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聖帝/滅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프란시스 스토리 지음|재연스님 옮김

Dhammarakkhita 2012. 11. 27. 10:25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

[道聖諦 Dukkha Nirodha Gāminī Paṭipadā Ariya Sacca]

 

 

“비구들이여, 그러면 ‘고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 즉 바른 이해, 바른 의도,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다.”

 

이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열반을 실현하는 구체적 방법의 개요를 말한다. 그러나 이 진리를 천명하기에 앞서 부처님께서는 먼저 그 당시 유행하던 몇 가지 그릇된 관념들, 특히 진리 탐구에 중대한 장애가 된다는 것이 입증된 것들부터 치워내셨다. 당신께서 고행을 그만 두셨을 때 등 돌리고 떠났던 다섯 비구들을 대상으로 하신 최초의 법문에서 부처님께서는 피해야 할 두 극단의 길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셨다. 한쪽은 감각적 탐닉의 길로, ‘상스럽고, 저열하고, 속되고, 존경받을만 하지 못하고, 이롭지 못한 길’이며, 다른 한쪽은 극단적인 육체적 고행을 닦는 길이니, ‘고통스럽고, 존경받을만 하지 못하고, 헛되고, 이롭지 못한 것’이다.

이들 처지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 있다.

 

“‘중도’로서 부처님이 발견하신 이 길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해주며, 평화로, 지혜의 체득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끌어준다. 고통과 괴롭힘이 없는 이 길, 비탄과 고뇌가 없는 이 길, 이 길이야말로 완전한 길이다.”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부처님께서 극단적 고행을 나무라신 데에는 당신의 말씀에 나타나 있는 것 이상으로 심오한 뜻이 있다. 오늘날까지도 실행되고 있는 어떤 요가 고행 중에는 병적인 자기혐오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어쩌면 고통을 경험하는 데서 자학적 쾌감마저 느끼는지도 모른다. 동기야 무엇이건 그런 수행을 하다보면 비정상적일만치 육체에 마음을 쓰게 된다. 해방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을 그것의 물리적 기반에 더욱 단단히 붙들어 매게 될 따름이다. 이와 같이 전도된 감각탐닉이 표출될 때에는 그것을 둘러싸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뭇 방해관념들이 떼 지어 일어나게 마련이다. 가령 몸과 별도로 존재하며, 몸과 싸우고 있는 영혼 또는 정신­실체라는 관념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되면 다시 육체는 영혼의 적일뿐 아니라 꼭 알맞은 증오의 대상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래서 영혼은 이 적을 조복하기 위해 새로운 고문방법을 끊임없이 개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와 매우 유사한 양상은 초기 기독교 고행주의의 매질, 거친 마소직(麻巢織) 옷 착용, 장기 단식, 수난을 자초하는 일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육체는 상존하는 적이었다. 적이라고 부를 때는 이미 그것에 중요한 비중을 두고 있다는 뜻이다. 그 적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육체 역시 정신으로부터 이런 취급을 당하다보니 따로 유리된 길을 걸을 수밖에 없고 그것도 적개심에 찬 행로를 취하게 된다. 그래서 수시로 틈만 나면 반격을 가하고, 괴로운 심리적 타격을 안겨준다.

 

그렇지만 불교는 남에게 폭력쓰기를 피하듯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폭력쓰기를 피한다. 몸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지만 그 제어방법은 폭력적이 아닌 다른 방법에 의해야 한다. 몸은 그 자체가 정신을 멍들게 하는 병균의 소굴이 아니라 단지 그 운반체일 뿐이다. 갈애의 성채를 점령하는 일은 마음에 대고 할 일이지, 몰이꾼이 모는 대로 움직일 뿐인 불쌍한 소와 같은 몸에 대고 할 일이 아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삶이 걷는 길로서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을 초월함으로써 끝난다. 그 길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지적인 파악을 의미하는 바른 이해[正見]이다.

 

“그럼 바른 이해[Right Understanding 正見]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고(苦)’와, ‘고의 집기(集起)’와, ‘고의 소멸[滅]’과,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을 이해하는 것이다(『장부』22경 2권 311쪽).”

 

또 다른 곳에서는 선하거나 불선한 행위의 뿌리들, 즉 도덕적 인과율에 대한 이해를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상응부』(온품 22 온상응)에서는 다시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무상하다(따라서 고를 면할 수 없으며 또한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해할 때 그때도 역시 그는 바른 이해를 지닌 것이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바른 의도[Right Intention 正思]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애욕과 갈망이 없고, 악의가 없고, 잔인성이 없는 의도이다.”

 

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사바세계와 관련되는 바른 의도는 선한 행위로 실현되고 그래서 좋은 세속적 결실을 가져온다. 또 하나는 열반을 최종 목표로 하는 보다 높은 청정한 길을 지향하는 바른 의도이다.

 

“그러면 바른 말[正語]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거짓말을 멀리 하고 진실을 고수하며, 말 전주를 금하고 불화 대신 화합을 조장하며, 거친 말씨를 삼가고 점잖고 예의바른 말을 쓰도록 하며, 공허하고 무책임하며 어리석은 얘기를 삼가고 항상 가치있는 주제, 즉 깨치신 분의 법과 같은 주제를 놓고 조리 정연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바른 행위[正業]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살생을 삼가고 훔침과 착복을 삼가고 부모 형제 자매 또는 친척의 보호를 받고 있는 여인, 결혼한 여인, 왕의 금령이 내려져 있는 여인, 약혼 중인 여인, 다른 사람의 첩 등과 성적인 관계를 삼가는 것이다.”

 

여기서 살생, 훔침, 금지된 부류의 여성과의 성관계를 삼가는 것은 세속적 바른 행위라 하고, 이는 (금생이나 다음 생에서) 좋은 세속적 결과를 맺는다. 이에 비해 이런 일들에서 등을 돌리는 것, 해탈에의 길에 집중된 깨끗한 마음으로 이런 행위를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 ― 이것은 출세간의 바른 행위라 부르며 청정한 도[向]와 과(果)를 맺는다.

 

“그러면 바른 생계[正命]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그릇된 생계 방식을 거부하고 바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여기서 그릇된 생계는 도살이나 그 밖의 유정물들의 안녕에 해가 되는 방식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바른 노력[正精進]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네 가지 고귀한 노력[四精勤]이니 피하려는 노력, 극복하려는 노력, 계발하려는 노력,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첫 번째 것은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나쁜, 비난할만한 상태[不善法]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니 바꿔 말하면, 의식[識]에게 감각대상이 표상될 때 집착이 생겨나지 않도록, 그래서 그 결과로 탐욕과 슬픔이 일어나는 일이 없게끔 미리 피하려는 노력을 말한다. 두 번째 것은 그와 같은 과정을 거쳐 이미 생겨난 나쁜 그리고 비난할만한 상태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세 번째 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좋은 그리고 유익한 마음상태[善法]들을 계발하려는 노력이다. 네 번째 것은 이러한 마음상태들이 생겨났을 때 이들을 참을성, 힘씀, 애씀에 의해 유지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면 이제 바른 마음챙김[正念]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몸에 대한, 느낌에 대한, 마음에 대한, 그리고 마음 대상들[法]에 대한 수관[随觀]이다. 이때 수행자는 세속의 탐욕과 비애를 털어 버리며 열심히, 분명한 의식으로, 주의 깊게 몸, 느낌, 마음, 법을 수관하면서 산다.”

 

이는, 사념처를 말하는 것으로 경에 “청정을 이루도록, 슬픔[憂]과 비탄[悲]을 극복하도록, 고통[苦]과 근심[愁]을 끝내도록, 바른 길과 열반의 실현에 들도록 이끄는 유일한 길”(『장부』22경「대념처경」 D II 290)이라고 설해져 있다.

 

“그러면 이제 바른 집중[正定]이란 무엇인가? 진실로 그것은 마음의 몰입,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킴이니 이것이 바른 집중이다.”

 

집중의 대상은 사념처이며, 집중의 예비조건은 네 가지 고귀한 노력[四精勤]이다. “이들을 닦고 계발하고 키우는 것이 ‘정(定)’의 발전요소가 된다.”

 

팔정도의 여덟 부문은 제각기 아주 명확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의미는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적 체계 전반과 논리적으로 잘 결부되어 있다. 그래서 ‘바른 견해(Right View)’는 단지 ‘좋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보다는 더 뚜렷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인생의 실상에 대한 자세하거나 개괄적인 지적(知的) 파악을 나타낸다. 도(道)의 끝에서 우리는 ‘바른 집중’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의 초월적 상태의 전조인 바 그 상태에서는, 지성에만 의지해서 불완전하게 이해되던 진리가 이전의 상태를 벗어나 곧바로 직관적 경험의 대상이 된다. 이런 상태에 도달되었을 때에만 ‘바른 견해’ 그 자체가 완전해진다. 따라서 도(道)의 여덟 부문은 순차적으로 하나하나씩 또는 점진적으로 다룰 게 아니라 일괄적으로 계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가 완성되려면 나머지 것들도 동시에 다 같이 발전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완성은 각각의 동시적 발전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의 공식을 구성하는 연결고리들의 경우와 똑같이 팔정도의 구성요소들도 단지 시간적 인과관계 속에 세워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북돋는 관계라는 측면에서도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른 집중’은 애초에는 ‘바른 이해’로 출발했던 지혜를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고 발전시켜 준다. 끝이 시초 속에서 미리 예시된 셈이다.

 

팔지성도[道]는 관례적으로 계․정․혜 세 부분으로 나뉜다.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는 계에 속하고,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은 정에 속하고, 그리고 바른 이해와 바른 의도는 혜에 속한다. 불교 윤리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글의 범위 내에서는 불가능하므로 여기서는 불교에서의 ‘계’가 불교 철학 체계의 중심 개념인 무아, 즉 자아의 궁극적 ‘비­실재(non-reality)’에서 곧바로 발원한다는 점만 지적해 두겠다. ‘나쁜’ 또는 불선한 행위는 자기를 중심에 둔, 자기이익본위[利己]의 행위이며 그렇기 때문에 탐욕 또는 애욕, 증오심, 미혹에 지배된다. ‘좋은’ 그리고 가치있는 행위란 자기를 돌보지 않는, 그리고 자비와 통찰에 의해 우러나는 것이다. 불교의 계는, 그 가치가 미심쩍은 신학체계에 한 가닥 줄을 대어, 시간이나 상황의 전개에 따라 얼마든지 휘둘릴 수 있는 독단적 품행 규범집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며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원리들에 뿌리박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 원칙들은 사건들로 가득 찬 덧없는 바깥 세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항수(恒數) 할 수 있는 심리적 동인이란 내면세계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갈애와 집착은 어디서 끝나게 되는가. 부처님께서 하신 대답은 그들이 일어난 곳에서 끝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즉 감각기관들과 그 대상들 다시 말해, 보이고, 들리고, 냄새 맡아지고, 맛보이고, 닿게 되고, 마음에 품어지는 것들 사이에 생겨나는 접촉[觸]이 바로 그 끝나는 곳이란 말씀이다. 이 말씀은 접촉으로 인해 감각작용[受]이 일어날 때 그 감각작용을 우리가 맨 그대로의 한낱 경험으로 볼 수 있게 되면, 즉 그 작용을 공허한 현상으로 볼 뿐 그 경험에 ‘나’를 개입시키거나 식별반응을 일깨우는 일이 없어지게 되면, 그들 감각작용을 향한 욕망이 뿌리부터 잘려나간다는 말씀이다. 분리되어 떨어져나가는[解離] 과정이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몸을 수관’할 때에는 맨 주의, 어떤 잡념도 붙지 않은 주의를 몸에 기울이어 그것을 음식 속에 섞인 머리카락 보듯 본질적으로 매력없는 물리적 요소들의 복합체로 공정하게 고찰한다. 몸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분석하고 그 구성체들의 혐오스러운 측면을 냉정하게 주시하노라면 몸에 대한 집착[取]이 약화되고, 집중의 정도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나겠지만 결국 완전히 제거되고 만다. 고행외도의 수행에서처럼 몸을 하열하고 유해한 ‘자아’로 보는 대신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관(隨觀)하면 몸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인다. 매 순간 노쇠하고 부패해 가는 과정에 있는 물질로, 물리적 법칙과 과거 업이 어우러져 이루어낸 산물로 보게 되는 것이다.

 

명상의 주제들, 보다 정확히는 마음수련(bhāvanā)의 주제들은 서로 다른 기질들에 맞도록 얼마든지 다양해질 수 있겠지만 목적은 한결같으니 현상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며, 관찰하는 자 및 관찰되는 대상 모두의 본질적인 공성을 깨닫는 것이니, 이것은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정신적 몰입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이 공성(suññatā)은 선(jhāna), 즉 몰입상태마저 넘어섰을 때 비로소 충분히 이해하게 된다.

 

“더 이상 (선의)[禪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이제 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서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무, 무(Natthi 無)’ 또는 ‘공, 공(suññaṁ 空)’ 또는 ‘원리, 원리(vivittaṁ 遠離)’, 그러면서 주의를 거기에 기울이고 그것을 잘 관찰하고 그리고 생각과 사유로서 그쪽으로 밀어붙여야 한다.” (『청정도론』 X. 33)

 

그리하여 “사대(四大)의 궁구(窮究)에 전념하는 비구는 공에 들어서, ‘살아있는 존재’라는 상(想)을 제거한다. 그런 존재들에 대한 상(想)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 맹수, 야차, 나찰 등에 관한] 잘못된 관념을 품지 않게 되고 그럼으로 그는 공포와 두려움, 즐거움과 혐오심을 정복하고, 마음에 드는 것들 때문에 유쾌해지지도, 마음에 안드는 것 때문에 의기소침해지지도 않으며, 큰 지혜를 지닌 자로서 바로 불사(不死)에 이르거나 아니면 행복한 재생을 확보한다.”(『청정도론』 XI. 117)

 

미망, 굴레, 고통의 상태와 완전한 해탈의 상태 사이에, 그 과정인 도[道]와 그 성취인 과[果]들이 깔려있는 바 이들은 열 가지 족쇄를 점차적으로 제거해 나가는 정도에 따라 네 범위로 나뉜다. 열 가지 족쇄는 1. 자아가 있다는 미망 2. 의심 3. 의식(儀式)의 거행이 해탈에 효험이 있다는 믿음 4. 감관적 갈애 5. 악의, 6. 색계(色界) 존재에 대한 갈애 7. 무색계(無色界) 존재에 대한 갈애 8. 아만(我慢) 9. 들뜸 10. 무명이다. 처음 세 가지를 부숴낸 사람을 ‘흐름에 든 이[豫流者]’라 한다. 그는 해탈의 흐름에 들어섰으며 앞길은 정해졌다. 그는 이제 인간보다 낮은 세계에는 결코 몸을 받지 않으며, 완전한 해탈을 일찍 성취하지 못할 경우에라도 늦어도 일곱 생 내에는 그것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그 다음의 두 족쇄마저 약화시키면 그는 ‘한번 더 돌아오는 이[一來者]’가 된다. 욕계에의 재생을 한번 이상은 더 겪을 필요가 없어진 사람이다. 거친 족쇄로 알려진 앞의 다섯 가지를 모두 완전하게 부숴낼 때 그는 ‘돌아오지 않는 이[不還者]’가 되어, 욕계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 열 가지 족쇄를 모두 부숴버리게 되면 ‘아라한’의 상태를 성취한다. 이미 그는 성스러운 삶을 구성하는 도의 모든 과정들과 그 결실을 실현해낸 것이며 그에게 고통스러운 재생의 순환[윤회]은 끝난 것이다. 이들 고귀한 사람(Ariya Puggala)의 네 단계는 어떤 경우에는 간격을 둘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곧 바로 뒤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각 단계에서의 ‘과실[果]’ 또는 성취는 심찰나적 연속 분상에서 도의 실현을 바로 뒤잇는다. 통찰의 심찰나가 섬광처럼 비칠 때 수행자는 일체의 의혹을 넘어 자신이 성취한 것의 성격을 알며 더 닦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도 안다.

 

탐․진․치를 총체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아라한이 열반을 이룰 때, 그는 이와 동반하는 것으로 ‘제자의 깨달음[聲聞菩提]’이라 알려진 어떤 유형의 깨달음을 얻는다. 다시 말하면, 그는 존재의 연기적 원인들이 무엇인지, 또 그 원인들을 어떻게 부수어내었는지를 완벽하게 안다. 그리고 그는 자아라는 미망이 부서져 내린 결과 자신의 기능들[諸根]이 신장되는 경험을 한다. 그 미망은 통상적으로 마음을 개인의 감각적 경험의 영역 속에 격리시킴으로써 마음에 대해 장벽 노릇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무상(無上) 대각자의 깨달음은 훨씬 수승한 것이며 그 범위도 무한대이다. 아라한에 따르는 지혜에다 더하여 일체지[sabbaññutā]를 증득한 것이다. 이는 그분이 어느 전생에 서원을 세우고 절륜한 덕행을 닦음으로써 실현하게 된 원대한 결의가 맺은 결실이다. 일체 중생의 이익을 위해 ‘충분히 깨달은 이[Fully Enlightened one]’, 세상의 스승이 되겠다는 결의인 바 그와 같은 완벽 무결한 지혜가 없이는 ‘법의 바퀴’를 굴릴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상 그의 지혜 중 훨씬 더 많은 부분은 남에게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자연적인 현상을 말씀하실 때에는 부처님은 청중들이 쓰는 그대로 용어와 개념을 구사하셨다. 그들 청중에게 생경한 개념을 써서 말씀하시면 이상하게 들리거나 놀라워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유클리드 기하학도 채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일반상대성이론은 입에 올릴 거리가 아닌 것이다. 제자들로부터 당신이 아는 바를 모두 가르치셨느냐고 질문을 받자 부처님은 비유로 이에 대답하셨다. 손톱 끝에 흙을 조금 올려놓으시고는 그 흙과 땅에 남아있는 흙 중 어느 쪽이 더 많으냐고 물으셨다. 당연한 대답이 나오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가 갖고 있는 지혜도 가르친 것보다 더 많다.”

 

이 말씀이 빌미가 되어, 어쩌면 부처님께서 몇몇 선택된 제자들을 위해 따로 준비해 둔 비전(秘傳)의 가르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입증해보려는 시도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다음 말씀을 보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지만 완전한 해탈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건 여래는 모두 다 가르쳤느니라.” 그러시고는 다시 “밀교(密敎)와 현교(顯敎) 같은 것을 따로 세우지 않고 여래는 법을 가르쳤다. 여래에게는 무언가 따로 감추어 놓는 스승의 주먹쥔 손[師拳] 같은 것은 없다.”고 말씀하셨다.(『장부』16경 2권 100쪽). 부처님께서 아시면서도 가르치지 않으신 것들은 해탈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윤회의 바다를 건너도록 중생을 이끄는 일과는 관계가 없는 것들이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사변이 무익하다는 것을 아셨기에 이것을 권장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론을 제시하지 않으셨다. “여래는 이론을 세우지 않는다”는 문구는 경전에 자주 나온다. ‘진리를 직접 접하셨기’에 그분은 단순한 추론 내지는 불완전한 지식에 근거한 견해들을 내버리셨다. 이성은 좋은 길잡이이며, 그것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한 그보다 더 나은 길잡이도 없다. 또 이성에 반하는 것은 어떤 것도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구경(究竟)’의 목적지를 향한 본격적 여행의 등정지점은 이성이 다른 것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더 이상 전진시켜주지 못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거기서부터는 한결 높은 마음[增上心, Adhi-citta]이 인계받아서 나머지 여정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여정이 끝날 때까지는 분별하는 개념적 마음의 추론행위는 용인되어야겠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는 장애가 된다는 점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식도 지혜에 공헌하게끔 만들 수도 있으니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 물리세계를 상세히 분석ㆍ검토해내기 이전에 살았던 선조들보다 어쩌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들을 이해하는 데 좀 더 나은 입장에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적 방법―사유를 주지의 사실에 연관시키는 정신적 훈련―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이런 방법을 절대 진리를 탐구하는 데 최초로 적용한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고통이라는 관찰된 사실에서 시작해서, 존재의 구성 요소들을 분석해냄으로써 고통이라는 것의 원인들과 그 처방을 찾아내셨던 것이다. 그 결과가 ‘사성제’였고 거기에 법이 모두 요약되어 있다. 그리고 과학이 자체의 모든 발견을 실증적 증명에 의뢰하듯이 부처님께서도 당신의 가르침을 이론이나 종교적 독단 또는 몽상가의 꿈이 아닌, 누구나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증명 가능한 진실로 제시하셨다. 불사의 문을 열어젖히고서는 그 열쇠를 한 사람 또는 어떤 특정 집단에게 주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 문을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누구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신 것이다.

 

법은 두말할 나위 없이 ‘심오하고 미묘하여 오직 지혜로운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쓰시는 언어체계에서 지혜는 학문적 배움을 의미하지 않는다. 거기서 지혜는 사물을 분명하게 보는 능력을 뜻한다. 이런 면에서는 어린아이가 때로는 철학자보다 더 지혜로울 때가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부처님께 최초로 암시를 준 것도 어릴 때의 명상경험이었다. 나이, 경험, 박식함 이런 것들은 지혜와 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어린이의 천진함은 단순한 동물적 무지일 수도 있고, 전생에 얻은바 통찰력이 수반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많든 적든 제근(諸根)을 온전히 갖추기만 했다면 학식이 높든 일자무식이든 인생의 진정한 본질을 찾아내고 그래서 열반에 이르는 길에 오를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다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그에게 불사의 문은 지금도 여전히 활짝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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