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念處 (네가지 마음챙김의 확립)/느낌(受)

-상응부 느낌편-

Dhammarakkhita 2012. 12. 4. 10:35

염수경(念受經)

-상응부 느낌편-

 

냐나뽀니까 스님 영역

규 혜 스님 옮김

 

Contemplation

of Feeling

The Discourse­Grouping on the Feelings

(Vedanaa-Sa.myutta)

 

Translated from the Paali

with an Introduction

by NYANAPONIKA THERA

 

THE WHEEL PUBLICATION No. 303/304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 1983 Sri Lanka

 

차 례

 

머리말 5

들어가는 말 13

 

1. 삼매 27

2. 행복 28

3. 버림 29

4. 바닥없는 구렁텅이 31

5.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33

6. 화살 35

7. 간병실에서(1) 40

8. 간병실에서(2) 47

9. 무상 53

10. 촉에 뿌리박은 느낌 53

11. 한적한 곳 55

12. 허공(1) 58

13. 허공(2) 60

14. 객사(客舍) 61

15 아난다(1) 61

16. 아난다(2) 64

17. 비구 다중(1) 67

18. 비구 다중(2) 70

19. 목수 빤짜깡가 71

20. 비구들 81

21. 시와까 88

22. 백여덟 가지 느낌 93

23. 비구 95

24. 과거 지(智) 96

25. 여러 비구들 99

26. 사문과 바라문들(1) 100

27. 사문과 바라문들(2) 101

28. 사문과 바라문들(3) 102

29. 청정한 출세간 102

 

《부록》

느낌의 통찰에 도움이 되는 성구들 109

주석서에 나타나는 성구들 116

아비담마에서 본 느낌[受]의 위치 119

원주설명 124

 

 

머리말

 

이 책은 빠알리경 경장의 상응부 제4권 가운데 느낌편[受相應品]을 번역한 글이다. 빠알리어에서 영어로 옮긴 역자는 스리랑카에서 불자출판협회(B.P.S.)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이 협회를 이끌었던 독일 태생 냐나뽀니까 스님이다.

 

다른 경들의 경우가 그렇듯이 이 경 역시 여러 나라에서 나름대로 제각각 번역이 되어 현재 다양한 번역본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영국 빠알리성전협회(P.T.S.)의 역본(F. L. Woodward, The Book of The Kindred Sayings, Book Ⅳ, Part Ⅱ, Kindred Sayings about Feeling, London, 1927, pp.136~161.)과 일본어역 남전대장경 (立花俊道 譯, 南傳大藏經 第十五卷 相應部經典 卷四, 六處篇 第二 受相應, 1940, pp.318~368.)이 있다.

 

여기 소개하는 냐나뽀니까 스님 역본은 상응부 중에서 수상응(受相應, 느낌편) 부분만 뽑아서 번역하고 서문을 붙인 글로서 1983년에 스리랑카 불자출판협회(B.P.S.)에서 법륜(Wheel) 총서로 펴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비교적 최신의 번역으로, 그 간의 연구 성과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최근의 경전 연구 경향과 그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책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현재 그들의 연구수준이나 번역이 꼭 완벽해서라기보다는, 고요한 소리가 앞으로 본격적인 역경에 착수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현재까지 나와있는 모든 연구 성과들을 일단 섭렵․수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도 가능한 한 원역자의 입장을 존중하고 그 견해를 반영하여 독자들과 더불어 검토․음미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경전을 더욱 올바르게 이해하고 또 경전 용어의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함으로써 적합한 한글역어를 찾아보려는 것이다.

이번에 사용한 냐나뽀니까 스님의 영역본에는 종래의 번역본들과 다른 입장을 취한 참신한 이해와 표현들이 많이 나와 우리들의 경전이해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따라서 가능한대로 영역의 원의를 그대로 살려내려 애써 보았다. 다만 그중에서 우리에게 너무 생소한 감을 주는 말들은 가급적 피하고 친숙한 표현으로 바꾸었다. 가령 phassa를 sense impression으로 표현하는 경우 촉(觸)으로 옮기고, 원번역자의 용어를 주(註)에서 소개하는 방식을 취했다.

 

제목 `염수경' ― 상응부 느낌편 ― 은 영어제목 `Contemplation of Feeling' (The Discourse-Grouping on the Feelings)을 유념하면서 이미 간행한 바 있는 염신경 (금구의 말씀 하나, 고요한 소리, 1991.)과 맥락을 같이 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다. 우리의 바람은 이 글이 사념처(四念處) 가운데 수념처(受念處)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며 아울러 신념처에 이어 사념처를 차례로 설명해나가는 목적 또한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원역자의 `들어가는 말'과 `아비담마에서 본 느낌의 위치' 주1) 는 아비담마 불교에서 수(受)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요약 소개한 글로서, 아비담마의 관점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줄 믿는다. 또한 이를 통해 남방불교의 독특한 입장도 살펴볼 수가 있겠다. 원역자의 번역이 이루어진 배경이 이러하므로 이 책이 어느 면에서는 아비담마 내지 남방불교 전통에 입각한 번역의 일단이라 간주되어도 무방할 것이다. 아비담마적 해석과 근본불교적 이해가 일치할 경우 그것은 가장 안심스러운 번역토대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문제는 앞으로 고요한 소리 역경에 있어 최대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참으로 중대한 과업이기 때문에 관계 제현의 적극적인 동참을 구하는 바이다.

끝으로 노파심에서 한 말 더 붙이자면, 여기 실은 `들어가는 말'이나 `아비담마에서 본 느낌의 위치'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는 오히려 난삽한 느낌만 주게 될 위험도 있으니만큼 그 읽기를 뒤로 미루고 본문 경부터 먼저 읽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백 가지 해설 도움말보다도 부처님의 말씀은 더욱 도움이 되고 해설이 되니까.

 

일러두기

 

이 책은 수상응(Vedan Sam yutta) 경의 수가 29편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P.T.S.본에 따른 분류이다. 미얀마 6차 결집본은 31편으로 되어 있고 이에 따라 이 번역의 저본인 B.P.S.영역도 31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내용은 전혀 동일하며, 다만 같은 경이 둘로 나뉘어 편수가 늘어난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P.T.S.본의 합리적 편성을 따르기로 했다. 각 문단 첫머리의 항목 번호도 저본에는 없는 것인데 P.T.S.원본의 것을 취해서 넣었다. 게송 뒤에 붙은 번호 역시 마찬가지다. 저본인 B.P.S.영역본에는 영어권 독자들의 취향에 맞춰 반복문구는 거의 모두 생략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될 수 있는대로 생략을 피하고 아무리 지루한 감이 있어도 꼼꼼히 다 챙겨 담기로 했다. P.T.S.본도 약자 처리로 생략한 곳이 많은데, 그런 경우는 여기선 다 살리기로 하고 다만 제18경 5절은 빠알리 원문의 표기대로, 27경은 주에서 밝힌 이유로 생략했다.

 

들어가는 말

 

`느낌이 세상 전부인 것을!'

어느 독일 시인의 감개 어린 말이다. 지나친 감이 없지 않지만, 인간의 삶에 있어 느낌이 얼마나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요소인지 정곡을 찌르고 있다. 알게 모르게 사람들은 즐거운 느낌을 더 늘리고 괴로운 느낌은 줄이려는 밑도 끝도 없는 노력에 평생을 다 바치고 있다. 평범한 생활의 단순한 기쁨에서부터 야심가들의 권력욕이나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적 희열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인간적 야망과 투쟁도 따지고 보면 이 한가지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소망스런 즐거움이야말로 다다익선일 것이다. 즐거운 느낌에 수반하는 정서적 만족을 그들은 행복으로 여기니까. 만일 그것이 행복이라면 행복에는 천박한 것에서 세련된 것에 이르기까지 가지수도 천차만별이 되고, 강도(强度)도 경우에 따라 제각기 달라서 때로는 대단히 강렬한 행복도 있게 될 것이다.

 

또 정서라는 것 역시 여러 가지로 의지작용을 일으킬 수밖에 없고 의지작용은 다시 행동을 낳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쾌락의 극대화'가 추구될 수밖에 없다. 인류는 그동안 이 원칙에 충실하다보니 더러는 꽤 영웅적인 행각도 벌였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비겁하고 파렴치한 일을 훨씬 더 많이 저질러온 것이 사실일 것이다. 즐거운 느낌을 누릴 방법을 공급해줄 양으로 생산업과 서비스업이 수없이 생겨났고 그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수도 엄청나게 늘어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과 응용과학 역시, 날로 커져가고 있는 감각적 향락과 안일에 대한 수요를 채우는 일에 온통 매달리다시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정서적, 감각적 행복의 조달자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 공포와 근심 등 괴로운 느낌마저도 자기네가 해결해 내겠다면서 온갖 수상하기 짝이 없는 갖가지 처방전을 궁리하느라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간단히 살펴본 것만으로도 이제 "일체사가 느낌에 귀결된다"는 부처님의 간명한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느낌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올바로 인식하고 나면 어째서 느낌(vedanaa)에 대한 잘못된 관념들이 스무 가지 유신견 주2) 에 들게 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느낌의 쌓임을 자아로 간주할 때 유신견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느낌은 아직 첫 단계의 외톨이일 때에는 전혀 색깔이 없는 상태여서 대상이 주는 충격을 즐겁다, 괴롭다,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식으로 떠올리는 데서 그친다. 그러다가 감정적 요소나 의도적 요소들이 첨가되면 비로소 욕망, 사랑, 싫음, 미움, 걱정, 두려움 또는 왜곡된 견해 따위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과정으로 진행되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혼합물들이 결코 느낌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하루 종일 받는 수많은 인상 중에서 미약한 것들은 대부분 매우 희미하고 짧은 동안의 느낌을 떠올리는 데서 멈추어 버릴 뿐, 더이상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이로 보아 우리가 느낌을 `맨 주3) 느낌(bare feeling)'의 단계에서 멈추게 만들 수 있다는 심리학적 가능성이 입증되는 것이며, 따라서 마음챙김과 자기제어의 힘만 빌릴 수 있으면 아무리 자극적인 느낌일지라도 그것이 감정으로 발전하지 않고 맨느낌에서 그치도록 의도적 작용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이는 실제 경험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만큼 끝없는 연기의 유전도 느낌[受]의 대목에서 멈출 수가 있고, 느낌의 뒤를 갈애가 반드시 이어야 한다는 내재적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느낌이야말로 해탈의 길에서 주요한 관건이 되는 요소임을 깨닫게 되며, 이 때문에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느낌에 대한 수관(隨觀)'이 효과적인 수행방편으로 높이 평가되어 온 것일 것이다.

 

느낌에 대한 수관은 사념처(四念處: 身念處, 受念處, 心念處, 法念處) 가운데 하나이며, 통찰력의 증진을 목표로 하는 관법 수행(위빠싸나)을 통하여 실천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느낌에 대한 수관을 일상생활에 잊지 말고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느낌이 선하지 못한 감정으로 바뀌려 할 때에는 반드시 놓치지 말고 챙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수행할 욕심에서 일부러 느낌을 만들어 내고자 애쓸 필요는 없고 다만 느낌이 일어날 때에만 그것을 마음챙겨 관찰하면 충분할 것이다. 마음이 깨어있고 고요해서 우리가 느낌을 그 시작단계에서 분명하게 주시할 수만 있다면, 그런 기회는 얼마든지 누릴 수 있을 터이니까.

 

느낌 수관에서 가장 요긴한 것은, 느낌이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느낌을 마음챙겨 알아차리고 `이것은 즐거운 느낌, 이것은 괴로운 느낌, 이것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각각 또렷이 구별해내는 일이다. `뒤섞인 느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느낌이 일어나면 그것이 짧게 지속되더라도 그 느낌에 대해서는 끝날 때까지 계속되는 동안 내내 유의하여 마음챙김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느낌이 꺼지는 종결점을 꾸준히 주시하다보면 차츰차츰 그 순간이 더 분명하게 포착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감정, 생각, 의지 따위들을 훨씬 용이하게 옭아맬 수 있을 뿐 아니라 마침내는 멈추게도 할 수 있게 된다. 보통 때는 이들 감정들이 느낌에 따라붙어 습관적으로 어느결에 엉겨버리곤 한다. 즐거운 느낌은 으레 습관적으로 쾌락과 욕구에 연결되며 괴로운 느낌은 혐오에,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중립적 느낌은 지루함과 혼미에 연결되며 또한 그릇된 견해의 배후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느낌의 생멸(生滅)을 관하는 데에 순수한 `맨주의'(bare attention)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들 오염물들이 섞이지 못하도록 붙들어 둘 수 있으며 혹시 오염현상이 일어나더라도 그 본색을 드러나게 만들어, 그냥 두었으면 강력해질 뻔했던 것들도 꼼짝없이 주저앉게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느낌을 부풀었다 터지는 거품으로 관찰하게 되면 갈애 또는 혐오와 느낌과의 연결관계는 점점 약해져서, 끝내는 그 고리마저도 끊어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 수행해 가면, 좋고 싫은 것에 대한 집착도 줄어들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비와 연민이라든가 지족(知足), 인욕, 관용 같은 한결 고상한 감정과 덕성들을 키울 수 있는 내면 공간은 점점 더 넓어지게 될 것이다.

 

이 관법 공부에서는 느낌에 티끌만큼이라도 `나' 또는 `내것' 따위의 관념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느낀다(고로 나는 존재한다)" 따위로 `나'라는 개념을 붙여선 안된다. 아울러 "기분이 참 좋다. 난 정말 행복해!"라는 식으로 느낌의 소유주가 된 듯한 생각이 있어서도 안된다. 즐거운 느낌을 더 누리고자 할 때엔 갈애가 생겨난다. "나는 괴로워. 난 정말 불행해!" 하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할 때에는 혐오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나'니 `내것'이니 하는, 사실과 다른 그릇된 견해를 탈피해서, 우리는 느낌들이 한낱 조건지워진, 덧없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올바로 알고 있어야[正知, sampaja~n~na]만 한다. 성성한 마음챙김이 빈틈없이 유지되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는 것은 단지 이러이러한 느낌의 정신적 작용일 뿐이라는 그 엄연한 맨사실 자체에 마음챙김을 집중해야 한다. 염처경 에서도 말하듯이 올바른 앎[正知]은 통찰과 마음챙김[正念], 이 두 가지의 계발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에도 쓰여질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느낌에 대해, 어떤 주체가 있어 그 느낌을 `느낀다'고 생각하고 있는 한, 심지어 명상 중에도 그런 짓을 하는 한, 관법 수행에 진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느낌을 `나'니 `내것'이니 하는 식으로 자신과 연결시키지 않고 올바로 알아차리는 일은 느낌을 일어나게 하는 신체적인 자극과 느낌 자체를 명확히 분간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그 자극에 뒤따라 일어나는 정신적 반응과 느낌과도 구분하게 해준다. 그렇게 되면 수행자는 주의력을 오로지 느낌에만 집중시킬 뿐 엉뚱한 데로 빠져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 `느낌에서 느낌을 주시한다'라고 말한 의취가 바로 이것이다. 수행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수행자는 `정신, 물질을 분명히 식별하는(naama­ruupa­pariccheda) 통찰지' 주4) 를 성취하는 쪽으로 성큼 다가선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진전하려면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반드시 그 느낌이 매순간 생멸하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마음챙겨 관찰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렇게 공부해 나가면 무상(無常)을 점점 더 깊이 체험하기에 이르는데, 이와 같은 체험이야말로 구경해탈에 들어서는 관문 중에 하나인 것이다. 관법 수행을 하는 중에, 느낌이 사라지는 순간을 더욱 예리하게 주목하게 되면 될수록 명상자는 그 마음에 느낌의 무상성을 깊이 각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느낌 이외에도 다른 정신적 육체적 변화 과정에서도 얻을 수 있는데, 이 경험이 점점 익어가면 멸괴지 주5) 가 나타난다. 그 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자신이 더 깊은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길에 올바로 들어섰음을 알게 될 것이다.

 

느낌 수관은 고의 쇠사슬 중 가장 약한 부분을 끊어내는 데에 유효한 도구임은 분명한데 위빠싸나 수행법을 닦을 때에 그 힘이 최대로 발휘된다. 또 그렇게까지 본격적이지는 않더라도,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에 대해 고요히 숙고해 보거나, 아니면 나중에 되돌아보기만 하여도, 느낌 수관은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렇게 하다보면 머지 않아 느낌과 감정이 `분리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목전의 감정을 바라보며 숙고하거나 지내놓고 돌이켜 숙고해보기만 해도, 다음 번에 같은 느낌이나 감정이 생겨났을 때 그것들을 좀더 확연히 알아차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좋아서 날뛰거나 의기소침해지는 등 지나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일도 없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바라보거나 되돌아보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마음의 견고함과 평정상태가 차차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 수관은 그것만을 지속적으로 해서는 안되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느낌이 일어날 때 어떻게 감정이 뒤따라 일어나는지 그 구조를 잘 알게 될 때까지, 적절한 상황에서 적당한 기간 동안만 닦으면 된다. 이와 같은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조복할 수 있는 힘이 저절로 커지게 된다. 혹 이처럼 느낌과 감정에 의식을 집중하다가는 너무 냉담해지거나 정서적으로 메말라 버리지 않을까하고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기우이다. 오히려 우리의 정신과 마음은 앞에서 말한 더욱 고상한 정서를 향해 환하게 열리게 될 것이다. 느낌 수관이 따뜻한 인간관계를 가로막지는 않으며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모름지기 집착의 열병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뿐이며 이러한 체험은 이 고(苦)의 세계에서 그것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꽤나 큰 충족감을 가져다 줄 것이다.

 

매일매일 이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서원 더욱 크게 익어가리니

느낌에 대한 수관을 통해

저 드높은 뜻 성취되기를

이 마음 고에서 완전히 해탈하기를!

 

불기 2537(1983)년 정월

스리랑카 캔디에서

냐나뽀니까 합장

 

 

염수경

 

―상응부 느낌편―

 

1. 삼매

 

3. 주6)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들이,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니라.

 

4 삼매에 들어 분명히 알며

마음챙기는 부처님의 제자는

느낌【원주1】을 알고 느낌(이 어떻게 비롯되는지) 그 기원【원주2】을 알며 1

어디서 느낌이 그치는지,【원주3】

그리고 느낌의 멸진(滅盡)에로 이끄는 길【원주4】 을 아느니라.

느낌의 멸진에 다달았을 때 비구는

갈증이 풀려 열반을 성취【원주5】한다. 주7) 2

 

2. 행복

 

3.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들이, 비구들이여, 곧 세 가지 느낌이니라.

 

4. . 즐거움이든 괴로움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마저도,

(또) 내가 겪든 남이 겪든 주8)

그 어떤 느낌에 접하든 간에,【원주6】 1

 

그 모두를 괴로움으로 아나니,

거짓되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것.

그것들이 부딪치고 또 부딪쳐왔다가

사라져 가는 양을 지켜봄으로써【원주7】

그는 느낌으로부터 초연함, 즉 열정에서

벗어남[離欲]을 얻는다. 2

 

3. 버림

 

3.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들이, 비구들이여, 곧 세 가지 느낌이니라.

 

4. 비구들이여, 즐거움을 느낄 때 탐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원주8】을 버려야 한다. 괴로움을 느낄 때 저항(염오)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경우, 무지(無知)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5. 비구가 즐거운 느낌을 대하여 탐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고, 괴로운 느낌을 대하여 저항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하여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을 버렸다면, 그 때 그는 고질적 잠재성향에서 벗어나 올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다음 생에 다시 몸을 받게끔 묶는) 족쇄를 풀어버렸으며, 아만【원주9】을 철저히 꿰뚫어보아 고(苦)를 끝낸 것이다.

 

6.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은 알지 못한다면

그는 탐욕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1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느낌의 본성은 알지 못한다면

그는 미움에 마음이 쏠려

해탈을 얻지 못하리라. 2

 

그리고 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주9),

대지혜자 그것을 평화롭다고 말씀하셨지만,

그것 또한 맛들여 매달린다면,

그는 결코 고(苦)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리라. 3

 

그러나 비구가 열심이어서

분명히 알아차리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으면

그는 모든 느낌의 본성을 꿰뚫게 될 것이다. 4

 

또 그렇게 됨으로써 그는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다할 것이며,

지혜가 성숙하고, 법의 길에 확고하며

(언젠가) 수명이 다하여 몸이 무너질 때엔

어떤 헤아림으로도 개념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은 없으리라. 5

 

4. 바닥없는 구렁텅이

 

3. 비구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가 '큰 바다속에 바닥없는 구렁텅이【원주10】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실제로 있지도 않고 이치에 맞지도 않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원주11】

. 비구들이여, 그 바닥없는 구렁텅이는 차라리 괴로움으로 찬 육체적 느낌을 이르는 말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4. 배우지 못한 범부가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 사람을 일러 바닥없는 구렁텅이를 감당해내지 못하고 그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찾지 못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라 해야 할 것이다.

 

5.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원주12】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도 않는다. 그를 일러 그 바닥없는 구렁텅이를 감내하며 그 속에서 발 디딜 곳을 찾아내는, 참으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 부른다.

 

6 고통스런 육체적 느낌이

목숨을 앗아갈 듯 일어나는 것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

그는 괴로움을 당하면 부들부들 떤다.

그는 울부짖고 큰소리로 통곡한다.

허약하고 무력한 사람,

그는 그 구렁텅이에 맞서지 못하며,

발판도 마련하지 못한다. 주10) 1

 

그러나 바로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데도 떨지 않고,

괴로운 신체적 느낌이 일어나는 것을

견뎌내는 사람,

그는 진실로 그 구렁텅이를

버티어 낼 뿐만 아니라

그 깊은 속에서도

능히 안전한 발판을 확보한다. 2

 

5.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3. 비구들이여, 다음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 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괴로운 느낌들을 가시로 볼 줄 알아야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을 무상한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4. 비구가 즐거운 느낌들을 괴로움으로 볼 줄 알며 괴로운 느낌들을 가시로 볼 줄 알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을 무상한 것으로 볼 줄 안다면 그는 바로 보는 사람이라 불린다. 그는 갈애를 끊었고 (몸을 받게 하는) 족쇄를 풀었으며, 아만을 철저히 꿰뚫어보아 고를 끝낸 것이다.

 

행복에서 고통을 읽어내며

고통스런 느낌을 가시처럼 여기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저 평화로운 느낌에서

무상을 인식하는 사람

이들 느낌들을 충분히 이해하는

그러한 비구야말로,

진실로 올바른 안목을 지닌 것이다.

또 느낌들을 꿰뚫어 보았기에

그는 바로 이생에서 번뇌가 다하며,

지혜가 무르익고 법의 길에 확고하여

언젠가 수명이 다해서

몸이 무너질 때엔

어떤 헤아림으로도 개념으로도

그를 가늠할 길은 없을 것이다.

 

6. 화살

 

3. 비구들이여,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도 즐거운 느낌을 느끼며, 괴로운 느낌을 느끼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4. 마찬가지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도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

 

5. 그러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으며 어떤 다른 점이 있으며, 어떤 차이가 있는가.

 

6. 존자시여, 주11)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내는 이 주12) 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부디 존자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께서 말씀해 주시면 주13)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7. (법을)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그것으로 멈추지 않고 정신적으로까지)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느낌을 겪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8.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괴로운 느낌을 접하게 되면, 그는 그것에 저항(하고 분개)한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고 분개)하는 그에게는 그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된다. 그 괴로운 느낌에 밀려 이제 그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가 그처럼 구는가?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길 말고는 그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에겐,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자리잡게 된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samudaya)과 꺼짐(atthagama)을, 그리고 이러한 느낌들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이처럼 느낌의 일어남과 꺼짐을 그리고 느낌들에 수반하는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관해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자리잡게 된다. 즐거운 느낌을 경험하거나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거나 간에 그는 느낌에 매인 사람으로서 그 느낌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태어남, 늙음, 죽음, 근심, 탄식, 괴로움, 슬픔, 절망에 매인 배우지 못한 범부라 한다. 참으로 그는 괴로움에 매여 있나니, 이를 나는 분명히 천명하노라.

 

9. 비구들이여, 그러나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 느낌만을 경험할 뿐이며 결코 정신적인 느낌은 겪지 않는다.

 

10.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에 맞았지만 그 첫 번째 화살에 연이은 두 번째 화살에는 맞지 않은 것과 같다. 그래서 그는 화살 하나에 맞은 괴로운 느낌만을 겪을 뿐이다. 그처럼 비구들이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괴로운 느낌에 접하더라도 결코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치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한 가지 느낌, 즉 육체적인 느낌만을 경험하는 것이다.

 

괴로운 느낌에 접했다 해서 그는 그것에 저항(하고 분개)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겐 그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는다. 그 괴로운 느낌에 밀려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쪽으로 나아가지도 않나니, 왜 그런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것 말고도 괴로운 느낌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 감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에겐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자리잡지 않는다. 그는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꺼짐 그리고 이들 느낌들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러한 느낌들의 일어남과 꺼짐 그리고 이들 느낌들의 달콤함과 위험함 그리고 (느낌들로부터)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기 때문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관해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않는다. 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할 때 그는 그 각각의 느낌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사람을 일컬어 태어남, 늙음, 죽음, 근심, 탄식, 괴로움, 슬픔, 절망에 매이지 않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 한다. 그는 결코 괴로움에 매여 있지 않다고 나는 분명히 천명하노라.

 

11. 비구들이여, 이것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와 배우지 못한 범부간의 구별이요, 다른 점이며, 차이나는 점이다.

 

12. 느낌에 동요되지 않나니, 지혜있는 이,

많이 들은 이[多聞者],

즐거움이나 괴로움에도 움직이지 않으니,

현자와 범부간에 능숙함의 차이가

이렇듯 크나니. 1

 

법을 터득한 이, 많이 들은 이,

이 세상과 피안의 세계를 올바로 보는 이,

기꺼운 법에 그 마음 설레지 않고

역겨움에 혐오심을 내지 않나니. 2

 

순(順) 역(逆)이 모두 흩어지고 꺼져서

이미 존재하지 않나니.

번뇌없고 근심없는 길을 알아

올바로 통찰하는 자

존재의 피안에 도달했다고 이르나니. 3

 

7. 병실에서 (1) 주14)

 

1.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의 큰 숲에 있는 중각당(重閣堂)에 머물고 계셨다.

 

2. 세존께서는 해질 무렵 홀로 앉았던 곳에서 일어나 병실로 가셨다. 병실에 도착한 세존께서는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으시고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겨(sato) 분명히 알아차리면서(sampajaano) 시간을 보낼지라. 주15) 이것이 참으로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권고이니라.

 

3.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챙기[正念]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몸을 대하여 몸 수관(身隨觀)을 하면서 세상과 관련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머문다.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느낌을 대하여 느낌 수관(受隨觀)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마음을 대하여 마음 수관(心隨觀)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법을 대하여 법 수관(法隨觀)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실로 이와 같이 마음을 챙기느니라.

 

4. 그리고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분명히 알아차리[正知]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갈 때나 돌아설 때나 분명히 알아차린다. 앞을 똑바로 보거나 다른 데를 볼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리며,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가사를 수할 때에나 발우를 다룰 때에도.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에도. 용변을 볼 때에도.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할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린다. 주16)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처럼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5.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마음챙겨 온전히 알아차리면서 시간을 보낼지라. 이것이 참으로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권고이니라.

 

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지워졌다. 주17) 그런데 이 몸은 진실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緣已生)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이생인 몸에 의해 조건지워진 이 즐거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aniccaa)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vay )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離欲, viraagaa]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nirodhaa)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pa.tinissaggaa)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몸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그에게서 몸에 대한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한 갈망의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7.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진실로 무상한 것이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이생인 몸에 의해 조건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겠는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그에게서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저항하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8.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지워졌는가? 바로 이 몸에 의해 조건지워졌다. 그런데 이 몸은 진실로 무상한 것이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이생인 몸에 의해 조건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겠는가?"

그는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몸에 대해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초연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그에게서 몸에 대하여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하여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은 사라진다.

 

9. 만약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주18)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안다. 그것이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10. 즐거운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11.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안다.

 

12. 이는 마치 호롱불이 기름과 심지를 의지하여 타는데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불꽃은 받쳐주는 것이 없어져 꺼지고 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낄 경우 "지금 나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안다.

 

8. 병실에서 (2)

 

1. 한때 세존께서는 웨살리의 큰 숲에 있는 중각당(重閣堂)에 머물고 계셨다.

 

2. 세존께서는 해질 무렵 홀로 앉았던 곳에서 일어나 병실로 가셨다. 병실에 도착한 세존께서는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으시고 비구들에게 이렇게 법을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매순간을 보낼지라. 이것이 참으로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권고이니라.

 

3. 그러면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마음을 챙기[正念]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몸을 대하여 몸 수관(身隨觀)을 하면서 세상과 관련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느낌을 대하여 느낌 수관(受隨觀)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마음을 대하여 마음 수관(心隨觀)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그는 법을 대하여 법 수관(法隨觀)을 하면서, 세상에 관한 욕심과 슬픔을 극복해내며 열심히,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문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실로 이와 같이 마음을 챙기느니라.

 

4. 그리고 비구들이여, 비구는 어떻게 분명히 알아차리[正知]는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걸어갈 때나 돌아설 때나 분명히 알아차린다. 앞을 똑바로 보거나 다른 데를 볼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리며, 구부리거나 펼 때에도. 가사를 수할 때에나 발우를 다룰 때에도.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에도. 용변을 볼 때에도. 걷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나고, 말하고 침묵할 때에도 분명히 알아차린다.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처럼 분명히 알아차리는 것이다.

 

5.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마음챙겨 온전히 알아차리면서 시간을 보낼지라. 이것이 참으로 그대들에게 주는 나의 간곡한 권고이니라.

 

6.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지워졌나? 바로 촉(觸, phassa) 주19) 에 의해 조건지워졌다. 이 촉은 진실로 무상한 것이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다. 이렇듯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이생인 촉에 의해 조건지워진 이 즐거운 느낌이 어찌 영원할 수 있는가?"

 

그는 촉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열정이 식어감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촉에 대해 그리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열정이 식어감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비구에게서 촉과 즐거운 느낌을 갈망하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7. 그리고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지워졌는가? 바로 촉에 의해 조건지워졌다. 이 촉은 진실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다. 이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이생인 촉에 의해 조건지워진 이 괴로운 느낌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는가?"

 

그는 촉에 대해 그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열정이 식어감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촉과 괴로운 느낌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열정이 식어감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비구에게서 촉과 괴로운 느낌에 저항하려드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8.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처럼 마음챙겨, 분명히 알아차리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머무는 중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안다. 즉 "지금 나에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다. 이것은 조건지워진 것이며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이 아니다. 무엇에 의해 조건지워졌는가? 바로 이 촉에 의해 조건지워졌다. 그런데 이 촉은 진실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다. 이 무상하고 형성된 것이고 연이생인 촉에 의해 조건지워진 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어떻게 영원할 수 있는가?"

그는 촉에 대해 그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상함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열정이 식어감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른다. (이렇게) 몸에 대해 그리고 촉에 대해 무상을 관하며 머무르고, 사그라짐을 관하며 머무르고, 열정이 식어감을 관하며 머무르고, 그침을 관하며 머무르고, 놓아버림을 관하며 머무는 비구에게서 촉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 무지해지려는 고질적 잠재성향이 사라진다.

 

9. 만약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안다. 그것은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란 걸 안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안다. 그것은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이 무상한 줄 안다. 그것은 연연할 것이 못되는 줄 안다. 그것이 즐길만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10. 즐거운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낄 경우 그는 그것에 매이지 않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느낀다.

 

11. 그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모든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안다.

 

12. 이는 마치 호롱불이 기름과 심지를 의지하여 타는데 기름과 심지가 다하면 불꽃은 받쳐주는 것이 없어져 꺼지고 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낄 경우 "지금 나는 몸이 무너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낄 때 "나는 지금 목숨이 끊어지는 느낌을 느낀다"라고 안다. 그는 "지금 곧 이 몸 무너져 목숨이 끊어지면 즐길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느낌들도 싸늘하게 식고 말 것이다"라고 안다.

 

9. 무상

 

3. 비구들이여, 이들 세 가지 느낌들은 무상한 것이요,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니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그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다.

 

4. 세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5.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 느낌들은 참으로 무상하며, (요소들로) 형성된 것이며 연이생이어서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그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인 것이다.

 

10. 촉에 뿌리박은 느낌

 

3. 비구들이여, 여기 이 세 가지 느낌들은 촉에서 생긴 것이며, 촉에 뿌리박고 있으며 촉을 원인으로 하며 촉에 의해 조건지워졌느니라.

 

4. 세 가지란 어떤 것들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5. 비구들이여, 즐겁게 느껴지기 마련인 촉에 반연하여 즐거운 느낌이 일어난다. 즐겁게 느껴지기 마련인 그 촉이 그치면,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그 감각작용【원주15】 ― 다시 말해 그 촉에 의존해 일어난 그 즐거운 느낌 ― 역시 그치고 가라앉는다.

 

6. 괴로운 느낌을 가져올 촉을 반연하여 괴로운 느낌이 일어난다. 괴롭게 느껴지기 마련인 그 촉이 그치면,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감각작용 ― 다시 말해 그 촉에 의존해 일어난 그 괴로운 느낌 ― 역시 그치고 가라앉는다.

 

7. 비구들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가져올 촉을 반연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가져올 촉이 그치면 그것으로부터 생겨난 감각작용 ― 다시 말해 그 촉에 의존해 일어난 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 역시 그치고 가라앉는다.

 

8. 마치 두 개의 막대기를 맞대어 비비면 열이 생겨 불꽃이 일어나고, 그리고 그 막대기를 떼어 분리시키면 그들에 의해 생긴 열기도 그치고 가라앉듯이.

 

9. 비구들이여, 이들 촉에서 생겼고 촉에 뿌리박고 있으며 촉을 원인으로 하며 촉에 의해 조건지워진 세 가지 느낌도 꼭 그와 같나니, 어느 한 가지 촉 주20) 에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이 일어나며, 그 촉이 그치면 그에 상응하는 느낌도 그치는 것이다.

 

11. 한적한 곳

 

2. 어느 때 한 비구가 세존을 뵈러 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존자시여, 제가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앉아있는 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세존께서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그것이다. 이 셋을 세존께서는 설하셨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또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고 설하셨다.' 존자시여, 여기서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움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까?

 

4. 잘 말했다, 비구여. 잘 말했다! 나는 세 가지 느낌을 가르쳤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 셋을 나는 가르쳤다. 또 한편으로 비구여, 나는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 뒤의 말은 모든 조건지워진 현상[諸行, sa.nkhaaraa] 주21) 의 무상함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제행(諸行)이 무너지기 마련이며, 사그라지기 마련이며, 열정이 식기 마련이며, 그치기 마련이며,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니라. `느껴진 것은 무엇이든지 괴로운 것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니라.

 

5. 비구여, 나는 더 나아가서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 주22) 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初禪)에 들면 말(vaacaa)이 그치며, 이선(二禪)에 들면 생각일으킴(vitakka)과 추론적 사유(vicaara) 주23) 가 그치며, 삼선(三禪)에 들면 희열(piiti)이 그치며, 사선(四禪)에 들면 입출식(入出息)이 그치며, 공무변처(空無邊處)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色想, ruupasa~n~naa]이 그치며, 식무변처(識無邊處)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想受滅)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貪]이 그치고 성냄[瞋]이 그치고, 미망[癡]이 그친다.

 

6. 비구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 주24) 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고 성냄이 가라앉고, 미망이 가라앉는다.

 

 

7. 비구여, 무릇 여섯 가지 고요함 주25) 이 있나니 ,초선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원주16】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2. 허공 (1)

 

3. 비구들이여, 허공 중에는 갖가지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 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갖가지 느낌들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저 위의 허공 중에는 온갖 바람들이 불고 있어,

동에서 오는가 하면 서에서도 오고,

북에서 오는가 하면 또 남에서도 불어닥치고, 1

 

먼지 섞인 바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찬 바람인가 하면 더운 것도 있으며,

거센 바람인가 하면 부드러운 바람도 불고 ―

가지가지로 바람이 불고 있다. 2

 

그와 같이 여기 이 몸속에서도

가지가지로 느낌이 일어나나니,

즐거운 느낌들, 괴로운 느낌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라. 3

 

그러나 비구가 열심이어서 분명히 살피어

다시 태어남의 기반을 허물기에 열심이라면

마침내 모든 느낌을 두루 통찰하는

현자(賢者)가 되리니. 4

 

그는 느낌을 두루 통찰함으로써

바로 이 생에서 번뇌가 다하여,

몸이 무너질 때엔 법에 확고히 주하며

헤아림으로는 미치지 못할

지혜의 달인일지니. 5

 

13. 허공 (2) 주26)

 

비구들이여, 허공 중에는 가지각색의 바람이 불고 있다. 동에서, 서에서, 북에서, 남에서 불어오는 바람, 먼지 섞인 바람, 먼지 없는 바람, 더운 바람, 찬 바람, 부드러운 바람, 거센 바람들이다.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이 몸속에서도 가지각색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14. 객사(客舍)

 

비구들이여, 객사에는 동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고, 서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북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하며, 남에서 온 사람들이 묵기도 한다. 무사계급 사람들이 와서 묵기도 하고, 바라문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평민들이 와서 묵기도 하며, 노예들이 와서 묵기도 한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이 몸에도 여러 종류의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출세간적인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출세간적인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며,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기도 한다.

 

15. 아난다 (1) 주27)

 

2. 어느 때 아난다 장로가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아난다여, 이 셋이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것을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5.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6.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7.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고요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선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고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6. 아난다 (2)

 

2. 어느 때 아난다 장로가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은 아난다 장로에게 세존께서 물으셨다. 느낌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냐?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이냐? 위험함이란 무엇이냐? 벗어남이란 무엇이냐?

 

4. 존자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내는 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존자시여, 부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시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게 되면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그러면 아난다여, 듣고 잘 유념하도록 해라, 내가 말할테니. 네, 존자시여. 아난다 장로가 대답했다.

 

5. 세존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6. 아난다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7.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8. 아난다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고요함에 대하여 가르쳤다. 초선을 이룬 자에게선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선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7. 비구 다중(1)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3.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나고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으로부터 벗어남이다.

 

5. 비구들이여,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그침에 대해서도 설했다. 초선에 들면 말이 그치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그치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그치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그치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그치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그친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그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그치고 성냄이 그치고, 미망이 그친다.

 

6. 비구들이여, 다시 더 나아가서 나는 제행의 순차적인 가라앉음에 대해서 가르쳤다. 초선에 든 자에게서는 말이 가라앉으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가라앉으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가라앉으며, 공무변처에 들면 물질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식무변처에 들면 공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무소유처에 들면 식무변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으며, 비상비비상처에 들면 무소유처에 대한 인식이 가라앉는다.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가라앉는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가라앉으며 성냄이 가라앉으며, 미망이 가라앉는다.

 

7.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고요함이 있나니, 초선을 이룬 자에게서는 말이 고요해지며, 이선에 들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고요해지며, 삼선에 들면 희열이 고요해지며, 사선에 들면 입출식이 고요해지며, 상수멸에 들면 인식과 느낌이 고요해진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서는 탐욕이 고요해지며 성냄이 고요해지며, 미망이 고요해진다.

 

18. 비구 다중(2)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은 비구들에게 세존께서 물으셨다. 느낌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냐?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이냐?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이냐? 위험함이란 무엇이냐? 벗어남이란 무엇이냐?

 

4. 존자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원으로 하며, 세존을 봇도랑내는 이로 하며, 세존을 귀의처로 합니다. 존자시여, 부디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의 뜻을 (친히) 밝혀주신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세존으로부터 듣게 되면 비구들은 마음에 새겨 지닐 것입니다.

 

5~8.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를 일러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난다.

 

(앞의 경과 같이 상세히 설하시다.) 주28)

 

19. 목수 빤짜깡가【원주17】

 

2. 어느 때 목수 빤짜깡가가 우다이 장로를 뵈러 갔다. 가서 공손히 절을 올리고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여쭈었다.

 

"우다이 존자시여, 세존께서는 몇 가지의 느낌을 설하셨습니까?"

 

"오, 목수여,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이들이 세존께서 가르치신 세 가지 느낌입니다."

 

4. 이 말을 듣고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寂靜)하고도 오묘한 유(類)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5. 다시 우다이 장로가 목수 빤짜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두 번째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유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6. 세 번째로 우다이 장로가 목수 빤짜깡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 목수여, 세존께서 설하신 느낌은 두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셨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세 번째로 목수 빤짜깡가는 우다이 장로께 이렇게 말했다.

"우다이 존자시여, 참으로 세존께서 가르치신 것은 세 가지가 아닙니다. 세존께서 설하신 것은 두 가지 느낌입니다. 즉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존자시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적정하고도 오묘한 유의 즐거움이라고 세존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다이 장로는 목수 빤짜깡가를 설복시킬 수 없었고, 목수 빤짜깡가도 우다이 장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7. 아난다 장로가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이 논쟁 얘기를 듣게 되었다.

 

8. 그러자 아난다 장로는 세존께 나아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그렇게 앉아서 아난다 장로는 우다이 장로와 목수 빤짜깡가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전말을 세존께 아뢰었다.

 

9.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목수 빤짜깡가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우다이 비구의 주장은 옳았다. 마찬가지로 우다이 비구가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목수 빤짜깡가의 주장 또한 옳았다.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원주18】 아난다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느니라.

 

10. 참으로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렇듯 제각기(의 근기에 맞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여 신랄한 독설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 논쟁과 논박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아난다여, 이처럼 나는 방편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명되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서로를 우정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 할 것이다.

 

11. 아난다여, 여기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觸]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아난다여, 이것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아난다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나는[緣已生] 즐거움(sukkha)과 기쁨(somanassa)을 관능적 쾌락 주29) 이라 부른다.

 

12. 그런데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아난다여,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아주 멀리하고, 도덕적으로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不善法]을 멀리한 채,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불선법을) 멀리 떨쳐낸데서 오는[遠離生]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관능적)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13.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생각일으킴[尋]과 추론적 사유[伺]가 가라앉으면서 제이선에 들어 머무는 바, 그 선에는 내면적 확신이 있고, 그리고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앞의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4.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온전히 알아차리는 채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 바 `평온한 채로 마음챙겨 즐거움에 머문다'고 하는 제삼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5.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비구가 있어 즐거움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으며,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은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사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6.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색에 대한 인식[色想]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장애 주30) 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고, 그밖의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하며 공무변처(空無邊處 aakaasana~nc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7.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난다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무한하구나, 식(識)은'하며 식무변처(識無邊處, vi~n~naa.na~nc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8.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것도'하며 무소유처(無所有處, aaki~nca~n~n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9.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nevasa~n~naanaasa~n~naayatana)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20. 아난다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想受滅, 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아난다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원주19】

 

21. 그런데 아난다여, 때로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여보게 친구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간에 즐거움이라고 한다네." 주31)

 

20. 비구들

 

3.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세 가지로도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4. 참으로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법을 방편에 따라 다르게 설했는데, 이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지 않고 수긍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말다툼을 벌여 신랄한 독설로 서로 상처를 주면서 논쟁과 논박으로 치닫고야 말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나는 방편 따라 법을 설했는데, 제각기 잘 설해지고 잘 말해진 법에 동의하고, 수긍하고, 아주 흡족해하며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은 사이좋게 화합하여 언쟁하지 않고 서로를 우정어린 눈으로 보면서 물과 우유가 잘 섞이듯 할 것이다.

 

5. 비구들이여, 여기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혀로 인식되는 맛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니라.

 

비구들이여, 이것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에 의지하여 생겨나는 즐거움과 기쁨을 관능적 쾌락이라 부른다.

 

6. 그런데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말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것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다른 즐거움인가? 비구여, 여기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아주 멀리하고, 도덕적 향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법을 멀리한 채,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멀리 떨쳐낸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관능적)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즐거움이니라.

 

7.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면서 제이선에 들어 머무는 바, 그 선에는 내면적 확신이 있고 그리고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기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8.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마음챙기고 온전히 알아차리는 채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 바 `평온한 채로 마음챙겨 즐거움에 머문다'고 하는 제삼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과는 다른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9.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여기 비구가 있어 즐거움을 버렸고 괴로움도 버렸으며, 이미 그 이전에 기쁨과 슬픔은 사라져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가운데 평온에 기인한 마음챙김의 청정함이 있는 제사선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0.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색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했으며, 장애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고, 그 밖의 다양한 인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로 `무한하구나, 허공은'하며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한결 즐겁고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1.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하구나, 식은'하며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2.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없구나, 아무것도'하며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3.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4. 비구들이여, 만일 어떤 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중생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이요 기쁨이라 한다면,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가 있어 일체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상수멸(인식과 느낌의 그침)에 들어 머문다. 이것이 참으로 비구들이여, 그 즐거움을 능가하는 한결 수승한 또다른 즐거움이니라.

 

15. 그런데 비구들이여, 때로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문 고따마는 인식과 느낌의 그침을 설한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다시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것이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말하는 다른 외도 유행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 "여보게 친구들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운 느낌만을 즐거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네. 오히려 여래는 즐거움이면 그것이 언제 어디서 얻어지건간에 즐거움이라고 한다네"라고.

 

21. 시와까

 

1. 어느 때 세존께서는 왕사성 죽림정사의 다람쥐 키우는 곳에 머무셨다.

 

2. 거기에 몰리야 시와까라는 한 유행승(遊行僧)이 세존께 다가와서 정중히 인사를 올린 후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 유행승 몰리야 시와까는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고따마시여,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kata)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존경하는 고따마께서는 어떻게 설하십니까?"

 

4.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담즙(膽汁) 주32) 때문에 생기는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5.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점액(粘液) 때문에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6.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바람[風, vaata] 때문에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7.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그 세 가지가 겹쳐서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8.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계절의 변화에 의해서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9.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예기치 못한 충격에 의해서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10.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상해(傷害)에 의해서 생긴 것이니,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도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11. "시와까여, 어떤 느낌들은 업의 익음에 의해서 생긴 것이니[業報, 業異熟, kammavipaaka]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나 스스로 알 수 있고 세상에서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시와까여, 그런데도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문과 바라문들은 이런 학설과 견해를 가져 주장하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들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모두가 전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기인한 것이다'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스스로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과 어긋나고 세상에서 인정하는 사실과도 어긋나기 때문에, 나는 그들 사문과 바라문들이 잘못되었다고 설한다."

 

12. 이렇게 설하셨을 때 유행승 몰리야 시와까는 세존께 사뢰었다.

 

"훌륭하십니다 고따마시여! 훌륭하십니다 고따마시여! 세존께서는,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시고, 가려진 것을 드러내 보이시며, 미망에 빠진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시고, 눈 가진 자 보라며 어둠속에서 등불을 밝혀드신 것처럼 갖은 방편으로 법을 설해주셨습니다. 존자시여, 이 사람은 존자 고따마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또한 귀의합니다. 존자 고따마께서는 저를, 오늘부터 목숨이 있는 날까지 그분께 귀의한 재가신남(在家信男)으로 받아주소서."

 

22. 백여덟 가지 느낌

 

2. 비구들이여, 이제 (느낌에 대한) 백팔문(百八門) 법문(法門, dhamma-pariyaaya)을 설하리니, 잘 새겨들을지니라.

 

3. 비구들이여, 무엇이 백팔문 법문인가? 나는 방편에 따라 느낌들을 두 가지로 설했고, 느낌들을 세 가지로도 설했으며, 다섯 가지로, 여섯 가지로, 열여덟 가지로, 서른여섯 가지로, 때로는 백여덟 가지로 설하기도 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나는 방편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법을 설했느니라.

 

4. 비구들이여, 두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육체적인 느낌과 심적인 느낌이니, 이를 두고 두 가지 느낌이라 한다.

 

5. 비구들이여, 세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니, 이를 두고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6. 비구들이여, 다섯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즐거움의 기능[樂根, sukkhindriya], 괴로움의 기능[苦根, dukkhindriya], 기쁨의 기능[喜根, somanassindriya], 슬픔의 기능[憂根, domanassindriya], 평온의 기능[捨根, upekkhindriya]이니, 이를 두고 다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7.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눈과 닿아서[眼觸] 생긴 느낌, 귀에 닿아서[耳觸] 생긴 느낌, 코에 닿아서[鼻觸] 생긴 느낌, 혀에 닿아서[舌觸] 생긴 느낌, 몸에 닿아서[身觸] 생긴 느낌, 마음에 닿아서[意觸] 생긴 느낌이니, 이를 두고 여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8. 비구들이여, 열여덟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기쁨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위의 여섯 가지 느낌, 슬픔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여섯 가지 느낌, 평온으로 대상에 다가가는 여섯 가지 느낌이니, 이를 두고 열여덟 가지 느낌이라 한다.

 

9. 비구들이여,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세속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기쁨, 출가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기쁨, 세속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슬픔, 출가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슬픔, 세속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평온, 출가생활을 바탕으로 한 여섯 가지 평온이니, 이를 두고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라 한다.

 

10. 비구들이여, 백여덟 가지 느낌이란 무엇인가? 과거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 미래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 현재의 서른여섯 가지 느낌이니, 비구들이여, 이를 두고 백여덟 가지 느낌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백팔문 법문이니라.

 

23. 비구

 

2. 어느 때 한 비구가 세존을 뵈러 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남이란 무엇입니까?"

 

4. "비구여, 이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 이를 세 가지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남으로써 느낌이 일어난다. 갈애(ta~nhaa)가 곧 느낌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이니라.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에서 벗어남이다.

 

24. 과거 지(智)

 

2. 비구들이여, 내가 깨닫기 전, 아직 정등각을 성취하지 않은 보살이었을 때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참으로 느낌이란 무엇인가?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이며, 느낌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은 무엇인가? 느낌의 그침은 무엇이며,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은 무엇이며, 그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3. 비구들이여, 그리고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세 가지 느낌이 있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들을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나면 느낌이 일어난다. 갈애가 느낌의 일어남에 이끄는 길이다.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에서 벗어남이다.

 

4. 비구들이여, `이것이 느낌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주33)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5.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6.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에 이끄는 길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7. `이것이 느낌의 그침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8. `이것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9.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10. `이것이 느낌의 위험함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11. `이것이 느낌에서 벗어남이다'라고 하자, 나에게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하여 눈이 생겨났다. 지(智)가 생겨났다. 혜(慧)가 생겨났다. 명(明)이 생겨났다. 광(光)이 생겨났다.

 

25. 여러 비구들

 

2. 어느 때 여러 비구들이 세존을 뵈러 왔다. 공손히 절을 올리고는 한곁에 앉았다.

 

3. 그렇게 앉아서는 세존께 여쭈었다.

"존자시여, 느낌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은 무엇입니까,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달콤함이란 무엇입니까, 느낌에 있어 위험함은 무엇입니까, 그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4. 비구들여, 이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이들을 느낌이라 한다. 촉이 일어남으로써 느낌이 일어난다. 갈애가 곧 느낌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이니라. 촉이 그치면 느낌이 그친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 그것이다.

 

느낌으로 인해서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것이 느낌의 달콤함이다. 느낌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기 마련이니, 이것이 느낌에 있어 위험함이다. 느낌에 대한 욕탐을 제어하고 끊어버리면, 이것이 느낌에서 벗어남이다.

 

26. 사문과 바라문들 (1)

 

2. 비구들이여,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3.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이 세 가지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atthagama), 달콤함과 위험함,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가 (비록) 사문 가운데 있어도 사문이라 할 수 없으며 바라문 가운데 있어도 바라문이라 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비록 존경은 받지만 참 사문의 길과 참 바라문의 길을 지금 여기서 스스로 알지도 못하고 실현시키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문과 바라문이 되어 살아갈 뿐이다.

 

4. 그러나 참으로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이 세 가지 느낌들의 일어남과 사라짐,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면 그는 사문 가운데 사문이요 바라문 가운데 바라문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여기서 바로 알고 실현시켜 참 사문과 바라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27. 사문과 바라문들 (2)

 

(앞의 경과 완전히 동일함. 철자법에서 앞의 경은 samudaya.m ca인데 이번 경은 samudaya~nca 식으로 다를 뿐, 번역에선 어떤 차이도 나타낼 수 없어 생략함 ― 옮긴이 주)

 

28. 사문과 바라문들 (3)

 

3. 비구들이여, 참으로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느낌을 알지 못하고 느낌들의 일어남을 알지 못하고 느낌들의 일어남에로 이끄는 길을 알지 못하고 느낌의 그침을 알지 못하고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하고 느낌의 달콤함과 위험함,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면 그는 (비록) 사문이로되 사문답다 할 수 없으며 바라문이로되 바라문답다 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지금 사문된 의의(意義)를, 바라문된 의의를 스스로 터득하고 실증(實證)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가서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4. 그러나 참으로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느낌을 알고 느낌들의 일어남,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면 그는 사문다운 사문이요 바라문다운 바라문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사문의 의의를, 바라문의 의의를 지금 스스로 터득하고 실증하면서 그 자리에 들어가 머물고 있는 것이다.

 

29. 청정한 출세간

 

2. 비구들이여, 느낌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무엇이 그 셋인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곧 그 세 가지이니라.

 

3. 비구들이여, 세간적 희열[喜, piiti]이 있고, 출세간적 희열이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 또 있다. 세간적 즐거움[樂, sukha]이 있고,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고,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이 있다. 세간적 평온[捨, upekkhaa]이 있고, 출세간적 평온이 있고,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 있다. 세간적 해탈(解脫, vimokkha)이 있고, 출세간적 해탈이 있으며,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 있다.

 

4.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 희열인가? 비구들이여,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희열을 일컬어 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5.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희열인가? 여기에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멀리하고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멀리한 채,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멀리 떨쳐버린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또)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면서 내면적 확신이 있고,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제이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일컬어 출세간적 희열이라 하느니라.

 

6.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그보다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漏盡]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vimutta)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희열이 생겨난다.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희열이라 한다.

 

7.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인 즐거움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반연하여 생겨나는 즐거움을 일컬어 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8.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즐거움인가? 여기 한 비구가 있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고,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법을 멀리한 채,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를 수반하며, 멀리 떨쳐낸데서 오는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초선에 들어 머문다. (또)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가라앉으면서, 내면적 확신이 있고, 생각일으킴과 추론적 사유가 붙지 않는 마음의 단일성이 있으며,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이 있는 제이선에 들어 머문다. (또) 그는, 희열마저 차츰 사라져버리면서, 마음챙기고 온전히 알아차리는 채, 평온에 머문다. 안으로는 즐거움을 느끼면서. 성자들이 일컫는 바 `평온한 채로 마음챙겨 즐거움에 머문다'는 바로 제삼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컬어 출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9.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나니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즐거움이라 한다.

 

10.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 있나니, 그 다섯은 무엇인가? 눈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코로 인식되는 냄새가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혀로 인식되는 맛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몸으로 인식되는 닿음이 있으니,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매력있고, 유혹적이며, 욕심을 짝하고, 탐심을 부추기는 것들이다.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들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이다. 비구들이여, 이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을 반연하여 일어난 바 그 평온을 일컬어 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11.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평온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한 비구가 있어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리면서 그리고 이미 그전에 기쁨과 슬픔이 사라져서 비구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으며 마음챙김이 평온에 기인하여 극히 청정한 제사선에 들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컬어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12.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버린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평온이 생기나니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평온이라 한다.

 

13.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세간적 해탈인가? 물질[色]과 관련된 해탈을 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14.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출세간적 해탈인가? 무색(無色)과 관련된 해탈을 출세간적 해탈이라 한다.

 

15.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인가? 번뇌를 완전히 말려 버린 비구가 있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성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자신의 마음을 관찰할 때 해탈이 생기나니 이를 일컬어 더 큰 출세간적 해탈이라 하는 것이다.

 

부록

 

느낌을 통찰하는데 도움되는 여러 성구들

 

느낌들이란 참으로 거품과 같나니

 

-- 상응부 , 온상응(蘊相應), 제95경.

 

일체사는 느낌에 귀결된다.

 

-- 증지부 , 여덟에 관한 모음, 제83경.

 

모든 느낌들은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간에, 안에서든 밖에서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우월하든 간에,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하나니.

 

-- 상응부 , 온상응, 제59경 무아상경(無我相經) 주34).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있는 동안에는 즐겁지만 변할 때는 괴롭고, 괴로운 느낌은 그것이 있는 동안은 괴롭지만, 변하면 즐겁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그것을 알면 즐겁고 모르면 괴롭다.

 

중부 , 제44경, 유명소경(有明小經).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 느낌을 자아라고 간주하지도 않으며, 자아를 느낌의 소유주로 간주하거나, 느낌이 자아 안에 포함되어 있다거나, 자아가 느낌 안에 포함된다고도 간주하지 않는다.

이렇게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느낌이라는 올가미에 걸리지 않았으며 안팎의 올가미들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해야 될 것이다. 그는 언덕을 보았으며, 저편 언덕(피안)을 보았으며, 괴로움에서 완전히 해탈했다고 나는 말한다.

 

--상응부 , 온상응, 제117경.

 

비구들이여, 느낌들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연기를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다양함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이 익어 맺는 결실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그침을 알아야 하며, 느낌들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알아야 한다고 이미 설했다. 어떤 인연으로 그렇게 설했는가?

 

비구들이여, 무엇이 느낌인가? 이 세 가지가 느낌이나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니라.

 

어떤 것이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지우는가? 촉이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지운다.

 

어떤 것이 느낌들의 다양함인가? 세간적 즐거운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 즐거운 느낌이 있다. 세간적 괴로운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 괴로운 느낌이 있다. 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고, 출세간적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있나니 이를 일러 느낌들의 다양함이라 한다.

 

어떤 것이 느낌들이 익어 맺는 결실인가? 이 느낌 또는 저 느낌에서 생긴 개아적 존재가 그 결실이다. 이때 그 존재가 띠는 복덕성 또는 비복덕성은 느끼는 당자가 야기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느낌들의 그침인가? 촉의 그침이 느낌의 그침이다.

 

그리고 이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八正道]이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이니 즉, 바른 견해,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선정이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이와 같이 느낌을 알고, 느낌들을 일어나도록 조건짓는 것을 알고, 느낌의 다양함을 알고, 느낌이 익어서 맺는 결실을 알고, 느낌의 그침을 알고, 느낌의 그침에 이르는 길을 알 때에 그는 통찰력이 있는 성스런 삶을 아는, 다시 말해 느낌의 그침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 증지부 , 여섯의 모음, 제63경.

 

이들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나는 설시(說示)하였나니 (이들은 저) 명석한 사문이나 바라문들조차 논박 못하고, 흠내지 못하며 비난하지 못하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떤 연유로 나는 이 성스러운 진리를 설할 수 있었는가?

 

여섯 가지 기본요소[六界] 주35) 를 반연하여 모태에 듦이 있고[入胎, gabbhassa-avakkanti], 모태에 들게 되면 명색(名色, naama-ruupa)이 있게 되고, 명색을 반연하여 육입(六入, salaayatana)이, 육입을 반연하여 촉(觸, phasso)이, 촉을 반연하여 느낌(受, vedanaa)이 있게 된다. 이제 그 느끼는 자【원주20】를 위해(vediyamaanassa) 나는 이것이 괴로움이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요, 이것이 괴로움의 그침이며, 이것이 괴로움의 그침으로 이끄는 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증지부 , 셋의 모음, 제61경.

 

"비구니들이여, 여기 기름 등불이 타고 있다고 칩시다. 그 기름도 심지도 불꽃도 불빛도 모두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무상해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그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불빛 또한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니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반연하여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제각기 나름대로 조건을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이 생겨나고, 조건들이 멸하면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느낌들도 멸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비구니들이여, 성스러운 제자가 참으로 이와 같이 볼 때 그는 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를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 중부 , 제146경, 난다까의 법문.

 

악기웨사나여, 즐거운 느낌은 무상하고 조건지워진 것이며, 연이생(緣已生)이며, 무너지기 마련이고, 희미해지기 마련이며, 바래기 마련이고 그치기 마련이다. 괴로운 느낌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또한 그러하다.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이것을 알게 되면 즐거운 느낌에 대해 싫증나게 되며,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도 싫증나게 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도 싫증나게 되느니라. 싫증내기에 욕망이 사라지게[離欲] 되고 욕망이 사라짐으로써 해탈하게 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고 아는 지혜가 생겨난다. 이제 그는 명확히 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해 마쳤으며,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악기웨사나여, 이렇게 마음이 해탈한 비구는 그 누구에게도 편들지 않고, 그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대로 언어를 취해서 쓰되 (세상 사람들처럼) 착각하지 않고 쓴다.

 

-- 중부 , 제 74경, 장과경(長爪經).

 

주석서에 나타나는 성구들

 

느낌(등 오온)의 일어남(과 그침과 그침에 이르는 길)을 있는 그대로 알면 집착없이 해탈로 나아가게 된다. 도에 맞기 때문이다.

 

느낌의 일어남 등을 완전히 통찰하지 못하면 마침내 윤회의 감옥속에 갇히게 된다. 그러한 (무명이) 업 형성[行]의 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미혹이 들어 느낌들의 참성질을 가려버리고 느낌들을 즐기고 있게끔 만든다.

 

그러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느낌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고 또 느낌에 대해 초연하게 된다.

 

느낌에서 위험을 읽을 줄 모르면 느낌에 대한 갈애가 증장하나니, 느낌에서 `달콤함'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느껴진 것에 대해서 욕심이 있을 경우에는 `나', `내것'이라는 관념에 붙들려(집착하여) 몸부림치고, 그리고 영원불변[常見] 따위의 관념에 붙들려 몸부림치게 된다. 이렇게 이어지게 되는 것은 무간연(無間緣) 주36) 에 의해서인 바, (유신견에 대한) 집착[取]은 갈애[愛]에 의해 조건지워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가 항상하다는 이론[常見] 따위를 내세우거나, 그것들에 상응하는 정서를 느끼는 자들에게는 촉(觸)이 그 인연(hetu paccaya) 주37) 이 되고 있다. 이 인연이 적용되는 까닭은 그런 견해나 정서를 갖는 일이, 감각 기관[根, indriya]과 대상[境, visaya]과 식[識, vi~n~naa.n]의 만남[三者和合]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 장부 , 제1경, `범망경'(梵網經)의 복주에서 ―

 

아비담마 주38) 에서 본 느낌[受]의 위치

 

우선 불교심리학에서는 느낌[受, vedanaa]을 즐겁게, 괴롭게,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게 감수되는 순수감각 현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따라서 느낌은 감정과 구분되어야 한다. 느낌은 맨감각이고 이러한 기본적 느낌에서 정서의 흐름인 감정이 일어난다. 그 감정은 또 느낌에다가 좋다 싫다 그 밖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덧붙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이란 수온(受蘊)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른바 사람이라는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 주39) 가운데 하나이다. 정서의 흐름(감정)속에 작용하고 있는 그 특정 요소들은 행온(行蘊)에 속하며 따라서 이것들은 수온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느낌은 네 가지 정신적 더미 중 하나인데 식(識)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이 수온, 상온, 행온이 불가분으로 함께 일어난다.

 

느낌은 감각기관[根, indriya]과 대상[境, visaya]과 식(識, vi~n~aa.na), 이들 세 가지 요소가 만날 때에는 언제나 생겨난다.

불교심리학에서 말하는 촉(觸, phassa)이 바로 이 셋의 만남을 이르는 말인데, 그 중에서 식의 존재여부가 촉의 결정요인이 되므로 이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과정이지 육체적 과정은 아니다. 이 과정은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신체기관과 여섯째인 의(意)에 의해서 조건지워지므로 모두 여섯 종류가 있는 셈이다. 이 여섯 가지 촉에 의해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느낌이 조건지워지는 것이다.

십이연기법(十二緣起法, pa.ticca-samuppaada)에서 이것은 "촉이 느낌을 조건짓는다[觸緣受, phassa-paccayaa-vedanaa]"는 연결고리에 해당된다. 만일 감정이 따라 일어난다면 그것은 그 다음, 즉 "느낌은 갈애를 조건짓는다[受緣愛, vedanaa-paccayaa-ta~nhaa]"라는 연결고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여섯 가지 감각의 대상[六境] 가운데 형상(色, ruupa)과 소리(聲, sadda)와 냄새(香, gandha)와 맛(味, rasa)에 닿아서 생겨난 맨느낌은 항상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는 점이다. 이들 네 가지 감각적 인식[想]에 관한 한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런 느낌이 따를 때는 그것은 최초의 반응인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뒤이은 인식과정상의 추가 단계가 되는 것이다. 한편 닿거나 압박하는 등의 육체적 감촉은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 중 어느 하나를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意)를 통한 정신적 촉은 기쁨, 슬픔 또는 정신적으로 담담한 느낌(upekkhaa)을 야기할 수 있다.

 

아비담마에서 느낌은 또한, 모든 형태의 식(識)에 공통되는 정신적 요소[心所, cetasika] 중의 하나가 된다. 주40) 달리 말하면 식의 경험은 모두가 어느 정도는 색조를 띠게 마련이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나 담담한 느낌이라 해서 아무런 색조가 없는 것이 아니고 그 나름대로 독특한 성질의 색조를 띤다는 것이다.

 

느낌 그 자체는 따로 떼어내 본다면 앞에서 말한대로 그것은 즐겁다, 괴롭다, 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라고 알게 되는 순수한 감각 현상이다. 이 기본적 느낌에 달라붙는 감정적, 실용적, 도덕적, 정신적 가치 등은 그 느낌과 관련되어 바로 뒤따라 일어나는 다른 정신적 요소들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 굳이 분류하자면 이들은 행온(行蘊)에 속하는 것이다.

이들 느낌과 같이 일어나는 이 정신 요소들의 작용과 특성에 따라 느낌이 좋거나 나쁘게, 고결하거나 저열하게, 업을 짓거나 짓지 않게, 세간적이거나 출세간적이게 되는 것이다.

느낌은 식(識)의 작용이 강하지 않을 때에는 대개 맨감각 단계에서 그치고 그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가 마음을 챙겨 느낌을 제어할 때에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런 경우 그 느낌에 대해선 이미 어떤 의미부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감정적으로든 지적으로든 간에.

 

불기 2547(1883)년 정월

스리랑카, 캔디에서

냐나뽀니까 합장

 

 

역자주

 

1) `아비담마에서 본 느낌의 위치'는 아비담마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독자에게는 다소 난해한 면이 있어서 이 책에서는 본문 뒤에 수록하였음.

 

2)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 개아가 있다는 믿음. 인간을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도록 묶고 있는 열 가지 족쇄(sa.myojana) 중 첫 번째. 유신견이란 우리가 오온 하나하나에 대해 다음 네 가지 믿음을 가짐으로써 생기므로 모두 스무 가지이다. (1-5)受 想 行 識 身이 자아라는 믿음. (6-10)자아가 受 想 行 識 身을 소유한다는 믿음. (11-15)受 想 行 識 身 안에 자아가 있다는 믿음. (16-20)자아 안에 受 想 行 識 身이 있다는 믿음. 예류과를 성취하면 유신견이 완전히 떨어지게 된다.( 중부 44경, 상응부 22장 1경.)

 

3) 맨: bare의 번역으로 `맨발', `맨얼굴'이라고 할 때의 뜻임.

 

4) 정신과 물질을 분명히 식별하는 통찰지 : 관법 수행(vipassanaa)을 통해서 증득하게 되는 경지의 하나. 빠알리 주석서에는 관법 수행의 향상단계를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1. 물질(ruupa)에 대한 분명한 식별, 2. 정신(naama)에 대한 분명한 식별, 3. 정신과 물질 둘 다에 대한 분명한 식별, 4. 정신과 물질이 조건지워졌음을(pa.ticcasamuppaada) 앎, 5. 정신과 물질이 조건지워졌기에 무상이요, 고(苦)요, 무아임을 앎.

 

5) 멸괴지(滅壞智, bhaaaga-~naa.na): 모든 형태의 존재의 붕괴를 보는 지혜. 무상 고 무아를 거듭 관하면 마음챙김과 올바른 알아차림[正念正知]이 예리해져 신체적 정신적 형성이 섬광처럼 분명해지며 이 단계에서 이들 형성물의 붕괴 해체상도 두드러지게 된다.

 

6) 1,2절이 생략되었고 3절부터 시작된다. 이 경이 상응부 속에 실린 수많은 경들 중의 한 편이므로 일일이 형식을 갖추지 않고 이처럼 1,2절을 생략한 것이다. 그러나 40쪽 제7경에서 보듯이 완벽하게 갖춘 경우도 있다.

 

7) 열반: 흔히 쓰이는 대로 죽음에 든다는 뜻이 아니고, 살아있는 채 불교 궁극의 경지인 열반을 성취한다는 뜻.

 

8) 원문은 `ajjhatta~nca bahiddhaa ca.' P.T.S.영역본과 일역본에서는 `안으로나 밖으로'로 새김.

 

9) 영역자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여기서부터는 거의 대부분 neutral feeling이라 옮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원문에 충실하여 계속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이라 옮기기로 한다. 그것은 neutral이 단순히 평면적인 의미에서 "중간의, 중립의" 뜻으로 이해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71쪽의 목수 빤짜깡가의 얘기를 참작할 필요가 있다.)

 

10) 우드워드(F.L.Woodward)는 "구렁텅이를 벗어나오지도 굳은 땅에 도달하지도 못한다."로 옮기고 있다.

 

11) 상대를 높여 부르는 호칭인 Bhante의 옮긴 말로 여기서는 세존을 가리킴. 대승경전 같으면 `세존이시여'라고 표현할 법한 경우인데, 빠알리경에서는 `존자시여(bhante)'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큰스님들에게 대해서나 다를 바 없고 다만 그 이름을 bhante다음에 붙이지 않는다는 점만 다르다. `세존이시여'란 호칭은 후기경에서 사용된 것 같다.

 

12) nettika. `길 이끄는 사람', `치수자(治水者)', `거공(渠工)'의 뜻인데 `봇도랑내는 이'로 새겼음.

 

13) 원문은 `세존에게서 들으면'.

 

14) 이 경과 다음 경은 내용이 같은 가운데 다만 느낌을 조건지우는 요소로 `몸'을 들고 있는데 반해, 다음 경은 `촉'을 들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십이연기법에 따라 촉이 수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은 당연하나 이 경에서 몸을 들어 수의 조건으로 얘기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점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 시간을 보내다(kaalam aagameyya): `때를 기다리다', `죽음을 맞다'로 해석하기도 함. 죽음을 맞이하는 극도의 고통속에서도 느낌을 관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이 있다.

 

16) 원문은 "걸어갈 때나 돌아설 때나 분명히 알아차리는 자[正知者]이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있어 매양 분명히 알아차리는 자로서 행한다." 영역자는 이를 apply clear comprehension(분명한 알아차림을 기울이다)로 옮기고 있다.

 

17) 여기서 몸은 육처 가운데 안 이 비 설 신, 오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8) 원문은 vedana.m vediyati로, 직역하면 `느낌을 느낀다'는 말 그대로임. 이런 식의 표현은 영어에는 어색하지만 우리말과는 비슷한 점이 있어 흥미롭다.

 

19) 원역자는 sense­impression(감각 인상 또는 감각적 각인)으로 옮기고 있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촉을 쓰기로 한다.

 

20) 어느 한 가지 촉: 안이비설신의 육처를 통해 각각 일어나는 육촉 중 어느 한 가지.

 

21) 원역자는 all conditioned phenomena란 표현을 쓰고 있다. `모든 조건지워진 현상'으로 옮겼는데 아래에서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제행'으로 쓰겠다.

 

22) 그침: nirodha의 역. 보통 멸(滅)로 옮기는데, 영어에서는 cease로 옮김. 원뜻은 억지(抑止)라는 뜻에 가깝다.

 

23) 생각일으킴은 vitakka의, 추론적 사유는 vicaara의 새김. 영역자가 쓰고 있는 말은 thought-conception과 discursive thinking임. 고요한 소리 보리수 잎 에서는 생각(thought)과 숙고(contemplation) 등으로 옮겼음.

 

24) 가라앉음: vuupasamaa의 역. 보통 적정(寂靜) 정지(靜止) 등으로 옮김. 가라앉는다는 뜻인 바, 앞에 말한 nirodha가 억지(抑止)의 단계라면, 이제 억눌려 정지된 것이 그 타성을 잃고 가라앉아 진정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원역자는 이를 stilling으로 옮긴 것 같다.

 

25) 고요함: passaddhi의 역. 칠각지의 다섯 번째 요소로 보통 경안(輕安) 또는 제(除)로 번역됨. 진정된 다음에 육체적 정신적으로 가뿐하고 평안함을 말한다. 영역자는 quietening으로 옮기고 있는데 빠알리어 사전들은 대개 calmness, tranquillity 등을 쓰고 있다. 일단 고요함이라 새기기로 한다.

 

26) 앞의 경과 동일한데, 뒤의 게송만 없다.

 

27) P.T.S. 빠알리어본의 원제명은 Santakam, 영역본은 Property라 옮겼고, 일역본은 이것이 내용과 무관하다해서 止息이라 제하였다. 본경과 다음경 6절에 v pasamo는 止息이라 옮기고 어근 am에서 온 것으로 봐 이를 제목으로 취했다는 설명이다. 본문에서는 원역자 냐나뽀니까 스님의 용례를 따랐다.

 

28) 모든 원본에서 이 말로 마무리짓고 있다.

 

29) 관능적 쾌락: Kaamasukha. 한역은 欲樂. 영역은 sensual pleasure.

 

30) 장애(pa.tigha): 한역은 유대(有對). 걸리는 것 또는 저항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일체 감관에 대한 대경을 의미함. 또 윤리적 면에서 성냄[瞋心]을 의미하기도 함.

 

31) 중부 , 59경과 내용이 같음.

 

32) 담즙: 당시 인도 의학에서는 담즙과 점액(粘液), 바람[風] 등 신체의 삼요소가 질서와 균형을 잃을 때 병이 된다고 보았음.

 

33) 다르게 해석하면, "나에게 `이것이 느낌이다'라고 하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에 대한 눈이 생겨났다."로 새길 수도 있다. 즉 `느낌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는 생각 자체가 법안이 열린 것이며 지혜가 생긴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견해이다.

 

34) 상응부 에서는 `다섯'(pa~nca)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후대에 편집자들이 무아상경(Anattalakkha.na S.)이라 불렀다. 여기서 다섯이란 녹야원의 최초 오 비구를 가리킨다. 초전법륜경에 이어 행해진 유명한 법문임.

 

35) 여섯 가지 기본요소: 지 수 화 풍 공(空) 식(識).

 

36) 무간연(anantarapaccaya): 식의 흐름에 있어서 어떤 상태의 식이 그 바로 뒤를 잇는 단계에 대해 조건이 될 때 그 양자간에 간격이 없으므로 무간연이라 함.(아비담마에서 말하는 이십사 연 가운데 네 번째 연). 예를 들어 색을 보는 과정에서 안식(眼識)이 그 뒤를 잇는 의계(意界)―대상을 떠올리는 기능을 함―에 대해 등무간연(saman antarapaccaya)이 되고, 이 의계는 또 그 뒤를 잇는 의식계(意識界)―대상을 조사하는 기능을 함―에 대해서도 등무간연이 됨. 무간연과 등무간연은 실제로는 동일함.

 

37) 인연(hetu paccaya): 뿌리의 조건인 바 나무가 뿌리에 근거하며, 뿌리가 살아있어야 나무도 살 수 있듯이 모든 건전하거나 불건전한 마음상태는 제각기 그 뿌리(탐 진 치 무탐 무진 무치의 여섯 가지)의 동시존재를 필수 조건으로 함. 이를 인연이라 분류함(이십사 연 가운데 첫 번째).

 

38) 아비담마(Abhidhamma): 불교의 경전을 경 율 논으로 나눈 가운데 논부(論部)의 총칭. 곧 부처님의 설법을 경, 경을 조직적으로 설명한 것을 논이라 한다. 논을 아비달마라 하며, 대법(對法)이라 번역. 그런데 여기서 아비담마는 남방불교 전통을 가리킨다. 불교의 각 부파는 주로 경에 대한 해석상의 상이 때문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각 부파는 각기 제나름의 논부를 가지고 있으며, 빠알리경의 논장은 칠론(七論)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뿐 아니라 경장의 제오부 소부경에도 무애해도 와 의석 등이 들어 있어 아비담마적 특색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후대에 조성된 붓다고샤의 청정도론 은 남방불교의 경전해석에 있어 부동의 준거틀로 군림하고 있고, 더 후대의 아비담마타 상가하 (勝法義攝)는 인식론의 결정판이다. 냐나뽀니까 스님의 본 논고는 바로 이와 같은 남방불교 전통에 입각해서 느낌을 해석한 글이다. 원문에서는 서두에 `들어가는 말' 다음에 실려 있으나 우리 한국 독자들이 모처럼 부처님 원음을 만나면서 굳이 남방의 눈에 의지할 필요는 없겠기에 뒤편으로 돌려 남방전통을 이해하는데 참고로 삼도록 했다.

 

39) 오온(pa~ncakkhandha): 존재를 이루는 다섯 가지 무더기.

 

40) 아비담맏타 상가하 (勝法義攝)에 의하면 느낌(vedanaa), 인식(sa~n~naa), 의도(cetanaa), 촉(phassa), 작의(作意, manasikaara), 정신적 활력(jiivita), 집중(samaadhi)의 일곱 요소는 어떤 형태의 식에서도 반드시 동시에 같이 일어나는 정신적 요소들[心所, cetasika]이다.

 

 

【원 주】

 

1.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고성제의 방식에 의해 느낌들을 이해한다.

 

2.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집성제의 방식에 의해 느낌을 이해한다.

 

3.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멸성제의 방식에 의해 느낌을 이해한다.

 

4. 주석서에서 주석하기를: 그는 (멸에 이르는) 도성제의 방식으로 느낌들을 이해한다.

 

5. 반열반(parinibbuto): 완전하게 꺼진.

논서에서 주석하기를: 번뇌를 완전히 꺼버림으로 써(kilesa-parinibbaanaaya)

 

6. 모든 종류의 느낌에 관하여. 제22경 참조.

 

7. phassa phassa vaayam disvaa 논서는 달리 해석한다. 이 문구를 ~naa.nena phusitvaa phusitvaa로 바꾸어 "생멸에 대한 지식의 방식으로 (그들을) 되풀이해 경험하며"로 해석함. 이 구절은 숫따니빠따 739게에도 나오는데 거기엔 한 줄이 더 첨언되어 있다.

 

8. 고질적 잠재성향: anusaya를 영역에서는 the underlying tendency로, 한역에서는 使隨眠으로 옮긴다. 여기서는 niranusaya의 뜻으로 고질적 잠재성향으로 옮겼다.

 

9. `자만'(conceit)은 특히 아만(asmimaano) 즉 지 정 양면의 인격체의 대한 믿음[有身見].

 

10. paataala. 심연, 험애(險崖).

 

11. 주석서는 말을 바꾸어 풀기를, "일반의 믿는 바에 따르면, 바다속에는 물살로 패여진 매우 깊은 심연이 있어서 용신(龍神)과 같은 수중 동물의 서식처가 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이 심연은 안락한 주처로 생존의 기반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이 심연을 바닥없는 구렁텅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 되고,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이 적절하지도 명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육체적 존재와 불가분인 육체적 고통을 두고 `바닥없는 고통의 구렁텅이'라 불러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적 고통이란 측량할 길없는 윤회의 한 부분이 되니까."

 

12. 주석서에서 설명하되: 이 경에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란 말은 첫째로는 예류과에 이른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또한 예리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지성으로써 어떤 느낌이 일어나든 거기에 끄달리지 않을 수 있는 선정수행자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왜냐하면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느낌을 꿰뚫고 있다고 보아야 할 테니까). 주석서의 소(복주).

 

13. 여기서 `몸'(身)이란 말은 육촉처(phass yatana) 중 앞의 다섯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4. 감각인식 또는 촉(觸)은 정신적 요인으로서 육체적 부딪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15. 원문은 tajjam vedayitam임.

 

16. `고요해짐'(pa.tippassaddha)의 절에선 네 가지 무색정(無色定)이 언급되지 않는다. 주석서에 따르면 이 네 가지 정은 `상수멸'에 포함되고 있다는 것이다(상수멸을 성취하는데 이 네 가지 정(定)은 조건이 되니까).

 

17. 이 경은 중부 제59경 `많은 종류의 느낌'과 내용이 동일함.

 

18. 제22경 참조.

 

19. 주석서: 제사선부터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상태다. 그러나 이 무덤덤한 느낌도 `즐거움'으로 불린다. 평화롭고 고상하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과 여덟 가지 정(定)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느껴지는 즐거움'이라 부르고, 상수멸(想受滅)의 상태는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라 한다. 따라서 느껴지는 즐거움이든 느껴지지 않는 즐거움이든 둘 다 고통에서 벗어난 상태란 뜻에서 확실히 즐거움인 것이다. 증지부 아홉의 장 제34경에서 사리불 존자는 단호히 말한다. "열반은 행복이다. 벗이여, 열반은 행복이다. 진실로!" 그러자 우다이 비구가 물었다. "느낌이 없는 터에 어떻게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사리불 존자가 대답했다. "거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그것이 바로 행복이네, 벗이여." 그 경의 뒷 이야기를 본 경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열반이 행복이란 데 대해선 증지부 여섯의 장 제100경 역시 참조할 것.

 

20. 주석에는 이를, 느낌을 이해하는 당자로 규정하고 염처경 중 수념처의 시작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다르게는 `느끼는 자'란 일체의, 고를 느끼고 그로부터 해탈을 구하는 중생들을 언급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The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법륜 열 둘(금구의 말씀 둘) 염수경-상응부느낌편-

 

1996년 12월 10일 1판 1쇄 인쇄

1996년 12월 20일 1판 1쇄 발행

 

영역자 냐나뽀니까 스님

옮긴이 규 혜 스님

펴낸이 한기호

펴낸곳 도서출판 고요한 소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72번지( 110-300)

☏ 739-6328/725-3408 글전송 723-9804

(대구 053-425-4035/부산 051-513-6650)

 

출판등록 제1-879호 1989.2.18.

ISBN 89-85186-52-3 03220

 

값 1,000원

 

*잘못된 책은 바꾸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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