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알아차리기/묘원법사

[스크랩] 제53회 대념처경 법문: 심념처5

Dhammarakkhita 2016. 12. 28. 14:16

 

 

 

모든 행위는 반드시 의도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의도에 의해서 일어난 행위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을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 과보, 업력(業力)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바라는 마음이 있어

업의 힘을 형성시킨 결과로 다음 생(生)이 연결됩니다.

 

이때 업의 힘은 나의 힘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서 일어난 힘이며

이 힘은 일어났다가 순간적으로 사라집니다.

여기에 ‘나’라고 하는 자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태어남은 환생이 아니고 재생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무아를 알아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재생의 업력을 끊는 것입니다.

 

태어남은 또 다른 괴로움의 시작이기 때문에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때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바라고 없애려는 것 없이

중도적 관점에서 지켜보기 때문에 최상의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은 궁극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인데

그 궁극의 지혜가 바로 무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아상경’에서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한 때 세존께서 바라나시 국에 이시빠다나 니가다의 숲에서 머무셨습니다.

이때 세존께서는 빤짜와끼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라고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네 세존이시여!” 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하여

물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물질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물질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해도

물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느낌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느낌이 나라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하여

느낌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느낌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느낌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해도

느낌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

 

“비구들이여! 지각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지각이 나라면 이 지각은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하여

지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지각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지각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해도

지각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의도는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의도가 나라면 이 의도는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하여

의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의도가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도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해도

의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의식은 내가 아니다.

비구들이여! 만일 이 의식이 나라면 의식이 아프지 않아야 한다.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하여

의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비구들이여! 의식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아프게 된다.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어라! 나의 의식이여, 이렇게 되지 마라!’ 라고 해도

의식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이 항상 하는가? 항상 하지 않는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항상 하지 않는 물질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라고 비구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물질을,

‘이것이 나의 것이다. 이 물질이 나다. 이 물질이 나의 자아다.’ 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

 

“느낌이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느낌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느낌을,

‘이 느낌이 나의 것이다. 이 느낌이 나다. 이 느낌이 나의 자아다. ‘

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지각이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지각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지각을,

‘이 지각이 나의 것이다. 이 지각이 나다. 이 지각이 나의 자아다.’ 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의도는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의도가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의도를,

‘이 의도가 나의 것이다. 이 의도가 나다. 이 의도가 나의 자아다.’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의식이 항상 한가? 항상 하지 않은가?”

“항상 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는 의식이 고통스러운가? 행복한가?”

“고통스럽습니다. 세존이시여!”

 

“항상 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변하는 특성을 가진 이 의식을,

‘나의 것이다. 이 의식이 나다. 이 의식이 나의 자아다.’ 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가? “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그러기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물질을,

‘이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물질은 내가 아니다. 이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느낌을,

‘이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느낌은 내가 아니다. 이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지각을,

‘이 지각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지각은 내가 아니다. 이 지각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의도를,

‘이 의도는 나의 것이 아니다. 이 의도는 내가 아니다. 이 의도는 나의 자아가 아니다.’

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내부와 외부의 거칠고 섬세한, 저급하고 고귀한,

멀고 가까운 모든 의식을,

‘이 의식은 내가 아니다. 이 의식은 나의 의식이 아니다. 이 의식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

라고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한다. “

 

“비구들이여! 이렇게 보는 바른 견해를 가진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을 염오한다. 느낌을 염오한다. 지각을 염오한다. 의도를 염오한다.

의식을 염오한다. 염오하기에 갈애가 없다. 갈애가 없기 때문에 번뇌로부터 자유롭다.

번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번뇌에서 해방되었다고 아는 지혜가 생긴다.

 

다시 태어남이 다했다. 고귀한 수행을 마쳤다.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이제는 도를 깨달아 번뇌를 제거하기 위하여 해야 할 다른 일은

더 이상 없다고 분명하게 안다. “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빤짜와끼 비구들은 세존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에 매우 만족하여

환희에 차서 받아들였습니다.

세존께서 다른 게송과 섞이지 않은 법문을 하셨을 때

빤짜와끼 비구들의 마음은 집착을 하지 않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상이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무아상경’입니다.

그냥 무아경이라고도 하지만, 무아상경은 무아의 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우리가 무아를 알아야만 아라한의 도과(道果)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빤짜와끼 비구들은 이 무아상경을 듣고 모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수행자들이 수행을 해서 무상과 고, 무아를 보는 과정에서

수다원은 무상과 고와 무아를 낮은 단계에서 보고,

사다함은 무상과 고와 무아를 수다원 보다는 높은 단계에서 보고,

아나함은 역시 똑같은 무상, 고, 무아를 사다함보다 더 높은 단계에서 보고,

아라한은 역시 똑같은 무상, 고, 무아를 완전하게 알아서 아라한이 됩니다.

 

모든 수다원의 도과(道果), 모든 사다함의 도과(道果)

모든 아나함의 도과(道果), 모든 아라한의 도과(道果)는

똑같이 무상, 고, 무아를 알아서 집착을 끊고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어떤 수행자들은

선업의 공덕과 수행의 노력을 통해서 빠르게 아라한을 성취하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그 아라한도 빠르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도과를 거쳐서 아라한에 이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단계에서 시간이 걸리지만,

선업의 공덕이 많고 수행을 열심히 한 수행자들은 빠르게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합니다.

 

그런데 아라한과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은

무아를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아를 아는 것에 따라서 집착을 끊을 수가 있습니다.

 

수다원은 유신견(有身見)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열반에 들었다 나온 뒤에는 다시 적절한 유신견이 생깁니다.

그 적절한 유신견이라는 것은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려는 유신견을 말합니다.

 

이처럼 무아를 알아야 유신견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궁극의 아라한은 무아를 알았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상과 고와 무아를 알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무아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먼저 모든 것이 변한다는 무상을 알고,

그 뒤에 무상을 안 뒤에 오는 괴로움을 통찰하고,

그 괴로움이 자기 뜻대로 해결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무아의 진리를 보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무아의 진리를 보았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무아이기 때문에, 내가 없기 때문에

유신견이 생기지 않아서 그 결과로 집착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집착을 하지 않기 때문에 업의 생성을 일으키지 않아서 미래의 태어남이 없고,

받을 것이 없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내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염오한다’는 것입니다.

지혜가 나면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염오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바로 이 염오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을 아름답게만 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은 온갖 오염들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서

우리는 자유로운 해탈의 길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상좌불교 한국 명상원
글쓴이 : 편집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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