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는 성스러운 진리
[苦聖諦 Dukkha Ariya Sacca]
부처님께서는 이 첫 번째 진리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정형화시키셨으며, 이 정형구는 불교 경전 속에 시종 반복되고 있다.
“비구들이여, ‘고(苦)’라는 성스러운 진리란 무엇인가? 태어남이 고다. 노쇠가 고다. 죽음이 고다.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이 고다. 즐거운 것과 갈라짐이 고요, 싫은 것과 같이함이 또한 고다. 요컨대 집착과 연관된, 존재의 다섯 쌓임[五取蘊]이 바로 고다.”
이 구절을 두고 흔히들 불교의 안목이 담고 있는 염세주의적인 기본태도, 심지어 절망적 태도의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한 예로 쇼펜하우어가 그의 철학에서 동양사상을 원용할 때 그렇게 드러난다. 거기에는 서양의 활기차고 생을 긍정하는 태도와 반대되는 것으로 불교를 보려는 경향이 보인다.
만약 이 첫 번째 진리[苦聖諦]가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라면 위와 같은 부정적 해석도 근거있는 것이 될 수 있다. 또 비관주의나 낙관주의, 생의 부정 아니면 긍정의 사고 범주 중 어느 하나에 꼭 끼워 맞춰져야 한다면 이 진리 하나만을 놓고 볼 때 불교가 어느 쪽에 들어가게 될지는 자명하다. 그러나 불교의 견해에서는 양극단적 사상 중 어느 한 쪽을 선호한다는 일부터가 타당치 못하다. 인생을 객관적이고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실재적으로 보는 눈이 필요할 따름이다.
첫 번째 진리는 인간의 처지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체 유정물의 삶 전반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 끝에 도달된 결론이다. 이 첫 번째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일상적 시각을 시정하고 재조정한다는 뜻도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여태껏 만성적 병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으레 무시해왔던 만인공유의 병의 증상을 새삼 인식하게 되는 셈이다. 불교가 고를 강조하는 것은 치료를 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사전 준비작업인 것이다. 말하자면 의사가 환자에게 당신은 지금 병에 걸려있다고 말해주는 단계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명언화되다시피 한 이 첫 번째 진리가 기쁨이나 웃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성제는, 즐거운 것에 안주하고 마뜩찮은 것은 무시하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인간의 천성, 매우 의기소침하게 만드는 경험에도 불구하고 삶의 의지를 유지시키는 심리적 기제가 되기도 하는 저 인간의 천성이, 안이한 도피적 성향으로 치닫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의 어두운 쪽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첫 번째 진리는 우리가 소위 행복이라 부르는 것을 개인적으로 즐기고 있는 그 순간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유정들이 비참한 고통에 잠겨 있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고 있다. 이런 일깨움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실상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쉽다. 또 행복을 운위(云爲)하려면 한 가지 사실, 즉 많은 사람들이 고가 삶을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면서도 막상 자신의 힘으로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덧없는 쾌락 속에서 찾고 있는 형편이다.
부처님은 당신께서 즐거움과 고통 모두를 그 극치에 이르도록 경험해서 알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인생이 기복이 없는 비참함뿐이라면 누구도 생을 이어갈 욕구를 느끼지 못할 것이고, 또 순전히 행복뿐이라면 종교가 제공하려 드는 치유가 아예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상적으로 행복하고 안전한 세계, 인간이 꿈꾸어 온 가상의 유토피아 중 하나가 될 그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노력을 촉구하는 자극이 전혀 없을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좀 더 부연하자면, 그 꿈의 세계는 꿈꾸는 사람이 제각기 나름대로 제 맘에 들게 그려내는 세계이기에 그 세계들 중 단 두 세계도 공통되는 모습을 갖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처럼 서로 상충하는 조건들이 산재해 있는 곳, 선과 악이, 미덕과 사특함이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 곳에서만이 인간 특유의 가장 숭고한 노력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양면성이 존재할 수 있는 그런 세계이기에 그 같은 노력 역시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유토피아의 경우, 그것이 유토피아이기에 인간은 온갖 다양한 입맛, 성향, 욕구를 다 담으려 들기 마련인데, 하나의 특정 이상사회가 ― 그것이 아무리 이상적인 사회라 해도 필연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균질화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텐데 ― 구성원 모두의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처럼 어린애 같은 생각이 또 있을까.
우리는 요즘 현대 도시문명에서 피할 수 없는 한 속성으로서 불안신경증을 거론하는 것을 많이 들을 뿐 아니라 실제가 그럴만 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양면성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원시와 문명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어서 의식상태의 교호(交互)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불안으로부터 너무 과도하게 해방되는 것도 인간성에게는 낯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기미가 소위 풍요사회에서 벌써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범죄의 증가, 특히 청소년 범죄의 증가, 인종박해 사건의 격증, 기존질서에 대한 반항 등은 다른 어떤 원인들 못지않게 풍요사회가, 여가를 쓸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여가를 주고, 모험과 자극을 구하는 기질의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안전을 베풀고, 폭력이 유일한 의사표시 수단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순종을 요구하는 것에도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상황들은 어쩌면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부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떼를 지어 불량배노릇을 하고, 고속도로를 경주로로 만들고, 자동차나 기차 앞에 담력시합 놀이를 하는 십대소년들의 모습은 위험에 부딪히고 그래서 그 위험에 맞서 자기존재를 내세우고 싶어 하는 원시적 충동의 발로인 것이다. 과보호 사회가 금하기 때문에 억제되고 있는 싸움질과 모험, 거기에 따르는 스릴을 찾는 자존심의 외침인 것이다.
거의 모든 면에서 인간은 아직도 원시적이고 호전적 동물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전쟁은 벌써 오래 전에 저절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한다. 다만 제각기 자기식대로 원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모든 사람은 평화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 평화가 일종의 전쟁이기를 원한다. 이 측면은 국제회의나 지식인들의 인도주의적 모임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세계평화 담론의 이면에 작용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인식되지도 인정되지도 않고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간은 싸움질이 가져다 줄 승리감과 고통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단조롭고 지루할 뿐인 영원한 천국의 행복이 지금 같은 인간체질에는 맞을 리가 없다. 고통이 없으면 기어코 그것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불교는 이처럼 인간성의 중요한 실상을 바로 알기 때문에 천국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인격적 요소들이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 그대로인데 영원한 행복을 무슨 수로 감당해내겠는가. 불행이 없이는 행복 역시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속세의 상황을 개선하고 복지국가를 완성하려 애쓰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계점이 있어서 이런 노력들이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내부 붕괴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전체주의로 치닫게 된다. 옛날 서구에서 사람들이 그나마 자기완성에 힘쓴 것은 하늘나라에 가겠다는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꿈을 접어버리고 이 지상에다 완전한 인간사회를 이루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후로 사태는 점점 고약해져서 벌써부터 종교재판 시대에 보던 것보다 더 많은 자유의 억압과 말살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어찌 완전한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설령 완전한 사회가 이루어진다손 쳐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서는 그곳에 맞을 리가 없다. 이러한 사정을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선동가들이 더 큰 힘을 쓴다. 목소리를 가장 크게 내는 요소들 즉 정치적 요소와 상업적 요소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개인에게 자기 구원을 모색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 그런 세상을 사는 개인이 알고 있는 자기개발이란, 정보습득 과정이 고작인데 이것이 오늘날 교육이란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불교의 고의 진리는 공식적 표현이 나타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하고 있다. 태어남―불교식 정의에 따르면 끊임없는 생성과정―이 고통스러운 일이라거나, 정신적 육체적 노쇠와 그 종말인 죽음이 피할 길 없는 재난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재난은 그 일들의 실제적 발생에 한정되지 않고 그보다 훨씬 더 확장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의 걸음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들 고(苦)에 대한 어두운 생각으로 늘 그늘져 있기 때문이다. 현실화될 가능성이 크든 적든 간에 질병, 사고, 사별, 기타의 불행들의 위협으로 그늘져 있지 않은 때가 얼마나 될까. 마음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런 일들을 놓고 아무리 태연한 척 가장해도 그것은 어설픈 눈가림일 뿐, 언제 또다시 벅찬 혼란 속에서 생각을 가눌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영고성쇠는 삶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고 이것들을 무시하려 애쓰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현실 도피자이다. 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영고성쇠의 요소들을 우리들의 세계관 속에 흡수할 채비부터 해야 할 것이다.
세계관 얘기가 나왔으니 철학 쪽부터 살펴보자. 오늘날 현실적 철학자가 비관주의로 흐르게 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의 기계론적 우주관에는 인간적 가치가 들어설 자리도 개인적 성취에 대한 희망이 들어설 자리도 없다. 그도 불교의 고성제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생에 대해 환상이 없는 솔직한 관점을 취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가 치유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더 상위의 진리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렇다고 인간과 인간의 열망에 대해 분명히 적대적이거나 기껏해야 무관심할 뿐인 이 질서 정연한 우주체계 속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상(現狀)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길도 없다. 자신의 영웅적 절망에 대한 어떤 자만심이 그를 지탱해줄는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그는 이성에 반하는 믿음을 아직도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키에르케고르처럼 믿음이 불가능한 종교를 불가능 바로 “그 때문에” 믿는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는 부러워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과학 쪽을 돌아보자. 과학자들이 그려내는 별로 위안이 되지 않는 우주의 그림을 불교 또한 받아들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불교의 법[Dhamma]에는 상위의 진리와 그 진리를 실현하는 하위의 방도, 이 두 가지가 생생하면서도 알기 쉬운 사실로 담겨 있다. 그래서 현실적 시야를 희망의 세계로 안아 올려주는 역할을 법이 하게 된다. 불교와 과학적 사유간의 대화는 이제 겨우 시작단계에 있으며, 상호 이해가 깊어질수록 수많은 새롭고 의미심장한 해석을 도출해 낼 것이다.
일반 상식인들의 경우, 전통적 신앙체계에 대한 신념 상실은 그만큼 정신적 공백을 초래했고 이 공백을 메우려 사람들은 물질적 발전에 열중하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대의명분을 찾아 끝없이 몸부림치게 되었다. 이렇게 몸부림치다 보면 올바르고 정당한 것이 어느새 부당한 것으로 꼬여 있는가 하면 그 수단들도 목적에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것으로 변해 있기 일쑤다. 이런 함정들을 알고 나면 그 사람으로서는 세상사 흘러가는 대로 순순히 따르는 수밖에 달리 길이 없게 된다. 그렇지만 인간은 가치가 전적으로 배제된 삶을 살 수는 없다. 아무데서도 찾아지지 않을 때는 억지로라도 만들어야겠다는 강박감에 지배당한다. 이런 현상은 과학에서 조차 눈에 띈다. 코넌트가 지적했듯이 가치판단은 굽이마다 항상 끼어든다. 그래서 우리가 기어코 생 그 자체에 가치판단을 적용시켜보면 생의 전반적 얼개가 도덕적 명령을 결여하고 있듯이 궁극적 목적도 결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며 한편 생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고통과 불행 역시 이렇다 할 목적도 갖고 있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인간의 경험 전반에서 저들 불쾌한 양상들이 왜 꼭 판을 치고 있는 것인지 이런 사실을 보면서 당혹감을 떨치지 못한다. 19세기 말엽을 풍미하던 낙관주의 철학은 오늘날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실용주의적 측면에서 건설적인 철학의 가능성을 기대해보고 싶지만 자연 정복에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인간성이 점점 더 속절없이 표류하게 되는 형편에서는 그 가능성 역시 점점 멀어져 갈 뿐이다. 핵 정치(nuclear politics)에 사로잡히고 달을 소유권의 대상으로 만들어가는 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보라는 단어가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 자문(自問)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상책이란 것을 깨닫는다.
현대 철학과 마찬가지로 문학과 예술도 똑같이 황량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황무지』이후에 T. S. 엘리엇의 관심이 종교 쪽으로 기울었고 올더스 헉슬리의 박학하면서도 예리한 기지가 혼합적 신비주의로 방향을 바꿔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이 한번 울린 가락은 그들의 그 이후 작품이나 다른 이들의 작품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그 후 종교에서 답을 구하고자 하는 분위기도 사라져가면서 일군의 작가들이 정치적 몸짓을 통해 그 대안을 찾아보려 애써서 한때 활력을 갖기도 했으나 본격적 깊이나 영속적 가치를 지닌 것은 별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말았다. 대체로 작금의 문학은 현재로서는 인생의 괴로움을 그려 보이기만 할 뿐 그것을 줄여주거나 완화시키는 구실은 못하고 있다. 예전에, 기쁨이 슬픔으로 돌변하는 식의 시인들의 상투적 탄식이나 16세기 엘리자베스 시대 극작가들이 보였던 영혼의 어두운 면에 대한 관심들이 그래도 참을 만 했던 것은 거기에는 최종적 절망의 조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햄릿은 죽음을, 한번 건너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으로 그리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의 독백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방금 본 아버지의 망령이 실은 거기서 돌아온 것이 아니었던가. 고전 비극에는 이처럼 슬픔과 엄청난 공포도 있었지만 오늘날 허무주의가 안겨주는 것 같은, 심장까지 떨리는 오싹함이나 삶의 철저한 무의미에서 오는 20세기적 전율은 없었다. 괴로움에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때 인간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때 겪은 고통은 오히려 최상의 문학과 예술을 위해 풍부한 기초 자료를 마련해주었고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는 진실성을 제공했다. 우리가 인간의 실존을, 전체 인류적 상황과의 유대를, 고통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과의 동일화를 확인하게 되는 것은 비극 속에서이다.
“세 가지 고가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몸에 본유하는 고[dukkha-dukkhatā 苦苦性], 집성체(集成體)들의 고[saṅkhāra-dukkhatā 行苦性], 변이(變異)의 고[vipariṇāma-dukkhatā 壞苦性]가 그들이니라.”
(『장부』33경 3권 216쪽)
이 말씀은 매우 포괄적이다. 경험적 양태의 고 뿐만 아니라 우주의 구조적 필연성으로서의 고까지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육체적 고는 가장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는 고통인데 반해, ‘집성체들(Aggregates) 의 고’는 편치-않음(dis-ease), 불안, 불안정의 상태로 숨어있는 고이다. 그런 고는 존재라는 순간적 위상(位相)들의 생멸 그 자체에 이미 본유하는 것이며 우리가 보통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내지만 언제나 줄곧 존재하고 있는 고이다. 마지막의 ‘변이의 고’는 행복의 영속적이지 못한 성질에서 오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고통이 내재해 있는 것이어서 언제든지 고통으로 바뀔 수가 있다.
고의 이 세 가지 면 가운데에서 불교세계관에 대해 특별한 이해가 필요한 것은 두 번째 것뿐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집성들은 살아있는 유정물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온(蘊 khandhā) 내지 군(群 groups)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색온(色蘊 rūpakkhandha)은 보이고 만져지는 형상체로서 물질의 집성이고, 수온(受蘊 vedanākkhandha)은 눈․귀․코․혀․촉각기관․뜻[意]의 여섯 감각기관들로부터 유도된 느낌들의 집성, 상온(想蘊 saññākkhandha)은 각기 대응되는 상대들과 접하고 있는 기관들로부터 일어나고 있는 지각들, 행온(行蘊 saṅkhārākkhandha)은 사고, 상상, 기억 그리고 의지를 포함한 정신적 속성들, 끝으로 식온(識蘊 viññaṇakkhandha)은 특정 순간의 의식의 전(全) 내용을 뜻한다.
이 온들은 모두 복합된 것이고, 조건에 매인 것이고, 영속하지 않는 것들이다. 끊임없는 변화의 상태에 있으므로, 다시 말해 생멸하고 있으므로, 그들 속에서는 견고하고 지속하는 실재(實在)다운 성질을 띤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이처럼 오온은 계속 변천하는 조건부적 존재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또한 변하지도 않는 인간존재의 핵 같은 것을 함유할 수가 없다. 의식 있는 존재라는 것은 실제로는 시공을 통해 흐르고 있는 인과의 연속체일 뿐 의식에 의해 알아차리는 자신의 존재란 것도 영구한 진행과정 중 한 단면도에 불과한 것이다. 끝내 완전한 존재의 실현에 도달하지 못하는 생성과정, 그 끝없는 변화 속에 ‘집성체들의 고’가 본유하는 것이다.
‘변화 속에서의 자기 동일성’의 문제는 동일성을 하나의 인과관계로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가령 동물인지 식물인지 구별하기조차 모호한 원생동물이 연출하는 일련의 탈바꿈에서도 고도로 복잡한 유형의 개별성을 발견할 수 있다. 생애 중 어느 한 단계에 있는 어떤 원생동물이 그전에 존재했던 것과 또는 직후에 존재할 것과 ‘동일한’ 원생동물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 원생동물이 독자적으로 생겨나지는 않는다. 각 단계의 탈바꿈은 그 앞에 일어났던 탈바꿈 과정들의 후속결과이며, 또 각 단계는 외부조건들에도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생의 기본구조에 다가 갈수록 이 원리는 더욱 분명해진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경우 아무리 분석해 보아도 이들 오온 이외의 어떠한 정신적․물질적 구성요소도 더는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자아-실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아는 여러 조건이 맞물려 빚어낸 주관적 현상이며, 영적 생명이라는 것은 일련의 정신적 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인간 존재의 구성에 참여하는 모든 것을 제법의 ‘세 표상[三法印]’ 즉 무상(Anicca)ㆍ고(Dukkha)
ㆍ무아(Anattā)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 중 무아[Anattā, 산스크리트어로는 an-ātman, 영혼이 공함]는 이 영속 불변한 존재의 정수(精髓)의 부재를 의미한다.
동시에 생명에 대한 집착의 원인도 이들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오온들이다. 이들은 정신적 물질적 양면에서 선행 조건 및 동시 발생 조건들의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들은 생의 충동을 지속시키고 끊임없이 재보충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집착온[取蘊 upādānakkhandha]이라 불린다. 이 집착온들이야말로 존재가 자발적으로 자신을 고에 단단히 붙들어 매는 쇠갈고리들인 것이다.
다른 모든 유기체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극에 반응하게끔 조건 지어져 있다. 자극 반응의 원리가 유기적 진화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형태의 고는 인간이 오히려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거나 고와 낙이 자극의 형태로 서로 겹쳐 있어 때로는 고인지 낙인지 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해서 놀랄 일은 못된다. 육체적 흥분도 과도하게 되면 즐거움에서 고통으로 바뀌어 버린다. 심미적 자극도 마찬가지로 기쁨과 슬픔의 경계를 넘나든다. 낙조의 아름다움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거나 불안하게 만드는 수도 있지만 그 누구도 그런 이유로 그 아름다움을 피하려 하지는 않는다. 자학증을 두고 비정상적이라 간주하지만 실은 완벽하게 ‘정상적’이다. 사람들은 커다란 비극을 통해 연민과 공포를 맛보러 일부러 극장에 간다. 이런 일들은 제쳐놓더라도 즐거움은 본질적으로 고통의 원천이다. 지속되고 있는 동안의 즐거움은 일종의 어수선함이자 흥분이다. 즐거움이 끝나버리면 우리는 아쉬움에 잠겨 그것이 좀 더 계속되거나 반복되기를 바라는 심정이 된다. 또 즐거움을 추구하는 과정 중에 부딪치는 위험이 고를 포함하듯, 즐기고 있는 경험에 대해 스스로 나타내는 반응에도 역시 어느 정도는 고가 포함되어 있다. 사치나 감각적 쾌락을 유달리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맛볼 뿐 아니라 그런 것을 즐기는 중에 절제를 행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무절제한 방종에 젖어버리면 그 결과는 자제에 따르는 고통보다 훨씬 더 괴롭고, 또 오래가는 고통을 안겨주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은 거친 육체적 쾌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극도로 세련된 지적, 심미적 즐거움에도 역시 사로잡힐 수가 있고, 중용을 결여한 이런 유의 힘은 정신적 탐닉의 형태를 취할 수 있으며 탐닉이 심리에 끼치는 영향은 파괴적이다. 어느 모로 봐도 즐거움은 자극제 기능의 한 부분으로서 고를 포함하고 있거나 아니면 즐거움의 결과로서 고를 초래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모든 느낌은 궁극적 의미에서 따져볼 때 자극이란 면에서 고이다. 그것이 바람직한가의 여부는 순전히 주관적인 분별에 달린 별개의 문제이다.
불교에서는 고를 다시 네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드러나지 않은 고, 드러난 고, 간접적인 고, 직접적인 고가 그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고는 성냄이나 열정, 갈망에 수반하는 쓰라림처럼 밖으로 표출되지 않는 심리적 고통이나 그 고통의 원인을 말한다. 또한 두통처럼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육체적 고통의 형태가 될 수도 있다. 드러난 고는 고문을 당할 때의 고통처럼 고통과 그 원인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간접적인 고는 감각적 즐거움처럼 그 뒤에 겪게 될 고통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 아픔이며, 직접적 고는 당장 겪고 있는 아픔이다.
인간이 알아차리거나 말거나 관계없이 고는 우주론적 면에서 엄연히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고는 존재의 세 가지 표지, 즉 모든 현상들[法]의 세 가지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주안의 모든 것은 생멸하기 마련이며 무상․고․무아의 세 특성은 물질과 비물질을 막론하고 모든 합성체[諸行]에서 볼 수 있다.
물질은 사대(四大:地ㆍ水ㆍ火ㆍ風)로 만들어지며, 이들은 물질이 형태를 취하는 네 가지 범주를 각기 대표하는 것들이다. 편의상 이들을 견고성[地], 응집성[水], 온도[火], 움직임[風]의 ‘요소들’이라 정의한다. 때로는 공(空)을 제5요소로 추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분류는 물질의 원자단위들의 기능과 그 다양한 변환을 설명하려는 철학적 목적에 매우 적절하며, 실제로 그 적절성이 증명되고 있다. 이들 원자들과 그의 구성 요소들은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하는 상태에 있고, 그러한 과정 중에 에너지는 지각 가능한 물리적 물질이라는 단단한 외관을 띠기도 하는 것이다. 이 물질이란 것이 한낱 ‘겉보기’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은 러셀의 다음 말에서 지적되고 있듯이 현대 물리학에서 충분히 확인된 사실이다.
“무언가 본체(本體)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을 찾아 물리학자들은 일반 물질을 분자로, 분자를 원자로, 원자를 전자와 양성자로 분석했다. 그러나 이제 전자와 양성자마저도 하이젠베르크에 의해서는 방사선계로 그리고 슈뢰딩거에 의해서는 파동계로 용해되고 있다. 이 두 이론은 수학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내용이 된다. 그리고 이런 결론들은 멋대로 떠드는 형이상학적 사변이 아니고 대다수 전문가들에게 받아들여진 냉철한 수학적 계산이다.”
물질이 방사선이든, 파동이든 간에 에너지로 결말이 나고 있는 이상 모든 현상[法]은 정적(靜的)인 실체로 볼 것이 아니라 시공 연속체 속에서의 사건들의 이어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들을, 모든 형태의 에너지의 한결같은 특성 다시 말해 끊임없는 이동과 변환이란 특성을 지닌 한낱 과정들로 관찰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다시 개별성의 문제가 불거져 나온다. 원생동물이나 마찬가지로 원자 역시 격렬하게 동요하는 존재의 위상에선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는 실질적 동일성을 지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주 그 자체의 기본 구조를 에너지라 할 때 이 에너지는 끊임없는 불안정과 동요란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을 뜻한다.
사람과 관련하여 오온을 분석함에 있어 부처님은 육신과 그 외의 모든 물질들(예를 들어 눈물․콧물․똥․오줌등)을 구성하는 것들이 모두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그 구성품들을 열거해 나가며 그들이 자신의 몸 안에 있는가 아니면 몸 밖의 외부 세계에 있는가에 따라서 내재적 및 외재적 요소로 분류해 나가신다. 그래서 자기 몸의 것이든, 바깥 객체의 것이든, 견고성[地 paṭhavī])은 모두가 하나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고, 동일 범주의 현상에 속하며, 또 그것이 어디에 있든 간에 생멸(生滅)이라는 동일 법칙에 따른다는 것을 밝히신다. 똑같은 방식이 안팎의 모든 응집성․온도․움직임의 인자들에도 적용된다. 이처럼 분류된 것들은 매번 다음의 언명으로 끝난다.
“자 그럼, 그것이 내적 요소든 외적 요소든, 성질에 있어서는 그 둘이 하나이다. 이 점 누구나 실제대로 참 지혜에 의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즉 이 요소는 나에게 속하지 않으며, 이것이 ‘나’가 아니며, 이것이 나의 ‘자아’가 아니라고.”
『중부』28경 1권 186쪽
무슨 형태로 존재하고 있건 간에 물리적 물질은 사실상 그 기본구조에 있어서는 한 가지이다. 물질을 고체․액체․기체의 세 부류로 나누는 대신 불교의 우주론적 분석은 그것을 가벼운 성질(lightness, buoyancy), 유연한 성질(softness, plasticity), 활발한 성질(activity)과 같은 군(群) 특성(group characteristics)에 의해 정의한다. 물리학적으로 보아도 절대적으로 고체적, 기체적, 액체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없고 오히려 각각은 다른 성질들도 어느 정도 띠고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그 모두를 사대종(四大種)에 귀속시키는 분류방식이 불교의 진리탐구의 목적에도 잘 맞는다. 이렇게 분류하는 불교적 지혜를 특히 육체에 적용하는[身隨觀] 목적은, 거기서 더 나아가 모든 물질을 포용하는 보편적 원칙을 세우려 하는 목적은, ‘마음’으로 하여금 인간의 몸을 다른 물질적 대상과 구별되는 초자연적 유기체라고 믿는 데서 깨어나도록, 또 몸을 ‘자아’로 여기거나, 아니면 자아에 불가결한 것으로 보려드는 경향을 불식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비물질적 내지 정신적 온(蘊)들도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다루신다. 감각[受], 지각[想], 의도적 활동[行], 의식[識]은 모두 인과적으로 조건 지어진 인자(因子)들이다. 이 인자들의 ‘수명’은 심찰나(心刹那 thought-moments)들로 이루어지며 이 심찰나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일어났다 사라진다. 한 존재가 자각하며 실존하는 실제기간은 이들 의식의 점(点)찰나(刹那)들 중 하나의 존속 기간보다 길지 않은데, 이 찰나들이 인과의 실에 꿰어 있기 때문에 자기 동일성이라는 환(幻)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하신다.
“모든 온(蘊)들은 덧없다. 모든 온들은 고에 지배된다. 모든 것들[法]은 자아실체를 결하고 있다. 몸은 덧없다, 느낌은 덧없다, 지각은 덧없다, 정신적 집성들[諸行]은 덧없다, 의식은 덧없다. 그리고 덧없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에 휘말린다. 고와 변화에 휘말려 있는 것을 두고 “이것은 ‘나’에게 속한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자아’다”라고 진정으로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 형상을, 감각을, 지각을, 정신적 집성들을, 또는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이건 간에, 거칠든 미세하든, 품위 있는 것이든 저급한 것이든, 멀든 가깝든, 실제대로 참 지혜에 의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가장 넓은 뜻에서 고(dukkha)라는 말은 가벼운 불만에서 절망에 이르기까지, 가벼운 불쾌에서 뼈저린 고뇌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의 정신적 물질적 편치않음을 다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살아있는 유기체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들이 모두 영구하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에 유기체 나름의 불안정하고 항상 변하는 성질에 본유하는 형태의 고에, 마냥 존재로 되어가기(comingtobe)만 할 뿐 진정한 존재의 상태를 실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정 특유의 고에 지배당한다. 다시 정신적 집성들의 경우에는 불안정이라는 특징이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성마름, 좌절, 분노, 걱정, 갈등하는 욕구와 정서들, 일체의 고민에 찬 상태들, 이들이야말로 고로 이해해 마땅한 것들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행복이라 알고 있는 것마저도 흥분이라는 고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행복’도 그 반대 되는 것, 즉 우리가 ‘슬픔’이라 부르는 불안정의 양상과 대조될 때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따라서 즐거움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은 짝을 이루는 상대적인 것으로 그 대칭이 없이는 경험해 볼 길도 없는 그런 것들이다. 불교는 식(識)에 끌려가는 삶이라는 조건이 전제되는 한, 완벽하고 변하지 않는 순수한 행복이 있을 여지는 없다고 단정한다. 왜 이런 단정을 하는지, 그 이유는 다음의, 고의 근원과 발생원인을 다루는 두 번째 성제[第二聖諦]를 검토해 나감에 따라 더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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