은 있지만 그것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마음은 없고 매순간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은 변하지 않고 항상 하다고 하면 그것을 지배하는 자아가 있다고 보기 쉽습니다. 그래서 자아가 생기고 절대적인 힘을 가진 초월적 존재가 있다는 견해가 생깁니다. 이러한 견해는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생깁니다.
이런 견해는 언제부터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 말이 옳은 말인 줄 알고 그냥 전해진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누군가가 잘못된 것을 말해도 진실을 아는 지혜가 없으면 그것을 믿고 잘못을 진실처럼 알고 삽니다.
마음은 전기불이 들어오는 원리와도 같습니다. 전기불이 켜질 때 전류가 빠르게 끊어지면서 에너지를 보냅니다. 이것을 잘 모르면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선을 통해서 들어오는 불도 최소의 미립자들로 구성된 에너지가 전송되면서 불이 켜집니다. 실제로는 작은 미립자들로 구성된 에너지가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전해지는 것이지 이것들이 모두 붙어서 계속 전류를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현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인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에서 최초의 마음인 재생연결식을 새로 만들어서 생명이 계속됩니다. 이때 죽을 때의 마음과 새로 태어난 재생연결식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순간마다 조건에 의해 생긴 마음은 모두 다릅니다. 우리가 평생을 하고 사는 호흡이 같은 호흡이 아니듯이, 마음도 같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입니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면서 쉬지 않고 흐릅니다. 먼저 마음이 다음 마음을 조건지우고 사라지지만 먼저 마음에 있는 정보는 다음 마음에 고스란히 옮겨갑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이 다음 마음과 같은 마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전혀 다른 마음일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원인과 결과라는 현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생명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오직 원인과 결과만 있습니다.
이때 이전 마음의 과보가 전해져서 다음 마음이 지속됩니다. 이때 이 과보는 내가 아닙니다. 이 과보는 원인과 결과입니다. 한순간의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음 순간에 마음이 즉시 일어나는 것처럼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지는 과정도 순간적입니다. 마음은 잠시도 어느 곳에서 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명의 끝은 순식간에 다음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시간이 어느 곳에서 잠시 쉬다가 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도 시간처럼 쉬지 않고 흐릅니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사라지면서 다음 마음을 조건지우고 사라집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다고 알면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그 무상은 어떤 누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과 결과에 의한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무아는 마음은 있지만 그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 일어난 마음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것이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서 집착이 끊어져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항상 하는 마음으로 알기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압니다. 그러나 지혜로 보았을 때의 마음은 매순간 변합니다.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지금 이후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이러한 마음에 대한 분석은 수행을 해서 최고의 지혜가 났을 때라야 비로소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여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 보면 마음은 있지만 이 마음을 내가 소유하거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는 무아를 압니다. 바로 이러한 견해의 차이로 집착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느냐 아니면 얻지 못하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4)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일어납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 순간의 마음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집니다. 이때의 조건이란 눈이 빛에 의해서 형상이라는 대상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눈이 없어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며, 빛이 없어도 형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며, 이러한 조건은 바로 대상과 접촉을 통해 일어납니다.
마음은 저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독립된 개아(個我)가 아닙니다.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입니다. 이때 순간의 마음은 있지만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이기 때문에 자아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귀가 공기에 의해 소리와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귀가 없어도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공기가 없어도 소리를 아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코가 바람에 의해 냄새와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혀가 침에 의해 맛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몸이 외부의 대상과 접촉했을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은 그 자체가 완성된 모습으로 있지 않아서 실체가 없습니다.
마음은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마음을 갖습니다. 유익한 대상을 만났을 때 유익한 마음이 생깁니다. 해로운 대상을 만났을 때 해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즐거운 대상을 만났을 때 즐거운 마음이 생깁니다. 괴로운 대상을 만났을 때 괴로운 마음이 생깁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대상을 만났을 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마음이 생깁니다. 수행은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그것을 알아차린 마음이 일어납니다. 수행은 보통의 대상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5)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다
마음은 매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한순간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한순간에 두 개의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했을 때 오직 하나의 마음만 일어납니다. 그래서 즐거울 때는 오직 즐거운 마음만 있습니다. 그리고 괴로울 때는 오직 괴로운 마음만 있습니다. 선한 마음이 있을 때는 오직 선한 마음만 있습니다. 불선한 마음이 있을 때는 오직 불선한 마음만 있습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을 때는 오직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마음일 때는 온전하게 선한 마음만 있으며 불선한 마음일 때는 온전하게 불선한 마음만 있습니다. 그래서 한순간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영화를 볼 때 어떤 장면이 스크린에 비칩니다. 이때 본 한 장면은 무수한 필름들이 돌아가면서 필름의 한 컷, 한 컷이 모여서 장면을 전개하는 것입니다. 이때 필름의 한 컷은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순간에 두 개의 컷이 존재할 수 없듯이 마음도 한순간에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순간에 하나의 마음이라는 것은 조금 전의 마음과 현재의 마음과 지금 이후의 마음이 모두 다른 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한 순간의 마음을 나라고 하면 사실 나는 매순간 태어나고 죽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찰나 간에 있으며 그 찰나에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현재 한순간의 마음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불선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이런 한순간이 두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한순간은 현재입니다. 지혜는 오직 현재의 한순간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한순간의 진실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선한 마음과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은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해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받습니다. 인간이 행복할 때는 행복한 과보를 받아서 생기데 되며, 불행할 때는 불행한 과보를 받아서 생기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교차하는 것은 선심과 불선심이 섞이지 않은 과보의 영향입니다.
괴로움을 겪는 것은 괴로움의 과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때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수행을 한다면 불선 과보가 아닌 선과보가 작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선한 행위를 해서 선과보를 많이 만들면 불행할 때도 선과보가 일어나 선한 결과를 얻습니다. 가장 선한 과보를 받는 것이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선 과보가 많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6)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마음이 있어서 이끕니다. 몸이 만들어지는 것도 먼저 마음이 있어야 하고, 마음에 의해 생긴 업이 있어야 하고, 온도가 있어야 하고, 자양분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앞에서 이끌어야 몸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몸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바로 마음, 업, 자양분, 온도라는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서 생깁니다.
앞서서 이끄는 마음이 선한 마음일 때는 선행을 하여 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마음일 때는 불선행을 하여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무엇이나 지은 대로 받습니다. 이때 누가 있어서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원인이 결과를 만듭니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도 과거에 지혜로운 마음이 있어서 오계를 지키는 행위를 하여 그 과보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음 생에 또 인간으로 태어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잘못된 마음으로 잘못된 행위를 하면 지금도 짐승처럼 살며, 다음 생에도 짐승으로 태어나서 짐승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과보가 상속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마음에 의해 순간의 윤회가 흐르면 그 결과로 다음 생의 윤회로 이어집니다. 윤회는 흐름, 지속, 상속인데 계속 흘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는 종자가 있는데 이것이 과보입니다.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지면 지금 이 순간도 윤회를 하고, 죽은 뒤에 다음 생으로 태어나는 윤회를 합니다. 이때 내가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고 과보가 윤회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과거에 무엇으로 살다가 여기에 인간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이런 나는 없습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로 온 것이 아니고 과거의 원인이 현재의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행위가 원인이 되어 현재의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유신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너’, ‘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관념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가 원인이 되어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물론 내가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일으킨 과보가 전해져서 그 결과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서 이끌고, 이끄는 그 마음에 따라 행위를 하고, 그 행위는 반드시 과보를 일으킵니다. 이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져서 그것을 지속시키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들을 원인과 결과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살고 있다면 과거에 잘살만한 원인을 만든 것이고, 현재 우리가 못살고 있다면 과거에 못살만한 원인을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현재 새로운 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 새로운 원인이란 이 순간에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원인이 되어서 이 과보가 현재에도 좋은 결과를 만들고 다음 생에도 좋은 결과를 만듭니다.
법구경 게송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마음이 그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 그에게는 반드시 괴로움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여기서 마음이 그들을 앞서간다고 할 때 그들은 오온(五蘊)의 색(色), 수(受), 상(想), 행(行)을 말합니다. 그리고 식(識)이라는 마음이 그들을 이끕니다. 그리고 괴로움이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고통을 말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라고 할 때 주인은 자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수레가 황소에 의해 끌려갈 때 황소를 말하듯이 앞에서 이끄는 것을 주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것들은 앞에서 이끄는 마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 알아차려서 선한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7) 마음은 무아(無我)다.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알 때 자아가 있으며, 나의 마음이 아니라고 알 때 무아입니다. 마음에 대한 분석은 오직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무아를 알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아를 알지 못하면 결코 집착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더 이상 이를 곳이 없는 궁극의 진리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이 중 최고의 지혜가 나야 완전한 무아를 발견합니다. 지혜는 처음에 무상의 지혜로 시작해서 괴로움의 지혜로 성숙한 뒤에 마지막에 무아의 지혜로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무아의 지혜는 수행자가 반드시 이르러야 할 최고의 지혜에 속합니다.
2. 한국명상원의 마음 알아차리는 수행
한국 명상원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둘째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셋째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넷째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이러한 수행은 위빠사나 수행자들이 각각의 다른 상황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실천방법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이유는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면 전부를 아는 것입니다. 마음은 한 생명의 태어남을 기원으로 해서 일어난 뒤에 죽음을 강어귀로 하여 끝이 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들로부터 흘러나온 강물들이 계속해서 흐르는 것처럼 마음은 수많은 지류를 형성하면서 계속해서 흐릅니다. 그러다 바다를 만나면 그 생명이 다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을 모르면 자신에 대해 모르고 삽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란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수행을 할 때 일차적으로 일하는 마음이 있어 수행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다시 일하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이 일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린 적이 없어서 이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마음이 몸을 알아차리거나, 마음이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이나, 마음이 법을 알아차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을 색다르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몸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대상이 몸이 아니고 마음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화가 났을 때 화가 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 화로 인해 생긴 거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가 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화가 났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렇듯 나타난 대상의 어느 면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각각의 염처가 구별됩니다. 이때 화가 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화를 내고 있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르는 수행자는 마음이 다 하는데 구태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모든 것을 이끌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정보를 받아들여서 아는 것과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은 다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어디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항상 현재 여기에 있습니다. 항상 여기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입에 감각대상인 육경이 와서 부딪쳐서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이 말은 피사체가 카메라 렌즈에 와서 부딪히는 것과 같습니다. 렌즈가 피사체에 가서 장면을 담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 있는 장면이 렌즈에 와서 닿아서 영상이 찍히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눈이 물체가 있는 밖으로 나가면 마음이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대상을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럴 때는 알아차리기 어렵고 고요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대상에 마음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가 바로 갈애가 일어나 집착하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밖에 있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서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감각기관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순서입니다. 이런 순서를 지켜야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이처럼 감각기관에서 감각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에 대한 좋고 싫음 없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마음이라는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의 감각기관은 안, 이, 비, 설, 신이고 마음의 감각기관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 마지막인 의(意)에 해당됩니다.
마음에 대해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세 가지 과정을 거쳐야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단계로 의식이 고양되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한순간에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첫째,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과정입니다. 마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가보지 않은 동굴을 탐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불을 밝히는 등불이 있어야 하고 반드시 자신이 한걸음씩 걸어가야 합니다. 이때 불은 스승의 가르침이고 한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누구나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살기 때문에 온갖 잘못된 견해의 지배를 받고 삽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처음에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 시작하여 차츰 마음이 가진 비밀의 베일을 벗기게 됩니다.
둘째, 마음을 조절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때 마음이 길들여지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은 오랫동안 축적된 성향과의 숨바꼭질입니다. 수행을 지속하면 차츰 집중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이 들뜨지 않고 하나의 대상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그리고 어떤 현상에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충동적인 마음으로부터 유연한 마음을 갖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런 상태에서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할 때 심사숙고하게 됩니다. 이것이 마음을 조절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조절은 수행을 통해 생긴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반드시 악한 마음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것만은 아닙니다. 시작은 매우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소한 일을 할 때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불선행을 하고, 그에 따라 불선과보를 받아 자꾸 괴로움이 더 커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면 주변의 사소한 일들로부터 자유를 얻어 일상의 일에서 괴로움을 겪는 횟수가 적어집니다. 이런 과정이 연속되어서 차츰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되고, 차츰 더 큰 번뇌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대상을 맞이하면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이 즉각적으로 갈애를 일으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괴로움이 대상이 아니고 괴로운 마음이 대상이 되면 괴로움이 비로소 제어됩니다. 즐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반드시 집착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즐거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즐거운 느낌으로 인해 일어나는 집착이나 다음 행위가 조절됩니다.
셋째, 마음이 자유를 얻는 과정이 있습니다.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아 마음은 모든 족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래서 모든 번뇌가 불타버린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수행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마음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것입니다.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모든 관념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녀왔던 고정관념은 사라지고 존재하는 것들의 성품인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습니다. 바라는 것이 없어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자유입니다
한국명상원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네 가지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모두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에서는 같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접근방법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나 쉽게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도록 한 것입니다.
1)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무슨 마음가짐인가?’ 또는 ‘지금 무슨 마음이 있는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많은 일을 시작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 마음이 있어서 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거나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때마다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마음이나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지지만 마음에 저장된 종자가 다음 마음에 전달됩니다. 그래서 시작할 때의 마음을 알아차리기 못하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정보가 계속해서 다음 마음에 전해지기 때문에 현재 하는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망상이 나타납니다.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지지만 다음 마음에 종자를 남기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상속됩니다. 그러나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이 마음에 있는 종자가 다음 마음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다음 대상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사실상 마음을 계속해서 새로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마음에 담긴 종자가 다음 마음에 전해지는 것을 상속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순간의 윤회입니다. 그래서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순간 윤회가 끊어집니다. 물론 이때의 소멸은 순간적인 소멸입니다. 그러나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순간의 윤회가 흐릅니다. 이때는 마음에 담긴 과보가 다음 마음에 전해진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의 윤회가 거듭되어 한 일생의 윤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한순간 한순간이 모여 수많은 세월이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지금 여기 있는 한순간의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잡담을 하다가 좌선을 했을 경우와 경행을 하다가 좌선을 했을 경우 수행 중 나타나는 장애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잡담을 했을 경우에는 잡담에 대한 정보가 입력된 상태에서 좌선을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좌선 중에 망상이 일어나 집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좌선을 하기 전에 경행을 하다가 좌선을 하면 망상이 훨씬 적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경행할 때의 집중력이 좌선을 할 때 그대로 상속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있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새로운 마음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가지고 있는 정보의 힘이 계속되어 망상을 하거나 들뜨거나 혼란한 상태의 마음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무슨 일을 하거나 일을 시작할 때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알아차리지 못할 때 가지고 있던 마음의 종자를 가지고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살게 되며 수행을 할 때도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무슨 일을 하거나 현재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서 하루를 보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여러 가지의 상황이 생길 것입니다. 새로 맞이하는 모든 상황에서 처음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하고자 하는 일을 하면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식사를 하기 전에, 운전을 하기 전에, 업무를 하기 전에, 대화를 하기 전에 ‘지금 무슨 마음가짐인가?’ 또는 ‘지금 무슨 마음이 있는가?’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시작합니다. 수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무슨 마음으로 수행을 하는가?’하고 알아차리고 해야 합니다.
2)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무슨 마음인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아는 마음만 일어나지만 이 마음이 느낌이나 고정관념에 의해 즉각 좋거나 싫은 마음으로 변합니다. 그러면 이 순간부터 새로 일어난 마음이 자신을 지배합니다. 이런 마음이 지배할 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굴절된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합니다. 이때 새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을 즉시 알아차리면 다시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자기 가치관에 따라 판단합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은 무명과 욕망을 기본바탕으로 삼아서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은 언제나 이기적이고 욕망에 차있어서 어리석기 마련입니다.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번뇌가 주인이 되어 자신을 지배합니다.
알아차릴 마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모두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기본적으로 불선심과 선심을 알아차립니다. 불선심은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으로 이런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선심은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탐욕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관용이 있는 마음으로 계발해야 하며, 성냄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자애가 있는 마음으로 계발해야 하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알아차려서 지혜가 있는 마음을 계발해야 합니다.
수행자는 불선심만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심이 일어난 것도 똑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선심인 관용, 자애, 지혜가 있을 때는 그 순간에 불선심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불선심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때는 그 순간에 선심이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선심을 알아차리면 불선심이 붙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심으로 인해 교만해지는 마음까지 제어됩니다. 마찬가지로 불선심을 알아차리면 선심이 생기며, 불선심으로 인해 더 나빠지는 것이 제어됩니다.
일반적으로 불선심과 선심이 일어날 때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불선심도 거친 마음이 있고, 중간의 마음이 있고, 미세한 마음이 있습니다. 거친 마음도 알아차리기 어려운데, 하물며 미세하게 일어나는 마음은 알아차리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불선심이 일어나도 우리는 대책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이 자기 습관대로 삽니다. 이러한 불선심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일어났는지 특별하게 자각을 하지 못하더라도 이따금 ‘지금 무슨 마음인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선심과 불선심 뿐만 아니라 이 마음을 기본으로 파생된 다양한 마음까지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불선심을 보지 못하면서 남의 불선심을 봅니다. 그리고 남을 비난합니다. 남의 잘못을 보면 불쾌하게 여기고 미워하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이때 대부분 이런 행위를 하는 자신의 불선심은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보고 비난하는 것이 바로 불선심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잘못에 잘못으로 대해서는 아무런 개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남의 잘못은 남의 잘못으로 그냥 두고 그것을 보는 자신의 마음이 불선심을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내가 남을 비난할 때 나도 그 사람의 수준과 같아집니다. 그러므로 비난받을 짓을 한 사람이나 그것을 보고 비난을 하는 사람이나 정신적 수준이 똑같습니다. 그러나 남의 잘못을 보고 ‘몰라서 그랬네’ 하고 관용으로 이해한다면 그는 잘못을 행한 사람보다도 정신적으로 우월한 사람입니다. 이때 이런 관용을 보이기 위해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과 함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린 후에 가슴으로 가서 마음이 일으킨 느낌을 연계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오래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려도 분명하게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분명하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가슴으로 가서 분명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과 느낌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가슴에 그 마음이 남긴 흔적이 느낌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느낌까지 알아차려야 비로소 마음을 알아차린 바람직한 효과를 얻습니다.
가슴에 있는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거친 느낌에서 중간느낌으로 다시 미세한 느낌이 될 때 까지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이 싫어서 알아차리다 말면 느낌에 나쁘게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려서 얻는 상승효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때 대상을 없애려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느낌이 고요해지면 그 순간 마음도 평온해 집니다. 가슴에는 호흡, 맥박, 그리고 여러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남기고 간 느낌이 반드시 가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에서 강한 느낌이 일어나면 머리에서 느낌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이처럼 먼저 마음을 알아차린 후에 가슴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지만, 역순으로 가슴의 느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어느 때 가슴에 강력한 느낌이 일어났을 때는 먼저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면 이 느낌을 일으킨 원인의 마음을 알 수도 있습니다. 이때 가슴에서 일어난 느낌을 빨리 알아차리면 이 느낌을 남기고 떠난 어떤 마음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수행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마음으로 인해서 가슴의 느낌이 일어난 것을 통하여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납니다.
괴로움이 있을 때 이미 괴로움은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것을 기억하여 자꾸 괴로움을 지속시킵니다. 이때도 괴로움을 기억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가서 괴로움으로 인해 생긴 느낌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수행을 반복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때의 이 마음은 지혜입니다. 이 순간 부질없는 생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느낌을 괴로움이라고 자각해야 합니다.
이때 이 괴로움을 피하지 않고 자각하면 자연스럽게 괴로움을 일으킨 기억을 떠올리지 않게 됩니다. 이제야 이 기억이 부질없음을 아는 지혜가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에서 일어나는 괴로운 느낌을 피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알아차려 괴로운 기억이 남긴 상처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가 나서 괴로운 기억으로부터 자유를 얻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바르게 사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괴로움을 피하는 지혜가 나서 괴로움이 소멸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가슴에 느낌을 남깁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느낌을 연계해서 알아차리면 마음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동시에 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마음으로 인해 몸은 한시도 편한 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병을 얻어 괴롭게 살다 죽어갑니다.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의 토대가 되는 몸도 보살피는 것이 몸에 대한 감사함을 표하는 방법입니다. 몸은 탐욕스럽고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항상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3)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또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려는 마음은 의도입니다. 모든 행위는 반드시 의도가 있어 일어납니다. 마음은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어떤 의도가 있어 행위를 하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행위를 하기 전에 마음을 알아차리면 반드시 의도에 의해 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품을 하는 것이나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도 모두 의도가 있어 한다는 것까지 알 수 있습니다.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기 위해 의도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려면 처음에는 어떤 행동에서 다른 행동으로 옮겨갈 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령 좌선이 끝나고 경행을 하려고 할 때 움직이지 않던 몸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이때 앉아서 손을 바닥에 짚으려는 의도와 천천히 일어나서 걸으려는 의도를 알아차리면 됩니다.
처음에는 몸을 움직이면서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보다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상태에서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하려는 마음의 의도를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집중력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동작에서도 모든 의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모든 행동은 의도와 움직임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행위를 마음의 형성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위자체는 스스로 할 힘이 없습니다. 모두 의도가 있어 행위를 하는 결과가 있습니다.
걸을 때도 처음에 발을 들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발을 움직이거나 서 있다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 돌려고 할 때도 의도를 알아차리면 좋습니다. 이 외에도 말하기 전에 말을 하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하면 거칠게 하려던 말이 금방 부드러운 말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의도를 알아차리는 수행은 일상의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됩니다.
무엇인가를 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 모두 의도입니다. 의도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행위를 하는 것, 고무하는 것, 격려하는 것, 자극하는 것, 조정하는 것, 기억하여 행위를 하게 하는 것 등이 모두 의도입니다. 이런 것을 통틀어서 모두 의도라고 합니다.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여러 가지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들과 함께 중요한 대상입니다.
의도는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없으면 의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의도가 바로 행(行)입니다. 행위를 업(業)이라고 하는데 의도가 있는 행위를 업이라고 말합니다. 이때의 의도란 분명하게 하려는 마음을 낸 것을 말합니다. 업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르는데 이때 의도가 없는 행은 업이라고 볼 수 없고 단지 행입니다. 그래서 하려는 의도가 없이 한 행은 업이 되지 않아 과보를 받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살생했을 때의 과보는 다음 다섯 가지의 조건이 성숙되어야 과보가 생깁니다. 첫째,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것. 둘째, 살아있는 생명이 있다고 아는 것. 셋째,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려고 의도하는 것, 넷째,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려고 행위를 하는 것. 다섯째, 결과적으로 살아있는 생명이 죽는 것. 이상의 다섯 가지 조건이 성숙되어야 살생의 과보를 받습니다. 여기서 의도의 유무에 따라 과보가 생기거나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일을 의도를 가지고 하면서도 의도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하기 때문에 습관으로 살고 어리석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12연기에는 업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의 업과 현재의 업입니다. 과거에 형성된 의도를 행이라고 합니다. 이때의 행이 바로 의도이고 이것이 마음의 의지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행은 의도가 있기 때문에 업입니다. 그리고 현재 새로운 의도를 내서 하는 행위를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의도는 행이고 현재의 의도는 업의 생성입니다.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현재 무엇인가를 하려는 의도를 내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의 생성에 속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현재 새로 생성하는 업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과거에 형성된 업을 알아차리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라서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새로 생성하는 업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업의 생성이란 업의 힘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업력입니다. 현재 의도를 일으켜 업을 만들면 이 힘이 미래의 태어남을 만들기 때문에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이때 유념해야 할 것은 내가 미래로 옮겨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업의 힘이 옮겨가서 태어남이 생깁니다. 의도를 알아차리면 이런 인과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는 자아가 없습니다.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업의 생성으로 인해 축적된 그 힘이 옮겨가기 때문에 여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라서 실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는 원인으로서의 의미 이상은 없습니다. 과거는 관념이며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서 수행자에게는 반면교사로서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수행자는 항상 현재 여기에서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지금까지 모르고 진행되던 과정을 이제 분명하게 알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이 되어 선한 의도를 내서 선한 행위를 합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 처음에는 생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말을 합니다. 그런 뒤 마지막으로 행동을 합니다. 이것을 세 가지 업이라고 합니다. 시작은 생각으로부터 합니다. 그러나 의도를 알아차리면 생각에서부터 바른 의도가 생깁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합니다. 이 결과로 선한 과보를 받아 고통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할 때도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아파서 고통을 느낍니다. 이때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싫어합니다. 그런 뒤에 움직이려는 의도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몸을 움직입니다. 이때 아파서 싫어하는 것은 성냄이고 움직이는 것은 탐욕이고 탐욕과 성냄으로 하는지 모르고 하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처럼 작은 행동 하나에도 모두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란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움직임 하나도 그 순간의 의도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마음으로 습관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마음은 미세해서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이 순간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미세한 번뇌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도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이런 의도들이 모두 겉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선하지 못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통제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던 것을 겉으로 드러나게 하여 치유를 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불편하고 괴로운 생각들은 모두 잠재의식 속에 있던 것들이 표층으로 나와서 치유의 기회가 온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괴로움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반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가장 완전한 치유방법입니다. 괴로움을 피하면 영원히 괴로움의 노예로 살아야 합니다. 괴로움은 하찮고 비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하기 때문에 하찮은 괴로움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는 괴로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법입니다.
수행자가 경행을 할 때 처음에는 몸의 움직임만 알아차립니다. 차츰 수행의 발전이 있으면 모든 것이 의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의도에 의해 몸의 움직임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납니다. 이것이 연기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원인과 결과의 지혜가 나면 모든 의문이 풀립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의도에 의해 행해지고 그 결과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이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선한 의도를 내서 선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자신의 행위가 절제됩니다. 무심히 할 때는 어리석음과 감각적 욕망으로 하게 되지만 의도를 알아차리면 청정한 마음으로 하게 되어 계율을 지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청정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인해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면 수행이 더욱 발전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로 갑니다.
4)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또는 ‘지금 내 마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일하고 있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위해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마음을 새로 내는 방법이 바로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최종관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선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 ‘일어난 마음 알아차리기’, ‘하려는 마음 알아차리기’ 수행을 충분히 해서 네 번째인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 수행까지 해야 합니다. 사실 이상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네 가지 방법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접근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있어서는 모두 똑같습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했을 때는 아는 마음 알아차린다는 용어에 걸려 복잡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앞선 세 가지 알아차리는 방법을 충분하게 숙지하면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 수행이 되지 않을 때는 억지로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대한 부분은 매우 미세한 것이라서 충분한 조건이 성숙되어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렵게 생각되던 것도 실제로 하고 보면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되지 않는 것에 크게 연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꼬여서 점점 더 복잡하게 생각하여 알 수 없게 됩니다. 모르는 것은 그냥 그대로 두고 넘어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아직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는데도 반드시 알려고 하는 것은 또 다른 욕망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함으로써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층 더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잘 안 될 때나 수행이 잘 될 때나 언제나 알아차려서 마음이 싫어하거나 좋아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수행자가 마지막 지혜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행을 해서 몸이 소멸하면 호흡과 느낌이 사라집니다. 이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마지막 단계의 지혜인 도과의 지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 도과의 지혜가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하지 않고서는 도과를 성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수행을 바르게 익히면 마지막에 별다른 장애 없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최종 단계의 마음은 매우 미세하므로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그 미세한 마음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도과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의 과정을 평소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먼저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는 단계가 옵니다. 그러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마음밖에 없습니다. 이때의 마음이 아는 마음입니다. 수행은 반드시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하므로 이때 남아있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때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이해가 안 될 때는 호흡이 사라진 것을 아는 마음, 현재를 지켜보고 있는 마음, 고요함을 아는 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아는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마음이 방황합니다. 그러면 마음을 새로 내서 알아차리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다른 말로 하면 ‘알아차리는 마음을 지켜보기’라고 하거나 더 줄여서 그냥 ‘앎’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영어로 말하면 노팅(noting)하는 것을 워칭(watching)한다고 합니다. 노팅은 앞에서 일하고 있는 마음이고, 워칭은 일하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서 처음에 있는 ‘아는 마음’이란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는 1차 행위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있는 ‘알아차리기’란 대상을 알고 있는 그 마음을 대상으로 새로 알아차리는 2차적 행위입니다. 그래서 현재 일하고 있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처음에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일하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알아차리는 통로를 통해서 마음의 영역에 들어가면 무난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고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떻게 할 줄 몰라서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러한 문장을 통해 실재 하는 마음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마음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관념을 통해 실재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좌선 중에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알아차렸다면 이때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을 알 수도 있고, 망상하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는 것을 알기도 알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졸고 있거나 통증이나 가려움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상황에 직면해 있을 때 마음을 새로 내서 이런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후에 만약 수행을 하지 않고 멍청하게 있을 때는 즉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을 때는 계속해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다시 한 번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대상을 면밀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이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리면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알아차리는 것은 좌선을 할 때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경행을 할 때나 일상생활을 할 때나 모두 적용됩니다. 그래서 항상 일하는 마음을 새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새로 지켜보는 마음이 일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감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일하는 마음이 망상을 하거나 다른 일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망상을 했다 하더라도 이내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마음은 워낙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순간순간 많은 마음들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이때 이런 마음에 빠지지 말고 단지 알아차리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다시 요약하면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면 세 가지 현상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마음이 수행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에 빠집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멍청한 상태로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대상과 싸우고 있을 수도 있고, 수행이 하기 싫어서 짜증을 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거나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이때 망상을 하고 있다면 망상을 문제 삼지 말고 단지 ‘지금 내 마음이 망상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둘째,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여 수행을 하고 있는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거나 느낌을 알아차리고 있거나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대상이 명확해지고 더 견고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대상을 지속해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때 대상이 매우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나 매우 깨끗한 상태에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셋째, 몸의 느낌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고 오직 마음만 남아 있는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이때는 남아있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있는 마음을 새로 일어난 마음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이론상으로도 가능한 것은 마음은 매순간 새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듯이 마음도 함께 흐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새로 일어난 마음이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일로 마음이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현상 중 어느 상태가 되었거나 일하는 마음을 다시 한 번 현재로 오게 하여 대상을 알아차리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지속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또 수행자는 이런 알아차림을 통해 차츰 마음의 성품을 알 수 있으며 궁극의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마음이 매순간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것을 지혜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새로운 마음이 일어나서 새로운 대상을 경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들은 호흡이나 경행을 할 때 발의 움직임을 몸이 아닌 전면의 마음에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마음이 몸이 있는 곳에 가서 알아차리는 것보다도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시간이 더 길어집니다. 또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망상이 들어와도 얼른 망상하는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어 오랜 동안 망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일하는 마음을 새로 일어난 마음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망상을 하는 순간 빠르게 망상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 다시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전면에서 알아차린다고 말합니다. 이때의 전면을 앞에서라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전면이라는 것은 편의상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전면에서 알아차린다고 해서 마음이 실제로 밖으로 나가지는 않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음이 밖으로 나갈 수 없고 항상 몸과 함께 있습니다. 다만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약간의 시차가 생겨 입체적으로 느껴져서 전면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마음은 몸과 함께 있지만 몸의 어느 부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몸이 아닌 전면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전면을 마음자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대상을 알아차리면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다 보면 몸에서 알아차리는 것보다 느낌이 분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집중이 되면 알아차리는 힘보다 집중의 힘이 강해져서 마음이 점점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면 전면에서 다시 몸으로 와서 알아차려서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집중의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균형을 맞추게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노력이라고 합니다. 노력은 몸의 노력이 있고 마음의 노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알아차림과 집중의 균형을 맞추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항상 전면에만 두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힘이 약하면 몸으로 와서 실재하는 대상을 알아차려서 집중력을 키운 뒤에 자연스럽게 다시 전면으로 옮겨가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 보면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알아차림이 점점 약해질 수 있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의 힘은 약해지고 집중의 힘이 커져 졸음에 빠집니다. 대상의 느낌이 실제로 있는 곳에서 알아차리지 않고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면 대상이 점점 희미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면 좋습니다. 이때 알아차리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지켜보면 집중의 힘이 커져서 졸음에 떨어지지 않고 알아차림의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는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보완해줍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나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마음이나 내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대상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대상도 매순간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 고, 무아입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리면 이 순간 마음을 새로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릴 때 마음을 새로 내야 한다는 사실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어느 순간 한번이면 됩니다. 사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수행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이론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을 매순간마다 새로 내려는 노력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계속해서 마음을 새로 내기 때문에 대상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렇게 아는 것을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새로, 새로, 새로 라고 되 뇌이면서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이론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지혜로 알아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나타나는 대상이 모두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무상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새로’라는 것은 지혜로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필요한 경우에만 마음을 새로 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동차 바퀴가 굴러가면서 지면에 닿는 것과 같습니다. 바퀴가 굴러갈 때 바닥에 닿는 점은 한 부분이며 이것들은 한순간이지만 매번 새로운 것들입니다. 이때 바퀴가 닿는 지점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매순간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항상 현재에 머물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법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 전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법은 대상으로서의 법이 있고 진리로서의 법이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무상, 무아의 진리의 법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더 가까워집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다른 수행에 비하여 더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으며, 지혜를 얻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반드시 실천해야 할 수행방법입니다. 일부 수행자들이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진 상태에서 마땅한 지도를 받지 못해 수행을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을 포기하거나, 자기가 최고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진 상태까지 가기도 어려운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줄 몰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수행도 때가 있습니다.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으면 다시 점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으면 선업이 다한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선업의 과보가 다하면 다음에는 불선업의 과보가 들어옵니다. 이때 바르게 수행을 배웠으면 그렇지 않겠지만 바르게 지도를 받지 못했을 때는 수행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히려 수행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전면에 마음을 고정하면 현재를 지켜보는 마음만 있습니다. 이때 지켜보는 마음이 특별한 감정이나 마음의 동요가 없는 한 현재 가장 분명한 대상이 전면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호흡이나 통증 등 강한 대상이 있을 때는 전면의 마음자리에 이 대상들이 나타납니다. 경행을 할 때도 마음을 전면에 두면 발의 모양을 발이 있는 곳이 아닌 전면에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몸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보다 집중력이 있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호흡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몸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고, 전면의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이때 호흡을 몸에서 알아차리면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을 전면에서 알아차리면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마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면 많은 종류의 불선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럴 때마다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때 이 마음은 나의 마음이 아닙니다. 단지 순간순간의 마음이 연속되므로 이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선심을 본 것은 알아차림이 있는 마음이라서 선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 불선심이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알아차림을 놓치면 그 순간 불선심이 됩니다. 이때는 다시 불선심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선심으로 돌아옵니다.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수행자는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어떤 마음이 되었거나 언제나 현재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현재에는 항상 하나의 마음밖에 없으므로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수행자가 괴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 가지 마음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다면 이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때 ‘지금 이것이 누구의 마음인가?’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항상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리는 것에 마침표를 찍지 않습니다. 만약 알아차림에 마침표를 찍으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현재는 항상 계속되고 있는데 알아차림을 놓치면 과거나 미래로 가서 생각에 빠집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는 ‘지금 내 마음이 대상을 놓쳤네’ 하고 놓친 그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면 즉시 현재로 돌아오게 됩니다.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궁극의 진리인 무상, 고, 무아의 법을 알기 쉽습니다. 아는 것이 마음이고 그 마음이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비로소 무상을 압니다. 이렇게 무상함으로 인해 오는 정신적 방황을 통해서 괴로움의 실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해도 해결되지 않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무아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것이 단지 대상이지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나서 최종적으로 무아를 아는 지혜가 성숙합니다.
마음은 항상 현재 일하고 있으며, 대상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을 아는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알아차리기 어려우면 가만히 현재를 지켜보십시오. 이때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오직 현재에 마음을 고정하십시오. 얼마간 이렇게 지켜보다가 현재 무엇이 현재를 지켜보고 있는지 알아차려 보십시오. 그러면 현재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마음이라고 알게 될 것입니다. 이때 현재를 지켜보는 마음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의 힘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는 힘과 집중의 힘을 배양하는 것이 바로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노력이 앞에서 이끌어야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노력을 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 집중입니다. 집중은 다른 것이 아니고 대상에 마음을 오래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저 스스로 머물지 않습니다. 마음은 살아온 습관에 의해 잠시도 한곳에 머물지 않고 달아납니다. 이때 이러한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이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노력과 알아차림은 항상 하나로 결속되어서 항상 함께 일을 해야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말에 기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알아차릴 대상을 기억하여 잊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과 알아차림은 먼저 몸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만약 몸이 긴장하고 있다면 이 긴장을 통하여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몸은 마음에 의해서 이끌립니다. 그러므로 몸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마음이 긴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자연스럽게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을 움직이려고 할 때는 움직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몸을 통하여 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몸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은 언제나 함께 가야합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에서 마음이 몸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면 마음을 알 수 있고, 마음을 알아차리면 몸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은 항상 함께 있으면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서로 반응합니다. 몸과 마음이 상호적인 관계에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지혜를 얻습니다.
이때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고 보는 것은 기존의 생각입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대상의 바른 성품을 알 수 있습니다. 몸은 몸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마음은 마음의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몸은 몸의 역할이 있고, 마음은 마음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물질적 영역에서 물질적 현상이 있는 것과 정신적 영역에서 정신적 현상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 두 가지를 서로 분리해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른 지혜가 납니다.
일하는 마음을 속박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욕망은 마음을 속박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속박하면 마음이 싫어합니다. 일하는 마음이 싫어하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일의 적절함과 마땅함이 있어야 마음이 싫어하지 않습니다. 만약 마음이 싫어서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고 달아나면 이때 달아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마음을 바르게 이끌고 마음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는 가장 필요한 요소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밖에 있지 않습니다. 대상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어리석으면 미혹에 빠져 답을 구하지 못하지만 내 마음에 지혜가 있으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얻습니다. 지혜는 오직 수행을 통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궁극의 진리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