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의 길에 대하여
사야도는 네 가지 길을 차례로 설명하면서 게송으로 마무리 했다. 혜송스님의 선창에 따라 대중은 두 번 따라 했다. 대중의 합송이 울려 퍼질 때 법당안은 충만되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축복 받은 기분이다. 그래서 법우님이 “거사님 덕분에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사야도는 가장 마지막으로 열반의 길에 대하여 설명했다. 사마타를 닦은 공덕으로 색계와 무색계에 태어나지만 결국 윤회할 수밖에 없다. 완전한 행복이 아니다. 위빠사나를 닦아야 완전한 행복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열반은 고통이 없는 순도 100프로 행복입니다.”라고 말했다.
열반의 길은 위빠사나를 닦는 것으로 완성된다. 사야도는 먼저 신, 수, 심, 법 사념처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오롯이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한번이라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죽 안에서 관찰했을 때 이를 ‘사띠빳타나 위빠사나’라고 했다. 사띠에 토대를 둔 위빠사나라는 뜻이다.
사마타는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관찰대상이 된다. 몸의 경우 행주좌와가 모두 대상이 된다. 그 중에 복부관찰이 있다. 호흡과 함께 일어나는 복부에 집중하는 것이다. 숨을 쉴 때 배가 불러지는 것에 집중하여 “부품”이라고 관찰하고, 꺼지면 “꺼짐”이라고 관찰한다. 복부를 관찰하면 복부의 움직임과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된다. 그 어디에도 사람, 중생, 나, 너와 같은 개념이 발 붙이지 못한다.
느낌에 대한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이다. 그것은 지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느낌을 관찰할 때는 쑤시고, 쓰리고, 시리고, 찌르는 등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강한 대상 하나를 잡아서 관찰하면 생멸을 볼 수 있다. 느낌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마음관찰은 어떤 것일까? 탐욕과 성냄 같은 것이다. 이 밖에도 질투, 인색, 지루함 등 갖가지 현상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때 일어나는 족족 알아차리고 호흡으로 가는 것이다. 여기서 호흡은 주관찰 대상인 배의 호흡을 말한다.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말한다.
법념처란 무엇일까? 사야도는 앞의 세 가지에 대하여 ‘생멸(生滅)을 보는 것’이라고 했다. 생멸을 본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성품’을 보는 것이다. 다른 말로 ‘실재’를 본다고 한다. 그래서 사야도는 “세 가지 생멸의 경지를 보는 것이 법관찰입니다.”라고 말했다.
혜송스님은 사야도의 법문을 통역하면서 “위빠사나의 핵심은 생멸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몸과 느낌, 마음을 관찰하는 것도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을 보기 위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도 생멸에 대한 것이고, 경행 할 때 발을 움직이는 것도 생멸에 대한 것이다. 좋은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느낌도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성냄도 일어나고 사라진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말 것에 목숨 걸 필요 없다.
생멸을 관찰하면 지혜가 생겨난다.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음을 알아 무상의 지혜가 생겨난다. 무상한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에 대한 지혜가 생겨난다. 무상한 것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의 지혜가 생겨난다. 신, 수, 신, 법으로 사념처를 닦으면 무상, 고, 무아의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나서 적멸에 들 수 있음을 말한다. 온천지가 무상하고, 온천지가 괴로운 것이고, 온천지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적멸이 되어 수다원 도와 과에 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위빠사나를 닦는 것에 대하여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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