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의 당신에게 감로수를 드립니다
― 病席 暝想法 ―
1965년 9월 3일 법문
하나
우리 모두는 병자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만 없으면 병자라 여기려 들지 않습니다. 세상 어디서나 다 그런 식이지요. 활동하는 데 지장만 없으면 이를 정상이라 부르면서 병든 상태와 구별하려 듭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정상 상태라는 그것 또한 바로 큰 병에 걸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시시각각으로 무너져 내리는 큰 병에 걸려있는데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건강하다느니, 정상적이라느니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착각이고 무지한 자만입니까. 그 자만에 빠져 세상사에 몰두하느라 겨를이 없다 보니 자신의 큰 병은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병이 들어 누워있는 당신은 복이 많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아무 일하지 않고 오직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육체적인 고통만을 바라보고[隨觀 : 대상을 간단없이 계속 지켜보기] 있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니까요. 덕분에 당신은 쓸데없는 일에 쏠리지도 않고 정신을 빼앗길 일도 없습니다. 온종일 고통을 지켜보고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며 드디어는 24시간 내내 고통을 놓아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신경을 깊은 관찰 · 숙고에 쏟게만 된다면 아픔은 느낄 겨를도 없이 저절로 스러져 갈 것입니다. 이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여기서 아픔을 느낄 틈이 없다는 말은 사람들이 세상사에 바빠서 자신의 병을 돌아볼 틈이 없다는 뜻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일상생활에 휩싸여 다른 생각이 없는 비어있음은 놀이에 팔려 정신이 없는 ‘비어있음’이요, 그러한 ‘비어있음’은 진짜 빈 마음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 누워있는 이 때, 바로 당신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 모든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이 얼마나 속절없고 고통스러우며 그러면서도 막상 거기에는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제대로 지켜볼 수 있게만 된다면 이는 참으로 유익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일단 아픔을 느끼고 있는 당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속단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사라져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그저 여기에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고 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 사건들은 사건일 뿐, 그것이 당신일 수는 없습니다. 또 당신 것일 수도 없습니다. 만일 그것들이 진짜 당신의 것, 당신의 소유물이라면 당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어야 할텐데, 그 사건들에 대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것들이 당신 것일 수 있습니까.
한번 살펴봅시다. 당신 뜻대로 손쓸 수 있는 구석이 어디 있습니까. 아무 데도 없지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몸이 아픈 것도 그렇지요. 몸이 아픈데 당신이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내 몸, 내 몸이 아프다’고만 마음 쓰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몸에 어떤 병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있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정작 마음속에 번뇌, 갈애, 집착과 같은 큰 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혹시 심한 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은 아닐까하고 신체적 병에만 신경을 쓰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병을 겁낸 나머지 이를 면해 보려고 몸부림쳐보지만 병은 일어날 때가 되면 일어나며, 어떤 좋은 약도 병의 진행을 그저 잠시 유예시킬 뿐입니다. 그렇게 힘이 넘치던 항우장사도 지금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누구나 마침내는 자신의 육신과 이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거듭거듭 관찰 · 숙고해 나가면 당신은 모든 것이 속절없고[無常], 고통스럽고[苦], 실체가 없다는[無我] 명명백백한 사실을 자기 속에서 확연히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당신은 한걸음 한걸음씩 현상에 대한 미망에서 점차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제대로 가게 놓아버릴 때, 거기에 그래도 남아있는 그 누군가가 있을까요? 아파하고 있는 것이 과연 당신일까요? 아니면 아픔이라는 한 현상[dhamma, 法]이 벌어지고 있는 단순한 사건 전개일 뿐일까요? 이 점을 주의 깊게 살펴서 아프고 있는 것이 결코 ‘당신’이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차려야만 됩니다. 병은 결코 당신의 것이 아닙니다. 병이란 육신에 일어나는 현상이자 지·수·화·풍 사대(四大)의 변화일 뿐입니다. 육체적 현상이나 정신적 사건들은 변화하기 마련이며[無常], 변화 속에서는 긴장될 수밖에 없으며[苦], 변화와 긴장 속에 자아가 있을 순 없는[無我] 것이지요. 당신은 이런 무상 · 고 · 무아를 분명히 깨닫기 위해 그것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하며, 지켜보아야 하며, 수관(隨觀)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지혜가 아주 분명해지도록 하십시오. 그 지혜가 분명해지는 경지, 거기가 바로 당신이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곳이 될 것입니다. 오온(五蘊)이야 저들 사정에 따라 일어나고, 자라고, 병들고, 스러져 가기 마련입니다. 인연이 다하면 죽어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될 테지요.
어떤 사람들은 한창 건강하고 자기만족에 차 있을 때 갑자기 자기가 죽는 줄도 모르고 뜻밖의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이럴 때 그들의 마음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병상에 누워 고통을 관찰하면서 미혹에서 깨어나고 있는 쪽이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그러니 고통을 두려워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만약 고통이 계속되거든 그런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다만 마음까지 덩달아 고통을 겪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저 바라만 보십시오. 바로 지금, 이 마음이 ‘나’, ‘내 것’이란 생각에서 벗어나 있는가 어떤가 그것만을.
계속 마음속을 들여다보십시오. 계속 들여다보면 마침내 사물의 실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밖에 자신의 상태나 처지에 대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병이 치유되거나 고통이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겁니다. 흔히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이지요. 반면에 고통이 완화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그 또한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 마음이 ‘나’ 또는 ‘내 것’에서 벗어났다면 이는 단순한 것으로 보이지만 대단히 특별한 일이 됩니다. 이미 거기에는 고통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온의 고통 따위에 대해서는 더이상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자신을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여기 이렇게 누워 병과 더불어 매순간 내관명상(內觀瞑想)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병원에 있거나 집에 있거나 그것이야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 것은 일체 괘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마음만 비어있게 하십시오. 모든 일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그만두십시오. ‘내가 지금 어디에 있구나’ 하는 식으로 이름붙이는 일 말입니다.
존재하고 있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오온의 가합(假合)입니다. 단지 가합일 뿐 그것을 주관하고 있는 인물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든지 ‘내 것’이라 할 그 무엇이 거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비게 되면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있든 저리로 가든 또는 그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입니까. 이렇게 되면 육체의 고통도 정신의 억압도 확실히 끝나게 됩니다.
마음이란 것은,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끄달리지만 않는다면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자체가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성품이 본래 비어있음을 알 수 있기 위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마음의 움직임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어떤 즐거움도 욕구하지 않도록, 그 어떤 고통도 밀어내려 애쓰지 않도록, 그래서 일체의 바라는 마음이 끼어들지 않도록 막아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본성 그대로 비어있을 때는 거기엔 내 마음이란 관념이 붙을 자리도 없을 뿐 아니라 마음 그 자체에 붙일 이름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설혹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 생각을 실체가 없는 것, 자아가 없는 것으로 볼 따름입니다. 단지 어떤 감각이 있고 그리고 곧 사라질 뿐입니다. ‘즉시 사라지고야 말 감각’, 그게 전부입니다.
따라서 당신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의 현상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일어났다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도 이름도 부여하지 않게 되어 마음은 비어있을 것입니다.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야 원래 오온의 속성이 그런 것이니 더 말할 것이 없고 문제는 마음이 거기에 말려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을 움켜쥐려들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당신은 그 점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허구한 나날을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을 수도, 또 사물에 이름표를 안 붙이고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고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지요. 하지만 당신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활용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이 고통을 두고 ‘내가 아프다’라고 이름표를 붙이거든, 당신은 그것을 면밀히 읽어보십시오. 계속 수관(隨觀)을 하다 보면 그 이름 붙이기가 잘못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제대로 된 것이었다면 ‘고통은 내가 아니다. 고통은 빈 것이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또 ‘내가 괴롭다’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그 생각 역시 잘못입니다. 그러니 스스로의 생각에 대해서 당신은 전혀 새롭게 접근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무슨 생각이든 생각한다는 것 그 자체가 속절없고 고통스럽고 당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목전의 그 일을 직시하고는 놓아버리십시오. 다만 자신이 계속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지만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그 본성대로 계속 비어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당신을 어지럽히지 않더라도 심한 통증이 일어나거나 기분이 언짢아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일어나고 있든 그것을 곧바로 보아야 하고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각을 줄곧 놓치지 말고 들여다보고 있어야 합니다. 일단 빈 마음을 느껴보게 되면 마음의 동요나 짜증 따위에 대해서는 그것을 일으킨 인식 그 자체가 애당초 잘못된 인식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올바른 인식이 잘못된 인식의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올바른 인식에 의한 앎을 그 바탕부터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제어하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하며, 이와 병행하여 정신적 억압과 육체적 고통이라는 현상에 주의력을 집중하여 수관하는 훈련을 해나가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게 빈 상태에서도 올바른 앎의 자세가 계속 견지될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 그 자체가 바로 고통이 끝난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런 훈련을 계속 쌓아가야 합니다. 고통이 일어나면 그것이 강한 것이든 약한 것이든 간에 거기에 아무 꼬리표도 붙이지 말고 의미도 부여하지 마십시오. 비록 기쁨이 일더라도 그 기쁨을 ‘나’의 기쁨이라 꼬리표를 달지 마십시오. 그저 계속 놓아주기만 하십시오. 그러는 순간마다 ‘자아[我]’에 대한 일체의 집착이 비면서 마음은 해탈[心解脫]을 누릴 것입니다. 당신은 간단없이 이 수련에 마음챙김[正念]과 정진력[正精進]을 다 기울여야 합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당신은 자신이 행운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 아파 누워서 고통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팔정도를 충분히 닦아서 통찰력, 즉 지혜를 얻고 또 세상사를 놓아버릴 수 있는 기회를 누리고 있는 셈이 되니까요. 지금 당신보다 더 좋은 기회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저마다 일에 매여 바삐 돌아가고 있습니다. 몸이 바쁠 뿐 마음은 전연 매여 있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긴 하지만 어떻게 그 사람들과 당신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은 매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통찰력을 키워나갈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있는 그대로 사물의 본성을 꿰뚫는 지혜를 얻고 있으니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이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사물의 본성은 바깥 경계에서는 지금 드러나 보이는 현상, 즉 오온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당신은 이러한 오온의 암호를 판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판독해나가다 보면 오온이 쳐놓은 미망에서 깨어나게 되고, 그들에 대한 흥미가 사라지게 되며, 마침내 그들을 놓아버리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이와 같은 상태가 되면 그 다음 단계는, 마음이 어떻게 비어있는지 그 빈 정도를 관찰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매우 정치(精緻)한 수관을 해야 하며 그래서 궁극적 비움으로 줄곧 매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 비움이란, 아무런 생각이 끼어들지 않고 생함도 멸함도 없는, 일체의 변화가 멎는, 가장 깊숙한 내면에 감춰져 있는 참된 본성을 분명히 간파하는, 그런 종류의 비어 있음입니다.
사물의 성품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까지 외면적 차원에서 올바로 정확하게 사물의 본성을 살피고 있으면, 마음은 지금껏 끌어안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놓아 보내게 됩니다. 바로 이때 당신은 저절로 내면적 차원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면서 감춰져 있는 사물의 본성을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일체 생사의 윤회가 비어있는, 순수무잡한, 그 형언할 길 없는 빔[空]의 본성을 말입니다. 무어라 할까요. 비고 비어 더할 수 없이 비어있다고나 할까요. 일체의 집착이 사라진, 꼬리표도 의미도 붙지 않는 빔[空]을……. 바라마지 않는 것은 당신이 이 빔을 당신 마음가운데서 분명히 찾아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일컫는 ‘빈 마음’은 외적 차원을 가리킬 뿐 더 심오한 수준은 담아내지 못합니다. 진실한 빔은 비고 빈 나머지 마침내는 내면적 차원의 사물의 참된 본성에 도달하게 되며, 그것은 진실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 진실로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 스스로 알아내야 합니다. 참으로 말로써는 나타낼 길이 없지만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 방법을 일러줄 수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 모든 것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그 텅 빈 경지는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그리고 매순간 이처럼 통찰력을 증장시켜 나아간다면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음의 경지는 제 스스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은 그것을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즐거움이나 괴로움에 사로잡혀 어지럽게 되도록 방치하지 마십시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꿰뚫어보도록 간단없는 집중을 유지하십시오.
당신은 이렇게 매진하고 있을 때와 힘이 넘쳐 이것저것을 생각하며 정신없이 쏘다니는 때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아시겠지요. 그러니 고통을 많이 겪는다고 해서 결코 해로운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사물에 대해 꼬리표를 달고 의미를 부여하는 그 짓거리를 하는 우리들의 우둔함, 그것이야말로 해로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들이 병들거나 죽어 가면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무상하다는 사실은 외면하려 듭니다. 때로는 잠시 무상함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내 다른 일들에 휘말리면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맙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매순간 자신 속에서 무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는 동안에는 폭넓은 안목을 상실하기 일쑤입니다. 아직도 이것저것을 행하고, 이것저것을 생각하고, 이것저것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모든 시야를 막아버리고 맙니다. 수행 역시 자칫 잘못하면 그런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한두 달 시간을 쪼개내어, 어디 특별한 장소로 가서 명상에 잠긴다는 식의 수행 말이지요. 물론 수행의 핵심은 그런 것에 있지 않지요. 지금 당신이 여기서, 잠든 때를 제하고 이렇게 밤낮없이 병상의 고통과 싸우면서 행하고 있는 공부에 비하면 그런 수행은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고통이 심하면 심할수록 명상수행에 더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심한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상이 무엇인지, 짓눌림과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또 우리들 힘으로는 아무것도 어떻게 해볼 수 없다는 사실도 확연히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상을 지금 바로 여기서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통찰력을 계속 키워나감으로써 고통의 참모습, 그것을 법으로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고통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잘못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으로부터 풀려나는 길입니다.
이런 수행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아시겠지요. 죽는 그 순간이나 죽음에 임박한 때까지 미룰 일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그저 마냥 계속하고 있어야 할, 통찰하고 있어야만 할 그런 일입니다. 병이 호전되면 호전되는 대로, 악화되면 악화되는 대로 그저 들여다만 보십시오. 이와 같이 통찰력을 키워나가면 마음은 무지와 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애나 번뇌 같은 것들이 이전처럼 마음을 들볶지는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통찰하는 데에 당신 모두를 바치십시오. 마음챙김을 놓치지 말고 쉼없이 정진하십시오. 모처럼 이렇게 법을 닦을 기회를 맞지 않았습니까. 금생이 당신의 마지막 태어남이 되도록 하십시오. 다시는 몸받아 태어나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다시 태어나면 지금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고 똑같은 시들픈 일들이 여전히 거듭될 것입니다. 일단 태어났다 하면 업장에 따라 희로애락을 무수히 겪으면서 늙어가고 병들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의 윤회입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것은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욕망도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떤 욕망이든 그 욕망이 마주쳐야 하는 것은 무상 · 고 · 무아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단지 번뇌와 갈애의 또 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이런 것들은 고개를 드는 순간 바로 해체시켜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 번뇌나 갈애가 욕망을 선동하는 초기단계에 바로 해체시켜 버리라는 것입니다. 욕망이라지만 기실은 세 가지 갈애 즉 애욕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 모두가 ‘재생의 씨앗'들이며, 마음속에 싹을 틔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싹트는 곳에 정확히 집중하여 수관을 들이대십시오. 비록 육처라는 감각적 접촉의 장은 갈애가 생을 일으키는 곳이긴 하지만 당신은 마음에, 즉 식(識) 그 자체에 앎을 정확히 들이댈 수 있고 그래서 ‘앎을 놓아 보내는 앎’을 그 자리에 대치시킬 수 있으니만큼 재생의 방지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공부가 완전히 숙달되어 자유자재하게 될 때까지 계속 정진하십시오.
이처럼 알아차리는 앎[正知]을 똑바로 마음에 세우는 것, 이렇게 알음알이[識]를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유익한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국집할 것도 없어지고 지식이나 견해에 매달리지도 않게 됩니다. 잘못된 지식은 물론 올바른 지식도 놓아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끄달림 없이 앎을 놓아버리는 앎’이라고 합니다. 이런 식의 앎은 무엇이 일어나든 마음이 그것에 들러붙지 않게 해 줍니다. 무엇을 알게 되든 바로 그 즉시 그것을 놓아버리는 겁니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아는 순간 이미 그것을 놓아버린 겁니다. 마음은 그저 빈 채로 있을 뿐입니다. 정신적 형성[行]과 사고(思考)로부터,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온갖 망상으로부터 비어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런 것들을 재빨리 간파하고 놓아버립니다. 알아차리고 그리고 놓는 것이지요. 그 무엇도 붙드는 일없이 말입니다. 그것들이 모두 떠나버린 상태가 바로 ‘빔’입니다.
당신은 이미 사물을 관하고 그것을 놓아버리는 수행을 쌓아감으로써, 고통받는 것이 당신이고 죽어 가는 것도 당신이라는 그런 생각조차 놓아버리는 수행에 한걸음 한걸음 닦아감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를 벌써 보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나 죽어감은 전적으로 오온이 벌이는 사건일 뿐입니다. 이것이 ‘나’의 일도 아니고 그 사건에는 ‘나’라는 것이 있지도 않다는 이 지혜가 분명하고 확실하면, 거기에는 빈 마음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꼬리표도 붙을 수 없는 빈 마음 말입니다. 이 빈 마음이 바로, 무엇을 놓고 이것이다 저것이다 생각 짓게 했던 그 싹들과는 무관한 마음의 본성입니다. 그 싹들은 이제 뿌리가 뽑힌 것입니다. 우리가 그 싹들에 대하여 수관하였기에 그러한 싹들은 이제 죽은 것입니다. 드디어 우리는 놓아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 앞에 알아차림이라는 보초를 세워서 어떠한 알음알이가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놓아 보내 버림으로써 마침내 마음이 온전히 비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분명한 본연의 ‘빔’에…….
의식[識]이라는 것도 속내를 알고 보면, 일어났다가는 사라지는 성질의 것입니다. 의식에는 본체가 없습니다. 의식[識]을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요소로 파악할 때 식계(識界, viññnāṇa-dhātu)라 부르는데, 거기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식에는 아무런 본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혹은 정신적 현상과 연계되지 않았을 때에 식계는 저절로 혼자 알아차릴 따름입니다. 순연한 알아차림이라고나 할까요. 이것을 우리는 순연한 마음, 혹은 순수 본연의 고유한 식(識)이라 부르는 것이며, 그 식은 자신마저도 놓아 보내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알아차리시오. 그리고 그 앎마저도 놓아버리시오’라고 한다면 그 뜻은 사물을 감지하는 식을 알고 그러고는 그 식을 놓아버리라는 얘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식이 모여 쌓여서 식온(識蘊, viññ
-nāṇa-khandha)이 되면 미상불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식은 ‘나’라는 의식에 매달려 떨어지려 하지 않는데, 그 안에는 사물을 자꾸만 쌓아가려 드는 배(胚)세포들이 숨어있습니다. 식 그 자체는 원래 육체적 고통을 혹은 육체적 정신적 사건들을 모두 놓아 보내버릴 수 있는 것인데도 ‘나’ 의식은 계속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지요. 앎을 놓을 줄 알라는 말도 바로 이런 식(識)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런 식을, 꼬리표가 붙을 수 없도록 철저히 놓아버리라는 겁니다. 이때가 식이 비어있는 때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이치를 이해할 수 있다면, 또는 이런 각도에서 정신을 똑바로 차릴 수만 있다면 거기에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것입니다. 아픔, 괴로움, 짓눌림 등 당신의 마음을 빼앗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무의미해지고 말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또는 그 밖의 어떤 분별도 사라질 것입니다. 주와 객, 선과 악 등 일체의 이원성(二元性)은 더이상 효능을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런 방식으로 알아차린다면, 즉 알음알이 놀음을 놓아버리는 앎이랄까 순연한 의식이랄까, 하여튼 그런 것으로 알아차릴 수 있게 되면 어떤 형태의 마음지음도 미연에 방지될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로 대립시키는 이분법, 그것들은 원래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들이 생겨납니다. 그 뿐입니다. 그들이 사라집니다. 그 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마음이 좋고 나쁨을 끊임없이 왕래하며 나선형을 그려나가는 것,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랄까 의식이랄까가 끝없이 윤회하는 모형을 짓게 되는 것, 그것도 바로 이분법의 장난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음알이를 놓아버릴 줄 알게 된 이상 이런 이분법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좋다 나쁘다, 즐겁다 괴롭다, 진짜다 가짜다 등등의 꼬리표를 더이상 붙들고 있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놓아 보내기만 계속할 뿐입니다.
이처럼 알음알이 놀음을 놓아버리는 앎에는 ‘내가 안다’ ‘내가 본다’ 따위의 꼬리표가 붙어있질 않습니다. 이런 앎은 꽤나 깊숙이 숨어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빈틈없이 지켜보아야 하지요. 이와 같은 빈틈없는 지켜봄, 그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요. 당신의 지혜는 그처럼 매우 숙달된 빈틈없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러니 당신의 지혜가 빈틈없고 숙달되어 있는지 확인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적 차원에서든 외적 차원에서든 사물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당신의 지혜는 그다지 분명한 것이 못되고 말 위험이 있습니다. 겨우 초보단계의 빔[空]에 눌러앉아 꼬리표나 달면서 끄달리고 있다 보면 오온만 잔뜩 쌓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초보단계의 빔은, 순수하고 단순한 의식 단계에서 바로 앎을 놓아 보내는 그 앎의 빔, 즉 진정한 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빔에서의 알아차림이 지속되고 있는지 늘 확인하십시오. 한순간이라도 놓쳤으면 바로 되찾도록 하십시오. 꼬리표나 의미에 끄달리지만 않으면 좋다 나쁘다 하는 생각이 곧바로 멈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런 생각들은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을 빈 것으로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사물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고, 사물을 틀 지우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빔입니다. 마음이 비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비어있는 마음을 제대로 한번 알아차리면 그때부터 당신은 어떤 것에도 더이상 끄달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집중해서 들어가지 않으면 빔을 그저 어설프게나 알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런 저런 망상에 끌려 비우는 공부를 망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비우는 공부는 혼란 속에 있게 됩니다. 당신이 더 깊은 차원으로 수관하여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혼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저 빔의 주변을 겉돌고 있을 뿐입니다. 더 깊은 차원의 빔으로 들어가려면 바로 당신 앞에 지금 일어났다 사라지고 있는 그 현상에서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철저히 밝혀낼 때까지 정신을 집중하여 지속적으로 관해야 합니다. 마음이 이 단계에 이르면 의미나 꼬리표 따위에 끄달리기는커녕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게 됩니다.
이런 차원의 빔을 바로 보게 되면 우리의 존재라는 신체적 정신적 현상들의 쌓임[五蘊]에는 더이상 문제될 일도, 꼬리표를 달 것도 없게 됩니다. 그것들이 제각기 뿔뿔이 흩어질 때가 되었다 해서 새삼 흥분할 것도 심란해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본성대로 되어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붙잡고 늘어지니까 아픔을 겪는 것뿐이지요.
법은 바로 여기 우리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본다 해도 잘못 보기 때문에 그것에 끄달리면서 고통에 휘둘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챙김[正念]과 알아차리는 통찰[正知]의 눈으로 사물을 관하게 되면 우리를 괴롭힐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통이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설사 그것을 두려워한들 얻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신체적 정신적 현상은 제 나름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제 나름대로 무상한 채, 제 나름대로 긴장한 채, 제 나름대로 우리의 제어범위 밖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우리는 그것들을 향해 자꾸만 손을 뻗쳐 움켜잡으려 들며, 그것들의 고통과 긴장을 우리의 고통, 우리의 긴장이라고 우기려 드는 것입니까. 현상의 움켜쥠이 우리를 되풀이해서 괴롭히는 것임을 매번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바로 본다면,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놓아버리는 일뿐이며 한 가지 더 있다면 고통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가는 양을 지켜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말한 대로, 똑바로 알기 위해서는 마음을 계속 관하도록 하십시오. 거기에다 '마음'이라거나 그 무엇이라고 이름 짓는 짓은 하지 마십시오.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연의 순연한 상태대로 놓아두십시오.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 무엇에도 의미부여나 꼬리표 달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고통은 끝이 날 것입니다. 사물이 완전히 해체된다는 것은, 더이상 그 무엇을 일으킬 수 있는 어떤 싹도 붙어있지 않은, 바로 식계(識界)라는 원점에서부터 해체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더이상 어떤 류의 재생도 죽음도 있을 수 없는, 모든 것의 완전한 끝을 의미합니다.
수행은 당신 스스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사물을 올바르고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만큼 마음챙김과 통찰력이 발전한다면 그것은 날이 잘 선 도구를 수중에 지닌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도구인 마음챙김과 통찰력을 갖고 당신 마음을 예리하게 닦는다면, 번뇌도 갈애도 집착도 계속 뿌리뽑혀나가 결국엔 깨끗이 청소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해온 공부만큼 벌써 그런 것들이 사라져버린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마음은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 어느 것에도 연루될 필요가 없습니다.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십시오. 그러고는 마음이 그 자체를 놓아버릴 때까지 계속 놓아버리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어찌 법의 위대한 가치를 보지 못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집착을 비우고 일체의 ‘나’ 의식도 비워서 마음이 분명하게 당신 앞에 드러나게 되기를, 그래서 마음이 곧 법임을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마음이 마음이 아니라 바로 법이 되도록, 그래서 매순간 순간마다 그 본연의 모습이 당신 앞에 소소영영(昭昭瑩瑩)하게 드러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둘
마음이 일단 기본 수준의 빔[空]에 도달한 다음에는 법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대단히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이는 마치 활력 강장제와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아플 때는 고통이 우리를 넘보며 마음을 어지럽히려 들지만 법문에 귀 기울이고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고통은 마음을 끌어들이지 못하고 단순한 육체적 사안으로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법문에 귀를 기울이면서 다음의 사실을 관해 보십시오. ‘마음이 법문에 귀를 기울이다보니 고통 그까짓 것이야 어찌되건 놓아버렸구나, 그랬더니 마음이 비게 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진리를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마음은 집착을 놓아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제껏 한 번도 그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했거나 이에 대해 숙달된 방법으로 성찰해 본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일단 진리를 보게만 된다면 마음은 언제라도 환히 밝아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분명한 앎은 마음을 즉각 환하게 밝혀줍니다. 그러니 계속 주의 깊게 지켜보십시오. 아직 지혜가 무르익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최소한 기본 수준에서라도 중정함[中正性]과 빔[空性]을 균형있게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도록 하십시오. 그러노라면 육체의 고통도 문젯거리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거기에 집착하여 매이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고통에 대한 알아차림을 육신의 단순한 감각 차원, 바로 거기에 묶어두십시오. 고통이 육신의 것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조차 고통에 휘말려들게 하지는 마십시오. 마음까지 고통에 휘말려든다면 번뇌가 켜켜로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마음을 단속하고 번뇌를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으로 눈을 돌려 지각의 가장 깊숙한, 가장 내밀한 부분을 찾아 그곳에 머무는 것입니다. 당신은 바깥의 고통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고통을 그냥 참으려고만 들면 너무도 참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마음 그쪽을 찾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그 밖의 모든 것은 제쳐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럼 당신의 고통이 지켜볼 수 있는 정도의 것인지부터 살펴봅시다. 만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있거든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십시오. 고통이 변하고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은 평상의 중정 상태에 머물면서 그 나름의 내적 ‘빔’에 따라 고요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너무 심하면 눈을 돌려 안쪽으로 향하십시오. 왜냐하면 고통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갈애가 등장하여 고통을 밀어내고 즐거움을 얻고자 발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계속 번뇌를 쌓고 쌓아 마음을 끔찍한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부터 시작해봅시다. 갑자기 심한 고통이 닥치면 즉각 방향을 돌려 모든 주의를 마음에다 집중하십시오. 육신에 대해서는 아무런 상관도 하지 마십시오. 육신에서 벌어지는 고통에도 아무 상관 마십시오. 그 고통을 보지도 말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마십시오. 당신의 지각 가장 내밀한 부분과 함께 있도록 계속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육체와 더불어 고통에 빠져들지 않은, 그 순수상태의 마음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나아가십시오. 그런 집중상태를 계속 분명하게 유지하십시오.
이 상태가 계속 분명하게 유지되기만 하면 육신의 고통이 제아무리 심할지라도 그것은 그저 정신적 육체적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초연합니다. 마음은 이 모든 것을 옆으로 제쳐놓습니다. 마음은 이미 놓아버린 것입니다.
이 일에 통달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용한 방편이 될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중요한 일은 순전히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제대로 알면 우리는 이것저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바깥으로 내닫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느 것도 붙들고 늘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엔가에 매달리게 되면 곧 쓸데없는 고통이 뒤따르니까요.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않을 때,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그곳에 마음의 평안은 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있는 그 곳, 바로 그 곳이 마음에서 모든 고통과 짓눌림이 해체되는 그 지점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마음은 사물을 기꺼이 놓으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계속 꼭 붙들고 있을 것입니다. 바깥 사물에 너무나 깊이 맛들여져 있으니까요. 거기에 고통과 억압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막무가냅니다. 마음은 무척이나 그런 것들을 좋아하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망상들이, 마음을 온통 뒤덮고 있는 그릇된 지식이나 견해들이 마음 그 본연의 고요하고 비어있는 모습을 볼 수 없게끔 가로막고 있는지를 잘 관찰 숙고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견해들이 어떻게 복잡한 집착을 야기시키고, 그래서 마침내는 마음을 꼼짝없이 좁디좁은 편견에 가두어버리고마는지를 관하는 데 마음을 집중시켜 보십시오. 느낌[受]과 지각[想], 사고형성[行]이라는 정신적 사건들이 조건이 되어 마음을, 즉 의식의 고유속성을 뒤흔들어서 처참한 몰골이 되도록 유린해버리는지 보아야 합니다.
‘앎을 놓아버리는 앎’을 찾아내는 것이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앎이란, 정신적 사건들이 개입되지 않은 순연한 의식, 고유속성 그대로의 의식인 바, 이 단계는 아직 정신적 사건들과 연계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적 사건들에 의해 조건지어지지도 않았고, 또 정신적 사건들을 향해 조건짓고 있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미상불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식을 조건짓는 사고형성이라……. 생각해 보십시오. 십이연기에서 행이 식을 조건짓지요. 안 그래요? 그런데 행은 다시 무명에서 비롯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알지 못한다는 것, 또는 잘못 안다는 것, 이 때문에 사고형성이란 행(行)이 있게 된 것이고 그러고는 이 사고형성이 다시 온갖 것을 조건지울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니 이 무명에, 이 알지 못함에 대해 특히 초점을 모아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알지 못함[無明]의 특성을 알게 되면, 그와 동시에 이리저리 조건지우며 배회하고 있는 사고형성의 특성과 그 해체방법마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은 미묘하고도 심원한 것인만큼 능숙한 관찰력이 요구됩니다.
비록 미묘하고 어렵긴 하지만, 마음챙김과 통찰력을 이 정도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그럴만한 소질을 충분히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어요? 그 어려운 일을 흥미있게 해낼 수 있다는 얘기가 되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통을 끝내고 벗어나겠습니까.
아니면 이렇게 접근해 볼 수도 있습니다. 정신을 오로지 마음상태에 집중하여 그것이 계속 비어있도록 하십시오. 그 빈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져 자리를 차지하려 듭니다. 가령 어떤 형상이 눈과 접촉하거나 어떤 소리가 귀에 부딪칩니다. 그때 당신은 거기에 일어나는 순수한 감각,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감각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 특성들을 알아차리도록 해보십시오. 그러면 맨 감각은 저 혼자 그냥 있다가 미처 ‘좋다’ ‘나쁘다’ 하고 어떤 의미를 띠기 전에 해체되어버립니다. 맨감각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첫머리에 사라져 버린다면 고통도 없습니다.
어떤 대상이 눈과 접촉하는 그 순간을 잘 꿰뚫어 보십시오. 당신이 관심을 두지 않는 대상은 좋거나 싫거나 하는 느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색·성·향·미·촉에 관심을 갖게 되거나 어떤 의미가 있다고 느끼게 되면 이미 그 순간에 집착이 생겨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잠시 관을 멈추고 집착 쪽을 들여다보면, 이 집착이 얼마나 포착하기 어려운 것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단순히 의미를 부여했을 뿐인데도 벌써 집착이 들어서 있으니까요. 건성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집착이라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미묘하긴 해도 그것은 엄연한 집착입니다. 이렇듯 의미가 있는 한 집착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훌륭한 통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보이거나 들릴 때에 우리는 그것을 예사롭게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기막히게 교묘한 요술 같은 짓들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복잡한 과정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식의 알음알이 놀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 민감한 작용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걸 제대로 알아내려면 통찰력이 매우 뛰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알음알이 놀음의 단계에서 이것을 알아채버려야 되지, 만일 그냥 넘겼다간, 집착이 되어 서로 엉겨붙어버리면 일이 어려워집니다. 집착으로 변한 이들 요소들은 마음에 갖은 고자질을 다해서 온갖 사단들이 벌어지도록 조건지우고 조제하여 마음을, 아니 식(識)을 극도의 혼란 속으로 밀어 넣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내면세계를 투명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주 훌륭한 통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면세계는 변화무쌍하고 미묘하고 포착하기 어려우니까요. 마음이 텅 비어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을 때, 이때야말로 마음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단속하여, 감각이 접촉을 받아들이는 모양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해야 할 때입니다. 자, 보십시오. 순수하고 단순한 촉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이 해체되어 사라집니다.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중도의 빈 마음이. 일단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면 번뇌나 갈애, 집착의 힘에 의해 조건지어 지지 않은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빈 마음을 기준 삼아 내면세계를 다스릴 수 있게만 되면 그때 우리가 얻는 이익을 어떻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당신은 모든 감각적 접촉이 비어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는 곧 이 세상을 빈 것으로 봐야 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니 이야말로 가장 큰 이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도 지금껏 우리가 공부해온 것과 같이, 의식이 단순히 촉을 받아들이기만 할 뿐 그 외의 행동을 안 할 때, 그때 의식의 상태가 어떤지 잘 알아차리면서, 감각이 그저 명멸하고 있는 양을 관찰해보라는 뜻이 아니겠어요? 이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면 수행의 그 다음 단계는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첫걸음부터 바로 중도를 탄탄히 다졌으니까요. 촉을 받아들이는 행위가 이제부터는 조금도 복잡하질 않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더이상 사물을 가로채려 들지 않을 것이며, 더이상 좋다 싫다 하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마음은 언제나 고요한 가운데, 부단히 그 내면을 빈틈없이 살펴 알아차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공부가 이 단계에만 이르더라도 당신은 벌써 사물을 복잡해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데서 오는 이익을, 다시 말해 마음이나 촉 등이 번뇌와 갈애, 집착의 힘을 빌려서 사물을 만들어내게끔 내버려두지 않는 데서 오는 이익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많은 문제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제 더 나아가 감각적 접촉을 통해서 알고 있는 모든 현상들의 본질을 알아내기 위해서 집중력을 더욱 더 심화시키게 되면 거기에는 단순히 맨감각만 있을 뿐이며 그밖에 달리 집착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으로 통찰하게 되면 빔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은 사물로 가득 차 있어도 말입니다. 눈은 많은 형상을 보고 귀는 많은 소리를 듣지만 마음은 이제 이런 것들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사물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띠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모든 것은 밖으로 나가 사물에다 의미를 부여해 버리는 이 마음에서 발단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도 집착을 일으키게 되고 이는 정신적 억압을 빚게 되며, 그 억압을 다시 스스로 되받아 고통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관찰할 때는 끝을 볼 때까지 줄곧 지켜보아야 합니다. 밖을 내다보려거든 죄다 통찰해낼 때까지 줄곧 지켜보십시오. 안을 들여다보려거든 속속들이 다 볼 때까지 줄곧 지켜보십시오. 무상 · 고 · 무아를 통찰할 수 있을 때까지 줄곧 말입니다. 사물을 볼 때는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말고, 집착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본연의 사물을, 그 성품에 수순(隨順)하여 보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어떤 문제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그저 맑고 밝게 비어있을 것이며 당신이 그것에 대해 따로이 해줄 일이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마음에는 무지라든가 또 갈애라는 병균들이 있어서 사물을 쉽사리 생겨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 당신은 사물을 조심스럽게 감시하는 일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래서 촉이 생기는 순간, 다시 말해 고통스런 느낌이 있을 때, 곧바로 갈애가 생겨나는 것을 볼 수 있게끔 되십시오. 만약 그 느낌에다 ‘나의 아픔’이란 뜻의 꼬리표를 붙여주지 않으면 갈애는 그다지 기승을 부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의미를 부여해주기만 하면 이내 그 고통을 밀어내버리려는 욕망이, 또는 고통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즐거움을 대신 채우고 싶은 욕망 즉 갈애의 표출이 생길 것입니다.
모두가 이 모양입니다. 언제 한번이라도 욕망 끝에 믿을 수 있는 참된 그 무언가를 얻어 본 적이 있습니까. 욕망에서 얻는 쾌락치고 지속되는 것이 있습디까. 한결같이 우리를 농락하고는 금방 다른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고통도 마찬가지로 우리를 속이고는 다른 것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점점 복잡하게 얽히고설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지요. 온갖 것들에 의해 간섭받고 조건지어지다보니 마음은 혼란스러워지고, 현혹되고, 어두워지고, 엉켜들게 되어 버리지요.
그렇게 해서 갖가지 것이 여기 이 마음속에 엉켜들고 있습니다. 알음알이 놀음을 놓아버리는 알아차림의 원리도 중요한 도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무슨 일이 닥치더라도 알음알이만 놓아버릴 줄 알면 다 해결됩니다. 만사형통이지요. 만약 그 알아차림을 놓치면 바로 그 알아차림으로 되돌아가기만 하십시오. 이런 알아차림이 어디까지 가는지, 그래서 당신의 마음을 치우침 없이 빈 채 유지시켜 주는지 스스로 확인해 보십시오.
이런 확인력은 조금씩 조금씩 늘어날 것입니다. 마음이 이것저것들로 뒤섞여 혼탁하지 않고 기본적 수준의 정상 상태, 다시 말해 비었다고 할까 고요하다고 할까, 그런 상태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세심하게 지켜보십시오. 고요해 졌다 해서 무관심하며 멍한 상태가 되도록 만들지 마십시오. 만일 그랬다간 고요한 상태는 평형을 유지 못하고 무너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 마음이 멍하니 넋을 잃고 있으면 육처(六處) 중 어느 감관에서 촉이 생겨나기만 하면 곧바로 느낌이 일어나고, 그래서 갈애·집착이 생겨나 사건이나 사물을 빚어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도 방심하지 말고 순간순간 마음이 움직이는 양을 지켜보는 데다 정신을 모으십시오. 이러한 마음챙김을 깜빡 놓칠 때마다 그 즉시 알아차리는 공부를 다시 챙기도록 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누구 없이 깜빡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속에 아직도 찌꺼기 중에서도 가장 문제되는 찌꺼기인 무명이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무명이 건재하고 있는 한 우리는 관찰적 자세를, 체계적 분석을, 초점을 맞춘 알아차림 공부를 지속해서 그것들이 더욱 더 분명해지도록 계속 노력해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정념정지 공부에 당신의 마음이 푹 익도록 만드십시오. 중단함이 없이.
그래서 사물[緣起現象]을 아주 능란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마음챙김과 통찰력이 익으면 당신은 번뇌가 나타나는 순간 이를 해체시켜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좋다 싫다의 느낌이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 느낌이 쌓여 다른 무엇으로 발전하기 전에 즉각 그것을 처리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이 훨씬 수월해 집니다. 만일 당신이 그런 느낌을 애초에 다잡지 못하고 마음에 이런저런 조건을 붙여 짜증내거나 우울해 하거나 흥분하는 등 언행으로 드러날 지경까지 방치해 둔다면 당신은 죽기도 전에, 살아생전에, 지옥 같은 곤경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하자면 우리는 바로 이 마음에 대해서 빈틈없이 용의주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온갖 번뇌가 끊임없이 우리를 부추기며 호감을 사려고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를 능숙하게 감지 못하고, 마음을 주의 깊은 감시 하에 둘 줄 모른다면 우리는 번뇌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번뇌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잘 감시하고 있다면 번뇌는 우리를 두려워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챙김과 통찰력을, 우리의 알아차림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마음이 비어있을 때 관하십시오. 그 무엇에도 집착하는 일없이, 한 점도 허술함이 없이 두루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번뇌는 애당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숨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챙김을 놓게 되면 번뇌는 당장 튀어나옵니다. 그래요. 당장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튀어나오자마자 바로 그 정체를 확인해버리면 번뇌는 그 자리에서 해체되어 버립니다. 마음챙김은 지니고 있을만한 참으로 유용한 능력입니다. 그런데도 이 유용한 능력을 쓰지 않고 번뇌가 사건을 벌이도록 놓아둔다면 그땐 그것들을 해체하기가 졸연치 않을 것입니다. 그땐 끈기있게 싸워나가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선은 참고 볼 일입니다. 그대로 그것을 견뎌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변하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잘 관찰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물의 속임수를 꿰뚫어볼 수 있도록 그저 지켜보는 것입니다. 사물이 생겨서 지속되다가 제풀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뿐입니다. 속임수를 분명히 알면서 지켜보는 도중에 번뇌가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는 영원히 번뇌를 끊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완전히 텅 비어서 비의존적이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사물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꿰뚫어보는 방법, 자기만의 작은 순간적인 깨어남이라 부를 수 있는 그 방법을 익히게 된다면 당신의 알아차림은 더욱 더 밝아지고 힘있게 될 것이며 날이 갈수록 폭넓게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만의 작은 순간적인 깨어남의 방법을 익히도록 공부를 지어 나가십시오. 그러다가 공부가 적절하게 향상되면 번뇌와 오염물이 생겨나는 순간 이내 끊어져버려 다시 발붙이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열반의 경지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계속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라는 무기를 갈고 닦으십시오. 무디어진 무기로는 속시원히 잘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대로라도 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계속 잘라 들어가십시오.
요컨대 당신에게 부탁드리는 것은 이것입니다. 마음속을 골고루 점검하고 이해하기를 계속해 나가십시오. 그래서 마음속의 모든 것이 다 소소영영하게 분명해질 때까지, 그리고 오온에는 ‘나’ ‘내 것’이 없다는 깨달음으로 그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십시오. 계속 놓아버리기만 하십시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곳 병원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보살펴주고 있으니 당신은 병치료를 위해 해야 할 일들은 모두 하십시오. 그러나 육신의 치료와는 별도로 오로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특별한 공부, 그저 놓아 보낼 뿐인 이 지혜의 공부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모든 문제는 영원히 종식될 것입니다. 확인된 바로 그 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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