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테라와다란

상좌부-장로들의 가르침

Dhammarakkhita 2012. 3. 4. 00:04


테-라와-다(Theravda)의 테-라(thera)는 「장로(長老), 상좌(上座)」, 와-다(vda)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으로, 테-라와-다를 직역하면 「장로들의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장로는 승단(sangha)에서 비구들(bhikkhu)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분들입니다. 상좌는 비구들 중에서 윗자리에 앉아지는 분들을 말합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3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부처님의 3번째 제자였던 마하-깟사빠(MahKassapa)라고 하는 대 아라한이 부처님을 곁에서 오랫동안 모시었고 부처님이 인정하신 측근의 제자인 우빨-리(Upli), 아-난다(nanda) 등 약 500명의 대 아라한들을 모아 결집을 실시하여 「부처님의 순수한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정리했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불리는 회의입니다. 그 결집으로 정리된 경전에 근거하여 테-라와-다 불교가 시작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충실히 지키려고 노력하므로 보수적이라고 말해지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테-라와-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상의 길은 없는 것을 체험으로부터 확신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길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삼법인, 사성제, 인연의 가르침, 8정도와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하기 위한 위빳사나 명상이라고 하는 수행 방법입니다. 부처님은 해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고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테-라와-다의 장로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게 다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가는 것에 자신의 모든 책임을 두고 계십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해석을 더하거나 하는 것을 일체 거부합니다. 그리고 빨리 경전에 기록된 부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사는 것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합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실 당시에도 그러한 장로들의 태도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후에 테-라와-다로부터 멀어져 대중부로 불리는 종파를 만들었습니다. 그 대중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분파가 생기고 부처님 입멸 후 200년 정도 지나면 18개의 종파로 분열해 버렸습니다. 이것들은 정리해 부파 불교로 불리고 있습니다.

부처님 입멸 후 4~500년 정도 지나서 부파 불교를 비판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쪽이야말로 우수하다고 하는 의미를 담아 대승불교라고 칭하고 부파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도의 대승불교가 소승불교라고 부르고 있던 것은 테-라와-다가 아닙니다. 실제로 소승으로 불리고 있던 부파불교는 현재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테-라와-다는 대승이나 소승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부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인 테-라와-다 불교는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550년이 지난 지금도 매우 신선함과 동시에 놀라울 정도의 현대적인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보면 그 합리성과 과학적인 일로 깜짝 놀람과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현대에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납득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장로들은,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비판을 하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속 지켜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현재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할 수가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우리말로 상좌불교, 별칭으로 근본불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불교 종파와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해 나가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불교가 지금까지 2천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에 여러 사람들의 해석의 차이라든지 방향 전환 등에 의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과는 근본을 달리한 형태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본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근본불교라고 불리는 것은 그러한 의미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처음 진리를 깨달아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확대될 만큼 설득력이 있어 시방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수행 방법이나 실천의 방법도 모두 부처님 스스로가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우리들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에 힘쓰는 것이지, 부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우리들 독자적인 길을 걸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깨달음 즉 열반을 향해, 생사의 괴로움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을 파악해 체험해 가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넘어 두 번 다시 윤회하지 않아도 되는 그 진리를 체험할 수 있으므로, 그 길을 나타내 보이신 스승인 부처님에 대해서 당연히 존경의 마음을 가집니다. 또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으므로 이 훌륭한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멋대로의 생각을 더하거나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가르침이 최선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과 똑같게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나가다보니 테-라와-다 불교 사람들은 불교의 보수파라고 보여 지는 일도 있지만, 그만큼 부처님 가르침 이상의 길은 없다고 테-라와-다 불교 사람들은 확신하고 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말씀하신 방법 말고 깨달음의 길을 여는 다른 방법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부처님의 길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므로 불교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테-라와-다 불교이며, 테-라와-다 불교를 통할 때만이 부처님이 나타내 보이신 방법으로 깨달음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 깨달음을 위해서 나타낸 길이 4념처(四念處)라고 부르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위빳사나 수행법이며, 그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팔정도(八正道)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깨달음을 이루어 해탈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집착을 없애는 것이며, 번뇌를 소멸하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부처님 스스로의 체험에 근거한 방법이며, 집착을 일으키는 번뇌를 지우지 않는 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없다고 단언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고, 새로운 경을 기록한 책을 만들거나 할 것도 없이, 다만 열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 나가는 것에 자신의 임무를 두므로 다른 종파와 크게 구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입멸 후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연 설명하기 위해서 새롭게 해석을 더해 간다고 하는 방법 속에는 물론 뛰어나고 훌륭한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테-라와-다 불교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러한 것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변형이 되고나면 그것을 신호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 있어 인간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말해진 방법과 가르침에 변화가 생겨 버립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불교라고는 부를 수 없는, 불교가 아닌 불교라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테-라와-다 불교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부파불교 시대에 테-라와-다 불교로 부터 떨어져나간 경량부라는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계율이나 아비다르마 등을 특별히 소중히 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에 기초를 두고 불교를 실천했으니까 크게 생각하면 그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킨 종파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재는 경량부와 같은 부파는 어디에도 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부파 불교를 거쳐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것은 테-라와-다 불교뿐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소승불교라고 불리어지고 있던 종파는 부처님 입멸 후 200년 즈음에 인도에서 테-라와-다 불교로부터 나뉘어 떨어져나간 부파불교의 각 종파로 그러한 불교를 비판하며 대승불교가 형성되어 갔던 역사적인 사실이 있지만, 대승 불교로부터 소승불교로 불리고 있던 부파불교는 지금에 와서는 어떤 부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의 인식 부족일 따름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처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계승하여 유지해온 불교이며, 대승불교나 소승불교와는 그 성립 과정도, 주장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좀 더 불교 성립의 역사적 사실을 살펴봅시다. 앞에서 이야기 했지만 테-라와-다 불교로부터 나뉘어 대중부라고 하는 분파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부파불교의 시작으로 기원 전 100년경까지 몇 개의 부파불교가 태동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종파와 같이 조사에 의해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면서 나뉘어 나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서기 원년(부처님 입멸 후 500년)경에 대승 경전이 쓰여 지기 시작해 서기 100년경까지는 「반야경」,「법화경」,「화엄경」등의 초기대승경전이 완성됩니다. 서기 200년경 용수에 의한 「중론」,「12문론」에 이어 「해심밀경」,「여래장경」,「열반경」등의 경전이 완성되고, 또 400년경 세친의 「유식 20론」이 쓰여 졌습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이「유식 20론」전후지만, 처음부터 중국에서 쓰여 진 대승경전을 불설(佛說)의 불교로 받아들였으므로 대승경전이 불설인지 아닌지의 논의는 거의 일어나지 않은 채 받아들여져 버린 것 같습니다. 대승경전이 쓰여 진 것은 서기 원년 경부터 400년경 사이의 일이기 때문에 잘 생각해 보면 불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로는 부족하지만 그러한 경전이 불교의 가르침에 필적하고 있다고 보는 분이 일반적이어서 한국에서는 그만큼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불교 전래로부터 1600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지나 부처님의 가르침인 테-라와-다 불교를 다방면으로 배울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부처님의 직접적인 말을 구술과 필기로 기록해서 2550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장로 비구들의 노력으로 변형이나 더해지거나 하지 않고 전하여 왔습니다. 그런 덕분으로 21세기가 시작된 오늘날에도 2550년 전 부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를 우리는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만큼의 세월을 빛바램 없이 이어져서 문명이 이 정도까지 발전해 온 오늘날에도 수행과, 바르게 사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지침이 되고 있다는 것은 그 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일무이의 진리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증명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부처님 가르침의 훌륭한 점은 그것이 전란의 세상이든, 불황에 가라앉는 어두운 시대이든, 어떠한 시대에 있어서도, 또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아시아 사람들이든, 어떤 인종에 있어서도, 혹은 어린 아이이든, 노인이든, 과학자이든, 학교의 선생님이든, 어떠한 직업이든지, 그런 것에 일체 상관없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어 누구나 곧바로 실천할 수 있다고 하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들의 노력에 의해 기록되어 온 방법이 소중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255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배우면 항상 신선하고 감동적이며 놀라움을 체험하는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일상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 사회나 사람들의 생활과 함께 있습니다. 사회가 변화해도 또 사람들의 생각이 아무리 바뀌어도 진리는 영원한 것이며 진실은 한가지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진리에는 변형의 여지는 없습니다. 만약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문이 있다면 우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해 보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실천한 사람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만약 변형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변형해 보세요.』라고 말하고 계시는 만큼 그 방법은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부처님은 자신의 체험으로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과학의 법칙과 비교해 모순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을 지적해 보십시오. 근본불교 또는 원시불교라는 표현이 조금은 낡은 인상을 주는 듯도 하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근본 그대로 또는 원래 시작된 그대로 따르고 있는 유일한 불교이며, 2550년간 변형되지 않은 진리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배워 주시기 바랍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소승불교」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아래의 3가지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1):대승불교 발흥까지의 제 부파불교
(2):부파불교 중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3):현재의 동남아시아 상좌 불교(테-라와-다 불교)

부처님 입멸후 100년경에 계율을 둘러싼 대립으로 출가 교단(상가)이 엄격파인 상좌(테-라와-다)들과 상좌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정파인 대중부(대승불교의 토대)로 근본 분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기원 전·후의 북서 인도 부파불교 내부에서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 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무량수경 등 이른바 대승경전이 차례로 만들어 집니다. 새로운 경전의 신봉자는 스스로를 깨달음에 이르는 「큰 수레=대승」이라고 칭하면서 전통적인 불교를 받드는 전통파를 「작은·뒤떨어진 수레=소승」이라고 비난 했습니다. 당시 북서 인도에서는 전통상좌들로부터 멀어진 설일체유부라는 학파가 큰 세력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협의의 소승불교는 설일체유부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신봉자는 종래의 경전, 즉 붓다의 말씀인「아가마, 아함경」을 능력이 뒤떨어진 제자들을 위해서 말한 가르침이라고 경시하며 최고의 성자인 아라한의 권위도 부정하자인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보다, 부처님과 같은 불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보살 수행」이 훨씬 뛰어난 수행이라고 선양 했습니다. 이런 관계를 보아 원래 「소승불교」라고 불린 불교는 (1) 대승불교 발흥까지의 부파 불교 일반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한편 전통적인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대승경전이 새롭게 만들어지는 상황은 믿을 수 없는 파계 행위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경전이라는 것은 상가결집이라는 경전의 확인 작업을 통해서 결의된 <부처님의 말씀을 보태거나 삭제하거나 변형하지 않는다.>는 3가지 원칙에서 보면 심각한 위법행위입니다. 전통 경전은 부처님의 직설을 시자인 아난다존자와 우빨리 존자가 구술하는 것을 최고의 성자(아라한)인 마하깟사빠 존자, 아누룻다 존자, 그리고 사리뿟따 존자의 제자들을 비롯한 부처님의 성스러운 500명의 아라한 제자들이 내용을 승인한 엄격한 과정(경전 1차 결집)을 거쳐 편찬 되었고, 그 이후도 추가의 결집은 있었지만 부처님의 말씀(붓다와짜나)을 보전하고 지키려는 전통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부처님의 언행록을 무질서하게 내용을 덧붙이고 새롭게 만드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정확함은 소속부파가 뿔뿔이 흩어진 뒤에도 그것들을 모아 비교ㆍ조사해보니, 한역 아함부와 빨리어의 삼장이 상당히 공통되어 있어 대승 제경전과 같은 교의상의 혼란을 볼 수 없는 것으로도 분명합니다.

대승경전이 창작되었던 시대는 이미 제 부파불교 경전(경·론·논의 삼장)의 정통성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함부나 빨리 삼장의 어디를 봐도 경전의 설법 상대로서 보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입멸 후에 행해진 경전 결집에서도 대승경전은 그 흔적조차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 부파 불교 시대에 확립되어 있던 과거불(過去佛) 신앙에서도 제불(諸佛)의 교단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네 종류 제자에 의해 유지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현재·미래를 관철하는 불교의 교의 체계에서 대승의 형이상학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승경전은) 비밀스런 가르침이다」,「인간이 아니라 신들이 들었던 경전이다」라고 그야말로 변명을 늘어놓게 되는 것입니다.

대승 불교에서는 중관·유식의 2대 종파가 일어나서 부파불교나 불교 외의 종교와도 활발하게 논쟁을 펼쳤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식적인 일이었고 대승 불교는 서기4세기가 되어도 독자적인 교단을 조직 하는 일 없이 전통적인 부파 불교에 기생하는 형태로 존속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대승경전을 봉독하는 교단과 부파 불교와의 차이는 대승경전을 소리 내어 읽게 하는 것, 보살을 예배하는 것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실천 체계로서의 대승불교는 (2) 부파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의 계율과 아비다르마눨. 의 메뉴얼)를 전제하여 대승경전의 보살 수행을 찬탄하거나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대승불교의 실천체계는 설일체유부 등의 아바다르마를 이용하지 않으면 마음의 성장을 위한 실천방법으로 기능하지 않아서 수행의 완성을 부정하게 되고 수행하지 않아도 일체중생은 원래 깨닫고 있다는 개념적인 것에 함몰되기에, 후에 인도에서 대승 불교를 도입한 중국과 후기 인도 대승을 계승한 티벳 불교도 같은 노선이 답습되었습니다.

대승파와 부파에서 수호해 온 경전은 실크 로드를 거쳐 각각의 형태로 중국 문화권에 전해졌습니다. 인도의 초기불교~부파불교의 세력권을 떠나 대승불교는 자유의 신천지에서 꽃피워집니다. 거기서 종래 부파계의 경전(아함이나 논장)은 뭉뚱그려 「소승」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중국에서 뿔뿔이 흩어져 전해진 경전을 자신들의 사고로 본래의 문맥과 관계없이 바꾸고 분류하여, 실제 활동하고 있었던 부파불교 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경전의 분류 항목으로서 「소승불교」가 만들어 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교의 없이는 실천 체계로서 성립되지 않는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불교도는 실크로드나 해로를 통하여 인도나 스리랑카 등에서 제 부파와 대승파가 서로 비판하면서도 닮아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득하게 세월이 흘러 20세기에 한국의 불교도는 대승불교 이외의 불교, 즉 (3) 상좌불교(테-라와-다 불교)를 계속 지켜온 동남아시아·남부아시아의 불교도들과 만납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약 2천3백 년 전 아쇼카 왕 시대에 불교전도사를 통하여 스리랑카에 상륙했고 동남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부처님 본래의 가르침에 가장 가까운 불교라고 서구의 학자들이 평가하자, 한국의 불교학자들은 그들을 「소승불교」라는 말로 차별합니다.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살아온 분들이기에 실제로 처음부터 거기에 있는 테-라와-다 불교를 한국의 학자들은 고정관념으로「소승불교」라고 계속 부를 것입니다. 근대화에 성공한 한국인들이 우월의식으로 다른 아시아 불교도를 아래로 내려다보는 의미도 있겠지요. 마치 같은 대승불교라고 해도 티벳불교를 라마교라고 하듯이. 그런데 최근에는 남을 깎아내리는 것은 실례라는 양심에 밀려 역사적, 교육과 학문적인 의미에서의 「소승불교」라고 하면서, 「테-라와-다 불교」와 구별하는 것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대승 불교의 땅」이라는 한국에서도 최근에는 테-라와-다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대승·소승」이라고 하는 가치 판단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하나의 불교를 배우는 자세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닌 가 판단됩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스승이 없습니다. 어떤 시대 어느 조건아래서도 스승은 단 한명, 부처님뿐입니다. 제자라는 승려는 있지만 가르치는 것은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뿐이라서 거기에 제자로서의 자신의 견해나 해석이 비집고 들어갈 여력이 없습니다. 선배 비구를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은 있어도 그 스승은 제자들을 부처님에게 묶는 중요한 역할만 할 뿐입니다. 어떤 사람, 어떤 제자, 누구라도 부처님에게 묶는 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1000년 전이나, 500년 전일지라도 비구들은 완전히 똑같은 부처님의 가르침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문명이 급속도로 진행되어 인간의 생활 습관도 많이 변모해 가고 있는 오늘날, 어떻게 테라와다 불교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시대와 변함없이 살아가며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비구들이 사회와 관계를 가졌을 때 계율을 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사회와 잘 융화되었고, 사회의 요구에 응해 갔기 때문입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시대를 초월한 진리가 있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라는 것에 조금의 염려도 없었던 것이 훌륭한 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로부터 제자로 계승해진 가르침이면 시대의 변화에 의한 비구들의 생활도 변화할 것인데, 비구들의 생활은 항상 부처님의 말씀과 계율이 기본이 되고 있기 때문에 시대가 변해도 그 생활은 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만큼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진리의 절대성이 여기에 맥을 이어 오늘날까지 계속 살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