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행복론

Dhammarakkhita 2016. 12. 18. 11:30

행복론

 

우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것도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며 날마다 많은 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재화를 얻기 위하여 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정보를 얻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마음을 그러한 일들에 바치며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현함으로서 만족하며 행복감을 느낍니다. 우리 모두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보다 행복한 삶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은 행복의 추구입니다. 행복을 찾는 방식이 어떠하건 간에, 그리고 그 행복을 칭하는 명칭이 삶의 충만이건, 기쁨이건, 의무이건, 열정이건, 혹은 사랑이건 간에, 행복은 삶의 목적임에 분명합니다. 혹시 삶의 목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면, 그는 아마 다른 명목으로 행복을 찾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행복의 추구라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행복이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이 행복이 삶에 있어서 그다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행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개념이 우리 삶의 매순간의 질을 결정짓는 존재방식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행복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사회학자들은 행복을 “한 개인이 자신의 삶 전반의 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정도”라고 정의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은 한 개인이 스스로 꾸려나가는 삶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재산을 어느 정도 가졌느냐에 따라 그 정도와 지속시간이 달라지는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감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또한 행복이란 “사는 동안 자신의 삶의 활동 중 가장 활기찬 부분에 대하여 느끼는 희열”이라고도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각박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야외로 나가 한적한 숲 속을 한가롭게 거닐거나, 아름다운 산 정상에 올라 평원을 바라보며 가슴을 터이게 하거나, 모래 해안에 앉아 드넓은 해안과 바다 위에 떠있는 수채화 같은 섬들을 바라보며, 자연환경과의 조화 속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순간들을 행복과 결부하여 얘기할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시험에 합격했다거나,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과의 만남이라거나, 아기의 출생과 같은 일들을, 혹은 가족이나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낸 일을 얘기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위하여 봉사하였던 일을 행복으로 얘기할 것입니다. 또한 시골의 천진한 어린아이의 미소에서나, 뒷산을 산책한 후 차나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얻는 편안함, 평화로움, 여유로움의 소박한 행복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리 따스한 위안을 주는 것일지라도 우리의 삶 전체를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면 지속 가능한 행복은 아닙니다. 행복이 결코 어떤 일시적인 기분 좋은 감정이나, 강렬한 기쁨, 희열, 경이로움 혹은 자부심, 뿌듯함 등 삶의 미망에서 간혹 우리를 위로하는 어떤 순간의 청량제 같은 것으로 한정될 수는 없습니다. 이 다양한 부분적인 면만으로는 참된 행복의 깊은 의미를 드러내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험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내면적 갈등의 소멸’이 일시적으로 있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숲 속을 거닐 때,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 순간 지금, 여기에,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내면적 갈등의 소멸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자기 자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에 싸이게  됩니다. 

일상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 속에 순간적이나마 떠오르지 않고, 미래의 계획도 번잡하게 자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부대끼는 감정도 사라진 이 휴식의 순간은 마음의 평온・평화로 다가와 느껴집니다. 또한 어떤 목표에 도달했거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사람에게는 항상 내재하였던 긴장이 풀어집니다. 이때 찾아온 긴장 이완은 바램과 갈등으로부터 충만함과 더불어 마음의 평정이라는 자유가 찾아 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느끼는 행복감이란 조건적으로 찾아든, 잠시 반짝 개는 날씨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축복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행복감은 아니지만 이러한 감정・정서는 우리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는 끝없는 경쟁의 삶 한가운데의 와중에서 얻은 이 휴식의 순간들을 소중하게 관계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의 평온・평정・평화의 순간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충만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조건의 본질에 대해서 일깨워 줍니다.


그러면 보다 지속 가능하고, 본질적인 참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참 행복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가장 흔히 접해지는 쾌락과 기쁨과 참 행복 사이의 차이와 혼동에 대하여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을 것입니다.

현자는 “쾌락은 행복의 그림자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쾌락은 감각적, 미감적 혹은 지적인 차원의 기분 좋은 자극에 의해 일어납니다. 쾌락의 감정은 특별한 상황과 장소와 순간에 의존되어 일어나는데, 그것은 일어났다가는 점차 약화되어 무덤덤해지거나 불쾌해질 수 있어,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은 쾌락의 구체적인 한 면이지만, 일단 배가 부르고 나면 맛을 통한 즐거움으로부터 무덤덤해집니다. 계속해서 먹게 되면 이번에는 속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행복감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또한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술을 마시고 춤을 출 때는 열광과 흥분 속에서 쾌락을 즐깁니다마는 그러한 상황이 지나간 후 혼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내면에 슬그머니 공허감과 허전함이 찾아 듭니다. 이제는 즐거움이 있었던 자리에 고독과 소외가 대신합니다. 쾌락은 마치 닳아 없어지는 양초처럼 누릴수록 고갈되며, 반복하면 점차 일시적이나마 싫증을 가져옵니다.

더구나 쾌락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경험이므로 이기주의의 폐단과 쉽게 연결되어서, 타인들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습니다. 쾌락은 악의나 폭력, 자만심, 탐욕 등과 어우러질 수 있으며, 참된 행복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없는 그 밖의 다른 부정적인 정신들과 결합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복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쾌락을 얻기도 합니다. 거의 기계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감각적 쾌락을 쫓는 것은 강박관념이나 탐욕, 불안, 실망 등을 동반함으로서 행복의 반대를 향해 가는 길임에 분명합니다.

쾌락은 미망에 헤매이는 자들의 행복이요. 행복은 현자들의 쾌락입니다. 쾌락은 조건에 의존되어 일어나지만, 행복감은 쾌락과는 달리 내면으로부터 생겨납니다. 행복감은 조건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조건에 얽매어 종속되지는 않습니다. 행복감은 쾌락처럼 이내 그 반대방향으로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 지속되며, 관조하며 누릴수록 충만하며 증대합니다.


쾌락과 행복 사이에는 직접적 연계가 없습니다. 새집을 장만하여 소유하는 쾌락, 남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쾌락, 부자가 되는 쾌락, 맛있는 음식을 먹는 쾌락, 스포츠를 즐기는 쾌락, 등산과 산책을 하는 등의 모든 쾌락들은 단연코 기분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들은 절박한 상태에서 벗어날 때 얻는 충만감과 평온・평정・평화・자유로움과 같은 그런 행복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병든 상태에서나 극한적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으며, 가난의 한가운데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몸짱이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음의 과정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쾌락과 행복의 차별을 강조한다고 해서 기분 좋은 감각을 선호하는 그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즐거운 감정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한,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관계하거나, 의미 있는 예술품들을 감상하거나, 감미로운 음악에 젖거나, 오롯한 숲 속을 거닐거나,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을 멀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행복의 반대편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 대한 우리의 내면적 집착입니다. 쾌락은 그것이 정신의 균형을 깨뜨리고  강박관념의 집착을 불러일으킨다거나, 쾌락을 누리지 못하게 막는 것에 대한 갈등과 혐오감을 유발할 때 행복의 장애가 된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쾌락이 본질적으로 행복과 다르다고 해서 행복의 적은 아닙니다. 문제는 쾌락을 경험하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쾌락이 자꾸만 반복하고 싶은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불러와서 내적 자유를 구속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오감의 기분 좋은 감각적 경험은 그것이 집착으로 고질화 되어 갈증의 욕구를 불러일으킬 때 행복에 역행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중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공중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는 새처럼, 쾌락이 현재 순간에서 깨어있는 상태에서 경험되는 경우는 집착을 불러오는 강박관념이나 속박과 환멸, 그리고 소외의 갈등은 동반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쾌락이 내면적 자유와 더불어 자리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을 도와 줍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작용하는 양식에 대한 깨어있음을 통한 알아차림과 통찰을 갖추고 평정을 잃지 않은 상태라면, 쾌락은 행복감을 가리지 않으므로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감을 위하여 쾌락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적 요소도 아닙니다.


‘기쁨’이란 말 또한 매우 모호합니다. 기쁨과 행복의 차이는 보다 미묘합니다. 행복은 당연히 기쁨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수행의 진행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기쁨(piti)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그것이 연이어 자연스럽게 행복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온함과 거리가 먼 건전하지 못한 부정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기쁨은 오관의 감각적인 쾌락만큼이나 다양한 감정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가벼운 미소부터 한바탕 웃어재끼는 즐거움, 조용한 만족감, 새로운 도전을 통해 느끼는 흥분감, 이해를 뛰어넘는 경이로움, 두려움과 불안이 물러가고 난 뒤에 오는 안도감, 평상을 뛰어넘는 감동의 황홀감, 어려운 일을 성공해냈을 때의 환희, 선량하고 자비로운 행위를 하였을 때 느끼는 뿌듯함,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 느끼는 고마움, 그밖에 자부심 등과 더불어 기쁨이 일어납니다.

이 감정들이 행복으로 연결되려면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성냄이나 시기・질투가 일어나면 기쁨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집착과 이기심 또는 자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 기쁨은 서서히 무너져 버립니다.

기쁨이 지속되고 평온하게 성숙하려면 진정한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들인   깨어있는 의식과 선의가 갖추어져야 할 것이고, 질투, 인색, 악의, 성냄, 혐오, 지루함, 짜증스러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이 붙어 있지 않아야 합니다.


행복감은 놀라움과 예기치 않은 강렬한 기쁨으로 인해 풍요로워질 수도 있습니다만, 모든 형태의 기쁨이 행복감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의 내면에는 들뜸과 흥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들뜸과 흥분은 평온・평정・평화와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기쁨에 내재된 들뜸과 흥분과는 존재의 양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기쁨에 겨워 펄쩍 뛰기는 해도 행복해서 펄쩍 뛰지는 않습니다. 5년 전 우리는 온 국민이 월드컵으로 거의 광적으로 흥분되어 거리를 누비며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나라가 당장에 세계의 한복판에 우뚝 선 것 같은 뿌듯한 기쁨 속에서 거리와 술집에서 열광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무슨 이유에선가, 발원지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함과 공허가 슬그머니 기어 들어옴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열광의 기쁨에는 들뜸과 흥분은 있었을지언정 진정한 행복은 없었습니다.

지속적인 만족감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 모든 피상적 기쁨은 어김없이 우울 속으로 다시 추락하고 맙니다. 현대의 소비사회가 끊임없이 수많은 기쁨과 쾌락의 꺼리들을 만들어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수많은 도구와 꺼리 속에 포위되어져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만연된  현대문화 속에서 우리는 사회구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과 기쁨들을 자꾸만 찾게 되고, 감정적으로도 늘 감각적 긴장을 갈구하며, 마침내는 고질적인 중독 상태에 빠질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유적 행복’, ‘통조림 행복’에 불과합니다.


마음의 평온・평정・평화・자유로움를 아는 사람은 실패로 인해 절망하지도 않으며, 반대로 성공에 도취되어 자만으로 나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는 그 실패나 성공의 경험들이 덧없는 것임을 알고 거기에 집착할 이유가 없음을 알기에, 마음의 평정・평정・평화・자유로움 속에서 그 순간들을 선선하게 관계하며 살아낼 줄 압니다.


에티 힐섬(Etty Hillesum)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에게 끌려다니다가 아우슈비츠에서 죽기 일 년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면적 삶만 있다면 수용소 철장 안에 있건 철장 밖에 있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나는 많은 수용소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모든 걸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어떤 새로운 정보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못한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삶이 아름답고 의미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매순간 나는 그렇게 느낀다.”


행복감의 경험은 조건에 의존되어 휘둘리는 불안전감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 행복감을 경험하게 한 그 깨어있음의 통찰력이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비관적 감정을 허망한 자아로부터의 자유와 평온을 향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행복감은 일종의 ‘존재상태’입니다. 정신작용이 대상에 대한 섬세한 이해에서 비롯되는 깊은 정서적 균형상태인 것입니다. 일상적인 쾌락은 기분 좋은 일들과의 접촉에서 발생하여 그 접촉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지만, 행복감은 우리가 자신의 내적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한 오래도록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행복감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조용하게 외부로 향하는 이타심입니다.

또한 행복은 우리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지속시켜야 할 어떤 열광적 상태가 아니라 증오나 강박관념과 같은 정신적 독소들이 제거된 평안의 상태입니다. 참 행복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구조와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좀더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현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이란 지금, 여기서의 존재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가, 존재에 대하여 관념되어진 정신적 작위들로 인해 오류를 범하지 않고 인식한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참된 본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식의 오류는 세상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우리는 덧없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본질적인 고통에 다름 아닌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와 권력의 힘과 명성과 강박적인 쾌락에 대한 갈증이 바로 그렇습니다. 존재일반인 모든 것이 ‘관계’이며, 홀로 실재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모든 존재는 보이는 대로 실재한다고 비판 없이 인정하고 가치를 차별화합니다.

모든 불행이 이와 같은 인식의 오류에서 비롯됩니다. 이와 반대로 모든 행복은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참된 성품의 인식으로부터 얻어집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행복의 근본입니다. 깨달음이란 많은 정보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존재의 참된 본성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고통은 삶의 근본적인 조건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 대해 품는 그릇된 생각에 토대를 둔 삶의 정신적 양식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관계’이며,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 근본개념이 내면화되어 이해되고 그리고 실천될 때,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은 단순히 철학적 구축물로서의 개념적인 앎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경험되어야만 찾아드는 지혜의 덕목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증득할 수 있는 잠재적 역량을 자기 자신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무지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마음의 평온과 평화를 찾아 마침내는 자유로워지고, 우리의 정신에 사랑과 연민을 꽃피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행복이란 우리가 정신적 강박관념상태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나타나는 지속적인 충만이요, 평온・평정・평화의 상태입니다. 행복은 존재와 세상을 왜곡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입니다. 또한 내적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기쁨이요, 타인들을 향해 발산되는 선의의 자비입니다.

이러한 행복감은 우리의 정신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완전히 바꾸기란 어렵지만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는 이 수행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열심히 수행하십시다. 수행 안에서 삶을 사십시다.


                                           싸두 싸두 싸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