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緣起(輪回)/緣起

우 소바나 사야도 12연기 법문

Dhammarakkhita 2012. 12. 4. 13:13

우 소바나 사야도 12연기 법문

(12연기에 대한 위빠사나 집중수련회 중의 법문)

 

우 소바나 사야도 12연기 법문을 연재하며

(U Sobhana Sayadaw dhamma talk)

 

2003년 10월 3일부터 12일까지 10일간 천안 호두마을에서 우 소바나 사야도의 12연기에 대한 위빠싸나 집중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이때 사야도께서 말씀하신 법문에 대한 원고가 정리되는 대로 조금씩 나누어서 게시판에 올리겠습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U Sobhana Sayadaw)는 현재 미얀마 양곤의 쉐민모 명상센터(Shwe Mintmo Meditation centre)에서 수행을 지도하고 계십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가 가르침을 편 12연기는 미얀마의 레디 사야도(Ledi Sayadaw)의 뒤를 이은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로부터 계승된 수행방법입니다.

 

레디 사야도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를 널리 가르치셨고 그 뒤를 이은 모곡 사야도는 아비담마에 능통하신 분으로 12연기의 중요성을 더 크게 부각시켰습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가 지도하는 12연기 위빠싸나 수행은 이처럼 큰 스승들에 의해 계승된 전통적인 이론과 방법에 준한 가르침입니다.

 

10일간의 집중수련회가 열리는 동안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해 주신 분은 현재 미얀마에 거주하면서 수행을 하고 계신 조성순선생님이 해주셨습니다.

 

집중수련회가 열리는 동안 사야도의 법문을 녹음하였습니다. 다시 이것을 한국위빠싸나 선원의 이종숙 도우님과 김윤승 도우님께서 녹취작업을 해주셨습니다. 수련회 기간 중에 아쉽게 녹음되지 않은 날이 하루와 반나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의 법문은 녹취가 아니고 사야도의 법문을 받아 적은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원고를 미얀마에 보내서 조성순선생님께서 교정을 해 주셨고 이번에 미얀마에 가서 이 원고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가 다시 손질을 하여 발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심오한 내용의 어려운 법문을 빠른 시간안에 직접 말로 통역을 하고, 또 그것을 녹취하는 과정이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특히 어려운 빨리어와 법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쉽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손질을 했지만 원고를 번역한 것이 아니고 법문을 받아 적은 것이라서 완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족하더라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 법문은 12연기에 대한 도표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글을 읽으면서 12연기의 도표를 참조 하셔야 이해가 쉬울 것입니다. 도표와 함께 원고를 발표하겠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도표는 한글로 번역된 표와 빨리어로 된 표를 함께 올리겠습니다. 또한 12연기에 대한 모곡 사야도의 도표가 한글과 빨리어로 자료실의 기본앨범에 사진으로 올라 있으니 복사하셔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2연기에 대한 위빠싸나 수행은 미얀마가 아닌 외국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중한 법문이며 수행입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런 법문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 한국에 미얀마의 여러 큰 스승님들께서 직접 오셔서 지도를 해 주시는데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얀마에 가서도 이렇게 훌륭하신 스승들을 모두 뵙고 배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큰스승님들이 오실 때는 빠지지 말고 수련회에 참석하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법문을 해주신 사야도께 다시한번 진심으로 존경의 예를 올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통역을 해주신 조성순선생님, 녹취작업을 해주신 이종숙, 김윤승도우님과 따님 박정아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한글로 만들어진 12연기법 도표는 조현곤님께서 만들어서 올려주셨습니다. 그리고 빨리어 도표는 우 소바나 사야도 소유의 법문용 도표를 김봉이도우님께서 사진으로 찍어서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도표를 올려주신 두 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법문을 정리하면서 불가피하게 보충을 하는 부분이 있음을 양해를 구합니다. 읽는 분들을 위해서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고자 약간씩 보충을 하고 있습니다. 다만 사야도의 법문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보완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분들이 참여해주신 이 선업의 공덕으로 도과를 얻어 닙바나에 이르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올림

 

 

12연기(緣起)의 부분. 연결. 요소. 시간의 분류표

 

(참고 : 빨리어 표기는 인터넷용이라서 실제의 단어와 다를 수가 있습니다.)

 

1. 근본원인 --- 2가지 -- *(1) 무명(無明. Avijjaa)

*(2) 갈애(渴愛. Ta.nhaa)

 

2. 성제(聖諦. Sacca) - 2가지 -- (1) 집제(集諦. Samudaya-sacca)

(2) 고제(苦諦. Dukkha-sacca)

 

3. 부분 ------ 4가지 --- (1) 과거의 원인

(2) 현재의 결과

(3) 현재의 원인

(4) 미래의 결과

 

4. 요소(연결고리)- 12가지 - A - (1) 무명(無明. Avijjaa)

(2) 행(行. 業의 形成. Sa!nkhaara)

B - (3) 식(識. 再生連結 識. Vi~n~naa.na)

(4)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Naamaruupa)

(5) 6입(六入. 六根. Sa.laayatana)

(6) 촉(觸. 접촉. Phassa)

(7) 수(受. 느낌. Vedanaa)

C - (8) 갈애(渴愛. 愛. Ta.nhaa)

(9) 취(取. 집착. Upaadaana)

(10) 유(有. 業의 生成. Kamma bhaava)

D - (11) 생(生. 태어남. Jaati)

(12) 노사(老死. 늙음과 죽음. Jaraamarana)

 

5. 연결(Link) - 3가지 -(1) 행(行. 業의 形成. Sa!nkhaara) <===> 식(識. Vi~n~naa.na)

*(2) 수(受. 느낌. Vedanaa) <===> 갈애(渴愛. 愛. Ta.nhaa)

(3) 유(有. 業의 生成. Kamma bhaava) <===> 생(生. 태어남. Jaati)

 

6. 굴레(Va.t.ta) - 3가지 -- (1) 번뇌의 굴레(Kilesa va.t.ta)

(2) 업의 굴레(Kamma va.t.ta)

(3) 과보의 굴레(Vipaaka va.t.ta)

 

7. 시간(Period) - 3가지 -- (1) 과거(Past) (2) 현재(Present) (3) 미래(Future)

 

8. 전체요소-20가지- *(1) 과거의 5가지 원인 : 무명. 행(업의 형성). 갈애. 취. 유(업의 생성)

(2) 현재의 5가지 결과 : 식(재생연결 식). 명색. 6입[六根]. 촉. 수.

(3) 현재의 원인 5가지 : 갈애. 취[執着]. 유[生成]. 무명. 행(업의 형성)

(4) 미래의 결과 5가지 : 식(재생연결 식). 명색. 6입. 촉. 수.

 

번뇌의 굴레 <---무명(無明. Avijjaa) <----> 갈애(渴愛. Ta.nhaa) / 취(執着. Upaadaana)

업의 굴레 <---행(行. 業의 形成. Sa!nkhaara) <----> 유(有. 業의 生成. Kamma bhaava)

 

 

우 소바나 사야도의 법문

(U Sobhana Sayadaw Dhamma talk)

 

첫째 날, 수행을 시작하면서 (1)

 

수행자가 가져야 할 5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 수행자는 믿음을 가지고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성인의 대열에 들으신 스님들에 대한 믿음입니다.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수행의 발전이 없습니다.

 

둘째, 수행자들이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한 상태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음식물의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알맞은 양의 육식을 취하고 적당한 온도에 유의해야 합니다.

 

셋째, 수행자는 정직한 마음으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은 수행 중에 어느 곳에서나 법을 얻지 못하고 얻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법을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인터뷰를 할 때 경험한 것만을 진실하게 말해야 합니다.

 

넷째, 수행자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항상 마음을 기울여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야 이미 저지른 악업을 제거 할 수 있고 앞으로 올 수 있는 불건전한 행동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노력을 해야 아직 얻지 못한 도과(道果)를 얻을 수 있고, 얻은 도과는 더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다섯째, 수행자는 물질과 마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마음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바른 본성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짐을 바르게 알고 지혜로 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다섯 가지를 항상 생각하고 실천하면서 수행을 하게되면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게 되고 마음이 깨끗해지고 도과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한번 도과를 얻으면 절대 4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수행기간 동안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도와 과를 얻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7가지 요소(Sambojjha!nga. 七覺支)가 있어야 합니다.

 

1.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Sati Sambojjha!nga)

알아차림의 깨달음의 요소를 4념처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에게 항상 있어야 할 것은 알아차림(Sati. 주시)입니다.

 

2. 법에 대한 고찰의 깨달음의 요소(Dhammavicaya Sambojjha!nga)

남자, 여자는 개념이고, 마음과 물질 뿐만 아니라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숙고하는 것이 법의 고찰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 여자는 개념이고 물질과 마음은 실재입니다. 법의 고찰은 가르침에 대한 탐구를 말합니다. 이때의 탐구는 개념인 빤냐띠(pa~n~natti)를 보는 것이 아니고 실재인 빠라마타(paramattha)를 보는 것을 말합니다.

 

3. 노력의 깨달음의 요소(Viriya Sambojjha!nga)

위리야(Viriya)는 노력, 정진,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노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4. 기쁨의 깨달음의 요소(Piiti Sambojjha!nga)

수행을 하면 탐, 진, 치가 줄고 불선업을 짓지 않게 되니 마음이 깨끗해져 즐거움이 옵니다. 그러므로 인해 기쁨이 생깁니다. 이 기쁨을 삐띠(Piiti)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에는 5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①. 닭살이 돋는 듯한 느낌

②.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찌릿한 느낌

③. 불선업이 적어지고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생기는 느낌인데 파도를 타는 듯하고 공간을 떠다니는 듯한 느낌

④. 몸이 들떠서 공중에 뜬 것 같은 느낌

⑤. 깨 안에 기름이 낀 것처럼 본인의 몸 전체에 기쁨이 충만된 느낌

이렇게 5가지 종류의 기쁨(즐거움)을 경험하게 되어도 좋아하지 않고 일어남 사라짐으로 보아야 됩니다.

 

5. 평온의 깨달음의 요소(Passaddhi Sambojjha!nga)

마음이 깨끗해지고 수행을 하는 동안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안해집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이 상태를 열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열반이 아니고 느낌을 원인으로 오는 것으로써 편안하다고 좋아하지 말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삼법인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6. 마음집중의 깨달음의 요소(Samaadhi Sambojjha!nga)

사마디(Samaadhi)는 고요한 마음의 집중을 말합니다. 사마디는 삼매, 집중 등으로 말하는데 고요해진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 집중의 상태입니다.

 

사마디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사마디가 있습니다.

① 초기 삼매(Upacaara samaadhi. 접근삼매) ② 깊은 삼매(Appanaa samaadhi. 근본삼매) ③ 찰라 삼매(Kha.nika samaadhi. 순간삼매)가 있습니다. 이 중에 초기 삼매에 의해서 깊은 삼매로 가는 것은 사마타(Samathaa) 수행에서 사용되는 삼매이고, 찰나 삼매는 위빠싸나 수행에서 사용되는 삼매입니다.

 

사마디, 삼매, 또는 집중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마음이 대상에 밀착되어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집중이란 것은 한 대상을 오랫동안 알아차림 할 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진 것을 알고 할 때 생기는 현상입니다. 이때 사라졌으므로 없는 것이어서 일어나는 것을 알고 또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반복해서 아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알고 없고, 알고 없고를 연속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 모든 대상이 사라지고 없고, 사라지고 없고 하는 과정에서 사라짐을 '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아야지 나의 어떤 것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를 배제하고 볼 때 힘이 됩니다.

 

7. 평등의 깨달음의 요소(Upekkhaa sambojjha!nga)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법의 본래의 성품임을 알게됩니다. 이것이 모든 법의 본성이므로 그것을 봄으로써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 좋고 싫음이 떨어져나갑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도와 과에 가까워집니다.

 

이상과 같은 깨달음의 요인을 모두 얻게 되면 도와 과를 얻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비구. 비구니들 남자. 여자 수행자들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많은 법문을 우리에게 해주셨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법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길을 가르쳐 줄 뿐 법을 얻는 것은 수행자들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첫째 날, 수행을 시작하면서 (2)

 

부처님께서는 비구, 비구니, 남녀 재가자들에게 법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을 가르쳐 줄뿐이고 길의 끝인 열반에 다다르는 것은 수행자의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법문을 해주셨더라도 수행자 여러분이 지속적인 노력이 없으면 법을 얻지 못합니다.

 

수행을 지도하는 스승과 수행자 여러분에게는 각각의 의무가 있습니다. 각각의 의무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 스승은 수행자에게 법을 이해하도록, 분명히 알도록 법문을 하는 것이 스승의 의무입니다.

둘째, 수행을 하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셋째, 법을 드러내는 것은 법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스승, 수행자, 법의 의무,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셋 중에 첫 번째 의무는 스승에게 있습니다. 어떤 의무인가 하면 수행자가 법을 모르면 알게 하도록 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하도록 하고, 잘못된 견해를 제거할 수 있도록 하고, 수행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도록 법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해서 일곱 가지의 청정에 대해서 법문을 하겠습니다.

 

일곱 가지의 청정이란 깨끗이 해야할 일곱 가지입니다.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

1. 계의 청정[戒淸淨. siila-visuddhi]

2. 마음의 청정[心淸淨. citta-visuddhi]

3. 견해의 청정[見淸淨. di.t.thi-visuddhi]

4.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道疑淸淨. ka!nkhaavitara.na-visuddhi]

원인과 결과를 알아 12연기를 이해하는 것

5. 도의 옳고 그름을 아는 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dassana-visuddhi]

마음과 물질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가를 보는 것

6. 수행과정의 지혜와 통찰에 의한 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성과 소멸을 보고 그것을 혐오하는 것

7. 지혜통찰의 청정[智見淸淨. ~naa.na-dassana-visudhi]

고의 소멸로 도의 끝을 봄으로 해서 열반을 얻는 것

 

첫째, 계청정은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제일 먼저 계(戒)에 충실해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계가 청정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좋지 않은 일[不善業]을 삼가 하는 것입니다. 불선업은 10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삼가는 것이 계의 청정입니다.

 

나쁜 행동[不善業]을 10가지로 보면,

몸으로 저지르는 것 3가지,

입으로 저지르는 것 4가지,

마음으로 저지르는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신, 구, 의라는 3업(三業)입니다.

 

① 몸으로 저지르는 신업(身業)의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행동,

다른 사람이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는 일,

다른 사람과 부적절한 성적 관계를 갖는 부정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수행 중에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주지 않는 물건을 훔치거나 사용하지 마십시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성적 관계를 갖지 마십시오. 이 세 가지의 계를 지킴으로써 악업을 짓지 않게 되며, 이것이 계의 청정입니다.

 

② 입으로 저지르는 구업(口業)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업은 네 가지가 있는데 거짓말, 이간질, 거친 말, 이익이 없는 말입니다.

입으로 짓는 이 네 가지를 삼가고 제어함으로써 계청정을 지킬 수 있습니다.

 

③ 마음으로 저지르는 의업(意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업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탐욕(貪慾. abhijjhaa)입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불법으로 정당하지 않게 얻으려 욕심을 내는 것입니다.

둘째가, 악의(惡意. byaapaada)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되게 하기 위해 진심(嗔心)을 내는 마음입니다.

셋째가, 사견(邪見. micchaa-di.t.thi)입니다. 사견은 틀린 견해를 말합니다. 이것은 선업의 결과와 악업의 결과를 믿지 않는 잘못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 구. 의 3업(三業)으로 저지르는 10가지를 삼가고 제어할 수 있을 때, 계가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10가지를 사람들이 지켜야할 율(律)이라고 하는데 사람의 율(律)이라고 부릅니다.

 

수행자는 5계도 역시 안전하게 지켜야합니다. 즉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 음행을 하지 않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8계를 지켜야합니다. 5계를 지키고 정오가 지난 다음에는 음식물을 먹지 않는 것, 가무, 치장, 향수 등을 사용하지 않는 것, 높고 사치스러운 침상을 사용하지 않는 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삼가야 할 것을 삼가는 것이 계의 청정입니다.

 

둘째, 계청정이 이루어진 뒤에 마음의 청정[心淸淨]이 있게 됩니다. 마음의 청정은 마음이 깨끗해짐으로써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라앉아 집중력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집중력(사마디)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불선(不善)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불선(不善)한 마음이 들어오지 못하므로 마음이 깨끗해져서 수행자는 알아차림과 함께 점점 더 마음의 집중력이 길러 내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집중력을 얻게 하려면 항상 4념처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4념처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가지를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신념처(身念處)는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 중에 들숨 날숨을 보는데, 들숨 날숨을 보는 것이 계속 이어질 때 다른 어떤 불선(不善)한 것들이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다른 안 좋은 것들이 들어올 틈이 없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코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들숨 날숨으로, 배나 가슴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일어남 꺼짐으로 알아차립니다.)

 

신념처는 행주좌와(行住座臥)도 포함이 됩니다. 움직일 때, 멈춰 섰을 때, 앉았을 때, 누웠을 때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걸음을 걸을 때도 오른발 왼발 걷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걸으면서 알아차릴 때는 선하지 못한 마음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처음에 걸음을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걷는 것을 알아차릴 때 불선한 것이 들어오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오른발 왼발을 계속 보다가 어느 정도 집중(사마디)하는 힘이 생기면 들고 놓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발을 들면서 알고, 내리면서 알고, 동작 하나 하나를 알 때에 온전치 못한 것은 들어올 수 없고 수행자의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계속 들면서 알고, 내리고 알다보면 집중력이 더 좋아집니다.

 

다시 들고, 나아가고, 놓고, 하는 것을 알면서 (들면서 알고, 나아가면서 알고, 놓으면서 알고) 계속해서 알다보면 마음에 선하지 못한 것이 들어오지 못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이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면 집중력이 점점 좋아집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라앉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여러분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게 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일어나는 대로 알게 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집중을 사마디(samaadhi)라고 하는데 사마디가 좋아지는 것 역시 마음의 청정입니다. 마음의 청정을 얻은 후에는 견해의 청정이 뒤따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 견해의 청정이 있기 위해서는, 스승은 견해의 청정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도록 설명할 의무가 있습니다.

잘못된 견해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이 있고, 다음으로 상견(常見. sassata-di.t.thi)이 있습니다. 그리고 단견(斷見. uccheda-di.t.thi)이 있습니다.

 

처음인 유신견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빤냐띠(pa~n~natti)라고 하는 개념과 빠라마타(paramattha)라고 하는 실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개념과 실재라는 이 두 가지의 차이를 알아야 비로소 잘못된 견해를 제거 할 수 있습니다.

 

빤냐띠(pa~n~natti)라고 하는 개념이란 사람, 여자, 남자, 아름다움, 추함, 뚱뚱함 등등을 말합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지어서 부르는 것도 이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들은 개념으로 그렇게 부르라고 동의해서 정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부르라고 했을 때 이름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빤냐띠라고 하는 것인데 모양, 명칭, 개념, 관념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관습적 진리하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개념과 실재 즉 궁극적 진리를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빤냐띠는 개념이고 빠라마타(paramattha)는 궁극적 진리, 실재입니다. 빠라마타는 개념으로써가 아니라 존재의 실재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가 알아차려야 할 것은 존재의 실재인 빠라마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빠라마타라고 하는 궁극적 진리란 무엇인가요?

빠라마타는 다음 네 가지입니다.

① 마음[心. citta].

② 마음의 작용[心所. cetasika],

③ 물질(物質. ruupa)

④ 열반(涅槃. nibbaana)입니다.

 

수행자는 개념이 아닌 실재, 궁극적 진리에 대해서 안 후에야 만이 바른 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빠라마타를 안다는 것은 모양을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이것들의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빠라마타를 아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수행을 통해서 빠라마타를 알 수 있습니다. 수행 할 때 알아차릴 수 있는 빠라마타는 열반을 제외한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온(五蘊)입니다.

 

오온(五蘊)은 다섯 가지의 무더기(모임)를 말합니다.

첫 번째, 색온(色蘊. ruupa kkhandha). 두 번째, 수온(受蘊. vedanaa kkandha). 세 번째, 상온(想蘊. sa~n~naa kkhandha). 네 번째, 행온(行蘊. sa!nkhaara kkhandha). 다섯 번째, 식온(識蘊. vi~n~naa.na kkhandha)입니다.

 

오온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 자세하게 나눈 것으로 색, 수, 상, 행, 식으로 분류합니다. 이것들은 각자 저마다의 무더기로 모여서 이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색[物質]이 아니고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서 몸이라는 하나의 물질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몸이라는 물질 하나만도 32가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색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心]은 식(識)을 말하며 마음의 작용[心所]은 수, 상, 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들도 저마다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서 무더기[蘊]라고 말합니다.

 

1. 색온(色蘊)은 몸이라는 물질의 무더기입니다. 물질의 본성은 계속해서 바뀌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바뀌는 본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것이고, 전에는 아프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프고, 전에는 없었는데 지금은 생겼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본성은 항상 바뀐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바뀌는 물질의 본성이 우리 몸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것이 수행자들의 몸에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있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어로 삭카야(sakkaaya)라고 합니다. 삭카야는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몸, 또는 개체, 유신(有身)을 말합니다.

 

2. 수온(受蘊)은 느낌이라는 무더기를 말합니다. 좋고 나쁘고 한 느낌을 의미합니다. 좋고 나쁘고 한 느낌이 수행자 몸에서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보십시오. 이와 같이 느낌이 실제 있는 것 역시 삭카야(sakkaaya)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느낌이 각자의 몸에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3. 상온(想蘊)은 오온(五蘊) 중에서 색, 수, 상에서 상(想)에 해당하는 무더기입니다. 산냐(sa~n~naa)는 바라본다,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여자를 볼 때 어떻다고 하며 바라보는 대상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나 표상작용을 하거나, 지각, 기억하는 것을 상온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이 물건이나 무엇을 보았을 때 이렇게 알아보는 그런 마음이 수행자 마음에 있는가 알아차려 보십시오.

 

이런 마음이 수행자에게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4. 행온(行蘊)은 행위(行爲)에 해당하는 무더기입니다. 행온의 뜻은 행(行)하는 특성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고, 말하기를 원하고, 앉기를 원하고, 원하는 것이 상카라(sa!nkhaara)입니다. 의도(意圖)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의도가 있은 다음에 행이 있기에 행과 의도는 같이 쓸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행하고자 하고 마음이 우리의 마음에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수행자의 마음에 의해 몸에 행이 있으므로 해서 이것 역시 싹카야(sakkaaya) 입니다.

 

5. 식온(識蘊)은 아는 마음의 무더기입니다. 식온은 아는 것을 본성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밤색이고, 저 사람은 남자고, 여자이고 하면서 보고 아는 것입니다. 식온은 단순하게 대상을 접수하여 아는 기능을 합니다. 수행자의 마음에 이렇게 아는 마음이 있는가 보십시오.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수행자 : '예, 있습니다.'

 

이상의 다섯 가지가 수행자 몸 안에 있음으로 해서 이것이 바로 삭카야(sakkaaya)라 합니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몸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을 개체(個體)라고 합니다.

 

이 개체를 말할 때 남자, 여자라고 개념으로 부르는 것이 빤냐띠(명칭, 관념)입니다. 그러나 실재하는 현상은 빠라마타(궁극적 실재)인 오온입니다. 몸과 마음이란 오온 다섯 가지가 빠라마타인데 오온을 지, 수, 화, 풍이라는 4대의 느낌으로 아는 것이 빠라마타를 아는 것입니다. 이 4대 외에 28가지의 파생된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유신견(有身見. sakkaaya di.t.thi)이 어떻게 생기는 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잘못된 견해 중에 유신견(有身見. sakkaaya di.t.thi)이 있습니다. 빨리어로 삭까야 디티[有身見]라고 설명하겠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종교들의 믿음은 '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온을'나'라고 믿는 것이 삭까야 디티 즉 잘못된 견해입니다. 오온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삭까야 디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삭카야(sakkaya)는 실재하는 몸을 말하므로 유신(有身)인데 이것을 '나의 몸'으로 아는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라는 견해가 잘못된 견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삼법인(무상, 고, 무아)의 교리가 있습니다. 즉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이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할 뿐이며, 일어나면 사라지고 일어나면 사라지고 하는 것만 있어서 모든 것이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이 고(苦)라는 것입니다.

무상이란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이고, 항상 일어나는 것은 사라지고 유한(有限)하다는 것이 고(苦)이고, 그 괴로움을 알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무아(無我)입니다. 이렇게 3법인의 세 가지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수행자께서는 수행자 각자에게 있는 것이 오온뿐이지 그 안에 있는 것이 '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도록 노력하고 믿으십시오.

 

이것을 믿습니까?

수행자 : '예. 믿습니다.'

 

수행자가 항상 바뀌는 물질을 볼 때도, 느낌을 느꼈을 때도, 사물을 지각할 때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도, 아는 마음이 생겼을 때도, 내가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내가 아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온의 본성의 작용으로 느끼고, 지각하고, 행하고, 아는 것입니다.

몸을 알아차릴 때 오온의 하나인 물질로써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입니까? 색온(色蘊. 물질의 무더기)이 일어났다고 그렇게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내 몸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오온의 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느낌을 느꼈을 때도 내가 느꼈다고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수온(受蘊)의 작용일 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까? 어떻게 생각할 것입니까?

 

우리가 어떤 물질을 알아 볼 때 상온(想蘊)은 내가 기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온(想蘊)이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번째 행온(行蘊)도 내가 행하는가 아니면 마음의 작용으로 행합니까? 어떻게 느끼십니까? 오온 안에는 '나'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수행자 : '예, 믿습니다.'

 

잘못된 견해가 제거되는 것은 법문을 듣고 보고 아는 것 등등이 오온의 작용일 뿐,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일어나는 모든 대상 역시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로써 생기는 것이지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만이 집착이나 욕심을 줄여나가거나 제거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 그것이 통증이라면 내가 아프고, 내가 참을 수 없고 하는 것이 아닌 나와 통증을 분리해서 볼 수 있다면 화를 내는 것 역기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통증이 일어났을 때도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이것은 오온의 작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어떤 물질의 본성과 어떤 느낌은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이라는 무더기[蘊]의 작용이라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프고, 내가 느끼고, 내가 알고,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알았을 때 수행자는 집착이나 욕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수행하면서 대상을 볼 때 무엇을 볼 것인가? 수행의 대상은 이름, 개념이 아니고 실재하는 빠라마타(궁극적 실재)의 오온을 일어나는 대로 봐야합니다.

 

오늘은 개념과 실재를 구분하고 잘못된 견해를 제거한 후 수행하는 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참고 : 사야도의 법문이 짧은 시간에 통역에 의해 전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소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은 추가로 기록했습니다. 다만 사야도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읽는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문장을 완성했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첫째 날, 수행을 시작하면서 (3) - 수행하는 방법

 

수행자는 수행을 하기 위해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1. 조용한 곳에서

2. 가부좌를 하고(두 다리를 가지런히 놓아도 됨)

3. 허리를 펴고(너무 곧게 힘을 주지 않고 편하고 바르게 폄)

4. 손을 편안하게 가지런히 놓고

5. 눈을 살짝 감고

6. 입을 살짝 다뭅니다.

 

이제 마음을 코의 가장자리에 두고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을 주시합니다.

숨을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10분 정도를 계속합니다.

 

10분 정도를 들숨 날숨을 알아차린 뒤에 몸을 알아차립니다. 몸의 어느 곳에서 일어나든, 일어나는 것은 모두 알아차립니다. 아픔, 더움, 차가움, 무거움, 저림, 쑤심 등등 어떤 것이나 일어나는 대로 모두 알아차립니다. 계속 10분 정도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으면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 한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몸 전체에서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나는 쑤심이나 저림 등의 느낌이 일어났을 때, 쑤시면 쑤시는 것을 알고, 저리면 저린 것을 알고,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는 즉시 알아차립니다.

 

수행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알아차림(sati)과 노력(viriya)이 함께 하여, 분명한 앎(sampaja~n~na)과 지혜로운 마음으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으로 지켜본다는 의미는 숲에서 사슴이나 곰을 사냥할 때 그들을 지켜보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니는 곳을 하나도 놓침 없이 보듯이,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분명한 앎으로, 지혜로 본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도록 노력해야 되고 점점 양이 많아지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이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 분명히 아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보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점점 횟수가 많아질수록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되고, 차츰 고(苦)의 본성(本性)을 알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고 생각하게 되면, 이제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이므로, '고(苦)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다시 또 '고(苦)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하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됨으로써 고(苦)의 본성을 알게 되고, 순간순간 일어나는 것을 알고를 계속함으로써 점점 더 조용한 가운데 고(苦)의 본성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수행자가 가능한 한 참아가면서 대상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중에서 고(苦)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봄으로써 사성제 중에서 고제(苦諦)를 알게 됩니다. 실제 수행을 통해서 고(苦)의 본성을 알면 이 몸 자체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고(苦)의 본성을 알아차린 후에는 이 고(苦)가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의 목적은 열반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합니다. 이 몸이 고(苦)라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는 열반을 얻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한 시간은 60분이고 1분은 60초입니다. 그래서 1초에 아는 마음이 한번 있다고 볼 때, 수행자가 1분을 알아차리면 60번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순간순간에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계속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처음에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처음에는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을 계속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면 알아차림(sati)과 노력(viriya)이 강해지고 그러면서 집중(samaadhi)하는 힘이 강해집니다.

 

수행의 처음 단계에서는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부터 계속하면 집중력이 생기고, 다음 단계로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 쉬워집니다. 앞에서는 일어나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차리고 나서 집중력이 생기면 다음으로는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하다가 집중하는 힘이 생기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는 것을 계속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을 계속하다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내 몸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물질이라는 오온의 그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거기에 '나'라고 하는 것이 포함되지 않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때, 내 몸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이 위빠싸나 수행도 힘이 없게 되고, 힘있는 위빠싸나 수행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힘이 없는 위빠싸나 수행을 하게 되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고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위빠싸나 수행도 향상이 어렵게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 산다라는 스님이 수행을 하시면서 마음과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내 몸이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생각했을 때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스님은 내가 내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왜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고서 질문을 하러 갔습니다.

 

질문에 대해 한 스님의 답변은 무상과 무아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하지 않는 것을 봄으로 해서 무아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답변하신 스님이 무상과 무아를 보도록 요구했을 때, 질문한 스님의 말이 무상과 무아를 보았지만 그 무상과 무아를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거기서 물러 나와 아난존자에게 갔습니다.

 

스님은 아난존자에게 내가 수행을 해서 일어남 사라짐도 보고, 무상도 보고 그것을 어쩔 수 없다는 무아도 경험했지만, 내 안에 두려움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인지 질문을 했습니다.

아난존자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질문한 스님이 무상과 무아를 보고도 법을 얻을 수 없었던 것은 항상 거기에 '나'라는 것을 포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난존자도 질문한 스님에게 무상과 무아는 볼 수 있었지만 '나'라는 잘못된 견해와, '나'는 항상 하다는 견해와, '내'가 여기서 다하면 그만 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난존자는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나'라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스님의 수행이 향상이 없었고, 일어나는 것도 고(苦)이며, 사라지는 것도 고(苦)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는 모든 것,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 내가 아닌 다만 그것들의 본성으로, 곧 물질과 마음이 본성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거기에는 내가 없음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가 포함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 두려움이 사라질 때 마음에 고요함과 평화가 다가옵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는 항상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 해야 몸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는 내가 아닌 어떤 마음과 물질들의 모임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앎으로써 고(苦)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고(苦)의 본성을 봄으로써 고(苦)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싫어함으로 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어 열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고(苦)의 본성을 알고, 고(苦)에 대한 혐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열반을 얻기를 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우 소바나 사야도 12연기 법문

 

둘째 날, 법문

 

어제 법문을 했던 견해의 청정[見淸淨]에 대해서 간단하게 부연 설명을 한 후에 12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제 법문에서 오온(五蘊)은 오온일 뿐이지 '나'가 없지만, '나'가 있다고 믿는 것이 유신견(有身見. sakkaaya-di.t.thi)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 드렸습니다. 이렇게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갖는 사람은 상견(常見. sassata-di.t.thi)이든 단견(斷見. uccheda-di.t.thi)이든 역시 마찬가지로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유신견을 갖은 사람이 어떻게 상견 역시 가질 수 있는가는 다음과 같은 생각에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없어지지만, 우리가 말하는 영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몸은 없어지지만 나라고 믿는 영혼은 좋은 곳, 혹은 나쁜 곳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오온은 무상(無常)한데, '나'라고 하는 것이 항상(恒常) 하다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바로 이것이 상견(常見)입니다. 뿐더러 유신견을 가진 사람이 상견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단견(斷見)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무상(無常)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며, 그러므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무상(無常)은 항상(恒常) 하다는 것과 반대가 된다.)

 

이와 같은 잘못된 견해는 오온은 오온일 뿐이지 내가 없지만 있는 것으로 믿고 오온과 내가 같이 태어나서 같이 죽고,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내생에서도 같이 태어났다가 같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잘못된 견해 세 가지 견해는 제대로 설명을 하려면 긴 시간이 걸리므로 짧게 마치고 12연기를 설명하겠습니다. 수행자는 어떤 종류의 견해이든지 이 세 가지 종류의 잘못된 견해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사야도나 수행자, 우리 모두가 오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제 법문에서 오온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진다고 얘기했습니다.

 

이 생에서의 오온의 힘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 생에서의 오온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써 다음 생이 있습니다. 그것을 원인과 결과로 설명한 것이 12연기입니다.

 

( 지금부터 이 글을 읽으시는 수행자께서는 12연기 도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2연기의 도표를 보면 원의 바깥쪽에 1. 2. 3. 4의 4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번 칸은 전에 행한 과거입니다. 1번이 시간적으로 과거이면 2번은 현재입니다. 3번은 시간적으로는 현재로써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칸입니다. 그리고 4번 칸은 미래의 시간입니다.

 

수행자가 지금 머물고 있는 시간은 2번 칸으로 현재입니다. 2번 칸에는 현재 가지고 있는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根], 촉(觸), 수(受)입니다.

 

지금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식(識. 再生連結識. vi~n~naa.na)

2.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naama-ruupa)

3. 육입(六入. 六處. 六根. 여섯 가지 감각영역. sa.iaayatana)

4. 촉(觸. 접촉. 부딪침. phassa)

5. 수(受. 느낌. 감각. vedanaa)

이것을 오온(五蘊) 또는 다섯 가지 요소라고 합니다.

 

지금 오온(五蘊)이라고 한 것은 12연기에서와, 경장(經藏)에 따른 오온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한 오온과 오늘 부르는 다섯 가지 요소가 이름만 다르지 실제는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편의상 사람, 남자, 여자라고 부를 뿐이지 모든 것이 이 다섯 가지의 모임일 뿐입니다.

 

빨리어로 윈냐나(vi~n~naa.na. 識)는 우리가 모태에 들어 갈 때 첫 번째 갖는 식(識)입니다. 생(生)이 시작하는 첫 번째 식(識)을 윈냐나라고 합니다.

 

첫 번째 식이 있으므로 해서 정신과 물질[名色]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빨리어로는 나마 루빠(naama-ruupa)라고 하는데 나마(naama)는 정신이고, 루빠(ruupa)는 물질입니다. 이때 정신(精神)은 오온 중에서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질(物質)은 몸[肉體]을 의미합니다.

 

육입(六入. sa.iaayatana)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六根)을 말합니다.

 

촉(觸. phassa)은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대상에 부딪쳐서 생긴 식(識)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식(識)은 육식(六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육식을 하는 것을 통털어 촉을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식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도 여섯 가지입니다.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이 있으므로 해서 알고, 그 촉을 원인으로 해서 좋고, 싫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수(受. 느낌. vedanaa)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세속적인 진리[俗諦]로써 사람이라 부르고 때로는 남자, 여자라고 부릅니다. 지금 이 오온이 과거의 결과로써 얻어진 현생(現生)입니다. 현재의 생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다섯 가지는 4성제의 고성제(苦聖諦. dukkhasacca)입니다. 고성제의 둑카(dukkha)는 고통스러움, 괴로움, 불만족을 말하고 사짜(sacca)는 진리, 제(諦)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우리가 오온을 받은 것은 누가 준 것도 아니고 신이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지난 과거생의 무명(無明)과 행(行)을 원인으로 해서 지금의 오온을 결과로써 받은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의 생에서 무명이라는 원인으로, 행(行. sankhaara)이라는 원인을 만들며 살았었습니다. 여기서 행이라고 하는 상카라(asnkhaara)는 업을 형성하는 의지, 의도입니다. 행은 내가 좋은 의도로 행했는가, 아니면 나쁜 의도로 행했는가, 하는 의지를 가지고 살아 온 것을 말합니다. 이 결과로 오온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제 무명(無明. avijja)이란 과연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수행자가 12연기를 이해하려면 무명의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무명이란 첫 번째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 두 번째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명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 자체가 고(苦)라는 것을 모르게 할 뿐 아니라, 오온이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으로 잘못 알게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오온이 고라는 것을 가리우고, 반대로 이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알게 하는 것이 무명입니다. 무명과 치심(癡心. moha)은 같은 뜻입니다.

이 무명은 나면서부터 볼 수 없는 장님과 마찬가지입니다. 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은 흰색인지, 노란색인지, 빨간색인지 모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어떤 사람이 흰옷을 입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장님은 흰옷을 입고 싶다, 흰옷을 입고 싶다고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조르는 바람에 친구는 검정 색 옷을 만들어서 주었습니다. 자기가 원했던 것은 흰옷을 입고 싶어했기 때문에 검정 색 옷을 받았지만 볼 수가 없었던 장님은 자기가 입은 옷이 흰옷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님은 그 옷을 입고 다니면서 흰색 옷을 입었다고 말하면서 마을과 도시로 나갔습니다. 그는 흰옷을 입었다고 했지만 실제 그가 입은 옷은 검정 색 옷이었습니다.

장님이 검은 옷을 입고 흰옷을 입었다고 돌아다닐 때 그의 친구가 그것은 흰옷이 아니고 검은 옷이니 벗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장님은 벗지 않았습니다. 이 친구는 장님의 부모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지금 아드님이 검은 옷을 입고 흰옷을 입었다고 생각하며, 좋지 않은 옷을 좋은 옷으로 여기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창피를 당하기 전에 빨리 아들을 말리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로 가서 '지금 네가 입을 옷은 흰옷이 아니고 검은 옷이다. 네가 검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 흰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니 빨리 옷을 벗도록 하여라.'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아들이 말하기를 '내가 흰옷을 입고 있는 것이 너무 좋아 보이고 아름다워서 사람들이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재차 벗기를 권했으나 실패하고 아버지에게 가서 검은 옷을 벗도록 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말하기를 '검은 옷을 벗게 하려면 먼저 아들의 눈을 고쳐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얘기는 하나의 예입니다. 나면서부터 장님은 무명을 상징하고, 검은 옷은 고(苦)를 흰옷은 열반(涅槃)을 상징합니다. 법문을 하는 스님이나 수행자 모두 우리가 다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즉 고(苦)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생에서도 고를 모르고 살았으며, 모를 뿐만 아니고 반대로 고가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무명이었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모르고서 행했지만 그 중에는 선업도 있었고 악업도 행했습니다. 우리는 선행을 행할 때마다, 또는 좋지 않은 일을 행할 때마다 고(苦)인 갈애(渴愛)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무명이고 모름으로 해서 원하여서 선한 일, 악한 일을 행한 것이 쌍카라고 하는 행입니다.

 

지금 설명한 무명과 행은 과거에 행한 것이고 사성제로는 집제(集諦)에 해당합니다. 사성제 중에 집제는 고의 원인이 되는 법(法)입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있었고, 행을 원인으로 식(처음에 태에 든 식. 再生連結識)이 있었고, 그 식을 원인으로 명색(마음과 물질)이 있고, 명색을 원인으로 육입이 있고, 육입을 원인으로 촉이 있고, 촉을 원인으로 수(느낌)가 있는 것입니다.

 

무명과 행은 시간으로 볼 때 과거이고, 과거의 원인으로 현생의 오온이 있습니다. 과거의 무명과 행은 사성제 중에 집제(集諦)에 해당하는 것이고 현재 갖고 있는 오온은 고성제(苦聖諦)입니다.

 

이번에는 12연기 도표의 바깥쪽에 있는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넘어가는 설명을 하겠습니다.

 

현재 갖고 있는 오온(五蘊)이 고성제(苦聖諦)라는 것을 모름으로 해서 집착하고, 고(苦)를 다시 받게 하는 선업도 행하고 악업도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 해서, 스스로 다시 원하게 되어 갈애와 집착으로 연결되어서 업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번째 칸에 있는 갈애(渴愛. ta.nhaa), 집착[取. upaadaana), 유(有. 業有. 업의 생성. kammabhava)가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입니다. 현재의 갈애와 집착과 업을 생성[有]하는 집제로부터 4번 칸의 미래에 생(生. jaati)과 노사(老死. jaraamara.na)를 결과로 갖게 되는 것입니다.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을 다음 생에 다시 받게 된다면 역시 고(苦)일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도표에서 화살표(원의 윗 쪽 중앙)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무명인 상태에서 법을 얻기 전에 죽게 된다면 다시 무명과 갈애와 함께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법을 얻지 못하고 죽는다면 우리 역시 무명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 자신의 몸이 오온인 고(苦)라는 것을 모르고 무명에 가려서 죽는다면 아들, 딸, 재산 등등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갈애와 함께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윤회로 떨어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무명과 갈애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무명이 가리고 반대로 이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온과 살기를 원하는 것이 갈애입니다.

 

수행자에게 이 생에서 죽고 다시 태어날 때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사람이 죽음에 가까워졌을 때, 이번 생(生)인 사람에서 다른 생으로 가야할 때, 첫째로는 무명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사람에서 개[犬]의 생으로 가야 한다면 개의 생에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을 모르도록 가리우는 것이 무명입니다.

 

개로 태어난 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모르게 하는 것도 무명이지만 개의 그런 생이 좋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도 무명입니다. 개의 고통을 모르는 무명이 일어난 후에는 이런 무명으로 인해서 모르기 때문에 개로 태어나기를 원하는 갈애가 생깁니다.

 

무명과 갈애 뒤에는 개로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자기가 행한 악업이 개로 태어나게 되도록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것을 모르도록 가리우는 것이 무명이고, 그런 생을 원하는 것이 갈애입니다. 다시 생을 갖도록 행위를 하는 것을 빨리어로 상카라(sankhaara. 行)라고 합니다. 이때의 행(行)은 업의 형성이라고 하며 의도에 의해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윤회가 다른 것이 아니라 무명, 갈애, 행, 이 세 가지가 계속 도는 것입니다.

도표를 보면 1번 칸을 원인으로 해서 2번 칸이 있고, 2번 칸을 원인으로 해서 3번 칸이 있고, 다시 3번 칸을 원인으로 해서 4번 칸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모든 번뇌를 여읜 아라한의 대열에 들지 않는 한은 우리에게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무명과 갈애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명이 무명으로 인도하고 거기에는 항상 가운데 원 안에 있는 무명(無明. avijjaa)과 갈애(渴愛. ta.nhaa)가 우리를 윤회로 이끄는 가장 큰 두 가지 원인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가 원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고, 원의 중앙 상단의 화살표에서처럼 우리가 성인의 반열에 들지 않는 한은 무명으로 해서 다시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묻는데 계속해서 이렇게 연기법에 의해서 윤회를 하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습니까?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모두가 답을 하십시오.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수행자 : 예.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벗어나는 길을 지금부터 안내하겠습니다. 벗어나게 하는 길은 2번하고 3번 칸의 사이에 화살표가 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12연기를 게송으로 만들어서 매일매일 외우게 합니다.

시간으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개입니다.

 

도표의 가운데 중앙에서 볼 수 있듯이 근본이 되는 원인인 무명과 갈애는 네 칸으로 나뉘고, 다시 완전하게 해부해서 암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를 아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법문을 듣고 아는 것, 수행을 해서 아는 것, 법을 얻고 아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법문을 듣고 아는 것은 지금 갖고 있는 오온이 고성제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고(苦)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오온이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이므로 일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고(苦)로 계속 앎으로 해서 오온인 고(苦)를 원하는 갈애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원하지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원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다음 생에서 고(苦)를 받기를 원합니까? 미래에 다음 생에서 고(苦)를 원하지 않는다면 이 생에서 원인이 되는 갈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갈애(渴愛)는 범부가 목마르게 오욕(五慾)에 애착하는 것입니다.

정말 갈애를 없애고 싶습니까?

수행자 : 예, 없애고 싶습니다.

 

그렇게 원하면 할 수 있습니까?

원한다면 말로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정말 갈애를 제거하기를 원한다면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이 오온과 함께 하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 때만이 가능합니다. 오온이 좋은 것이 아닌 고(苦)라는 것을 앎으로 해서 갈애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갈애하고 고성제하고 어떤 것이 중요합니까?

고(苦)가 먼저입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 때 갈애가 안 생깁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해서 원하게 되어 생이 이어집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수행자 : 예.

 

그러면 어디서 우리가 고성제를 알도록 노력해야 하는가는 2번 칸의 수(受. 느낌)에서 3번 칸의 갈애로 넘어가는 사이에서 알아야 합니다.

도표의 아래를 보면 2번 칸의 수에서 3번 칸의 갈애로 넘어가는 화살표가 있습니다. 이 화살표가 양방향으로 표시되어있습니다.

 

첫째, 이 도표에서 주목할 것은 갈애에서 시작해서 집착 쪽으로 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12연기의 자연적인 원인과 결과의 과정입니다.

둘째, 그러나 수(受)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고 '연기의 출구(느낌. 갈애의 소멸)'로 가는 화살표를 따라가면 됩니다.

 

바로 수(受)와 갈애(渴愛)에서 수행자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수(受)라고 하는 느낌에서 갈애 쪽으로 가면 다시 이 생에서 원인이 되어 미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에서 갈애 쪽으로 가지 않고 원의 밖에 있는 쪽으로 나아가면 느낌이 갈애로 연결되지 않아 갈애가 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게 묻겠습니다.

한국인이 좋은 차, 좋은 집을 갖고 수준 높은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 '나'입니까? 아니면 느낌의 작용입니까?

수행자 : 느낌의 작용입니다.

 

그러면 행복하다는 느낌이 항상(恒常) 합니까?

아닙니다. 항상(恒常)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지 않은 법이 고통인가요? 아니면 즐거움인가요?

수행자 : 고통입니다.

 

고(苦)라는 것을 자꾸 자꾸 보고 알아차릴 때에 점점 갈애가 줄어들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시면서 지금 가지고 있는 오온이 고성제라는 통찰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성제라는 것을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 본다면 갈애, 집착, 업의 형성[行]이 없게 되고,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有]이 없다면 결과로써 태어남[生], 늙음과 죽음[老死] 역시 없습니다.

 

그래서 고(苦)가 소멸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멸제(滅諦. nirodha sacca)라고 하며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둘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오온(五蘊)을 개념(槪念) 없이 어떻게 말로 표현합니까?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오온(五蘊)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개념(槪念)입니다. 실재하는 것(paramattha. 빠라마타)은 우리 몸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가 쉽게 얘기하려면 빤냐띠(pa~n~natti. 명칭. 개념)를 붙이는데 이것을 이름이라고 합니다. 개념이란 이름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개념과 다릅니다. 다만 실재에다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알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실재를 보아야 법을 얻기 때문에 실재를 알기 위해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통 대상을 말하는 것은 개념으로써 모든 것이 빤냐띠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을 모두 오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온아! 이리 와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개념으로 모든 것은 빤냐띠이고 실재하는 것은 모두가 똑같이 알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오온이라는 몸과 마음은 이름이고, 실재하는 것은 성품인데 빠라마타라고 합니다. 이 빠라마타를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압니다. 몸의 느낌은 지, 수, 화, 풍의 4대와 28가지 파생된 느낌으로 압니다. 마음도 수, 상, 행을 통해서 느낌으로 압니다.

몸과 마음에서 실제로 있는 것은 빠라마타이고, 이것을 말하거나 부르기 위해 명칭을 붙이는데 이것이 빤냐띠입니다. 그러므로 오온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빤냐띠입니다.)

 

질문 2 :

어떻게 하면 무아(無我)를 알 수 있습니까? 무아를 몰라도 무아를 믿고 수행해도 되겠습니까?

 

답변 2 :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아직 체득하지 않았을 때는 무아를 믿고 수행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성인의 대열에 들지 않은 범부는 믿음을 믿고 실재를 알도록 수행을 하는 것이고 이렇게 수행을 함으로써 실재를 보고 알게 됩니다.

첫 번째는 믿고, 두 번째는 알도록 수행하고, 세 번째는 수행을 함으로써 실제로 보고 알게 되도록 노력을 합니다.

무아에 대해 의심이 없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수다원과를 성취해야 가능합니다.

 

질문 3 :

'나'라고 하는 것이 무아를 알 수 없게 하는 이유라면 몸 전체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있게 되는 나라는 느낌이나,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도 결국에는 떨쳐버려야 하는 가요?

 

답변 3 :

떨쳐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닌 오온의 작용이라고 자주 자주 추구해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역시 수다원과를 얻어야 완벽하게 제거됩니다. 우리가 수행 중에 정도의 차이이지 항상 내가 있다는 것은 수행을 하면서도 갖고 있는 생각입니다. 줄여가려는 노력으로써 수행을 하는 것이고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질문 4 :

오온의 작용으로 12인연으로 돌아가는지요? 오온의 작용이 없어지면 무아가 되는지요? 번뇌가 마음을 떠나지 않고 마음에서 일어나는데 이런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있는지요?

 

답변 4 :

오온의 작용으로 12연기대로 순환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온이 고성제라는 것을 모르므로 해서 순환하는 것이지 오온 자체가 원인은 아닙니다. 오온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생각은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하는 생각입니다. 이때 오온 자체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닙니다.

오온을 원하는 무명에 의해 잘못 알고 오온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원하는 갈애가 있음으로 12연기대로 도는 것이지 오온의 자체는 무아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번뇌가 생기면 잘 알아차리십시오. 계속해서 번뇌가 들어오면 들어오는 대로 알아차리십시오. 이렇게 알아차리다 보면 번뇌가 점점 줄어듭니다.

우리가 사는 집도 물이 새지 않도록 지붕을 덮듯이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 한다면 번뇌가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5 :

모든 것을 고(苦)로 돌리면 생사(生死)를 어떻게 알게 되는지요?

 

답변 5 :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은 오온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뜻이지 생사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고(苦)는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지혜로 오는 것입니다.

 

질문 6 :

좌선 중에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느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것은 오온 중의 무슨 현상이며 무슨 작용입니까?

 

답변 6 :

식온(識蘊 . vi~n~nnakkhandha)을 윈냐나 칸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 아는 마음이 오온의 리더(지도자)가 됩니다. 그렇다고 나머지 4가지가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라임주스로 보면 거기에 설탕도 들어가고 물도 들어가고 하지만 라임열매가 주가 되므로 라임주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질문 7 :

어제 법문에서 사성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오온과 사성제에 대한 것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도제와 도는 같은 것입니까?

 

답변 7 :

오온(五蘊)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고제(苦諦. dukkhasacca)입니다.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아는 것이 도제(道諦. maggasacca)입니다. 도제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집중력이 좋아지므로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제입니다.

사성제 중에서 고성제는 고(苦)의 세 가지 대한 유한성을 의미합니다. 고의 세 가지는 심신의 괴로움을 말하는 고고성(苦苦性)과 변화의 고통을 말하는 괴고성(壞苦性)과 오온의 괴로움을 말하는 행고성(行苦性)이 있습니다.

여기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은 유한(有限)하며 고성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어로 둑카사짜(dukkhasacca)라고 합니다.

 

어제 법문에서 말씀드린 도제(道諦)는 성인의 반열에 들어서 얻는 도(道. magga)가 아닙니다. 어제 말씀드린 도(道)는 지혜에 속하는 고(苦)가 아닙니다. 성인의 반열에 들어가는 것은 멸제(滅諦)를 말하며 이것을 도과(道果)를 성취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인의 대열로 인도하는 것은 도성제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위빠싸나 도를 말하는 진제입니다. 위빠싸나 도는 진제이며 실세간적인 도는 속제입니다.

도성제는 도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팔정도를 말하고, 도(道. magga)는 멸성제에 의해 열반에 이르러 얻게 되는 도과(道果)를 말합니다.

 

셋째 날, 아침 법문

 

마음을 알아차리는 법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알아차리는데 있어서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 5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서 일어나는 대상이 6가지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항상(恒常) 하는 대상 2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밖[外]에서 들어오는 마음은 다섯 가지입니다.

1. 보는 마음[眼識]

2. 듣는 마음[耳識]

3. 냄새맡는 마음[鼻識]

4. 맛을 아는 마음[舌識]

5. 몸을 아는 마음[身識]

 

둘째, 안[內]에서 생기는 마음은 여섯 가지입니다.

1. 탐욕이 있는 마음[貪心]

2. 성냄이 있는 마음[嗔心]

3. 어리석은 마음[癡心]

(이상은 불선(不善)의 대표적인 마음으로 탐(貪), 진(嗔), 치(癡)를 말합니다.)

 

4. 탐욕이 없는 마음[寬容]

5. 성냄이 없는 마음[慈愛]

6. 어리석지 않은 마음[智慧]

(이상은 선(善)의 대표적인 마음으로 관용(寬容), 자애(慈愛), 지혜(智慧)를 말합니다.)

 

셋째, 항상(恒常) 있는 마음은 두 가지입니다.

1. 들숨의 마음

2. 날숨의 마음

 

여기서 마음이란 뜻은 마음의 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안식(眼識)은 눈에서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보는 마음이란 볼 때만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식(耳識)도 귀에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비식(鼻識)은 코에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것이고,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입과 몸에 통해서 들어오는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18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육근(六根. 안, 이, 비, 설, 신, 의)이 육경(六境. 색, 성, 향, 미, 촉, 법)에 부딪쳐서 육식(六識.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조건들의 부딪침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촉입니다. 이런 촉에 의해 식이 성립됩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앞선 마음을 뒤에 있는 마음이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여기에 컵이 있다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컵이구나, 하고 앞선 마음이 있고, 뒤에서 다시 이 앞선 대상을 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음은 한꺼번에 같이 일어나지 않고 한 순간에 하나만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대상이 있을 때(일어났을 때)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대상이 있는 것을 뒤에 일어난 마음이 안다는 것입니다.

'있는 것을 알고', 다시 '있는 것을 알고'를 하는 것은, '앞에 마음이 있고', '뒤에 마음이 있고'를 하면서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대상이 있고 알고', '있고 알고'를 거듭하는 것이고 이것은 '앞에 마음', '뒤에 마음'을 거듭하여 아는 것입니다.

 

마음을 볼 때는 사마디(samaadhi. 집중)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사마디가 있으므로 해서 앞선 마음을 뒤에 마음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집중력이 있어서 자신의 마음을 볼 수 있을 때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식이나 비식이나 설식이나 신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대상을 알고 보면 보는 것을 알고 다시 뒤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內]에서 생기는 마음에서 첫째, 탐욕이 있는 마음을, 욕심이 있는 마음으로 알아두어야 하고, 이 마음은 바람직한 마음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보아야 합니다.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관용), 성냄이 없는 마음(자애), 어리석지 않은 마음(지혜)을,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과 내부에서 생기는 의식이 없을 때는 들숨과 날숨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을 볼 때는 '들숨이 들어오고 없고', '날숨이 나가고 없고' 입니다.

 

(호흡의 경우 코의 호흡을 알아차릴 때는 들숨과 날숨으로 이해하고, 가슴이나 배의 호흡은 일어나고 꺼지는 것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호흡은 일어남이 있고 휴지부가 있고, 다시 꺼짐이 있고 휴지부가 있고, 가 반복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들숨이 들어오고 없고', '날숨이 나가고 없고', 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때의 '없고' 라는 것은 일어남이 있고 사라진 것을 말하며, 또한 일어남이 있었다가 사라진 뒤에 쉼(휴지부)이 있는 것을 '없고'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모든 대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마음도 함께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대상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본다는 것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없고, 알고 없고 한다는 것입니다.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는 몸과, 느낌과, 마음과, 마음의 대상(法)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사념처 중에서 마음을 본다고 말할 때는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이든지 알아차리는 것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알고 보고, 알고 보고, 하는 것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담마누빠싸나(法念處.dhammaanupassanaa)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적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지적(知的)으로 어리석은 사람은 찌따누빠싸나(心念處. cittaanupassanaa), 즉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도 수다원과를 얻기 위해서는 마음을 많이 보아야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넓은 의미에서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도 마음이 하는 것이므로 마음을 보는 것으로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념처에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본다고 하는 것은 이것과 다르게 마음 그 자체의 본성을 대상으로 보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몸을 볼 수도 있고, 느낌, 생각, 행위를 볼 수도 있는데 이때도 본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것이고 이것도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르게 아는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으로써의 마음을 본다는 것을 '마음을 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본다'고 하는 표현은 한문으로는 관(觀)을 의미하며, 영어로는 look, see 등등 많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대상을 마주할 때 눈으로 맞이하는 것이 차지하는 부분이 많고 대표적이라서 본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에서 본다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대상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관(直觀)을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용어로써 '본다'는 말을 사용하고 또한 실제로 눈으로 대상을 제일 많이 보기 때문에 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알아차림을 할 때는 '본다'는 용어에 익숙하여 마음으로 대상을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 실제로 눈으로 보려고 애를 쓰다 두통이나 상기가 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뿐더러 특히 마음을 보는 경우에는 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비 물질이라서 물질을 대하는 개념으로는 알기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의 경우에는 본다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특별하게 '마음을 본다'고 말할 때는 '본다'라고 하지 않고 '마음을 알아차린다' 는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문제로 느꼈기 때문입니다.

수다원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마음을 많이 알아차려야 한다는 말씀은 수행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경우에 수행자들이 처음에 마주하는 대상을 몸이라는 물질이나 마음의 작용인데 수행의 진전에 따라 이런 대상들이 사라져 버리면 남는 것은 마음만 남습니다.

이때 몸이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지고, 알아차릴 대상이라고는 아는 마음 하나이기 때문에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래서 '앎'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이 아는 마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숙지되지 않은 수행자는 헤매게 되고 장애가 일어나거나 수행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그래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일어나는 대상의 뿌리를 알게 되어 본질적인 것에 접근하여 지혜가 나게 하며, 마지막에서 무사하게 수행을 계속하게 되는 힘이 되기 때문에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사마디가 성숙되어야 제대로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수행을 하려면 먼저 호흡과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과정을 충분히 거치고 마음을 대상으로 수행을 하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셋째 날, 저녁 법문

 

여기 계신 수행자 여러분은 매일 하는 법문을 잘 이해하도록 하십시오. 이해하는데 그치지 말고 수행을 해서 실제 경험을 해야 할 것이고 마지막에는 도과(道果)를 얻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법문을 듣고 실행을 해서 도와 과를 얻기를 !

 

일곱 가지 청정에서 첫째, 계청정(戒淸淨), 둘째, 심청정(心淸淨), 셋째, 견청정(見淸淨)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 드렸습니다.

 

네 번째, 도의청정(道疑淸淨. ka!nkhaavitatra.na-visuddhi)을 이해하려면 12연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12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온에 내가 있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오온을 창조주의 창조물로 보거나 우연히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를 갖게 됩니다. 도의청정은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도과(道果)라는 열반을 얻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사람은 가슴에 찔린 창을 뽑듯이,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즉시 잘못된 견해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러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수행을 하는 사람은 잘못된 견해를 강하고 빠르게 제거해야 합니다.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지 않고 수행을 해도 공덕을 쌓고, 집중력을 얻고, 생성과 소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온의 소멸을 내가 소멸한다고 믿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그 두려운 마음 때문에 수행의 향상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도과(道果)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견해 세 가지를 법문을 듣고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12연기를 꼭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 법문을 내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오온의 작용입니다. 여기에서 오온은 식(識. vi~n~naa.na),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 naamaruupa), 육입(六入. 六根. sa.laayatana), 촉(觸. 接觸. phassa), 수(受. 느낌. vedanaa)입니다.

 

오온은 자연히 생긴 것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과거의 시간에서 무명(無明. avijjaa)과 행(行. sa!nkhaara) 을 원인으로 현재의 오온이 있게 된 것입니다. 과거의 시간에서 무명과 행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로써 현재의 식, 명색, 육입, 촉,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오온을 받는 것, 생을 받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도 있고, 천상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많은 생 자체는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써 생을 원하고 집착하여 생을 다시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생에서 현재의 신, 구, 의라는 3업이 행한 선한 행동이나 불선한 행동들이 원인이 되어 다시 업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원인이 있음으로써 미래에서도 태어남[生]과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게 될 것이고 이와 같이 윤회를 멈추지 못하면 생로병사 역시 멈출 수가 없고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생로병사가 있는 한 저나 수행자 모두가 고통 속에서 윤회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왕자로 태어나서 맛볼 수 있는 감각적인 것을 다 맛보고 즐겼으나 처음 노인, 병든 자를 보고 두려움을 느껴 모든 감각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숲으로 떠나셨습니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시고자 출가를 하신 것입니다.

 

미얀마에는 법문을 하시는 여러 큰스님이 계십니다. 그 분들 중에는 입적하신 분도 계시고 현재 살아 계신 분도 있습니다. 이미 입적을 하신 모곡 사야도께서는 다음 세 가지를 중요하게 보셨습니다.

 

첫째,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것

둘째, 생을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아는 것

셋째, 더 이상 생을 받지 않고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것. 그리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을 아는 것, 생멸을 안 후에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법문을 하셨습니다.

 

모곡 사야도께서는 신도들에게 법문을 하실 때 절에 와서 보통의 보시 공덕을 쌓기 위해서 오거나 집중력의 공덕을 쌓기 위해서나 또는 다른 공덕을 원하기 때문에 온다면 오지 말고 도과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의 한 수행자가 저에게 묻기를 다른 센터의 스님은 12연기 도표를 사용하지 않는데 왜 모곡에서는 도표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이 도표를 이해하지 않고 수행을 하면 수행의 향상을 가져오는 것이 느리게 됩니다. 뿐더러 이 도표를 통해서 우리가 윤회를 도는 모양을 알게 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겪어야 되는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해서 도표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무명(無明)과 행(行)이 노사(老死)의 원인이 되고 오온이 늙고 병들어 죽는 것입니다. 갈애(渴愛), 집착[取], 업의 생성[有]을 원인으로 다음 생에 생로병사(生老病死)로 이어집니다.

이 도표를 봄으로써 교훈을 얻고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교훈을 얻음으로 열반을 얻기 위해 강한 마음으로 수행에 임하게 됩니다.

 

12연기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첫 번째 수행자 여러분의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견해가 청정해지므로 지혜(pa~n~naa)와 분명한 앎(sampaja~n~na)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앎과 함께 수행을 함으로써 두려움, 슬픔, 기쁨 등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고(苦)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이 고(苦)라고 보고 앎으로 해서 고에서 벗어나고 싶게 됩니다. 앞에서 분명한 앎이 인도함으로써 도과(道果)를 얻는데 훨씬 빠르게 얻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마하니다나경에서 왜 살아있는 것들이 윤회해서 도는 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12연기를 세 가지 견해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돈다고 하셨습니다.

수행자가 12연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면 많은 이익이 있습니다. 사실 12연기는 어려운 법문입니다. 미얀마에서도 최소한 7일 정도는 법문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들도 바르게 이해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주십시오. 윤회를 돌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가, 왜 윤회를 하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12연기의 이해가 부족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아(無我)라는 법을 모르므로 '나'라는 그늘 밑에서 살아왔고 그래서 내가 윤회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12연기 도표의 첫 번째 칸 1번에 있는 무명(無明. avijjaa)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의 영향으로 해서 모를 뿐이지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무명은 내가 아니고 일종의 법인 것입니다. 무명의 본성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무명이 일어나고 사라진 후에 무명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의 힘이 작용해서 행(行. sa!nkhaara)이라고 하는 업의 형성이 따릅니다. 이 행은 선업과 악업 모두가 포함되는 행인 것입니다.

 

무명의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없지만 무명의 힘이 남아서 그 영향력으로 우리가 행위라는 것을 합니다. 행(行)이 '나'인가 하면 '나'가 아닙니다. 말하고, 생각하고, 말하기를 원하고, 생각하기를 원하고, 내가 말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닌 모두 행의 작용입니다.

빨리어로 상카라(sa!nkhaara. 行)의 본성은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행이라고 하는 것 역시 법(法. 마음이 알아차릴 대상)이고 항상(恒常) 하지 않습니다. 행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과거 생에서 상카라(行. 마음의 의도. 업의 형성)가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지 못함으로써 도과를 얻지 못했고, 그래서 행의 힘(영향)으로 다시 이 생의 오온을 받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 생에서 처음 시작인 식(識. vi~n~naa.na. 입태식. 재생연결식)으로 시작되는 오온은 과거의 업의 힘 때문입니다. 과거의 업(業)이 이 생에 따라오지는 않지만 만일 과거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면 이것 역시 잘못된 견해입니다.

 

여기서 경전에 있는 예를 하나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거울을 볼 때 보고있는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거울 속에 나타난 모습이 거울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까?' 물으면 대답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상좌불교의 부처님말씀에 의하면 과거의 업이 현생에 따라오지는 않지만 현생이 과거의 업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뚜바라고 불리는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단명하고, 어떤 사람은 병을 얻고, 어떤 사람은 재산이 많고, 가난하고, 잘생기고 등등 한 사람, 한 사람의 현재의 결과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각자가 다른 결과는 전생에서 행한 업의 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생을 한 사람은 단명하고, 살생을 삼가한 사람은 오래 살고, 남을 괴롭힌 사람은 병을 얻고, 괴롭히지 않은 사람은 건강하고, 보시를 많이 한 사람은 부자이고, 보시를 안한 사람은 가난하고 등등의 이유가 있음으로써 이 생에서 얻은 결과가 각기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해서 행이 있고, 행을 원인으로 해서 식(재생연결식)이 있고, 식을 원인으로 해서 명색(정신과 물질)이 있고, 명색을 원인으로 해서 육입이 있고, 육입을 원인으로 해서 촉이 있고, 촉을 원인으로 해서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受)라고 하는 느낌에 대해서 말하자면 느낌도 내가 있다고 믿으면, 내가 느끼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싫어하고, 내가 덤덤하게 느끼는 것으로, 모든 느낌을 내가 느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고, 싫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을 내가 느낀다고 생각하면 이것 역시 잘못된 견해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닌 감수의 모임[受蘊]인 수(느낌)의 본성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한 스님이 질문을 했습니다.

'열반에 다다르게 하는 근본이 되는 선업의 공덕이 무엇인가요?'

 

부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계의 청정이고,

두 번째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는 견해의 청정이다.'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첫 번째 계의 청정이 중요한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두 번째 견해의 청정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 견해의 청정입니까?'

 

'견해가 청정해졌다고 하는 것은 선업과 악업을 행하는 '나'는 없고, 선업과 악업의 결과를 받는 '나'도 없고, 선업과 악업을 행하는 것은 상카라(sa!nkhaara. 行. 마음의 의지. 意圖)이고, 그 결과를 받는 것은 느낌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다. 행한 것은 마음의 의도[行]이고 결과를 받는 것은 느낌이라고 아는 것이 견해의 청정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수행자에게 묻겠는데 수행을 하는 목적이 세속적인 풍요를 얻기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도과를 얻기 위해서인가요?'

'도과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물질적인 풍요함을 얻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으나, 도과의 열반을 얻기 위해서는 잘못된 견해를 제거하지 않고는 안됩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부유함 등 세속적인 추구가 병들고 결국에는 죽어야 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해줍니까?'

'아닙니다.'

 

'인간계가 아닌 천상계 존재들 역시 그들의 수명이 다하면 늙고 죽습니다. 여기 계신 수행자 여러분 중에 늙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프기를 원합니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나 역시 원하지 않습니다. 늙기를, 죽기를 원하지 않지만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합니다. 나나 수행자가 늙고 병들고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은 원인이 되는 무명과 행(업의 형성)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늙고, 병들고, 죽고를 다시 반복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원하지 않는다면 늙고 병들고 죽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도표의 3번째 칸에 있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입니다. 이 세 가지의 원인을 만들지 않아야 됩니다. 이 세 가지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 중에서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에 해당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중에서 제거해야할 것은 바로 이 집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 즉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느낌의 힘을 점점 약하게, 종국에는 느낌이 힘을 쓸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느낌도 법(法)입니다. 이 법 역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사라진 후에도 느낌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써 느낌의 힘(영향력)이 갈애가 생기도록 만들게 합니다.

여기서 법이라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고 이것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 느낌을 받게 되고 이 느낌으로 인해 갈애로 넘어 갑니다.

 

여러분께서 이 갈애를 제거하고 싶으면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봄(주시)으로 해서 알아차리고, 즉 보고 알고, 보고 알고를 계속함으로 집중력(사마디)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집중력이 생기면 다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生滅]을 분명히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알아차리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계속해서 알아차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이상을 알아차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차츰 사마디가 생기면 이제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생멸(生滅)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집중력을 얻는 것이 순서입니다.)

 

한국 수행자들이 심념처(心念處. 마음을 알아차림. cittaanupassanaa)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잠깐 언급을 하겠습니다.

 

사념처(四念處. satipa.t.thaana)에 대해서 말하자면 첫째, 신념처(身念處. kaayaanupassanaa)인데 신념처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사념처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법이라서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는 신념처를 말씀하시고 둘째로, 수념처(受念處. vedanaanupassanaa)를 말씀하셨습니다. 수념처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념처 역시 분명하고 두드러진 편이어서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신념처와 수념처를 주 대상으로 하려는 수행자의 성향은 다릅니다. 욕심이 많고 지적이지 않으면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가 좋고, 욕심이 많고 머리가 좋으면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념처가 좋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심념처(心念處. cittaanupassanaa)입니다. 심념처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지적(知的)이지 않으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잘못된 견해란 '나', '내 아들', '내 딸', '내 재산' 등등 모든 것에 항상 '나'를 포함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 처음 대상은 들숨 날숨입니다. 들숨 날숨을 할 때 들이쉬는 대로, 들이쉬는 동안 알아차리고, 내쉬는 대로 내쉬는 동안 알아차립니다.

 

들숨은 물질이고,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물질이 아닌 들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마음'입니다. 즉 물질이 아닌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숨을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고'를 할 때 물질이 아닌 '아는 마음' 쪽으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미얀마에서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데 있어서 마음을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은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다는 아니지만 지적(知的)이지 않은 사람도 포함된다고 말합니다. 이때 여러분 자신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이름을 붙여도 좋습니다.

 

그것은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이름을 붙이지 않고 숨을 내쉬면서 알고, 들이쉬면서 알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바로 법념처(法念處. dhammaanupassanaa)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법념처는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칭을 붙일 때는 어떤 것을 선택해도 좋지만 본인이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이름을 붙여도 무방합니다.

 

좌선을 시작해서 처음 15분 정도는 계속해서 들숨 날숨을 알아차림으로써 점점 집중력이 생기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소리와 귀[耳根]가 부딪침으로써 듣는 마음[耳識]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식(耳識. 귀로 듣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계속 알아차림으로써 결국 소리가 사라집니다.(들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수행을 할 때,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 비오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식)을 대상으로 계속 알아차림으로써 집중력이 강해져서 나중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집중력이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듣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 수행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가려우면 가려움을 아는 마음, 아프면 아픔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모든 대상을 강한 의지와 불굴의 노력으로 알아차림과 함께 보게 되면 이것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것들이 사라진 후 수행자들의 몸에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가 물질로써 심장의 소리를 이식(듣는 마음)이 아는 것입니다. 심장이 뛰고 들으면서 알고, 심장이 뛰고 들으면서 알고를 하는 것입니다.

 

상당한 집중력이 생기면 앞의 마음을 뒤에 마음이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소리를 듣는 마음이 있을 때, 듣고 그 마음은 사라졌는데 그 때에 그 다음 마음은(그 듣는 마음은 듣는 것으로 역할이 끝나고 사라졌고) 앞에서 있었던 듣는 마음이 사라진 것을 뒤에 마음이 압니다.

다시 말하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 마음(이식)이 일어나서 듣고 알고, 사라진 앞선 마음을 뒤에 마음이 다시 알아차린다는 것입니다.

항상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앞선 마음이 없어졌을 때 뒤의 마음이 일어난 다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교통 신호등에 몇 초, 몇 초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신호등에 붙은 숫자 표시가 차츰 줄어듭니다. 5, 4, 3, 2, 1, 0으로 가면서 45초를 줍니다. 쉽게 말하자면 이와 같이 3이 있으면 3이 없어지므로 2가 생기고, 2가 없어지면서 1이 됩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이 없어졌고, 그 뒤의 마음이 듣는 마음이 없어졌음을 뒤에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마음이 사라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과 마음이 사라진 것까지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일어난 것을 알 수도 있고, 사라진 것까지 알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라진 것까지 마음을 알아차리면 마음이 생멸한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이 앞의 마음 뒤에서, 다시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뒤에 마음으로(이것을 편의상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수 있어야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순간의 마음은 있지만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현상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알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무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도, 느낌도 매 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설명한 것을 여러분이 처음부터 다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단계별로 이런 단계를 설명한 것입니다. 정말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을 알아차리려 한다면 상당한 집중력을 요합니다. 어느 정도 집중력이 생겼을 때만이 마음을 계속 알아차려서 앞의 마음과 뒤의 마음을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손에 볼펜을 쥐고 이것이 볼펜이라고 봅니다. 이때 볼펜이라는 대상이 일어났다 사라지면서 눈하고 대상하고 부딪쳐서(접촉) 볼펜이라고 아는 식(識)이 생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마음입니다.

이 첫 번째 마음은 물건을 보고는 끝나는 것입니다. 일어났으므로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마음이 일어나서 다시 볼펜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초로 볼펜을 본 마음은 앞선 마음이고 다시 본 마음은 뒤에 마음입니다.

 

이렇게 앞의 마음과 뒤에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생멸(生滅)을 봐야 합니다. 앞에서 이식(듣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다시 뒤에 마음이 앞선 마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을 때 뒤에 마음이 앞선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셋째 날, 질문과 답변

 

질문 1 :

제일 처음에 좌선을 시작하면 무엇부터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까?

 

답변 1 :

처음 좌선을 시작하면 들숨과 날숨을 15분 정도 알아차리고 나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른 두드러진 대상이 없으면 계속 코에 집중하여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곡사야도의 12연기 수행방법은 처음에 10분에서 15분 정도 코의 호흡에 집중할 것을 말합니다. 이는 초기에 사마타 수행방법을 활용하여 집중력을 키워 안정감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 수행에서 꼭 코의 호흡만을 강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수행자들의 상당수가 배의 호흡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코의 호흡을 말할 때는 들숨 날숨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가슴이나 배의 호흡은 일어남 꺼짐으로 부릅니다. 때로는 배의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으로 부를 수도 있으나 본문에서 보듯이 일어남 사라짐은 생멸(生滅)을 말하는 것으로 호흡의 일어남 사라짐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배의 호흡은 일어남 꺼짐으로 부릅니다.)

 

질문 2 :

12연기 중에서 유(有)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2 :

유(有)는 빨리어로 깜마바와(kammabhava)라고 합니다. (이는 업을 통한 존재. 업유(業有)라고도 하고) 업의 생성(業의 生成)이라고도 부릅니다. 유의 시간은 현재입니다. 현재에서 신, 구, 의로 행하는 선한 행동과 선하지 못한 행동들인 것입니다.

현생에서 행한 선업이나 불선업들이 현생에서 행한 업의 결과로 다음 생이 생깁니다. 그래서 유(有)를 업의 생성이라고 합니다.

 

(유는 현생이면서 미래의 원인이 되는 업입니다.)

 

질문 3 :

죽으면 떠나가는 것이 영혼인가요?

 

답변 4 :

이것이 영혼은 아닙니다. 죽어갈 때에 죽는 사람은 자신이 자기가 가야 할 생에 대해 어떤 형상으로 나타날 수는 있습니다. 죽어 가는 사람이 다음 생을 자신이 상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자식이나 어떤 것에 집착을 하면 집 주위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죽을 당시의 마음이 가야할 데를 못 가서가 아니라 생의 한 종류로 집 주위에서 태어납니다. 예를 들면 아귀나 축생 등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을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라고 말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정신 또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마음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영원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영혼과는 다른 표현입니다. 그러나 이 시각의 차이는 매우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자의 존재나 창조의 문제와 직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으면 떠나가는 것은 영혼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업의 결과로써 생명이 사는 세계 중에 한 곳에서 조건지어져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윤회에 드는 것으로 다음 생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색계, 무색계로 나뉩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이 윤회의 세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삶이 연속되지 않습니다.)

 

넷째 날, 아침 법문

 

위빠싸나 수행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념처 수행을 할 때 처음에는 코나 배에 마음을 두고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며 집중력을 기를 수 있습니다. 코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릴 때,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고', 다시 '들이쉬면서 알고', '내쉬면서 알고'를 10분에서 15분 정도 하면 집중력이 좋아집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집중력이 생겼을 때 몸 전체를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합니다.

 

이번에는 안에서 방문하는 손님을 알아차리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안에서 방문하는 손님은 탐심, 진심, 치심과 무탐심, 무진심이 있고 무치심이 있는데 무치심은 어리석지 않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수행 중에 때로는 탐심이 생깁니다. 이때 수행자는 탐심이 생긴 것을 알아차리고 탐심이 사라질 때까지 보셔야 합니다.

 

(무탐심은 관용(寬容)이고 무진심은 자애(慈愛)이고 무치심은 지혜(智慧)입니다. 지혜는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탐심은 불선(不善)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불선한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은 선한 마음입니다. 즉 선하지 못한 마음을 선한 마음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선한 마음으로 바뀝니다. 알아차림은 행으로써 선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어떤 대상이나 대상에 불순한 것이 붙지 못하도록 마음을 보내는 것이 알아차림(sati)입니다. 이렇게 대상에 마음을 보내면 다시 마음이 이것을 알게 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선한 마음이 새로 일어나면 기존의 불선한 마음은 자연스럽게 소멸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효능입니다.)

 

탐심이 사라지고 난 후에 대상이 없으면 몸 전체를 알아차리십시오. 어느 곳에서든지 마음이 일어나서 몸의 어느 부분으로 마음이 가지는 곳이 있거나, 또는 다른 느낌이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대상이므로 알아차리십시오.

만약 아픈 곳이 있다면 아픈 곳을 알아차리면서 아픔을 주시하십시오. 그리고 아픔이 사라지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면 그 망상을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망상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난 후에 다른 대상이 없다고 알아차림을 놓치면 안 됩니다.

 

우리 몸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습니다. 소리나 다른 두드러진 대상을 알아차리시고 그것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십시오. 이렇게 소리를 듣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다른 대상을 알아차리십시오.

때로는 지루한 마음이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지루한 마음은 치심(癡心)입니다. 이때도 지루한 마음이 사라질 때까지 주시하십시오. 이렇게 계속해서 알아차리다 보면 일어나는 것 역시 마음이고 사라는 것 역시 마음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대상을 주시함으로써 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되면 여러분의 집중력이 더 좋아집니다. 대상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고, 알고를 하게되면 계속해서 아는 마음만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앞의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뒤의 마음이 계속 알아차리는 것을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모곡사야도 수행방법은 첫째는 집중력(사마디)을 높이기 위해서 대상 하나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로 집중력이 좋아진 다음에 대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모곡 방법은 처음에는 코의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림을 계속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직접 자신의 몸에서 알아차릴 때는 지혜(智慧. pa~n~naa)와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이 함께 했을 때 일어납니다.

그래서 일어남과 사라짐은 '나'라고 하는 자신이 아니고, 단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아만심, 유신견이 없어질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고 알았을 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어남이 고(苦)이고 사라짐 역시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 뿐이라는 것을 알고 고(苦)를 숙고함으로써 팔정도 중에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를 하게 됩니다. 정견과 정사를 숙고하여 지님으로써 열반에 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처음에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일어남과 사라짐을 주시하고 알고 하십시오. 오직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질 뿐, 내가 있다는 생각을 제거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통해 정견(正見)과 정사(正思)로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넷째 날, 저녁 법문

 

오늘은 12연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왜 윤회를 하는가 하면 가장 큰 근본원인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입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를 번뇌의 두 가지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오온(五蘊)이 있게 한 가장 가까운 원인은 행(行. 좋고 나쁜 의도가 가지고 신, 구, 의로 행한 업)이며 현재의 오온이 있게 한 가장 근원적인 원인은 무명입니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저나 수행자 여러분이나 왜 현재의 이 생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은 과거 생에서 무명의 속임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2연기 도표 4번에 있는 미래의 생을 받게 되는 가장 가까운 원인은 유(有)라고 하는 현생에서의 업의 생성(kammabhava)입니다. 그 다음 가까운 원인은 집착[取]입니다.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갈애[愛]입니다.

 

여러분께서 갈애의 본성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고통스러운 미래의 생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윤회에 돌게 하는 것은 과거 생에서의 무명과 현생에서의 갈애입니다. 이것을 근본원인으로 다시 12연기의 순환으로 윤회를 하게 됩니다.

 

과거 생에서 모르고 행하므로 업을 만들었고, 현생에서는 원함이 있으므로 집착을 하고, 집착함으로 얻기 위해서 신, 구, 의로 행하므로 업을 만들고, 업을 만들므로 해서 미래의 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윤회의 근본원인이 되는 무명과 갈애의 두 가지로 생을 받게 되면 사성제 중의 고제(苦諦)와 고의 원인이 되는 집제(集諦)를 계속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제과 집제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12연기의 도표에 있는 2번과 4번은 고제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1번과 3번은 집제에 해당됩니다. 도표 1번의 과거 생의 무명과 행의 결과로 도표 2번 현재의 생이 있고, 도표 3번 현생에서 갈애, 집착, 업의 생성으로 미래의 생이 있습니다.

 

과거 생에서 선한 업을 한 사람은 선업의 좋은 결과로 이 생을 받고, 또 현재의 선업의 행으로 미래의 생에 좋은 결과를 받습니다. 또한 과거 생의 불선업을 원인으로 현생에 나쁜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이것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 계속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로 이어집니다. 과거에 원인이 없으면 결과로써 현재도 없고, 현재에 원인을 만들지 않는다면 미래에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 사리불 존자는 전신(사리불존자가 출가하기 전 속인 시절)이 '우 빠띠사' 라는 남자였습니다. 이 사람은 죽지 않는 법을 찾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죽지 않는 법을 찾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다시 법을 찾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에 거리에서 탁발을 하는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스님은 아라한 이셨습니다. 우 빠띠사가 그 아라한의 행동을 보니 위엄있게 걸어가는 모습이 단아하고 맑고, 평온한 기품이 흐르는 존경심이 절로 나는 분이었습니다. 그가 평화롭고 조용한 것을 보고 그에게는 반드시 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리고 우 빠띠사는 스님(아라한)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은 누구이시며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말했습니다.

'나의 스승은 고타마 붓다이시고 나의 이름은 아싸지입니다. 나의 스승이 설한 가르침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생긴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법문을 들은 우 빠띠사는 친구인 꼴리따(뒤에 목련존자가 됨)와 함께 고타마 붓다에게 갔습니다.

 

이와 같이 12연기에서 볼 수 있듯이 무명과 행이라는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있고, 현재의 원인인 갈애[愛], 집착[取], 업의 생성[有]으로 미래에 생을 받고 고통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생을 원하지 않는다면, 즉 열반을 원한다면 현재에 원인을 만들지 않을 것을 수행자들께서는 숙고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음 생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제거해야할 것은 도표 3번에 있는 갈애, 집착, 업의 생성입니다. 미래 생에 원인인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을 사성제에서는 집제라고 합니다.

도표 3번은 미래 생의 원인을 현재 만들고 있는 곳입니다. 갈애, 집착, 업의 생성이란 세 가지의 근본은 갈애입니다. 원하는 것, 좋아한다는 갈애는 어떤 것인가 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五蘊)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의 색, 수, 상, 행, 식은 도표 2번에 있는 식, 명색, 육입, 촉, 수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도표 2번 칸에 있는 오온을 제거한다면 갈애는 저절로 제거됩니다.

 

부처님께서 나뚜마까(natumhaaka)라는 경에서 '다섯 가지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미래에는 분명히 고통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을 제거했을 때만이 미래에 결과로써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수행을 할 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니고 또 좋아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시고 마음을 기울여 수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써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일로 한 분이 아라한이 되신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삐따말라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름이 가진 뜻은 운동경기에서 가장 잘한 사람에게 금메달을 달아 주듯이, 최고로 수행을 잘 해서 달아주는 금메달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은 어느 날 시장을 가려고 집을 나섰는데 우연히 길가에 있는 절에서 스님 한 분이 학승들에게 교학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 가르침의 내용이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의 어떤 것도 우리 것이 아니고,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미래를 있게 하고, 이 오온을 좋아하여 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이것이 나의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행한다면 원함이 저절로 줄어들고 종국에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맛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그는 이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해서 스님이 되기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되기를 청한 다음에 우리에게 생을 받게 하는 원인인 갈애를 제거하기 위한 수행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 절에서 그에게 비구계를 주고 다른 30명의 스님들과 함께 숲에서 수행을 하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상 알아차림과 함께 노력을 기울여 수행할 것을 말했습니다. 갈 때, 올 때, 앉을 때, 잠들 때도 항상 알아차림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알아차림과 함께 하라는 말을 기쁘게 받아들여 수행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숲 속에서는 30명의 수행자가 서로 떨어져 한 명씩 자기 처소에서 혼자 고요히 수행을 했습니다.

 

그는 내가 열반을 얻을 때까지 결코 수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불굴의 의지로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좌선을 할 때 오온의 색, 수, 상, 행, 식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다리가 저려서 행선을 하려고 일어나면서도 다리의 저림을 알아차리고, 일어나고자 함을 알아차리고, 일어남과 허리를 펴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걸을 때도 발을 들고, 나가고 놓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걸을 때도 물질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렸으며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오온인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해서 알아차렸습니다. 이렇게 계속 걸으면서 알아차림을 하다보니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걸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네발로 엉금엉금 기어가며 알아차리는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수행자의 옆모습이 짐승이 기어가는 것같이 보여서 사냥꾼이 지나가다가 산짐승으로 잘못 알고 수행자에게 화살을 쏘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옆구리에 깊게 박혔습니다. 수행을 하시던 스님은 넘어졌고, 그 상태에서도 스님은 알아차림을 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으면서 화살을 빼고 손으로 출혈을 막으면서 계속 수행을 했습니다.

 

이때 스님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이 고통을 알아차림과 노력과 지혜로 밀착해서 보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느낌을 고통으로 알고, 통증이 일어남을 알고, 또 통증이 일어남을 알고, 이렇게 계속 수행을 했습니다. 그 고통이 너무 심해 잠깐씩 기절을 할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이 고통은 나의 고통이 아니고, 이 고통 안에 나도 없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짐뿐이라고 숙고했습니다. 이렇게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수행을 통해서 알아차렸을 때,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없어졌고, 오온을 원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없어졌을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스님은 이처럼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고 난 뒤에 오온을 혐오하는(원하지 않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수행을 하면서 거기서 벗어나고픈 마음으로 더 열심히 노력을 했습니다.

 

스님은 계속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다가 마침내 일어남 사라짐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이때 몸이 더울 때 시원한 물을 끼얹는 것처럼 시원하고 평화로움을 느꼈습니다. 이 순간 스님은 고요와 평화를 맛봄으로 해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스님이 아라한이 되었을 때 자신이 곧 반열반(般涅槃. parinibbaana)에 들게 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수행자들에게 알리려고 기침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주위의 수행자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상처가 매우 심한 것을 알았고, 이 상처와는 대조적으로 아주 평화로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왜 이런 심한 상처를 입고서도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라한이 된 스님은 '나의 수행이 끝나지 않아서 알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열반에 들 때가 되어서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위의 수행자들이 '열반에 드시기 전에 마지막 법문을 해 주십시오.'하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아라한이 되신 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스님들이여, 오온이 스님들의 것이 아님을 알고,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을 제거하는 것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오온은 스님들의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원인으로 생기는 것은 반드시 변화하는 법입니다. 계속 변화하면서 사람으로 또는 다른 생명체로 계속 윤회를 해서 도는 것입니다. 항상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행(行)이라는 법은 다른 의미에서 변화한다는 뜻이며 행이라는 법이 멈춘다는 것은 일어나고 사라짐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평온입니다.'하고 법문을 마치고 반열반(윤회가 없는 죽음)에 드셨습니다.

 

과거의 원인으로 인하여 현재가 있고, 현재에서 원인을 만든다면 다시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들께서 이 12연기를 이해하고 정말 열반을 얻기를 원한다면 지금 다음 생의 원인이 되는 행위인 갈애와 집착, 업의 생성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음 생을 만드는 원인 중에 첫째인 갈애를 제거하려면,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는 오온을 위하거나 원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갈애가 없으면 집착도 없고, 집착이 없으므로 업의 생성도 없고, 업의 생성이 없으므로 다음의 생이 없고, 생이 없으므로 노사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즉 오온을 위하는 마음인 갈애를 없애므로 해서 12연기의 고리가 끊어져 윤회를 벗어나게 됩니다.

 

사두! 사두! 사두!

 

다섯째 날, 아침 법문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가 있고,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지 못한 미래가 없으려면 현재의 원인을 행하지 않아야 합니다.

 

(좋은 미래를 갖기 위해서는 현재 좋은 선업의 원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현재 행하게 되는 첫째 원인은 갈애입니다. 그래서 가장 큰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갈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안다면 거기에는 오온을 원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갈애가 없으면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으면 업의 생성이 없고, 업의 생성이 없으면 생이 없습니다. 생이 없으면 노사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번뇌를 없애는 것입니다. 수행처에서 저녁을 먹지 않는 것도 번뇌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배가 부르면 번뇌가 생깁니다.

 

오늘은 사념처 위빠싸나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수행자가 지켜야할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이 적어야 합니다.

수행 중에 해야할 일은 오로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일 뿐, 다른 일은 없는 것입니다.(수행자들은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2.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꼭 필요한 말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이 적어야 얻는 것이 많고 수행이 점점 향상됩니다.

 

3.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밖에서도 여기를 보고, 저기를 보고할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항상 마음을 보면서 수행에 임해야 합니다.

제어란 의미는 수행자가 항상 주시하면서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것을 보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길 때는 원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볼 때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항상 알아차림과 함께 하면 원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알고, 알고, 이렇게 계속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 원하는 마음은 내가 아니고 단지 마음일 뿐이고, 보는 것 역시 보는 것일 뿐,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혜와 함께 알아야 합니다.

주시하는 것과 함께 아는 것이 이어지면 원하는 마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고, 물질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만 계속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집중력이 생겼을 때는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生滅],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알아차림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듣는 마음 역시 들을 때 듣는 것을 알아차리고, 항상 알아차림과 함께 하기를 원해야 합니다. 또한 행동을 할 때도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고 그 뒤에 가는 행동을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이런 현상은 마음과 물질의 작용일 뿐이며 거기에는 내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좋은 소리를 듣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듣고, 알고, 듣고, 알고를 합니다. 이렇게 듣고, 알고를 계속하여 집중력이 생기면 원하는 마음에 의해 행동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원하는 마음과 원하는 마음에 따르는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수행자들은 다음과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첫째, 사념처의 대상을 많이 알아차리도록 해야 합니다.

대상을 많이 알아차릴수록 수행이 깊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생기면 집중력으로 인해 일어남과 사라짐의 생멸(生滅)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사념처를 더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먹기를 원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먹고, 하나 하나의 동작을 알아차리면서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먹기를 원하는 것은 마음이고 먹는 것은 물질입니다. 대상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을 원인으로 아는 결과가 있게 됩니다.

먹고 씹고 하는 것을 계속하여 대상을 보는 힘이 강해질수록 그 맛이 두드러지지 않고(그냥 맛일 뿐), 씹을수록 집중력이 좋아 질 것입니다. 집중력이 좋아지면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둘째, 몸의 모든 동작에 대한 제어가 있어야 합니다.

몸의 동작이란 가고 오고 움직이는 것을 말하며 몸의 제어란 몸의 행동을 의미합니다.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그래서 가는 것을 알고, 발을 들면서 알고, 나아가면서 알고, 놓으면서 알고, 이렇게 동작 하나 하나를 알아야 합니다.

손의 동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팔을 구부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고, 구부리는 동작이 따로 있습니다. 손을 펼 때도 손을 펴려는 마음이 있고, 그리고 손을 펴는 행위가 있습니다.

이렇게 원하는 마음이 있고, 그래서 움직이게 되고, 이 모든 동작들을 알아차릴 때 지혜로써 보아야 합니다.

 

셋째, 마음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좋은 마음이 있고, 나쁜 마음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좋은 마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쁜 마음도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어떤 마음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잠이 적어야 합니다.

 

(잠자는 시간은 깨어있지 못한 시간입니다.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게으름이며 잠을 적게 자면서 알아차림을 많이 하면 수행이 빠르게 향상됩니다. 수행의 향상이란 알아차림이 계속 이어지므로 집중력이 생기고 지혜가 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음식을 알맞게 들어야 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으면 졸릴 뿐 아니라 나태해 집니다.

 

(음식을 먹을 때 많이 먹은 것은 욕망으로 먹는 것입니다. 음식은 수행을 위해서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하며 그래야 수행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다.

미얀마에서는 수행자 한 사람이 살면서 수행을 하면 그것이 법이고, 두 사람이 살면서 수행을 하면 말이 많고, 세 사람이 살면서 수행을 하면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사념처 수행은 마음이 가라앉아 일어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계속 알아차렸을 때 수행이 향상됩니다. 방에서나 밖에서나 어디에서나 꼭 필요하지 않은 말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자는 아직 보아야 할 대상이 많이 남아있고, 볼 대상도 많이 있습니다. 말을 줄이고, 대상을 많이 보고, 수행에 정진해야 수행자의 남아있는 생이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다섯째 날, 저녁 법문

 

12연기의 윤회를 돌게 하는 근본원인은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입니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사성제(四聖諦) 중에서 집제(集諦)와 고제(苦諦)의 두 가지 성제(聖諦)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제에 다다르게 하는 원인은 집제이고, 그 집제의 원인으로써 현생의 고제가 있습니다. 다시 고제에 다다르게 하는 원인이 집제이고, 집제를 원인으로 해서 다시 고(苦)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 고제와 집제라는 두 가지 성제가 함께 하는 것 뿐 아니라 다음과 같이 4개의 부분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12연기 도표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칸 부분은 과거의 원인입니다.

2칸 부분은 과거의 원인으로 인한 현재의 결과입니다.

3칸 부분은 미래의 원인입니다.

4칸 부분은 현재의 원인의 결과로써 미래의 결과입니다.

 

이 부분을 지나고 나면 연기의 12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1칸 부분의 과거의 원인은 12가지 요소 중에 무명(無明)과 행(行)이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때의 행은 과거에서의 업의 형성을 말합니다.

 

2칸 부분의 과거의 원인으로 인한 현재의 결과는 12요소 중에서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라고 하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六入은 六根을 말하는 것으로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여섯 가지입니다.)

 

3칸 부분의 미래의 원인은 갈애(渴愛), 취(取. 집착), 유(有. 업의 생성)라고 하는 세 가지입니다.

 

4칸 부분의 현재의 원인의 결과로써 미래의 결과는 생(生), 노사(老死)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12요소가 원인과 결과로 진행됩니다. 바로 이것을 제거할 때 개념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천상에서 나거나 벌레로 나거나 모두 개념에 속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온(五蘊)이 고통이고 슬픔이라는 것을 모르고 무명(無明)을 원인으로 선업과 불선업을 지어서 거듭되는 것입니다.

 

과거 생에서 무엇과 함께 살았는가하면 무명(無明)과 행(行) 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현재의 오온을 보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비구도 개념이고, 비구니도 개념입니다. 실제는 오온뿐입니다. 이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세 가지가 발생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갈애, 취(집착), 유(업의 생성)입니다.

 

연결(LINK)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세 가지 연결이란 도표의 화살표 <---LINK--->를 말합니다.

 

1번 칸의 첫 번째 연결(LINK)은 과거의 업이 행(行)으로 인해서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식(識), 또는 의식(意識)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행(行. sa!nkhaara)과 식(識. vi~n~naa.na)이 연결됩니다.(도표에 화살표로 1번 칸의 행에서 2번 칸의 식으로 연결됨)

 

2번 칸의 두 번째 연결(LINK)은 수(受. 느낌)에서 3번 칸의 갈애(渴愛)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느낌에서 갈애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념처 신, 수, 심, 법에서 수념처를 해야 하는 필요성은 이때의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도록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말합니다. 느낌이 일어나면 갈애가 생겨서 집착을 하는 과정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느낌이 갈애의 원인이 됩니다.)

 

3번 칸의 세 번째 연결(LINK)은 유(有. 업의 생성)으로 4번 칸의 생(生. jaati. 태어남)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다음 생을 받는 것입니다. 생을 받은 뒤에 늙어서 죽는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오온(五蘊)이 고통임을 알지 못해서 갈애, 집착이 있고, 업이 생성되게 됩니다. 원하는 마음, 갖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갈애입니다. 그래서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을 하게되고 집착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신, 구, 의 3업을 행하여 업의 생성[有]이 생기게 됩니다.

 

미래를 만들기 위한 현재의 원인으로써의 세 요소(갈애, 취, 유)가 미래에는 두 가지 결과로써 나타나게 되는데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바로 오온뿐입니다. 이때 사람으로 태어나고, 천인으로 태어나고, 축생으로 태어나고 하는 것은 개념입니다.(그것을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오직 오온일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12가지 요소를 축약하면 무명으로 시작을 해서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무명에서 죽음으로, 무명에서 죽음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돌게 됩니다.

 

12연기 도표에서 12요소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번 칸에서 무명(無明), 행(行) 두 가지가 있습니다.

2번 칸에서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3번 칸에서 갈애(渴愛), 취(取. 집착), 유(有. 업의 생성) 세 가지가 있습니다.

4번 칸에서 생(生), 노사(老死)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상의 것을 모두 합치면 12개의 요소가 됩니다. 이것이 윤회를 하는 것이며, 윤회란 결국 12개의 요소가 계속 도는 것입니다.

 

12연기의 3가지 연결(LINK)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 번째 연결은 과거의 업이 행(行. 업의 형성. sa!nkhaara)으로 인해 재생연결의 식(識)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행(行)이 명색(名色. 정신과 물질)과 연결을 해주는 연결의식을 만들게 됩니다.

이때 선업의 행은 선업의 식(識.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되고 불선업의 행은 불선업의 식으로 연결됩니다.

 

(선업을 행하면 다음 생의 연결의식이 선한 식(識)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좋은 일을 하면 다음 생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아 좋은 생을 받습니다. 또한 불선업의 행을 하면 다음 생에 좋지 않은 생을 받게 됩니다.)

 

2. 두 번째 연결은 수(受)에서 갈애(渴愛)로 연결되지만 모든 사람이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연결되는 사람은 누구이며 연결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인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종류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범부(凡夫)이고 하나는 성인(聖人)입니다.

 

① 범부는 항상 느낌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느낌과 늘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그것을 늘 원하게 됩니다. 눈으로 보고 느끼고, 듣고 느끼고, 냄새로 느끼고, 맛으로 느끼고, 몸으로 접촉하여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느낌을 갖고 좋아합니다. 이것이 범부의 마음입니다.

 

② 성인은 느낌이 제거된 고요함을 행복이라고 여깁니다.

부처님께서 범부는 나병을 앓는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가려움을 느끼고 긁어서 피가 나고 곪아 터져도 시원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범부는 행복하고 즐겁기 위해 갈애를 갖습니다. 그러나 범부가 행복한 것이라고 여기는 행복은 고(苦)입니다.

 

범부는 느끼고 원하고, 느끼고 원하고, 이것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느낌과 갈애가 항상 함께 한다면 현재의 존재에서 항상 업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은 각자 다르나 원하는 것은 같습니다.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직장 등등 이런 느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일합니다. 이유는 느낌이 있을 때만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3. 세 번째 연결은 유(有. 업의 생성)에서 생(生)으로 연결됩니다.

신, 구, 의 3업으로 업의 생성이 되고 다시 미래의 태어남이 원인이 되는 생성으로 다음 생이 연결되면 12연기가 계속 돌게됩니다.

 

이상과 같은 연결고리 세 개를 보면 첫 번째, 행(行. 업의 형성)이 재생연결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두 번째, 다시 현재의 느낌으로 갈애가 연결되는 것이고, 세 번째, 그 현재의 느낌과 갈애가 업을 생성하여 다음 생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느낌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고요한 기쁨과 평화로움을 원합니다. 왜 고요한 기쁨을 원하는가 하면 범부가 원하는 느낌과 함께 하는 삶은 고(苦)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수행자에게 묻겠습니다.

'항상 느낌과 함께 하는 삶은 4성제 중에 어느 성제에 해당합니까?'

'고성제(苦聖諦)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한국에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어느 성제에 해당합니까?'

'역시 고성제입니다.'

 

'만약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어느 성제에 해당합니까?'

'고성제입니다.'

 

항상 2번 칸에 있는 느낌과 함께 하는 삶은 갈애로 고리가 연결되어 있지만, 성인은 느낌과 함께 하는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갈애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나병이 치료된 사람과 같습니다. 나병을 치료하면 균 자체가 없으므로 가렵지 않기 때문에 긁지 않음으로 부스럼이 생기지 않습니다.

갈애를 긁는 것과 비교합니다. 가려움이 없으면 긁을 일이 없습니다.

 

수행자에게 묻겠습니다.

'계속해서 가려운 데를 긁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긁는 것을 멈추기를 원합니까?'

'긁지 않기를 원합니다.'

 

'긁지 않으려면 원인이 되는 균을 죽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긁지 않으려면 가려움이 없어야 하고 가려움이 없을 때 긁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느낌이 멸할 때, 즉 느낌이 고성제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을 때, 갈애 또한 멸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는 균이 죽은 것입니다.

 

느낌이 멸한 것이 도성제(道聖諦)입니다. 그리고 갈애가 없어진 것이 멸성제(滅聖諦)입니다.

 

12연기 도표 2번과 4번 칸이 고성제이고, 1번과 3번 칸이 집성제입니다. 그래서 느낌과 갈애가 소멸되면 4성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이 두 가지, 느낌과 갈애가 소멸되는 것 중에 어떤 길을 원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느낌하고 갈애가 연결고리가 되어서 이어지는 것을 원하십니까?

두 번째 부분인 느낌에서 멈춰지기를 원하십니까?'

'느낌에서 멈추기를 원합니다.'

 

정말 느낌이 멸할 때 갈애가 멸하는 길로 가고 싶으면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그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세 개의 연결 고리는 행(行)과 식(識), 수(受)와 갈애(渴愛), 유(有)와 생(生)입니다.

두 개의 윤회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현생에서는 갈애가 앞에서 인도하고 무명이 뒤따릅니다.

과거는 무명으로 원함(갈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원하는 마음(갈애)으로 해서 무명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이끄는 요소가 다릅니다.

 

과거에는 무명이 원인이 되어 원함이 있었지만 현재에는 원함이 있음으로 해서 무명이 뒤따릅니다.

축약하면 근본원인 두 가지인 무명과 갈애는 사성제 중에서 두 가지 고제와 집제가 포함됩니다.

 

다시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 칸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하는 1, 2, 3, 4번 칸인데 이것이 12요소이며 무명에서 노사까지 이어지는 12연기입니다.

세 개의 연결 고리는 행과 식, 수와 갈애, 유(업의 생성)와 생입니다.

 

세 종류의 굴레를 도는 모양을 설명하겠습니다.

 

12연기 도표를 보면 세 종류의 굴레가 있습니다.

(1번 칸의 원의 가장자리 쪽에 '번뇌의 굴레'와 '업의 굴레'가 있고, 4번 칸에 원의 가장자리에 '과보의 굴레'가 있습니다. 굴레는 얽어매는 것, 속박하는 것을 말합니다. )

 

첫 번째 굴레는 '번뇌의 굴레(kilesa va.t.ta)'입니다. 1번 칸의 번뇌의 굴레는 1번 칸의 무명에서 선을 따라 쭉 내려오면 갈애(渴愛)와 집착(執着)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무명과 갈애와 집착이 번뇌의 굴레가 됩니다.(번뇌의 굴레는 무명과 갈애와 집착을 원인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 굴레는 '업의 굴레(kamma va.t.ta)'입니다. 다시 1번 칸의 업의 굴레는 1번 칸의 행에서 선을 따라 쭉 내려오면 업의 생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업의 존재를 말하면 유(有)입니다. 유를 업의 생성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업의 생성이 업의 굴레가 됩니다.

 

세 번째 굴레는 '과보의 굴레(vipaaka va.t.ta)'입니다. 4번 칸의 과보의 굴레는 현생에서 다섯 가지 오온이 과보의 굴레입니다.

 

무명이 번뇌의 굴레이면 행은 업의 굴레이고 오온은 과보의 굴레입니다. 번뇌의 굴레를 원인으로 해서 업의 굴레가 있고, 업의 굴레를 원인으로 해서 과보의 굴레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 생에서 번뇌의 굴레와 업의 굴레라는 두 개의 굴레와 함께 살아왔습니다. 이러한 과보의 굴레로써 현생의 오온을 받았습니다. 과보로 받은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모르므로 갈애와 집착으로 이어져 다시 번뇌의 굴레로 돌게 됩니다. 번뇌의 굴레를 원인으로 다시 업의 굴레로 이어집니다.

 

3번 칸의 유(有. 업의 생성. kamma bhaava)를 원인으로 해서 다시 생(生)과 노사(老死)를 받습니다. 4번 칸의 생(生. jaati)은 태어남을 말합니다. 이 생(生)은 태어남을 말하지만 생유(生有. upapatti bhava)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유는 태(胎)에 들어가는 순간의 존재를 말합니다. 이것을 기유(起有)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생(生. jaati)이라는 태어남으로 인하여 노사(老死)가 함께 따릅니다.

 

세 개의 굴레는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인데 윤회를 돈다고 하는 것은 이 세 개의 굴레를 돌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번뇌의 굴레를 원인으로 해서 업의 굴레가 있고, 업의 굴레를 원인으로 해서 과보의 굴레가 있고, 과보의 굴레를 원인으로 해서 다시 번뇌의 굴레가 있고, 또 이로 인하여 업의 굴레가 오고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번뇌의 굴레는 세 가지 원인이 있는데 무명과 갈애와 집착입니다. 업의 굴레는 두 가지 원인이 있는데 행과 업의 생성[有. kamma bhava]입니다. 그리고 과보의 굴레는 오온이 원인입니다.

 

과보의 굴레는 여덟 가지가 있습니다. 2번 칸의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와 4번 칸의 생(生), 생유(生有), 노사(老死)입니다.

 

이상 설명한 것이 세 가지 굴레를 돌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또한 도표에 나타난 세가 굴레의 앞쪽에 있는 숫자는 굴레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낸 표기입니다. 번뇌의 굴레에 대한 원인 세 가지이기 때문에 '3 번뇌의 굴레' 라고 표기했습니다. 그리고 업의 굴레에 대한 원인이 두 가지라서 '2 업의 굴레' 라고 했으며 과보의 굴레는 여덟 가지라서 '8 과보의 굴레' 라고 했습니다.)

 

다음에는 윤회를 도는 데 따른 시간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12연기의 과정에서 시간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첫 번째는 도표 1번 칸의 과거입니다.

두 번째는 도표 2번과 3번 칸의 현재입니다.

현재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2번 칸으로 과거의 원인으로써의 현재의 결과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3번 칸으로 미래의 원인으로써의 현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원인으로써도 작용합니다.

세 번째는 도표 4번 칸의 미래입니다.

 

이상과 같이 과거의 원인으로 볼 때, 무명으로 인한 행으로 고(苦)의 원인이 되는 집제와 함께 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로 현재에서 오온이라는 고(苦)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오온이 고제라는 것을 모른다면 현생에서 갈애와 집착으로 이어지고, 갈애과 집착이 현재의 집제를 원인으로 해서 다시 이어집니다. 그래서 현재의 원인이 된 집제를 다시 행한다면 그 집제를 원인으로 해서 태어나야 할 미래의 생은 고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간으로 나눌 때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도는 설명을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12연기에 포함된 전체요소는 20가지입니다.

 

1. 과거의 다섯 가지 원인

완전한 구성요소 20가지 중에서 첫 번째는 1번 칸의 원의 밖에서 안쪽으로 세 번째 줄에 있는 다섯 가지입니다. 이것은 무명, 행, 갈애, 취(집착), 유(업의 생성) 다섯 가지입니다.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 무명이고, 모르고 행한 선업과 악업이 행(업의 형성)입니다.

 

선업이든 악업이든 행할 때는 거기에는 항상 원하는 마음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갈애입니다. 집착하는 것을 갈애라고 합니다.(갈애는 범부가 오욕락을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유(有)는 갈애 때문에 집착을 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생성이라고 하며 빨리어로 바와(bhava)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수행자가 과거 생에서 오온이 고(苦)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생에서 선한 행동도 하고 악한 행동도 했습니다. 선한 행동을 하면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원하는 마음과 함께 했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집착을 했습니다.

선업을 행하면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원했고, 사람으로 태어나길 집착했고,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이것이 과거에서 행한 다섯 가지 법을 원인으로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가 있게 된 것입니다.

 

2.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

이처럼 과거에서 행한 다섯 가지 법을 원인으로 해서 현재의 식, 명색, 육입, 촉, 수라는 현재의 다섯 가지 결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2번 칸의 다섯 가지입니다.

 

3. 현재의 원인 다섯 가지

3번 칸을 보면 현재의 원인이 되는 다섯 가지 법이 있습니다. 갈애, 집착, 유(생성), 무명, 행입니다. 이는 갈애를 원인으로 해서 집착이 있고, 집착이 있으므로 해서 얻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생성)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는 무명이 따르고 무명 뒤에는 행이 따르는 것입니다.

 

4. 미래의 결과 다섯 가지

이상의 현재의 원인은 이 다섯 가지 법을 원인으로 해서 미래에도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4번 칸의 다섯 가지는 식, 명색, 육입, 촉, 수입니다.

 

이상이 전체요소 20가지입니다.

 

다시 요약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첫 번째 부분의 과거의 원인 중에서는 무명이 앞에서 이끕니다.

2. 두 번째 부분에서는 과거의 결과로써의 현재가 다섯 가지입니다. 과거에서 무명의 인도로 인해 행함으로써 현재의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가 된 것입니다.

3. 세 번째 부분인 현재의 원인이 되는 다섯 가지입니다. 현재의 원인이 되는 다섯 가지 중에서 갈애가 앞에서 인도합니다. 현재의 다섯 가지 원인으로 미래에도 다섯 가지 결과가 있게 됩니다.

4. 네 번째 부분에서는 미래의 결과로써 다섯 가지입니다.

 

다시 한번 총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근본 원인은 두 가지, 성제는 두 가지, 굴레는 세 가지, 요소는 이십 가지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은 이것을 꼭 기억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12연기에서 왜 도는가를 충분히 이해하셨습니까?

 

근본 원인이 되는 두 가지는 무명과 갈애입니다. 무명을 원인으로 현재의 고가 있습니다. 그리고 갈애를 원인으로 해서 미래에 고가 있게 됩니다. 그래서 윤회를 돌게 하는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인 것입니다. 이것을 꼭 외우시기 바랍니다.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근본원인 두 가지로 윤회가 도는 것을 설명했고, 이번에는 집제와 고제의 두 가지가 어떻게 도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집제를 원인으로 해서 현생인 고제가 있습니다.

네 부분을 설명하면 1번 칸이 과거이고, 2번 칸은 과거의 결과로써 현재이고, 3번 칸은 현재의 원인이 되고, 현재의 원인이 있음으로 해서 4번 칸의 미래가 있게 됩니다.

과거의 원인의 결과로써 현재가 있고, 현재의 원인으로 해서 결과로써 미래가 있게 됩니다.

12가지 요소를 통해서 윤회를 한다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12가지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갈애, 집착, 유(업의 생성), 생, 노사입니다.

 

연결고리 세 가지는 행과 식, 수와 갈애, 유(업의 생성)와 생으로 이렇게 세 가지의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세 가지의 굴레는 번뇌의 굴레, 업의 굴레, 과보의 굴레입니다.

시간으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 가지가 있습니다.

20가지 요소는 과거의 원인 다섯 가지, 과거의 원인의 결과로써 현재에 다섯 가지, 현재의 원인으로 다섯 가지, 미래의 결과로써 다섯 가지입니다. 이 모든 것이 윤회를 돌게 하는 도는 모양을 설명한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정말 윤회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2번 칸과 3번 칸에 있는 화살표에서 결정지을 수 있습니다.

(2번 칸에서 3번 칸으로 넘어가는 화살표는 수(느낌)에서 갈애로 가는 과정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면 갈애로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집착이 생기지 않아 새로운 업이 생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애를 일으키는 느낌을 알아차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현생의 오온이 고라는 것을 보고 아는 도제를 경험하도록 노력하십시오. 도제를 경험한다면 원함, 갈애가 없어지므로 고통이 끝난 것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잠시 쉬어가기

 

미얀마 쉐민모 선원의 우 소바나 사야도께서 천안 호두마을에서 하신 12연기법 수행은 10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법문도 10일 동안 한 것이 여기에 게재되겠습니다. 이제 그 절반이 되는 다섯째 날 법문을 마치고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그간 어려운 법문을 읽어주신 도우님들게 진심으로 노고를 치하하고 싶습니다. 12연기의 법문이 내용은 뛰어나지만 여간한 인내가 없으면 계속 읽을 수 없는 어려운 법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저는 미얀마에 있으면서 12연기 법문을 듣고 싶었지만 기회가 닿지 않아 아쉬움을 달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한국에서 12연기 법문을 한다기에 이런 행운이 있는가 하고 집중수행에 참여했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이 법문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수행에 참여하여 법문을 들으면서부터 저 혼자 듣기에는 너무도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이 법문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런 마음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은 있었지만 여기에 이 법문이 소개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간 원고를 정리하면서 나름대로 어려움이 많았지만 워낙 내용이 좋아서 오직 이 원고를 정리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더욱이 수행에 참여하여 법문을 들었는데도 원고를 정리하다 보니 놓친 부분이 많아서 새롭게 느껴질 때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제가 쉐우민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배웠는데 이번 12연기 법문을 통하여 마음을 보는 문제에 대한 이론적 정립을 할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수확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수확은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상세하게 소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머지 5일 동안은 12연기를 바탕으로 한 법문 내용이 소개되겠습니다. 그 중에서 깨달음으로 가는 칠청정(七淸淨)이 자세하게 소개가 됩니다.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쉬어 가는 시간을 맞아 지금까지 이 법문을 읽으신 도우님들의 의문이나, 느끼신 소감이나 좋은 견해가 있으시면 이 게시판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내용이 되었거나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는 이 법문에 의문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여기시면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저도 하나 하나 확인을 하면서 글을 올리고 있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약간 확신이 안가는 글을 올린 부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통역의 실수인지 녹취자의 실수인지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었는데 어떤 때는 이것을 바로 잡기도 했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어려움이 컷 습니다. 그래서 약간 미진한 부분에 대한 것은 이 원고를 미얀마에 다시 보내서 우 소바나 사야도께 마지막 검증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이 법문에 관계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올려주시면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번 미얀마 방문 길에 쉐민모 선원에 들려 우 소바나 사야도도 뵈었지만 모곡센타에 들려서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을 몇 가지 구해오기도 했습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를 뵈었을 때도 많은 수행자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다시 모곡센터에 가보니 역시 많은 수행자들이 12연기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 소바나 사야도의 말씀처럼 외국에서는 12연기 법문을 쉽게 들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많은 수행자들이 이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이번 12연기 법문에 대한 게재가 끝나면 연이어서 우 소바나 사야도의 스승이신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을 번역하여 연재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내친 김에 계속 12연기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생각에서입니다.

 

만약 이 법문을 읽으시고 12연기를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번역작업을 의뢰하고 싶습니다. 혹시 혼자의 힘으로는 어렵겠다고 여기시면 함께 번역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있으시다 면 모두 맡기겠습니다. 자료는 제게 있으니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은 소망입니다만 이 글들이 모아지면 앞으로 책으로 출판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이내 12연기에 대한 법문으로 다시 뵈올 것을 기대합니다.

수행자 여러분의 참여로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올림

 

여섯째 날, 아침 법문

 

마음을 보는 법을 기본으로 해서 모곡 사야도께서 설하신 사념처 수행의 끝으로 인도하는 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념처(四念處)란 수행자가 수행을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념처 수행에서 사념처의 첫 번째는 우리의 몸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할 때 알아차림은 대상에 마음을 붙이는 기능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식의 기능이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함께 본다'는 것은 주시해서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알아차림은 주시(注視)라는 의미로 함께 쓰입니다.)

 

어느 수행자이든지 사념처의 대상을 많이 보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항상 대상이 있습니다. 들숨, 날숨, 가고, 서고, 앉고, 구부리고, 펴고, 화장실에서 보는 일까지 모든 것들을 시작과 끝까지 다 알아차림과 함께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몸 밖에 있는 것뿐이 아니라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것 모두를 보아야 합니다. 집중하는 힘이 좋아지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념처 수행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몸이 4대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몸이 물질일 뿐만 아니라 무상, 고, 무아임을 숙고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상, 고, 무아까지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게 됩니다.

일어남 사라짐을 보면서 모든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수행이 됩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생성과 소멸을 보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일어나고 사리지는 생멸(生滅)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몸과 마음이란 대상은 항상 일정하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게되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게 되며 이것을 보는 것이 바로 변화를 보는 것입니다. 변화는 무상입니다. 그래서 위빠싸나 수행은 먼저 변화를 보는 수행입니다.

무엇을 보거나 대상을 아는 것은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무수히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변화가 일어남 사라짐입니다. 이 일어남 사라짐은 단순히 호흡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느낌 그 자체가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처음에 할 일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림과 노력과 지혜로, 몸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대상을 볼 때는 보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소리를 들었을 때 듣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았을 때 냄새를 맡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었을 때는 먹고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접촉, 느낌이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의 대상이 이어지면 거기엔 아는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집중력(사마디)이 좋아지면 아는 마음 하나만 있으며 그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수행이 향상되면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 하나만 남게 됩니다. 이런 현상은 알아차림과 집중과 노력이 매우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음이 오직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이것을 앎이라고 표현하는 곳도 있습니다.)

 

아는 마음 역시 일어남과 사라짐을 합니다. 대상이 생기고 알고, 생기고 알고 하는 것을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정확한 표현은 대상이 생기는 것을 생기면서 알고, 생기는 것을 생기면서 알고 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과 함께 알아차림과 아는 마음이 함께 해야 합니다. 대상의 변화를 함께 예의 주시하고 또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에서 대상이 생기는 것과 그것을 아는 것은 일치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대상이 생긴 뒤에 아는 것이 아닙니다. 생기면서 아는 것입니다. 대상이 일어났을 때 대상에 향해지는 알아차림과 대상을 인식하는 것과는 간격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동시성, 일치성, 현장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을 수관(隋觀)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요령입니다.)

 

아는 마음 역시 내가 아니고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육식을 하는 것이 생기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 몸의 육문(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門)이 육경(색, 성, 향, 미, 촉, 법)에 부딪치는 것 역시 항상 하지 않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게 될 때 사라짐이 보다 강하게 알아차려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는 사라짐을 더 강조해서 보아야 합니다.

알기를 원하는 마음, 그리고 사라짐을 계속 보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알고 사라지고, 알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순서에 의해 알아차림을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첫 번째 단계는 간략하게 줄여서 말하자면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즉 생성을 보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이것을 알고, 일어나고 알고 하는 것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일어나는 것 하나를 아는 것에 주력합니다. 그래서 생(生)에 주의를 집중하여 아는 것입니다.)

 

② 두 번째는 이미 아는 마음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라짐을 아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라짐에 주의를 집중합니다. 이것은 멸(滅)하는 현상에 주의를 집중하여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같이 봅니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 보는 것에 지루한 마음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이때 이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수행이 될 것입니다.

(끝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하나로 묶어서 생멸(生滅)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보는 힘이 차츰 생기면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보는 힘이 없을 때는 간단한 것부터 보면서 집중과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이 생기면 더 자세한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모든 생기는(일어나는) 것은 다 사라진다는 법을 보게 됩니다. 단지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고 모든 생기는 것은 다 사라진다는 법을 직접 봄으로써 거기에는 내가 포함되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단순한 법으로써 일어남과 사라짐뿐이지 내가 거기에 없음을 숙고하게 됩니다. 이런 숙고는 거기에 갈애와 집착이 잘못된 견해라는 것을 알고 이것을 제거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갈애 역시 나라는 대상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부심 역시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없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질투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여기서 잘못된 견해는 단지 법을 가지고 거기에 내가 포함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갈애과 자부심과 잘못된 견해의 세 가지가 줄어들 것입니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것들을 제거하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고(苦)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이 고라는 것을 알면 떨리게 됩니다. 계속 고의 연속임을 알아차리고 자기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고의 연속임을 보고 있으면 고의 혐오감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을 알면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실제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생기게 됩니다.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마지막에는 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쁨을 도(道)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궁극적인 평화로움을 맞이했을 때 거기서 수행은 끝이 납니다.

 

모든 수행자가 대상이 끊어지지 않고 볼 수 있도록 수행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여섯째 날, 저녁 법문

 

어제는 12연기에 대해서 법문을 했는데 오늘도 12연기를 바탕으로 법문을 하고자 합니다.

오온과 12처, 18계에 관하여 법문을 하겠고, 현생에서 12연기를 어떻게 돌고 있는가를 설명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경(經)에 두 범부가 있었습니다. 한 범부는 분명한 앎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고, 한 범부는 바른 앎과 지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앎(아는 마음)이 없는 사람을 미얀마에서는 장님이라고 합니다.

앎이 있는 사람을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자신의 몸에 오온이 있지만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을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몸에 오온이 있는 것을 아는 것을 눈이 좋은 범부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지혜이고 모른다는 것은 무명입니다. 지혜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혜안이라고 합니다.)

 

눈을 볼 수 없는 장님은 오온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즉 변하는 오온의 속성을 모르고 내 몸이 변한다고 믿습니다.

느낌 역시 수(受)의 작용임을 모르므로 내가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지각(知覺)하고 기억하는 것을 상(想)의 무더기의 작용임을 모르므로 내가 지각한다고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합니다.

행(行) 역시 조건지어진 형성력이 아닌 내가 행한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아는 마음[認識] 역시 식(識)의 작용이 아닌 내가 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잘못 생각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므로 이런 사람을 장님이라고 부릅니다.

 

눈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범부는 수행을 행함으로써 물질이 변하는 것을 보고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는 것은 색의 무더기[色蘊]라는 물질의 본성이라는 것을 압니다. 느낌 역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변하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의 본성이라고 바르게 압니다.

상(想) 역시도 내가 아닌 상의 무더기[想蘊] 자체의 역할일 뿐인 것입니다. 행(行) 역시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지어진 행의 무더기[行蘊]의 역할일 뿐인 것입니다. 식(識. 認識. 아는 마음)도 식의 무더기[識 ]의 역할이라고 아는 것이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법을 보고,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눈이 좋은 범부라고 합니다.

 

수행자도 오온(五蘊)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오온은 색의 무더기[色蘊], 수의 무더기[受蘊], 상의 무더기[想蘊], 행의 무더기[行蘊], 식의 무더기[識蘊] 다섯 가지입니다.

 

이제 오온에 대한 것을 끝내고 12처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2처(十二處)를 설명하자면 내적인 인식기관 6가지, 외적인 인식 대상 6가지를 합쳐서 12처가 됩니다.

여기서 내적인 인식기관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라고 하는 눈, 귀, 코, 몸, 마음을 말하며 그래서 이것을 안에 있는 여섯 가지[六內處]라고 말합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으로써는 눈의 대상으로 모양, 귀의 대상으로 소리, 코의 대상으로 냄새, 혀의 대상으로 맛, 몸의 대상으로 접촉, 마음의 대상으로 법(마음의 현상)이 있습니다. 이것을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이라고 하며 밖에 있는 여섯 가지[六外處] 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포함하여 12처라고 합니다. 왜 12처라고 부르는가 하면 윤회를 돌게 만들기 때문에 12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2처 중에 안에서의 6가지는 물질로써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이고 마음으로써는 의(意) 하나입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대상은 물질로써는 모양, 소리, 냄새, 맛, 접촉이 있고, 여섯 번째는 마음의 대상, 혹은 현상, 법으로써 이렇게 여섯 가지가 정신과 물질이 둘 다 포함됩니다. 그래서 12처도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18계(十八界)를 설명하겠습니다. 이 18계를 이해함으로써 현재 우리가 12연기를 왜 돌게 되는 가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

 

18계는 내적인 인식기관으로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여섯 가지와, 외적인 인식대상으로 와서 자극하는 여섯 가지가 부딪쳐서 생긴 여섯 가지 식(識)을 합쳐서 18계입니다.

 

수행자께서 지금 보고 있는 도표는 글로써 보여주는 연기이고, 지금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실제 우리가 생활하면서 돌고 있는 연기입니다.

수행자의 몸에는 눈이라는 물질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양이라는 물질입니다. 물질로써 눈과 물질로써의 모양이 부딪쳐서 보고 아는 마음[眼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눈과 모양이 원인이 되어 결과로써 아는 마음이 있게 됩니다. 즉 눈과 눈의 대상인 모양, 형상이 있으므로 결과로써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것이 촉(觸)입니다. 눈과 모양과 마음[識]이 합쳐졌을 때 촉이라고 하는 부딪침이 생깁니다. 눈과 대상인 모양이 있음으로 보고 아는 마음[眼識]이 있고 이것이 원인이 된 결과로써 촉이 있게 됩니다. 촉이 일어날 때마다 촉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할 때 촉(觸)이 고제(苦諦)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촉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모름으로써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원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해서 좋은 모양, 좋은 소리, 좋은 냄새, 좋은 몸의 접촉이 있을 때, 좋은 생각들이 들 때마다 이 생각들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갈애(渴愛)입니다.

 

이렇게 촉을 원인으로 해서 느낌이 있고 느낌을 원인으로 해서 갈애로 이어집니다. 원하는 마음을 보지 않음으로 해서, 아니면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지 못함으로 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자체가 사성제(四聖諦) 중의 고제(苦諦)라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어서 다음 단계인 집착[取]이 생깁니다.

 

집착은 좋은 모양에 대한 집착, 좋은 소리에 대한 집착, 좋은 냄새에 대한 집착, 좋은 맛에 대한 집착, 좋은 접촉에 대한 집착, 이것을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이라고 말합니다.

 

집착에는 다음의 네 가지 종류의 집착이 있습니다.

 

첫 번째 집착은 안, 이, 비, 설, 신에 대한 감각적 욕망[愛取]입니다.

 

두 번째 집착은 잘못된 견해에 대한 집착[見取]입니다. 우리 몸에 내가 있다는 유신견(有身見)과 이 세상으로 끝이라는 단견(斷見)과 영원한 것이라는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세 번째 집착은 잘못된 수행법, 잘못된 계율에 대한 집착[戒禁取]입니다. 잘못된 수행법은 심한 고통을 겪게 하는 수행법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옷을 입지 않고 수행을 하는 것이 열반에 빨리 다다른다는 잘못된 수행법이 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인간이지만 동물같이 네 발로 걸으면서 수행을 함으로써 열반에 빨리 다다를 수 있다는 수행법도 있습니다.

 

네 번째는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우리 수행자가 네 가지 집착이 남아 있다면 신(身), 구(口), 의(意)라는 몸과 말과 생각이라는 3업으로 이어집니다. 밖에서 생활하면서 일을 할 때도 집착하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살아있는 생명들은 집착을 갖고 있는 일, 집착하는 일, 집착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있습니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있고,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생성이 있고,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다시 미래생이 있습니다. 현재 12연기를 돌고 있음으로 미래생으로 이어집니다.

 

수행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야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본생경(本生經. jaataka)에 부처님의 어느 전생에서 범천을 다스리는 왕자로 태어나 왕이 된 후에 왕궁을 버리고 사무량심(四無量心)인 자(慈), 비(悲), 희(喜), 사(捨)를 닦으면서 지낼 때였습니다. 어느 날 왕비의 마음에 좋지 않은 징조가 떠올랐습니다. 나쁜 징조를 본 왕비는 왕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왕비가 왕을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은 고요하고 편안한 평상시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무량심과 함께 생활을 하던 중 죽음이 가까워 졌을 때 왕비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왕국의 백성과 나를 측은히 여겨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왕은 왕비에게 나에게 더 이상 갈애와 연관된 말을, 갈애를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내가 당신과 백성을 측은히 여겨서 갈애와 함께 죽는다면 갈애를 원인으로 마음에 집착이 생기고 집착을 원인으로 신, 구, 의 3업이 생겨 이 업과 함께 죽으면 나쁜 곳에 태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죽을 무렵에 원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이 생기면 좋은 곳으로 가지 못하고 나쁜 곳에 태어나게 되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법에 의하면 자신의 소유인 집, 자신의 딸, 자신의 아들, 자신의 재산, 자신의 몸 등을 좋아하여 집착하는 마음,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마음이 떠나지 못하고 죽는 다면 9가지 생 중에 하나를 받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집이나 재산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마음이 원하고 집착하게 되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생을 바꾸게 되는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연결이 될 때 이생에서 마지막에 이런 생각(집착)을 한다면 좋은 생으로 태어나지 않고 축생이나 나쁜 생을 받게 됩니다. 소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염소, 쥐, 닭, 빈대, 물소, 개 등등으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벌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전생일 적에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갈애를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말고 원함을 일으키는 말을 하지 말고 원함을 제거하는 말을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왕비는 두 손을 모으고 말했습니다. '왕이시어, 이 왕국과 저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지 마십시오. 수행을 하시면서 죽음을 맞이해서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전신인 왕께서는 '사두! 사두! 사두!'로 답하셨습니다.

 

<사무량심(四無量心)

1. 자애[慈] : 선의, 자비, 보편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신의 진실한 마음이 모든 존재들의 행복과 평화와 번영을 기원합니다.

2. 동정[悲] : 다른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려는 동정심입니다.

3. 함께 기뻐하는 마음[喜] : 숭고한 덕은 함께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단순한 동정심의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이해하여 주는 기쁨입니다.

4. 평정한 마음[捨] : 집착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균형을 가진 평등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12연기를 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눈과 보여지는 모양, 그리고 보고 아는 마음[眼識]이라는 이 세 가지는 육근이 육경에 부딪쳐서 생긴 육식이라고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이 12연기의 시작에 해당합니다.

 

첫째, 눈이라는 안근(眼根)이

둘째, 대상으로써의 모양, 형상과 부딪쳐서

셋째, 보고, 아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촉(부딪침)이 생기고 다시 촉을 원인으로 하여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기고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으로 이어지고 집착을 원인으로 업의 형성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항상 알아차려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안식(眼識)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다시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그리고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하는 마음[意識]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생멸(生滅)을 보아야 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고 볼 수 있으면 고제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이렇게 고(苦)에 대한 이해가 생김으로써 지혜가 생깁니다. 지혜가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것은 사라진다는 분명한 앎이 앞서 인도하는 정도(正道)입니다. 이렇게 팔정도(八正道)가운데서 혜(慧)에 해당하는 정도[正見, 正思惟]와 함께 죽을 수 있다면 이 생에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설령 도(道)와 과(果)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음에 좋은 생을 받을 수 있으며 다음 생에서 열반에 들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도과(道果)를 얻기 전에는 계속해서 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촉(觸)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납니다. 다시 이 느낌을 보지 않음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느낌이 많아집니다.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느낌일 것입니다. 심한 고통이 일어났을 때 내가 괴롭고, 내가 아프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은 느낌의 작용일 뿐이지 나와 분리해서 보아야 합니다.

(몸이 아플 때는 몸만 보아야지 마음까지 아프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까지 아프면 화살을 두 번 맞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느낌은 생기고 사라지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죽음에 다다랐을 때 고통스러운 느낌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므로 이것을 알아차리면서 죽음을 맞이하라고 하셨습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만약 갈애가 일어났다면 다시 갈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도록 하십시오. 갈애를 원인으로 집착이 생깁니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갈애가 일어나면 죽기가 싫어집니다. 그래서 아들과 딸과 헤어지기 싫고, 집을 떠나기도 싫어집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욕심인 것입니다. 이것을 욕심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욕심이 일어나서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욕심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죽음에 임박해서는 자신과 아들, 딸, 아내, 남편, 재산에 대해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애와 집착이 아닌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보면서 죽는다면 12연기의 고리를 자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왕비가 왕에게 '갈애를 버리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십시오.' 라고 말씀드린 후에 왕은 죽음을 맞았고 죽은 다음에 좋은 곳에 태어났습니다.

 

수행자가 해야할 일은 왜 12연기를 돌아야 하는 가에 대한 이해가 있은 다음 고리를 자르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눈의 대상인 형상이 부딪침으로 인해 아는 마음[眼識]이 일어나는 과정이 촉(觸)이 있는 것입니다. 이 촉을 원인으로 느낌[受]이 있게 되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渴愛)가 생기고 갈애를 원인으로 취(取)가 일어나며 취라는 원인으로 유(有)라고 하는 업의 생성이 있고 업의 생성을 원인으로 생(生)이 있고 생을 원인으로 노사(老死)가 있습니다.

 

다시 귀가 소리와 마주쳐서 듣는 마음[耳識]이 생기고 이러한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로 이어집니다.

 

코와 냄새가 부딪쳐서 냄새 맡는 마음[鼻識]이 생기고 촉을 원인으로 느낌을,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혀도 마찬가지로 맛과 부딪쳐서 설식[舌識]이 생기고 촉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기게 됩니다.

 

몸과 접촉도 마찬가지로 몸의 접촉을 아는 마음[身識]이 생기고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마음과 생각도 마음의 대상인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意識]이 생기고 다시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깁니다.

 

이것이 현재의 생에서 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생기고 느낌을 원인으로 갈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알지 못함으로써 미래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은 현생의 12연기를 계속 돌 것입니까? 아니면 고리를 자를 것입니까?

윤회에 돌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항상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즉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이렇게 수행 중에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하나고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으로써 수행자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오온을 좋아하지 않고, 현재 좋아하지 않음으로써 미래에도 오온을 갖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오온이 고제임을 알 때 미래의 오온도 역시 고라고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오온이 고제라고 알았을 때 미래의 오온도 역시 고제라고 안다면 수행자의 마음에 현재의 오온을 좋아하는 것이 갈애라고 알게 됩니다. 현재의 오온을 좋아하는 것이 갈애라고 알게 되면 갈애를 제거함으로써 미래까지 이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갈애를 제거할 때만이 윤회의 고리를 자를 수 있습니다.

 

12연기를 통한 윤회를 돌지 않으려면 갈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갈애를 제거하려면 고귀한 진리인 사성제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성제(四聖諦)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가 괴로움인 고제(苦諦)입니다.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집제(集諦)입니다.

셋째는 괴로움의 소멸인 멸제(滅諦)입니다.

넷째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인 도제(道諦)입니다.

 

여기서 고제와 집제가 좋지 않은 성제(聖諦)이고 멸제와 도제는 좋은 성제입니다.

(첫째, 괴로움은 있는 것이다. 둘째,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이다. 셋째, 괴로움은 소멸시킬 수 있다. 넷째,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은 팔정도이다,)

 

고제란 무엇인가요? 오온(五蘊)을 고제라고도 합니다. 12처 중에서 받아들이는 역할의 내적인 감각기관 여섯 가지를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고제입니다. 다시 와서 부딪치는 외적인 대상이 여섯 가지를 육경(六境)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고제입니다.

이상 12처에서 생긴 것을 아는 마음인 식(識)이며, 이 여섯 가지를 육식(六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두 합쳐 18계(十八界)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고제입니다.

 

왜 오온과 12처와 18계가 고(苦)인가 하면 일어나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온을 고라고 부르는 원인은 무엇인가요? 고(苦)가 하는 일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먹기를 원하면 먹어야 하고, 가기를 원하면 가야하고, 졸리면 자야합니다.

 

오온이 괴롭히므로 수행자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달래야 하는 것입니다. 안 먹으면 배가 고파서 괴롭고, 먹으면 배가 불러서 고통스럽습니다. 조금 오래 누워있으면 등이 아프고, 그래서 옆으로 누워보지만 편치가 않습니다. 겨울이면 추워서 괴롭고, 여름이면 더워서 괴롭고, 모든 많은 일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래서 모곡 사야도께서는 오온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설명하실 때 어머니 한 분이 두 아들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두 아들을 가진 어머니가 있습니다. 이 어머니는 두 아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은 나면서부터 장님이었고 또 다른 아들은 소아마비였으므로 잘 걸을 수 없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장님으로 태어난 아들은 장님뿐만 아니라 설사하는 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소아마비 아들은 약간의 정신이상도 있었습니다.

 

장님이 갖고 있는 설사하는 병과 소아마비인 아들이 갖고 있는 정신질환도 어머니가 돌보아야 합니다. 한 아들이 설사를 하고 나면 먹여야 하고, 먹고 난 후 설사를 하면 다시 씻겨야 하는 일을 어머니 혼자서 해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쉴 사이가 없었습니다. 소아마비와 정신질환을 갖고 있는 아들은 항상 이것을 원하고 또 저것을 원하고 얻은 후에도 불만스러워하고 다시 요구하면서 여러 면에서 어머니를 괴롭혔습니다. 어린이가 둘이고 돌보는 어머니는 한 분이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두 아들을 돌보고 있는 어머니는 몸이 얼마나 고달픈 것일까요? 어머니가 피곤할까요? 안 그럴까요?

수행자 : '피곤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여기서 피곤하고 고통스러운 어머니가 오온과 함께 하고 있는 저와 수행자 여러분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아들 둘은 자신의 마음과 물질입니다.

 

첫 번째,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오온이 있지만 이것을 보지 않으므로 오온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수행자의 몸으로 불리우는 물질에는 아는 속성이 없습니다. 장님과 같을 뿐만 아니라 이 물질은 화장실을 가고, 대소변을 보고, 쑤시고, 아프고, 저리고 등등 물질로써 항상 괴롭힙니다. 물질로써 우리의 몸은 괴로움 자체인 고(苦)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물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저나 수행자 여러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있기 때문에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인가요? 행복한 일인가요?

수행자 : '고통입니다.'

 

두 번째, 마음에 관한 것입니다. 소아마비와 정신이상을 갖고 있는 아들은 마음에 해당합니다. 수행자 자신의 마음을 보십시오. 이것저것을 원하고 때로는 흰색 옷을 원해서 사주면 불만스러워하고 싫어져서 빨간색 옷을 원합니다. 다시 빨간색 옷을 사서주면 그 빨간색 옷이 싫어져서 다른 옷을 원하고 이와 같이 마음은 정신병자와 비슷하다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음식을 먹을 때 계란하나 먹는 것에도 삶은 것을 달라, 프라이팬에 익힌 것을 먹고싶다는 등등 먹을 때도 항상 이것저것을 원해서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만족을 못합니다. 무엇을 볼 때 느껴지는 것도 불만으로 생각하여 소아마비일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들 중에서 장님은 물질에 비유됩니다. 소아마비와 정신질환은 마음입니다. 왜 우리가 괴롭고 고통스러운가는 장님과 소아마비 둘을 다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이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께서 두 아들과 함께 산다면 그 생이 과연 행복한 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자신들이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음과 물질이 우리를 괴롭히는 법인가요? 아니면 행복하게 하는 법인가요?

우리를 괴롭히는 마음과 물질을 계속해서 좋아할 것인가요? 아니면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요?

그래서 갈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괴롭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마음과 물질이 우리를 얼마나 괴롭히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일곱째 날, 저녁 법문

 

오늘은 처음시간에 법문을 해드렸던 일곱 가지 청정 중에서 계청정(戒淸淨), 심청정(心淸淨), 견청정(見淸淨) 다음으로 4번째 청정인 도의청정(道疑淸淨. ka!nkhaavitara.na-visuddhi)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의 청정은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입니다. 그러나 조건을 파악하는 12연기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이 창조주가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생긴 것도 아닙니다. 과거에 무명과 업의 형성에 의한 결과로 생긴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온이 '원인이 있는 결과로 이루어진 것(조건을 식별하는 지혜)'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 일곱 가지 청정 중에서 네 번째 청정인 도의 청정을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이 오온이 결과로써 얻어진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여러분의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계속 보셔야 합니다.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방법은 첫째는 물질의 무더기[色蘊]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를 알지만 그것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것이 아니라는 무아(無我)를 봐야 합니다. 그래서 물질의 무더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실 때 항상 하지 않는 무상(無常)으로 알고, 고(苦)로 알고, 무아(無我)로 아십시오.

여기서 무상(無常)이란 일어나면 사라지고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과 마음의 괴로움이 바로 고(苦)입니다. 무아(無我)는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무더기들도 역시 일어나면 사라지는 것으로 알아야 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없다는 무상(無常)으로 알아야 할뿐만 아니라, 그것이 항상 하지 않고 유한하다는 것에서 고(苦)라고 알아야 합니다.

수, 상, 행, 식의 무더기[蘊]를 무아로 봄으로써, 일어나고 사라짐으로 보는 것이 많아지므로 오온을 무상으로 보고, 좋은 느낌도 무상으로 보게 됩니다. 이렇게 계속 봄으로써 모든 것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짐이라고 알면 여러분의 마음이 깨끗해 질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점점 여러분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우리 몸에서 마음을 원인으로 해서 생긴 물질 역시 깨끗해 질 것입니다. 깨끗해짐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위나 좌선 중에 빛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좌선을 하고 있는 방이나 법당이 환해지는 것을 봄으로 해서 이 빛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빛이 나타나는 것을 도와 과를 얻어서 나타난다고 생각하면서 좋아하면 이것 역시 갈애이고 이것을 좋아한다면 길을 잘못 들었으며 수행은 점점 힘을 잃을 것입니다.

이 빛을 좋아하게 되면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원하는 마음도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을 보지 못한다면 수행의 진전이 없게 됩니다.

 

색깔이나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볼 때 좋아하거나 기뻐하지 말고 빛이 나타난 것을 알고, 그 빛이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빛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 위빠싸나 수행입니다. 이처럼 수행의 향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첫째는 광명(光明. obhaasa)이나 색깔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나타나는 것은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 되는 앎[知. ~naa.na]이 생깁니다. 그래서 수행 과정의 모든 것을 일어나고 사라짐을 분명하게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보는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그것을 아는 마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짐을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쁨[喜], 또는 희열이라고 하는 것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삐띠(喜. piiti)라고 합니다.

기쁨[喜. piiti]의 종류에는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조그만 기쁨(khuddikaa piiti) : 닭살이 돋는 것 같은 작은 기쁨입니다. 소름이 끼치고 몸에 잔털이 일어서며 머리털이 쭈뼛쭈뼛 거리는 기쁨입니다.

2. 순간적인 기쁨(kha.nikaa piiti) : 섬광이 번쩍이는 것 같은 찰나의 기쁨입니다. 번개 불이 번쩍이듯 하는 순간의 기쁨입니다.

3. 진동의 기쁨(okkantika piiti) : 큰 파도 위에 실린 것 같이 두둥실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이 거듭 나타나는 기쁨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깊숙이 스며드는 기쁨입니다.

4. 도취의 기쁨(ubbegaa piiti) : 몸이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큰 기쁨입니다. 바닥에 앉아서 좌선하고 있지만 몸이 위로 솟구치는 것처럼 느끼는 기쁨입니다.

5. 널리 퍼지는 기쁨(phara.na piiti) : 몸의 부분이 아닌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사방에 가득 찬 기쁨입니다. 몸 전체를 바람으로 가득 채운 풍선처럼, 크게 흐르는 골짜기 물처럼 끊임없이 닿아서 퍼지는 기쁨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 기쁨(Piiti) 중에서 어떤 것이 나타나든지 좋아하면 안 됩니다. 어떤 기쁨이라도 좋아한다면 여러분의 수행은 향상이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기쁨이든 무상으로 보셔야 합니다. 기쁨 역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보셔야 합니다.

 

네 번째 나타나는 것은 수행의 향상으로 기쁨 다음으로 평온(平穩. 輕安. passaddhi)입니다.

몸과 마음이 고요하고 평안하며 가볍고 부드러운 평온의 요소들이 나타날 때 여러분이 좋아하면 안 됩니다. 이것 역시 무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섯 번째로 뒤따르는 것이 행복(幸福. sukha)입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행복함을 느낍니다. 여기서 행복함이란 전에는 수행을 하는 것이 괴로웠지만 지금은 수행을 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행복합니다. 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행복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이렇게 행복함을 느낄 때 도와 과의 열반의 행복인가하고 좋아합니다. 이 행복은 도와 과의 열반의 행복이 아니고 위빠싸나 수행으로 얻어지는 행복이며 이 행복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 나타나는 것이 행복 다음에 나타나는 확신(確信. 勝解. adhimokkha)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믿음이 적었지만 지금은 법의 본성을 보고 느낌으로써 믿음이 강해집니다. 이렇게 믿음이 강해질 때 이것을 좋아하면 안 됩니다. 이런 강한 믿음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셔야 합니다.

 

일곱 번째로 이렇게 강한 믿음이 생기고 사라진 뒤에는 강한 정진력(精進力)이 생겨 좀더 향상된 노력(努力. paggaaha)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노력이 강해진다는 것은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계속 보지만 피곤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한 시간을 앉아 있었는데 이제는 두 세시간을 앉아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때 정진력이 강해져서 좀더 수행을 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여덟 번째로 흔들림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는 현기(現起. upa.t.taana)입니다. 알아차림의 힘이 좀더 강력해져서 모든 대상이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봅니다.

 

그 다음에 아홉 번째로 평정[捨. upekkhaa]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도록 노력을 해야 보였는데 이 상태에서는 여러분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모든 대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보여 집니다. 일어날 때 알고, 사라질 때 알고, 일어나면서 알고, 사라지면서 알고, 이렇게 일어날 때마다 알고, 사라질 때마다 알고 하는 것이 계속 이어집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것에 대하여 이런 단계를 거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가 나타날 때마다 여러분은 이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마지막 열 번째로 이런 것들이 계속 나타나기를 바라는 욕구(欲求. nikanti)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나타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도 이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금 까지 위빠싸나 수행을 하면서 향상되어 나타나는 현상들 빛, 앎, 기쁨, 평온, 행복, 확신, 노력, 현기, 평정의 아홉 가지를 좋아하게 됩니다. 이것들을 좋아하는 것이 열 번째 바라는 마음인 욕구입니다. 이상 아홉 가지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것들이 위빠싸나의 열 가지 번뇌라고 합니다. 좋아하면 깨끗하고 바른 위빠싸나가 아닙니다.

 

이상 열 가지 번뇌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광명(光明. 빛. ochaasa) : 마음속에서 강한 빛을 경험합니다.

② 지(知. 앎. ~naa.na) : 예리한 이해력이 생겨 경전이나 교리의 깊은 의미를 꿰뚫어 이해가 됩니다.

③ 희(喜. 기쁨. piiti) : 몸의 전율을 느끼는 희열이 생깁니다.

④ 평온(平穩. 輕安. passaddhi) : 몸과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 집니다.

⑤ 행복(幸福. 樂. sukha) : 마음에서 강렬한 즐거운 느낌을 느낍니다.

⑥ 확신(確信. 勝解. adhimokkha) : 강한 믿음과 신심이 생깁니다.

⑦ 노력(努力. paggaho) : 더욱더 수행에 전념하여 정진을 합니다.

⑧ 현기(現起. upa.t.taana) : 흔들림이 없는 알아차림이 뚜렷하게 항상 자리잡고 있습니다.

⑨ 평정(平正. 捨. upekkhaa) :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마음이 평등한 상태가 됩니다.

⑩ 욕구(欲求. nikanti) : 이러한 모든 현상들에 대해 미세한 집착과 욕망이 일어납니다.

 

이런 번뇌가 있으므로 해서 여러분의 수행이 약해질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도 번뇌로 더럽혀집니다. 그러므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날 때마다 좋아하지 말고 오로지 알아차릴 대상으로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셔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꼭 경험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위빠싸나 수행과정 중에서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상 열 가지 번뇌라고 하는 현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이 현상을 좋아하는 것이 수행을 시들게 만들고 쇠퇴한 위빠싸나의 길로 접어들게 만들므로 여기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열 가지 번뇌에 빠지지 않을 때 칠청정 중에서 청정의 네 번째 단계인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dassana- visuddhi)이 됩니다. 이는 도의 옳고 그름을 아는 청정입니다. 빨리어 막가(magga)는 바른 길을 말하며 아막가(amagga)는 잘못된 길을 말합니다. 냐나(~naa.na)는 안다는 뜻이고 다사나(dassana)는 통찰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 maggaamagga-~naa.na-dassana- visuddhi)이란 말을 설명하면 도의 옳고 그름을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고 아는 앎의 청정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른 길이란 어떤 대상이든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이란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지 않고 좋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께서는 바른 길과 바르지 않은 길을 분명하게 눈으로 보는 것처럼 아셔야 합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도비도지견청정입니다.

 

여기까지 칠청정(七淸淨) 중에서 다섯 가지 청정인 계청정(戒淸淨), 심청정(心淸淨), 견청정(見淸淨), 도의청정(道疑淸淨),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을 말씀드렸습니다.

 

① 계청정이란 말 그대로 계율을 지켜서 계(戒)가 청정한 것입니다.

② 심청정이란 마음이 깨끗한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함으로써 집중(사마디)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집중이 됨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지기도 합니다.

③ 견청정이란 유신견, 단견, 상견이 없는 청정입니다.

④ 도의청정이란 과거의 원인으로 결과로써 현생의 오온이 있는 것이고, 현생의 원인으로 미래의 결과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 도의청정입니다.

⑤ 도비도지견청정이란 도의 옳고 그름을 아는 청정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상의 일곱 가지 청정 중에 앞의 네 가지가 청정해졌다면 작은 수다원(culla sotaapatti)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은 수다원은 수다원에 들기 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계가 청정하고, 사마디(집중)가 있으므로 해서 마음이 깨끗해지고,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고, 12연기를 이해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게 되고, 이 과정을 다 이해한다면 작은 수다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청정에서 네 번째 청정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지면 죽은 후에 최소한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는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은 수다원은 수다원과 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작은 수다원에서는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 완전하게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하게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수다원과를 성취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작은 수다원에서 우리의 목적인 수다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면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계속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온의 일어남 사라짐을 보고 알고 없고, 보고 알고 없고를 계속하면 앞에서 말한 빛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타나는 앎이나 기쁨, 행복 등이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말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고 아는 것이 바로 다섯 번째 청정인 도비도지견청정(道非道智見淸淨)입니다.

 

수행자가 도비도지견청정을 얻기를 원한다면 노력(viriya), 알아차림(sati), 집중(samaadhi)이라는 세 가지와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수행 중에 지루한 마음, 졸림, 망상 등 어떤 마음이 일어나든지 그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란 자기의 오온에 연연하지 않고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좋아졌을 때 노력이 좋아지고 노력이 좋아 졌을 때 알아차림 역시 좋아집니다. 알아차림과 노력이 함께 한다면 집중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집중력이 생긴 후에는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아는 마음 역시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고 사라질 때마다 알아차립니다.

 

여러분은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남을 알고, 아는 마음이 사라질 때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아차림으로써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생기고 멸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림(sati)에는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이 항상 뒤에 따라야 합니다.

 

수행자가 위빠싸나 수행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분명한 앎[正知. sampaja~n~na]과 함께 지혜(智慧. pa~n~naa)가 향상되어 원숙해질 것입니다. 이것을 얻기 원하신다면 정말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 와서 한국의 수행자들에게 법문을 할 때마다 굉장히 기쁩니다. 왜냐하면 한국 수행자들이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을 봄으로써 이론이 아닌 실재의 경험으로 생하고 멸하는 것을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수행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남은 기간과 집에 돌아가셔서도 계속 이러한 노력이 이어진다면 여러분은 이번 생에서 12연기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계속 법문을 했지만 수행자 모두가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분도 계실 것이고, 조금 받아들이거나 또는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경우가 다 맞습니다. 범부(凡夫)들은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아주 드뭅니다. 이것이 범부의 마음입니다. 범부의 마음에는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답변도 옳습니다. 여기서 옳음이란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본인이 무아를 완벽하게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말하지만 수다원과를 얻기 직전까지는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이지 내가 있다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온에 내가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아는 것이 수다원의 도과입니다. 수행자들의 입장에서 이건 단지 오온일 뿐이고 내가 없다는 것을 진정한 의미로 분명하게 받아들이기 원하신다면 여러분께서는 수다원과를 얻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은 수다원과를 얻으면 분명해 집니다.

 

때로는 수행자가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단지 오온일 뿐 내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수행을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일단 무아를 믿고 수행을 계속하십시오. 수행을 계속하다보면 알게 되고, 안 후에는 믿음이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믿음보다는 먼저 수행을 통해서 보고 알도록 노력하십시오. 믿음이 아는 것보다 항상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지금 제가 한국에 와서 법문을 한 것을 미얀마에 돌아가서 한국의 아름다운 산 중턱에 자리잡은 수행센터에서 한국 수행자들에게 12연기 법문을 하고, 그들이 이해하고, 인터뷰를 하고 등등을 미얀마 신도들에게 말하면서 여러분들은 내 말을 믿습니까? 하고 질문을 한다면 미얀마 신도들은 보지는 못했지만 제 말을 믿고 받아들인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12연기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외국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12연기에 대해 믿지 않았지만 법문을 듣고 이해하므로 12연기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믿고 아는 것은 항상 하지 않고, 알고 믿는 것은 항상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내가 없다는 것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법문을 했지만 여러분이 직접 수행을 통해서 내가 없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일곱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12연기 도표 중에서 1번 칸의 행(行. sa!nkhaara)과 3번 칸의 업의 생성[有. kamma bhava]과는 어떻게 다릅니까?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두 가지 다 업(業)을 형성한다는 것에서는 같습니다. 단지 1번 칸의 행(行)이라고 하는 상카라(sa!nkhaara)는 과거 생에 무명(無明)으로 지은 업이며 3번 칸의 유(有)라고 하는 깜마바와(kamma bhava)는 현생에 갈애와 집착으로 업을 형성하고 있는 시간적인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행과 현재의 행의 차이입니다.

<이번 12연기 법문에서는 편의상 행(行. sa!nkhaara)은 '업의 형성'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유(有. kamma bhava)는 '업의 생성'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질문 2 :

사람이 육신의 몸을 벗을 때 그 의식이 49일간 또는 7일간 머문다고 하는데 어떤 형태로 머물게 되는지요?

 

답변 2 :

이런 것은 전래되어온 생각을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상좌불교의 교리에서 보면 이런 말은 정설이 아닙니다. 상좌불교의 교리는 죽을 때 죽는 의식이 바로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죽을 때 믿는 업에 따라 바뀐다는 것은, 평소에 선업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도 죽을 때 아들, 딸, 재산 등에 집착하면서 죽는다면 평소 선행을 한 대로 다음 생을 받는 것이 아니고 탐심의 악업의 마음과 같은 악도에 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집착이 크면 일정한 곳에 머무는 몸을 받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생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말하는 중음신은 아닙니다. 영가를 위한 행위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영가를 위해 공덕을 쌓고 그 공덕을 영가에게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질문 3 :

육근의 의(意)의 대상인 법(法)이 물질과 마음을 다 포함한다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3 :

육근 중 마음의 대상인 법(法)은 너무 넓습니다. 의(意)의 대상인 법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대상인 법은 집이라는 물질이 되고, 또 일어난 마음을 대상으로 만나면 이 마음이 법의 원인이 됩니다. 그래서 의(意)의 대상인 법에는 정신적 요소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요소도 포함됩니다.

 

질문 4 :

마음을 뜻하는 찌따(citta), 나마(naama), 마노(mano)에 대하여 차이점을 말하여 주십시오.

 

답변 4 :

찌따(citta)와 마노(mano)는 육근의 마음으로써는 보통은 같은 것으로 봅니다. 다만 18계에서는 마노를 다르게 봅니다. 마노는 바왕가찌따(bhava.nga citta)라고 하는 것으로 생을 연결시켜주는 재생연결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일어나기 전의 최초의 마음, 본래의 마음을 마노라고 합니다.

 

나마(naama)는 나마 루빠(naama ruupa)라고 하는 정신과 물질에서 정신을 나마(naama)라고 합니다. 나마는 마음과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수, 상, 행, 식)가 같이 포함됩니다. 마음을 구성하는 요소[心所. cetasika]는 수(受), 상(想), 행(行)으로 항상 식(識. vi~n~naa.na)과 함께 일어납니다.

 

식(識)은 아는 마음으로 백지이고 마음의 작용[心所]에 욕심이 있을 때 백지인 마음에 욕심이 붙어 욕심을 내는 마음이 나타납니다. 마음의 작용인 심소(心所)에는 52가지 작용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여덟째 날, 아침 법문

 

수행자들께서 지금쯤 보고 아는 것이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간에 아침법문과 저녁법문을 통하여 수행하는 방법과 대상이 일어날 때 보는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께서는 법을 보고 알고, 보고 알고, 하면서 법을 얻기를 원한다면 알아차림과 노력과 함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할 때나 법회가 있을 때, 시작하는 순간부터 중간 그리고 끝이 날 때까지 1초 1초 대상을 놓치지 않고 보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이 알아차리면서 노력과 함께 할 때만이 집중을 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대상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대상 하나 하나를 집중해서 볼 수 있을 때만이 그 대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때 분명한 앎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어남과 사라짐을 볼 수 있으면 일어남도 고(苦)이고 역시 사라짐도 고(苦)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들은 고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고 고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수행이 바른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법문을 설하고 법문을 이해하도록 하는 의무는 지도자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이 의무를 다할 때 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 알아차리는 것이 많아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알아차리는 것이 많아질수록 여러분들이 도와 과의 열반으로 인도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난 대상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계속해서 많이 알아차리기를 요청하면서 아침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여덟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좌선을 하면서 알아차릴 때 마음속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마음이 아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므로 괜찮습니다.

 

(참고 : 수행자가 수행을 할 때 혼자서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말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대상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좌선 중에 말을 한다는 것은 대상을 알아차리면서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서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때는 알아차림을 놓친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때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말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상태가 계속되게 됩니다.)

 

질문 2 :

이론적으로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많이 들어서 알겠는데 정작 마음으로 보는 것은 어렵습니다.

 

답변 2 :

맞습니다.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아는 만큼만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어남 사라짐을 보는 것은 생멸을 보는 것으로 집중(사마디)과 모든 조건이 되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계속하다 보면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질문 3 :

주된 대상을 어느 것으로 하는 것이 좋습니까?

 

답변 3 :

수행에서 주된 대상은 없습니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무엇이든지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앎이 이어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참고 : 위빠싸나 수행의 대상은 신, 수, 심, 법 네 가지 범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입니다. 또한 좌선을 할 때의 대상과 경행을 할 때의 대상이 다르고 일상의 활동을 할 때가 다 다릅니다. 좌선을 할 때의 주된 대상은 호흡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좌선이 꼭 호흡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언제나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릴 것이 없을 경우에는 호흡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수행의 상태에 따라 강한 것보다 미세한 것을 알아차려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는 발을 주시하는 것으로 출발을 해야 하며 일상의 알아차림에서는 하고 있는 동작의 움직임이나 느낌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질문 4 :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면서 이것이 고(苦)라고 마음을 내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지요?

 

답변 4 : 고(苦)라고 숙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숙고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 : 고라고 하는 것은 삼법인의 지혜가 난 것입니다. 지혜가 나면 바로 알아차려서 그런 현상을 알아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지혜로 인하여 계속 생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질문 5 :

오온을 모두 보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답변 5 :

몸이나 느낌을 볼 수 있으면 볼 수 있는 만큼만 보십시오. 목적은 아는 마음입니다. 대상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6 :

오온을 가지고 편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답변 6 :

간단합니다. 원하는 마음을 점점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현재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질문 7 :

열반을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생의 고리가 완전히 끊어진다면 어떻게 됩니까?

 

답변 7 :

솔직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견해이지만 수행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고 : 윤회가 끊어진다는 사실은 수행을 하는 초보자에게는 매우 불안하고 두려움을 줄 수 있는 말입니다. 윤회가 끊어지기를 원하는 것은 지혜가 난 사람에게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처음부터 열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교 교리의 궁극적 핵심은 열반입니다. 수행을 통하여 괴로움이 있는 것을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지혜가 나서 아는 것이므로 이 상태에서는 자연스럽게 열반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문제는 수행자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해서는 현재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열반은 나중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잘 모를 때부터 열반에 대해 어떤 선입관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그것은 지고의 행복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 이익이 있습니다.)

 

질문 8 :

좌선 시에 멍한 상태가 옵니다. 졸린 것이 아닌데 의식이 잠시 멈추는 듯한 상태가 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멍한 상태였음을 조금 지난 후에 알고 경행을 합니다.

 

답변 8 :

멍한 상태를 알고 대상을 바꾸기보다는 그 마음이 없어질 때까지 더욱 마음을 기울여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질문 9 :

12연기를 이해하니까 이제까지 살아온 삶이 거기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가족, 친구, 애인 등등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답변 9 :

항상 우리 마음엔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수다원이 되어도 결혼을 해서 삽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점차로 되어 가는 것이지 너무 죄악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 10 :

사야도께서는 수행자에게 재가자의 삶을 권하시는 지요? 아니면 출가자의 삶을 권하시는 지요?

 

답변 10 :

비구, 비구니, 기혼, 미혼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출가자의 장점은 자기가 오후 불식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면 상황이 어렵게 됩니다. 가족들의 상황, 이런 인간관계에 갇히게 됩니다.

결혼은 한 웅덩이에서 물 없이 서로 살아야 하는 물고기처럼 계속 점점 고가 많아지는 생활입니다. 결혼을 안 한 사람은 고가 하나이지만 결혼을 한 사람은 고가 계속 많아집니다. 부처님께서는 고가 적은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여덟째 날, 저녁 법문

 

오늘 법문은 어제에 이어 일곱 가지 청정[七淸淨] 중에서 여섯 번째 청정인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행도지견청정에 대하여 말씀드리기 전에 다섯 가지 지혜(智慧. pa~n~naa)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어 빤냐(pa~n~naa)를 중국에서 소리나는 대로 음사[音譯]한 것이 반야(般若)입니다. 그리고 우리말로 의역(意譯)을 한 것이 지혜(智慧)입니다. 지혜는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의 지혜까지 있습니다. 지혜는 아는 것을 말하며 지혜의 반대는 무명입니다. 무명은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지혜는 선업이고 무명은 불선업입니다.>

 

다섯 가지 지혜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업(業)에 관한 지혜이고,

두 번째는 선정(禪定)에 관한 지혜이고,

세 번째는 위빠싸나[內觀. vipassanaa]에 관한 지혜이고.

네 번째는 도(道)의 지혜에 관한 것이며,

다섯 번째는 과(果)의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첫 번째, 업(業)에 관한 지혜입니다.

 

업(業)에 관한 지혜에서 여러분들은 업에 관한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업에 연관되어 지녀야 할 분명한 앎은 업이 있음을 믿고, 업에 의한 결과를 믿어야 합니다. 업은 과거에 지어놓은 업과 현재에 짓고 있는 업이 있습니다. 현재의 모든 결과들은 과거의 업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교도라면 과거의 업은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현재의 업을 의지해야 합니다. 현재의 업을 지혜와 노력이 함께 지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의 업과 현재의 업을 믿음으로써 업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있게 됩니다. 좋은 업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나쁜 업은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좋은 말, 좋은 행동, 좋은 생각들을 내어야 합니다. 좋지 않은 행(行)은 역시 결과 역시 좋지 않게 나타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업과 연관된 첫 번째 지혜를 깜마사까따 삼마디띠(業自性 正見. kammassakataa-sammaadi.t.thi)라고 합니다.

<깜마사까따(kammassakataa)는 업(業)을 자기(自己)라고 하는 업자성(業自性)의 뜻입니다. 즉 업이 자신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삼마디티(sammaadi.t.thi)는 바른 견해[正見]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업은 자신이 행하고 자신이 받는다는 것을 아는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두 번째, 선정(禪定. jhaana)에 관하여 분명히 아는 지혜입니다.

 

선정에 관한 지혜는 사마타깜마타나(寂止修行. 止業處. samathakamma.t.thaana)를 계속함으로써 색계 선정이나 무색계 선정에 들게 됩니다. 색계 선정을 닦으면 색계에 태어나고 무색계 선정을 닦으면 무색계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정삼매에 관한 것을 쟈나 삼마디티(禪定 正見. jhaana-sammaadi.t.thi)라고 합니다. 이는 선정에 대한 바른 견해를 말합니다.

 

세 번째, 위빠싸나(vipassanaa)의 지혜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위빠싸나의 지혜를 세분하면 열 가지로 분류합니다.

1)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sammasana-~naa.na) : 삼마사나 냐나는 현상들의 무상, 고, 무아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아는 지혜라고 합니다. 자신의 오온을 무상, 고, 무아로 바로 보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물질의 무더기[色蘊]가 여러분들의 수행 중에 나타나면 무상, 고, 무아로 보셔야 하고 수, 상, 행, 식의 무더기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무상, 고, 무아로 보고 숙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2)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udayabbaya-~naa.na) : 우다야바야 냐나는 발생과 소멸[生滅]에 대한 앎입니다. 오온인 물질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이처럼 생성하는 것은 소멸한다는 분명한 앎이 생기게 됩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앎이 강해졌을 때 어제 설명한 위빠싸나의 열 가지 번뇌가 나타납니다. 이때 좋아하지 않고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알아야 합니다.

 

3) 사라짐의 지혜(bha!nga-~naa.na) : 방가 냐나는 소멸에 대한 앎입니다. 오온의 생성과 소멸을 보고 알고, 보고 알고 해서 분명한 앎이 생기는 것입니다. 수행이 향상되면 일어남이 너무 빨라서 사라짐이 더 분명하게 보이는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라짐에 대한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면 땅에 닿으면서 없어지듯이 오온을 볼 때도 마찬가지로 사라짐이 더 분명해 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

 

4) 두려움에 대한 지혜(bhaya-~naa.na) : 바야 냐나는 두려움에 대한 앎입니다. 세 번째 사라짐의 지혜에서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짐에서 사라짐의 두드러짐을 봄으로 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두려움에 대한 앎입니다.

 

5) 불행에 대한 지혜(aadiinava-~naa.na) : 아디나와 냐나는 불행, 재난, 위험, 허물 등에 대한 앎입니다. 오온을 볼 때 사라짐만 보이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난 뒤에 오온에 대한 허물이 보여 불행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 전에는 오온과 함께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겼지만 이 단계에서는 오온 자체가 위험이고 허물로 보이게 됩니다.

 

6) 혐오감에 대한 지혜(nibbidaa-~naa.na) : 닛비다 냐나는 싫어해서 멀리하는 앎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계속 사라지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봄으로써 두려움과 위험으로 싫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나면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이 함께 하는 삶을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지혜가 생깁니다.

 

7)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mu~ncitukamyataa-~naa.na) : 문찌뚜깜야따 냐나는 벗어나고자 하는 앎입니다. 혐오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 다음에 고(苦)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정신과 물질을 보는 것이 싫은 단계에 접어들면 수행이 게을러지고 싫어져서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수행자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 역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수행자는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리는 것을 싫어하는 마음에서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고(苦)에서 벗어나길 원하는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는데 배가 뒤집혀 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강에 빠졌습니다. 이 사람은 수영을 해서라도 건너편 언덕에 닿도록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강 언덕을 향해 계속 수영을 하며 노력을 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어떤 도움이 되는 물건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때 하나의 물건이 잡혀서 의지하며 정신없이 가다가 강 언덕에 가까이 갔을 때 비로소 붙잡고 있는 물건을 보니 죽은 개의 시체였습니다. 개의 시체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털은 다 빠져 몰골이 흉했습니다. 이 순간 이 사람은 자기가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아했던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썩은 개가 의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개의 시체를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지금은 저 강 언덕에 다다르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죽은 개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도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서 헤엄을 쳐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무명과 갈애가 나쁘다는 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무명과 갈애로 받는 오온이 행복한 것이라고,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답다고 하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오온은 위빠싸나 지혜의 분명한 앎과 함께 보면 결국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라지는 것을 봄으로써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정신과 물질의 불행과 허물도 보게 되고 다시 싫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때 싫어하는 마음이 있지만 내 몸에서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개의 썩은 시체에와 같은 고(苦)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겠다는 마음으로 계속 알아차리셔야 합니다.

 

8) 다시 살펴보는 지혜(pa.tisa!nkhaa-~naa.na) : 빠띠상카 냐나는 되돌아 살펴보는 앎입니다. 계속해서 수행이 향상되어 갈 수 있도록 앞의 단계에서 준비를 마쳤지만 오온인 물질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다시 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오온에 대해서 전생에서부터 항상 하는 것이고, 행복하고, 또 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수행을 통해서 오온이 일어나면 사라지지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이라는 것과,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다시 한번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낮은 물가로 가서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를 하는 중에 몸체가 긴 물고기가 잡혀 건져 올리면서 바로 물고기의 목을 붙잡았습니다. 물고기를 잡아서 건져 올리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장어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면서 건져 올렸지만 장어가 아니고 독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놓고 싶었지만 바로 놓으면 뱀에게 물릴 것을 염려해서 목을 잡고 대 여섯 번 돌린 후에 멀리 던져버렸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모르므로 전생에서 오온을 좋고 행복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여 좋아하고 집착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오온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현재의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다시 무상, 고, 무아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다시 살펴보는 지혜입니다.

 

9)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sa!nkhaarupekkhaa-~naa.na) : 상카루뻭카 냐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평등하고 평정한 앎입니다. 대상이 계속 일어나고 알고, 사라지고 알고 하는 것이 이어질 때, 일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 없이 알게 되고, 사라짐도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알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마음만이 연속되는 것이 현상에 대한 평등한 지혜입니다. 일어남이 고(苦)라는 것을 알고, 사라짐이 고(苦)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좋은 것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평정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대상이 일어나고 알고, 사라지고 알고 하는 것은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일어남과 동시에 함께 주시하여 알고, 사라지는 것을 사라짐과 동시에 함께 주시하여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일어남과 사라짐이 있을 때 이것을 주시하는 것과 아는 것이 모두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대상과, 주시와, 아는 마음은 항상 일치해야 합니다.)

 

10) 적응의 지혜(anuloma-~naa.na) : 아누로마 냐나는 순서에 맞게 순응하는 앎입니다. 이것을 네 가지 도(道)와 네 가지 과(果)에 대한 앎이기도 합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싫어하는 마음이나 좋아하는 마음 없이 평등심으로 볼 수 있을 때 여러분의 위빠싸나 수행은 커다란 힘이 생기고 앞으로 나아가 도(道)에 다다르는 것도 분명하게 보게됩니다. 그리고 지난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지혜로 이어집니다.

적응의 지혜는 지금까지 말한 앞선 아홉 단계와, 마지막 열 번째 도(道)에 대해서 알고 있는 앎입니다. 여기까지가 행도지견청정(行道智見淸淨. pa.tipadaa-~naa.nadassa.na-visuddhi)입니다.

 

이상 열 가지 분명한 앎을 위빠싸나의 열 가지 지혜라고 합니다.

네 번째, 도의 지혜(道智. magga-~naa.na)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고 하는 것을 계속해서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에 아는 것이 끝이 있게 될 때에 고(苦)가 끊어지고 궁극적인 평화를 얻게 됩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평화를 아는 마음을 도의 지혜[道智]라고 합니다. 도(道)에는 고(苦)가 없고 짧은 순간에 궁극적인 평화를 맛보게 됩니다.

 

<아는 것이 끝이 난 이때를 닙바나[涅槃. nibbaana]에 이른 상태라고 말합니다. 닙바나의 상태에서 평화를 맛보는 것이 아니고 닙바나에서 깨어나 평화를 맛봅니다.>

 

다섯 번째, 과의 지혜(果智. phala-~naa.na)입니다.

 

과의 지혜는 바른 길에 대한 결과의 지혜로 계속해서 궁극적인 평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도의 지혜는 궁극적인 평화를 한 번 경험하지만 과의 지혜는 두 번, 세 번 계속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은 수행자 각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도와 과의 궁극적인 평화의 다른 점을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큰 나무 조각에 불이 붙어서 타고 있을 때, 물을 뿌리면 그 불은 꺼집니다. 이것을 도의 궁극적 평화라고 합니다.

 

(닙바나에 이르렀다는 것은 탐진치의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궁극적 평화라고 말합니다. 이 평화는 스스로가 느끼는 실재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불타던 곳에 불은 꺼졌지만 아직 뜨거운 열기와 연기는 남아있습니다. 다시 물을 두 번, 세 번 더 뿌려서 불이나 열기나 연기를 완전히 없앤 것이 과의 지혜로 나타난 궁극적 평화입니다. 이러한 궁극적 평화를 맛본다면 수행자의 마음은 아주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일곱 번째 청정인 지견청정(智見淸淨. ~naa.nadassa.na-visuddhi)입니다. 지견청정은 지혜통찰의 청정으로 열반을 얻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곱 가지 청정(계청정, 심청정, 견청정, 도의청정, 도비도지견청정, 행도지견청정, 지견청정)을 완벽하게 얻은 다음 여러분들의 목표인 과의 지혜, 궁극적인 평화, 열반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계속 수행을 했으므로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께서 12연기의 윤회를 원하지 않는다면 수행을 통해 12연기의 고리를 자를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비구, 비구니, 남녀 재가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을 보여 주는 것밖에 할 수 없다. 그 길을 끝가지 가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가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수행자는 그 방법을 받아들여 수행을 통해서 열반을 얻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입니다.

 

사두! 사두! 사두!

 

수행자 질문 : 경행이나 좌선을 할 때 한 동작을 움직일 때마다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과 움직일 때의 특성을 알아차리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 우선 매 단계마다 움직임을 먼저 알아차려야 합니다. 움직임의 특성은 나중에 알게 됩니다.

아홉째 날, 아침 법문

 

지금까지 수행에서 대상을 보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해드렸습니다. 수행자들께서는 이해가 가셨으리라 믿습니다.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아직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남은 시간에 꼭 알아차리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온의 일어남 사라짐을 본 수행자께서도 이것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십시오.

오온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싫어하게 될 만큼 알아차리셔야 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긴 만큼 여러분이 열반에 가까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상 하나하나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순간순간 계속 알아차림으로써 바로 그 길이 열반에 다가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오늘도 놓치지 않고 계속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사두! 사두! 사두!

 

아홉번째 날, 저녁 법문

 

오늘 법문에서는 범부(凡夫)와 수다원(須陀洹. 預流. sotaapanna) 도과(道果)를 성취한 성자(聖者. ariya)들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오온(五蘊)이 어떻게 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온[色, 受, 想, 行, 識의 무더기]이 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먼저 우리의 감각기관인 눈과 대상인 모양이 부딪쳐서 이것을 아는 마음인 안식(眼識)이 생깁니다. 아는 마음이 생길 때는 여러분의 눈과 모양이 물질의 무더기[色蘊]입니다. 안식이 일어날 때의 식(識)은 오온의 무더기 중에서 다섯 번째인 식의 무더기[識蘊]입니다.

 

여기서 모양이 좋고, 싫고 하는 느낌이 있는데 느낌은 수(受)의 무더기[受蘊]입니다. 보이는 대상이 남자, 여자, 볼펜 등등을 기억하고 알아보는 것은 상(想)의 무더기[想蘊]입니다. 보기를 원했기 때문에 보게 되는데 여기서 원하는 마음이 행(行)의 무더기[行蘊]입니다. 이처럼 안식이 생길 때 오온의 다섯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온(五蘊)의 안, 이, 비, 설, 신, 의라는 육근(六根)이 색, 성, 향, 미, 촉, 법이라는 육경(六境)과 부딪쳐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을 하는 육식(六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수행자가 눈[眼]과 모양이 부딪쳐서 아는 마음[眼識]이 생겼을 때, 그것은 내가 보고,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오온의 작용인 것입니다. 이런 과정은 내가 포함되지 않는 오온의 작용일 뿐입니다.

 

귀[耳]와 소리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오온이 듣는 것입니다. 귀와 소리는 물질의 무더기[色蘊]이고 소리를 듣고 아는 마음[耳識]은 식의 무더기[識蘊]로 앞서와 똑같은 과정입니다.

 

냄새와 코[鼻]도 마찬가지로 물질의 무더기[色蘊]입니다. 냄새를 맡고 아는 마음[鼻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고, 다시 이 냄새를 좋고, 싫고로 느끼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입니다. 이것이 어떤 냄새인지 지각하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이고, 냄새를 맡기를 원하여 냄새를 맡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혀[舌]와 맛도 마찬가지입니다. 혀와 맛은 물질의 무더기[色蘊]이고, 지금 내가 먹고 있는 맛을 아는 마음[舌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고, 맛을 느끼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입니다.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아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이고 먹기 위해 입을 움직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닿음은 몸[身]과의 닿음입니다. 몸이 있으므로 대상과 부딪치는 것입니다. 몸과 와서 닿는 것은 물질의 무더기[色蘊]이고, 닿음을 아는 것[身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며, 닿음의 촉감이 좋고, 싫고를 느끼는 것은 수의 무더기[受蘊]이며, 무엇이 닿았는지 알아보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입니다. 닿도록 몸을 움직이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다음은 마음[意]과 마음의 대상[法]입니다. 마음은 정신의 무더기[識蘊]입니다. 마음은 물질과 다르게 아는 것이 특성이지만 우리의 심장 어느 부분의 물질에 의존해서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에서 벗어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감각기관의 하나로 봅니다.)

마음의 대상인 법(法)에는 물질도 포함됩니다. 마음이 있고 거기에 마음의 대상이 부딪쳐서 생각하고 망상을 할 때 이것을 아는 마음[意識]은 식의 무더기[識蘊]이고, 그것이 좋고, 싫고 하는 느낌은 수의 무더기[受蘊]입니다. 알아보는 것은 상의 무더기[想蘊]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은 행의 무더기[行蘊]입니다.

 

저나 여러분들께서나 마음이 한번 일어날 때마다 이 오온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오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온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단지 오온의 작용일 뿐이라고 여러분께서 알고 보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성인(聖人)의 첫 번째 도과(道果)인 수다원에 드신 분의 마음가짐과 범부의 마음가짐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범부로 죽게 되면 다시 인간계인 범부로 태어나거나, 천상에 태어나거나, 사악도(四惡道)인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부를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 곳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인의 첫 번째 도인 수다원에 드신 분들은 가야 할 곳이 정해져 있습니다. 최소한 사악도에는 떨어지지 않는 좋은 곳으로 가도록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범부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범부는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항상 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심도 항상 하지 않고 부처님의 법이나 성인의 대열에 들어선 분들에 대한 믿음도 있다가 없다가 합니다.

부처님과 법과 성인에 대한 믿음이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고 또 종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범부는 죽음이 두려워서 종교를 바꾸기도 하고, 사업에 유리해서 종교를 바꾸기도 하며, 좋아하는 사람에 따라 종교를 바꾸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바꿀까요? 그것은 첫 번째로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있다가 없다가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오계를 항상 지키는 것이 아니고 지키다가 때로는 지키지 않다가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최소한 꼭 지켜야 하는 오계를 자기의 몸을 보신하거나, 사업, 또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계를 범하게 됩니다. 오계를 지킨다는 것은 살생과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는다는 것, 부정한 성 관계를 맺지 않는 것, 거짓말을 하지 않고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들을 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부는 믿음도 항상 하지 않고, 계율을 지키는 것도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가야 할 곳도 항상 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다원에 드신 분은 범부보다 믿음이 훨씬 강하고 오계를 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자신의 몸보신이나 사업이나 애인 때문에 오계를 범하지 않고, 부처님의 법과 승가에 대한 강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성인의 대열에 드신 분들은 종교를 바꾸지 않고 항상 오계와 함께 합니다. 절대 오계를 어떤 이유에서든지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도 범부에서 성인의 대열에 들도록 해야 합니다. 갈곳이 정해지지 않은 항상 하지 않는 것에서 갈곳이 정해진 항상 하는 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인의 대열에 들어선다는 것은 모양이 더 예뻐지고 뚱뚱한 것이 날씬해지고 하는 외적인 모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즉 외적인 변화는 없지만 마음이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미얀마에서 때로는 수행자들이 제게 묻습니다. 만약 수다원과를 얻는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요? 라고 묻습니다. 이때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수다원에 든다는 것은 유신견(有身見)과 같은 잘못된 견해와 회의적 의심이 제거되고 다른 것들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딸을 낳고 사업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부처님 당시에 위빠까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일곱 살에 수다원에 들고 그 후에 결혼을 해서 아들 딸도 많이 낳았습니다. 설령 수다원을 얻었다고 해도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결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왜 생기는 것인가 하면 수다원에 들어서긴 했지만 아직 갈애가 다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애는 사다함에 가서 거의 제거되고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제거됩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범부와 성인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다른지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법문을 듣고 내가 아직 범부인가? 아니면 도와 과에 가까운가? 한번 스스로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범부에게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자만심이 있으며 자주 이런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수다원에 든 성인의 대열에 드신 분들도 때로는 이런 마음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원하는 마음은 강하고 깁니다. 수다원에 드신 분은 원하는 마음이 일어나지만 곧 사라집니다.

범부는 화를 내고 말다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다원 역시 화를 내고 말다툼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범부가 화를 냈을 때는 강하고 지속되는 시간이 깁니다. 그러나 수다원이 된 성인은 화를 내고 금방 알아차리고 화를 낸 것이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곧 제거됩니다.

범부 역시 자만심을 갖고, 수다원을 얻은 분도 자만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욕심이 났을 때 이 욕심이 지속되는 것이 하루인가, 한 달인가, 일년인가 생각해 보고 길다면 틀림없이 범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 원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원하는 마음이 계속 지속됩니다. 어떤 범부는 다른 사람들로 인해 불만스러울 때 다시는 이 사람을 이생에서도 안 보고 다음 생에서도 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이 범부입니다.

성인 역시 불만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불만스러워 화가 나지만 화내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그 마음이 불선(不善)한 마음임을 알아서 불만이나 화를 계속 지속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부는 계속 불만이나 화가 생기고 또 생기고 하지만 성인은 생기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수행자들께서는 좋지 않은 마음이 일어나더라고 이것을 계속 이어나가지 마십시오.

 

두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성인이나 범부나 모두 불선한 행을 원인으로 불선업을 짓습니다. 하지만 범부는 불선업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불선업을 제거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범부는 욕심이 생길 때 계속 그 욕심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성인은 욕심이 일어났다가 제거됩니다.

범부는 나를 위해서 꼭 필요하고, 내 가족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어서 얻으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계속 원하는 마음을 제거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도 원하는 마음이 있어서 사업을 하지만 나와 나의 식구 등 나라고 하는 것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성인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하려는 생각하면서 욕심이 일어나면 알아차리고 가라앉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들께서도 욕심이 일어나고 화가 일어나고 자만심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세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범부는 믿음이 있다가 없고 항상 하지 않지만 성인의 믿음은 항상 하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범부들은 불교의 수행을 통해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적어 이 종교, 저 종교를 기웃거리며 수행을 게을리 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불교를 통해서 도와 과를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항상 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항상 하지 않은 것은 범부이고, 믿음이 항상 하는 것은 성인입니다.

 

네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범부와 성인 모두 불선업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인의 불선업은 사악도에 떨어질 만큼의 불선업이 아닙니다. 욕심이나 화를 내거나 자만심 정도의 불선업입니다.

하지만 범부는 어떤 불선업을 행하고도 제거하길 원하는 마음도 없고, 또한 어떻게 제거할지 방법도 모릅니다. 불선업을 행하므로 다음에 어떤 결과를 갖게 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계속 불선업을 행하기 때문에 범부라고 합니다.

성인은 욕심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화가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자만심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것을 알고 등등 이렇게 무엇이나 일어날 때마다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보고 불선업을 제거하는 방법을 찾습니다. 예불을 하고 수행을 하고 보시를 행하면서 일어난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께서도 욕심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까지, 화를 내는 것도 일어났다가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불선한 행과 불선한 마음이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예를 들면 어린이가 뜨거운 것을 모르고 손으로 집었을 때, 뜨거운 것을 알면 바로 놓아버립니다. 이와 같이 성인은 불선한 마음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고 놓습니다. 그래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성인도 범부와 같이 사업을 하고, 사회적인 일과 의무도 하고, 자신의 건강과 자신의 삶을 위한 사업도 합니다. 이처럼 범부나 성인이 똑같이 일을 하지만 일하는 과정이나 일을 대하는 마음이 다릅니다. 범부는 인간관계, 사업, 건강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계율을 상관하지 않고 등한시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친구들과 관계에서 바른 것을 바르지 않은 것으로 말하기도 하고, 본 것을 보지 않은 것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곡사야도께서는 범부가 1000원을 벌면 1000원어치만큼 사악도에 떨어질 확률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성인은 인간관계, 사업, 건강에 관한 어떤 일을 하던지 항상 계율과 함께 합니다. 인간관계나 사업에서 절대 계율을 어기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면 어미 소가 새끼인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고 있는데, 어미 소는 자기 먹을 풀을 뜯으면서도 송아지가 다른 곳에 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지켜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인간관계, 사업에서 계율을 어기지 않고 계율과 함께 하는 방법을 찾아서 합니다.

 

여섯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이 다른 점은 범부나 성인 모두 다 법문을 듣습니다. 그러나 법문을 똑같이 듣지만 듣는 자세나 듣고 이해하는 것은 다릅니다. 범부는 법문을 듣지만 마음은 집으로, 사업으로, 아들, 딸, 남편, 아내에게로 갑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법문을 듣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데 범부는 대상 하나에 마음을 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인은 법문을 들 때 마음을 법문을 듣는 것에만 기울이고, 이 법이 나에게 이익이 있으므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집중하여 법문을 듣습니다.

 

일곱 번째,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의 차이는 모두 법문을 듣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범부는 금방 듣고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법문의 가치에 대해서 모르므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에 대해 고맙고 존경하는 마음도 없고 법문을 해 주신 분에 대해 고마운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서 집에 가서는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범부를 '듣고 잊어버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범부는 법문을 듣고 알아지는 것이 없고 그러므로 이익이 없고 그래서 존경하는 마음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성인은 법문을 듣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고, 전에 알았던 것이 좀더 분명해지고, 그러므로 기쁨과 강한 믿음이 생기고 불, 법, 승 삼보에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이 함께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선한 마음이 생기므로 해서, 법문을 듣고 집에 돌아갈 때 기쁨과 희열에 의해 나타나는 현상이 생기기도 하고 기쁨도 점점 많아져 좋은 마음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 성인의 마음입니다.

수행자들께서 수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셔서 무슨 법문을 들었는지 아무 것도 모른다면 여러분들이 들은 법문을 이 센터에 다 놓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수행자들께서는 법문을 듣고 전에 알고 있던 것에 대해 더 확실하게 숙고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보아야 할 대상을 볼 수 있는 만큼 많이 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집에 돌아가셔서도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성인에 들어선 스님들에 대해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법문을 해 주신 분과 법문 자체에도 고마움을 가지셔야 합니다.

 

지금까지 범부와 수다원에 든 성인이 다른 점 일곱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들께서 자신을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범부인가? 수다원에 든 성인인가? 아니면 수다원의 성인에 가까운가?

본인이 범부라고 생각되면 좀더 성인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성인의 대열에 가까운 분이라면 성인의 대열에 들도록 노력하십시오. 우리가 수다원이 되었을 때만이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인의 대열에 들어서길 기원하면서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아홉번째 날, 질문과 답변

 

수행자 질문 1 :

인연에 대하여 듣고 싶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고 했을 때 인간관계를 갖기 힘들고, 또 다가오는 인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요?

 

우 소바나 사야도 답변 1 :

우리에게는 세속적인 일과 출세간적인 일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출세간 적인 일이고, 밖에 나가 생활하는 것은 세간적인 일로 인간관계가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말고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십시오. 인간관계에서 다가오는 인연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인이 항상 하지 않으므로 결과 역시 항상 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질문 2 :

수행 중에 보고 있는 대상을 사라질 때까지 보아야 하는가요? 만일 더 큰 대상이 나타나면 대상을 바꾸어야 하는지요? 그리고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고 그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보아야 하는지요? 아니면 마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생각을 끊어야 하는지요?

 

답변 2 :

이 상태에서 처음 보는 대상을 계속 볼 수 있다면 그 대상이 사라지는 마지막까지 알아차리십시오. 하지만 새로 일어난 대상이 너무 강해서 계속 알아차릴 수 없다면 할 수 없지만 되도록 하나의 대상이 마지막 사라질 때까지 알아차리도록 하십시오.

 

질문 3 :

초보 수행자로서 사회생활에 몰두하다 보면 알아차림이 미약해져서 자신이 경험한 정도까지 회복하기 힘듭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느 단계만큼 공부가 되어야 매일 이어지는 수행이 없이도 최소한의 자기 수준을 유지 할 수 있는지요?

 

답변 3 :

수행자들께서는 밖에서도 자신과 알아차림을 구분하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알아차림과 함께 하면 알아차림이 강해집니다. 물론 일하면서 놓치게 되면 놓친 것을 알고 다시 알아차림을 계속하십시오.

 

질문 4 :

매일 수행을 하면 좋지만 여건이 그렇지 못할 때 보편적으로 수행 공백기가 얼마까지 괜찮을까요?

 

답변 4 :

도와 과를 얻기 전까지는 수행하지 않으면 수행력의 유지가 어렵습니다. 수행과 수행사이의 공백기가 사람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면 출가하신 스님들은 재가자보다 생활이 단순해서 수행력이 재가자보다 길게 이어지지만,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재가 수행자들은 수행력을 유지하는 기간이 아무래도 짧아집니다.

 

<질문에 답변을 하신 후에 참회의 말씀을 하심>

 

그간에 제가 법문을 할 때 여기가 한국이지만 한국사람, 미얀마사람이라는 구별 없이 미얀마에서 법문을 하는 것처럼 똑같이 법문을 했습니다. 만일 이 과정에서 여러분들의 관습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면 여러분께 용서를 구합니다.

 

지금 여기에 앉아 계신 한국 수행자들은 미얀마의 한 종족인 샨족(중국 국경과 닿아있는 부족. 얼굴 모양뿐 아니라 음식도 비슷함)과 피부색이나 모습이 비슷합니다. 제가 법문을 할 때 샨족에게 하는 것처럼 이해하기 쉽게 법문을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나 행동들이 한국의 문화와 관습과 차이가 있더라도 용서하시고 너그럽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여러분이 용서하신다면 모두 함께 '사두! 사두! 사두!'를 하십시오.

 

일동 : 사두! 사두! 사두!

 

여러분이 제 허물을 용서하시겠다고 하셨으므로 저도 여러분의 허물이나 부족함을 다 용서하겠습니다. 모든 수행자가 도와 과를 얻어 꼭 열반을 성취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열번째 날, 아침 법문

 

수행자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 날입니다. 수행자 여러분들께서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 마지막 시간까지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주십시오. 이 수행이 끝나는 시간까지 여러분의 노력을 줄이지 말고, 뒤로 물러서지 말고 계속하십시오.

 

수행자 여러분들을 위해서 많은 분들이 이 수련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시간까지 수행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십시오.

 

사두! 사두! 사두!

 

열번째 날, 회향 법문

 

오늘 법문의 제목은 가장 좋은, 가장 바람직한 삶과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가장 바람직한 삶의 필수적인 법(法. dhamma)은 네 가지입니다.

 

1. 계의 법(戒의 法. siiladhamma)입니다.

2. 보시의 법(布施의 法. daanadhamma)입니다.

3. 믿음의 법[信心의 法. saddhaadhamma]입니다.

4. 자비의 법(慈悲의 法. mettaadhamma)입니다.

 

1. 계의 법(戒의 法. siiladhamma)입니다.

 

계의 법은 신(身), 구(口), 의(意)라는 세 가지 행(行)을 통해서 불선업을 쌓지 않도록 자신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신, 구, 의라는 삼업 가운데 제일 첫 번째로 제어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구업(口業)입니다. 즉 말로 행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마음으로 짓는 업입니다. 세 번째로 제어해야 할 것이 몸으로 행하는 업입니다.

 

첫 번째, 구업으로 여러분이 말을 하기 전에 마음으로 이 말이 선한 말인가? 먼저 생각하고 말을 제어해야 합니다.

두 번째, 마음의 제어는 어떤 생각을 할 때 이 생각이 좋은 생각인지 나쁜 생각인지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몸으로 하는 행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이익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이렇게 행한 것이 선한 것인지 불선한 행인지 알고 해야 합니다. 이처럼 삼업을 제어하면서 살아간다면 여러분들은 현재에서도 미래에서도 행복할 것입니다.

 

2. 보시의 법(布施의 法. daanadhamma)입니다.

 

보시를 할 때는 보시를 하기 전에도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보시를 할 때도 기쁜 마음으로 하고, 보시를 한 뒤에도 기쁨 마음과 함께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포함되어야 좋은 의지를 담은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시를 하기 전에 기쁜 마음이면 행복하고, 보시를 할 때도 기쁜 마음과 함께 하면 행복하고, 보시를 한 뒤에도 계속 기뻐함으로써 행복합니다.

 

(1) 보시를 할 때 가져야 할 두 가지, 또는 세 가지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① 먼저 보시를 할 때는 욕심이 없는 마음에서 해야 됩니다. 욕심이 없이 행하는 보시란 자신의 소유인 것을 남에게 준다는 욕심이 없는 좋은 마음입니다.

 

② 다음으로 화냄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를 합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여기서 화냄이 없는 마음이란 것은 보시를 받는 분에 대한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보시를 받는 분이 꼭 필요할 때 쓰시고 좋은 마음으로 써 주십시오, 하는 자애로운 마음과 함께 하는 화냄이 없는 마음입니다.

내가 올리는 보시 물이 예를 들면, 가사나 음식이라면 이 가사를 입으실 때, 또 이 음식을 드실 때 행복하시기를, 건강하시기를 하는 자애를 보내는 마음과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욕심이 없는 마음과 화내지 않는 자애로운 마음의 보시를 두 가지의 요소라고 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선한 의지로 드리는 보시라도 말 할 수 있습니다.

 

③ 보시를 할 때는 어리석지 않음(amoha)으로 해야 합니다. 빨리어 아모하(amoha)는 어리석지 않은 것을 말하고 모하(moha)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어리석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보시는 분명한 앎과 함께 보시를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분명한 앎은 지혜와 함께 하는 보시라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들께서 선업의 결과를 믿으시고 정신과 물질이 모두 무상, 고, 무아임을 알아 분명한 앎과 함께 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 화냄이 없는 마음으로 하는 보시, 어리석지 않은 분명한 앎과 함께 하는 보시, 이 세 가지의 요소, 세 가지의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보시인 것입니다.

 

(2) 다시 보시의 종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같은 보시이지만 가장 낮은 보시, 중간의 보시, 가장 가치 있는 보시, 이렇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가장 낮은 보시란 보시를 할 때, 사람으로 다시 행복하게 태어나길 바라는 것이나, 아니면 범천에서 행복하게 태어나기를 바라면서 보시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知的)이지 못한 사람이 하는 낮은 단계의 보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행복함이 고(苦)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범천에서 태어나는 것 역시 고(苦)라는 것을 모르므로 해서 고를 원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하기 때문에 가장 낮은 보시라고 합니다.

 

② 중간 등급의 보시란 자기 자신만의 열반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보시입니다.

 

③ 가장 가치 있는 보시는 가장 지적이고 지혜와 함께 하는 보시입니다. 이는 자신의 열반을 얻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열반을 얻게 하기 위해서 하는 보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시가 가장 가치 있는 보시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센터를 설립하신 분의 목적은 자신이 열반을 얻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열반을 얻기 원하는 마음에서 이 센터를 보시하셨을 것입니다.

 

<빨리어 다나(daana)는 보시(布施)의 뜻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보시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다나담마(daanadhamma)라고 합니다.>

 

3. 믿음의 법[信心의 法. saddhaadhamma]입니다.

 

보시를 할 때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셔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할 때는 수행자의 몸도 깨끗해집니다. 마음이 아름다울 때는 몸도 역시 아름다울 것입니다.

지금 여기 많은 수행자가 계십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과거에 보시공덕을 쌓은 것은 똑 같습니다. 그 보시공덕으로 인간으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모습이 다 다른 것은 전생에서 보시를 행할 때 어떤 마음으로 보시를 했느냐에 따라 그 결과로써 모습도 다 다릅니다.

 

4. 자비의 법(慈悲의 法. mettaadhamma)입니다.

 

얼마만큼 계속 사람으로 태어났고 또 아무리 부자이고 아름답다고 해도 자애로운 마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를 보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행복하기를, 건강하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는 용서와 참음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것을 익혀야 하고 많이 참아야 합니다. 정말 행복하길 원하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거나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거나 알게 되면 자신의 마음은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용서함으로써 행복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많이 참음으로써 행복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보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면, 이 생에서도 다음 생에서도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네 가지 법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율과 보시와 믿음과 자비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이 네 가지 법을 '살 때도 두려움이 없는 법이고, 죽을 때도 두려움이 없는 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은 우리를 열반으로 이끄는 네 가지 법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법 가운데 첫 번째는 오온이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볼 때,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태어났으므로 죽을 수밖에 없고, 이 몸이 무상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아셔야 합니다.

이처럼 항상 하지 않는 무상을 숙고함으로써 갈애, 자만심, 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인 유신견(有身見)이 제거될 것입니다.

 

2. 두 번째는 이 세상에는 의지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아들과 딸들은 부모를 의지 할 것이 못되고 부모 역시 아들, 딸들을 의지할 것이 못됩니다. 부모나 아들, 딸 모두가 무상과 고와 무아로 항상 하지 않는 것을 앎으로 해서 의지 할 것이 못됩니다. 부모는 아들과 딸들이 아플 때 어떻게 해 줄 수 없고 자식이 죽을 때도 어떻게 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식도 역시 부모가 아프거나 돌아가실 때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하지 않는 것, 즉 무상은 의지 할 것이 못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무상을 의지한다면 잘못된 것에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상한 것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다는 것을 많이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사는 것을 한번 보십시오. 부인이 남편을 의지했을 때 남편의 고통을 부인 역시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정말 의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수행을 통해서만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서 아셔야 합니다.

 

3. 세 번째는 수행자 여러분이 세상을 떠날 때 내 소유의 물건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자신이 소유했던 모든 물건 역시 항상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 역시 항상 하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합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이나 자신까지도 항상 하지 않으므로 해서 죽을 때는 내가 애착했던 좋은 물건들을 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사람을 버리던가 사람이 재물을 버립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을 숙고한 후에야 갈애와 자만심과 잘못된 견해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수행하므로 해서 열반에 다다르게 됩니다.

 

4. 네 번째는 갈애의 본성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애란 것은 원하는 마음입니다.

 

항상 갈애가 있다면, 항상 원하고 거기에는 만족이 없고 충족이 없습니다. 만원을 원했고 만원을 가진 뒤에는 다시 십 만원, 백 만원.... 끝도 없이 원하는 마음이 이어집니다. 이런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 마음도 끝이 없고, 그 다음에는 물질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욕심이 생기고, 설사 대통령이 되었어도 욕심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까지 통치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욕심을 대양에 비유하셨습니다. 대양을 한번 보십시오. 항상 많은 물이 들어오지만 꽉 차는 법이 없습니다. 만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욕심이 있는 한 거기에는 만족 충족이 없고 계속 원하는 마음만 있어 좀더 갖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를 집제(集諦)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의 갈애가 원인이 되어 현재 고(苦)와 함께 살아야하며, 현재의 갈애를 원인으로 미래 역시 고와 함께 태어나고 고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욕심이 끊어지지 않는 한 고도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욕심이 끊어졌을 때 고통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수행자께서 정말 열반을 얻기를 원한다면 욕심 내는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탐심(貪心. lobha)은 자신의 몸을 좋아하는 것, 남편 아들 딸 친척들을 좋아하는 마음,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들이 포함됩니다. 그래서 자신이나 가족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나 가족 친척 재물 등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몸이나 가족 친척 재물들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있는 것이 허물이 아니고 욕심이 있는 것이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 부인 아들 딸이 있는 것이 허물이 아니고 거기에 탐심이 있으므로 해서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재물을 탐하는 마음이 허물인 것입니다.

 

열반을 원한다면 자신이나 아들 딸 부모 재물 등이 항상 하지 않다는 무상을 알고 보셔야 할 것입니다. 욕심을 제거하지 못했을 때는 왜 욕심을 제거 못했는지 숙고한 후 욕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 네 가지를 이해한다면 여러분께서는 탐심을 제거할 수 있고 탐심을 제거하면 여러분은 열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께서 이 수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셔서 정말 좋은 삶, 바람직한 삶을 살기 원한다면 앞에서 말씀드린 네 가지(계율, 보시, 믿음, 자비)와 함께 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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