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알아차리기/법

화 “無我〈무아〉인데 화를 낼 대상이 그 어디에 있는가

Dhammarakkhita 2019. 2. 21. 00:47
“無我〈무아〉인데 화를 낼 대상이 그 어디에 있는가”
 
 
화가 나면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라
이 상황을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
관심의 대상 바꾸면 화는 사라진다

 

 

▲무언가를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화를 내려 놓을 수 있다. 아이가 화를 낼 때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하라, 그러면 화는 아이에게서 떠날 것이다.

 



첫 아이를 낳은 직후 ‘얀’ 이라는 이름을 가진 보모를 고용했는데 그녀는 은퇴했지만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었다. 종종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보모가 나를 위해 부엌의 찬장을 깨끗하게 닦았고 물건들을 다시 정리해 놓은 것을 보곤 했다. 얼마 후 나는 그녀의 청소를 집의 청결 상태에 대한 그녀의 불만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한 마음이 일어서인지 그녀의 청소에 대해 나는 모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게다가 점차 나의 가족들과 친근해지자, 그녀는 내 딸을 위해 30벌의 옷가지를 가져오기도 했다. 왜 그런 선물이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가를 이해하는데 몇 주가 걸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부부가 딸에게 옷을 제대로 입히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해 그녀가 옷을 들여왔다고 확신했다. 그녀의 ‘도움’에 대해 나는 실제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몇 달 후 얀은 우리를 수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그곳에서 그녀가 청소하고 정리하느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온갖 물건으로 가득 차있는 그 집의 지하실도 보았다.


나는 내가 화를 내고 있는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의 집안일에 대한 그녀의 간섭(?)은 사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얀은 단순히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딸은 성공한 30대 의사였다. 얀은 은퇴 후 자신의 딸집을 방문해 가구들을 청소하고, 재배치하고, 새롭게 단장했던 일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청소와 쇼핑은 그녀의 그런 걱정을 표현하고 달래는 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사사로운 불만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다. 이를 명백히 인식하게 되자 그 많던 나의 분노들은 볕에 눈이 녹듯이 사라져버렸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 그녀가 오래된 소파를 닦은 것을 보자, 그녀의 힘겨운 습관에 대한 동정심이 느껴졌다. 그러한 습관들은 실상 그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는 도구일 것이다.


얀에게 ‘얼마나 심하게 화를 냈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티베트의 비구니 스님 ‘툽텐 초드론’이 그녀의 책 ‘화’(Anger)에서 ‘화는 정확히 알지 못함에서, 사견(邪見)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쓴 대목을 되짚어 보았다. 우리가 상황을 명백하게, 감정적인 치우침이 없이 볼 수 있다면 화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도 화가 나서 다른 측면 또는 문제의 깊은 원인들을 인식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는 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인지하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관점에만 집착하게 된다. 우리 자신의 관점을 놓아 버릴 수 있는 것이 화를 정화 하는 첫걸음이다. 화를 놓아버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화를 움켜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화가 났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흥분 땐 집착도 더욱 강해져


“화를 냄으로써 누가 더 고통스러운가? 나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이 질문을 던지기 전에 우리는 그 답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몇 년 전 한 법사가 ‘혐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 내용 중에는 정말로 나의 가슴을 찡하게 울린 내용이 있었다. “아무 것도, 정말로 아무것도, 개인적인 것은 없다”라고 그 법사는 말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도, 절대적인 관점에서도 그러하다고 단언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보면 어떤 개인의 고통이 무지 또는 나쁜 습관, 다른 어떤 것에서 비롯된다며 그 원인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될 경우 그로 인한 행동 역시 ‘개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너는 매우 지독한 녀석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경우조차도 소리를 지른 사람에게 일어나고 있는 내면의 고통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가 대부분이다. 절대적인 가르침에서 보더라도, “자아는 없다. 우리 자신(수미, 재호, 지은 등)이라고 믿는 ‘우리’는 생각하는 것처럼 견고하거나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자아가 없다면, 모욕하거나 화를 낼 대상이 그 어디에 있는가? 오랜 동안 깊이 명상 수련을 하게 되면 자신에 대한 자아 개념 즉 ‘나’에 대한 집착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타인이 나에게 화를 낼지라도 그 화냄이 그대로 나에게 전이되어 머물러 있기는 매우 어렵다.


최근 화를 아주 훌륭하게 비유한 책을 읽었다.
“여기에 물 한잔이 있다. 물 잔에 소금을 큰 숟가락으로 한 숟가락 퍼 넣었다. 그 물은 아주 짜게 변해서 마실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여기에 호수가 있다. 같은 양의 소금을 넣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호수의 물맛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고 그렇기에 그 물은 그대로 마실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상호 연관되어 있고, 광범위하고, 자신에게만 얽매이지 않는 ‘자아’를 명확하게 깨닫는다면 나를 대상으로 한 타인의 화뿐만 아니라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자신의 화라 할지라도 휘둘리지 않게 된다. 우리 자체가 쓴 맛을 내는 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본래 맑기 때문이다.”


‘내면에서 화가 일어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화를 절대로 내지 않기 위해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 노력들은 화내는 것을 멈추게 하지 못함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좌절감에 빠져들게 한다. 화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것은 자연스런 인간의 한 모습이다.


한 운전자가 차로 당신을 칠 수도 있을 법한 상황을 접했을 경우 당신은 화가 치밀 것이다. 이 상황에서 평범한 사람과 깨어있는 사람의 차이는 확연하다. 그 화가 마음을 점령하고 분노로 격화되고 그래서 위험스러운 상황을 만든 운전자에게 소리를 지르게 되느냐 아니면 그 화가 올라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觀)하면서 그 화를 억압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화를 그대로 흘러가게 하느냐는 차이다. 무례나 고통, 위축 등의 감정이 더해짐으로써 화가 더 나게 하지도 않는 것이 깨어있는 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화가 날 때 ‘놓아버림’의 한 방편으로서 스스로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라.
“이 상황을 다르게 볼 수는 없을까?”


이런 시도를 할 때면 언제나 다른 관점이 있기 마련이다. 곧바로 다른 관점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짧은 시간이라도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 내가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또는 내가 그 상황을 다른 관점에서 보려고 하지 않을 때라고 할지라도 나 스스로에게 ‘왜 다른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느냐’고 자문하라. 화는 이내 줄어들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종종 나는 고통이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 외로움 등 더 깊은 내면의 감정에 이르게 된다. 이런 감정들이야 말로 진실로 객관화해야 할 대상들이다.


화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궁구(窮究)하는 것이 화를 더 내지도 않고 억압하지도 않고 화와 함께 지낼 수 있는 한 방편이 될 수 있다.

 

화는 영원하지 않은 것

 

그림 감상을 하듯이 화를 바라보고 유심히 관찰해 보라. 다음과 같이 해 보라. 그 첫 번째 질문으로 ‘화는 내 몸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하면서 너의 위장, 숨쉬기, 얼굴의 근육, 너의 손을 그대로 느낀다. 당신을 화나게 만든 그 사람에 대한 생각, 그러한 상황 또는 다른 그 무엇이 떠오를지라도 당신은 단지 현실을 내버려 둔다. 나는 이미 그 상황을 알고 있어, 또다시 지금 이러한 상황을 세밀히 되새길 필요는 없어, ‘나는 관심이 없어’라고 스스로에게 되뇐다. 그런 다음 ‘몸 관찰’로 되돌아간다. 화는 내 마음 어디에 있는가, 나의 가슴은 이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본다.


종종 뇌나 마음에 열이 있다고 느끼거나, 심장이 수축된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건 도대체 어떤 종류의 화이지’라고 자문한다. 불같이 달아오르는 화인가, 슬픈 화인가, 불공평에 대한 반발의 화인가, 변덕스럽고 성마른 화인가, 언짢은 화인가, 쩨쩨한 화인가. 수많은 종류의 화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각각의 화들은 서로 다른 원인들을 간직하고 있다. 화를 관찰하기 시작하면 종종 그 화는 흩어져버리기 시작한다. 화는 계속 불태울 재료가 없으면 지속될 수 없는 감정이다. 화의 원인이 되는 땔감 같은 생각들을 흩어버리면 그 불은 꺼져버린다.


이런 습관이 들게 되면 본인 스스로 화가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질 수 있다. 명상 수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과 그 움직임의 흐름을 알게 된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면 나는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한 날에는 충분히 잠을 잘 때까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어려운 상황에 대한 중요한 메일을 보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결심을 굳건히 한다. 내가 잠에서 깨어날 때 화를 낼 조건들이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인지할 수 있다. 내 마음은 내부에 이런 종류의 ‘열’을 내재하고 있고 발산할 대상을 찾게 된다. 마치 ‘열 추적 미사일’ 같다고나 할까. 불행히도 종종 남편은 나의 목표물이 될 만한 일들을 벌여놓곤 한다. 남편이 테이블을 제대로 닦지 않아 끈적이는 것이 남아있을 경우 내가 테이블에 올려놓은 종이가 들러붙어 끈적이게 된다.


내 마음의 열 추적 미사일은 목표물을 찾았고 드디어 폭발한다. ‘꽝’하고 말이다. 지독한 잔소리로 남편을 폭격한다. 그릇된 습관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으면 화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면 좀 더 안정이 될 때까지 본인 스스로가 상대방을 만나는 것을 피하는 등 효과적인 조치들을 취할 수 있다. 이런 단순한 조치만으로도 당신 스스로 집착하고 있는 고통과 타인에게 줄 수 있었던 고통을 급격하게 줄일 수가 있다.


우리 인간은 감정의 존재다. 그런 감정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평정과 평화로운 삶이 될 수도 있다. 더 많이 명상을 하면서, 화와 함께 생활하면서, 명확히 이를 관조하고 직관하면서 화를 놓아버릴 수 있는 능력은 증대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화’는 내 것도, 네 것도 아니다. 



출처:수미런던 듀크 불교공동체 지도법사 simplysumi@gmail.com
번역자 백영일 yipaik@wooriban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