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수행의 유익함

Dhammarakkhita 2016. 12. 18. 11:24

이 몸과 마음의 통찰 수행인 위빠싸나 수행을 통하여 얻는 삶에 있어서의 유익함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론 이 위빠싸나 통찰수행의 유익함은, 초기 단계에서는 수행자들에게 그렇게 분명하게 이해되기가 다소 어려울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선정(samadhi)이 깊어지는 단계를 거쳐 참 지혜의 맛을 조금씩 보게 되었을 때 그 유익함은 수행자에게 확연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수행자는 다음과 같은 유익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1. 마음이 분명하고 안정되어 평안의 상태를 얻게 됩니다.

2. 업(Kamma, 業)을 점점 제거시켜 도덕이 갖추어진 생활을 하게 됩니다.

3.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4. 육체적 고통과 질병이 치유됩니다.

5.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6. 보다 상위의 지혜가 계발됩니다.

7. 마침내는 숭고하고 장엄한 열반(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의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면 위에 열거한 수행의 유익함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음이 분명하고 안정되어 평안의 상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불분명한 마음의 상태 속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마음이 불선명하여 맑지 못하고, 그래서 무언가 불만스럽고, 확실치는 않으나 항상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만히 안정되게 한 곳에 있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들떠 있습니다. 또한 항상 잡념 비슷한 온갖 생각 아닌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가 하다가는 다시 오곤 하는 일이 연속되며 그래서 불분명하지만 무언가 불안한 마음 상태 속에서 생활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니라, 


탐욕이라고 하는 열렬한 바램이 있기 때문에

격렬한 때로는 미세한 성냄이 있기 때문에

미혹이라는 이해의 부족, 무지가 있기 때문에


마음이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는 것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불만스러운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이 확실치는 않으나 항상 무엇인가를 찾고 있을 때,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며 들떠 있을 때, 또한 잡념 비슷한 온갖 생각이 일어날 때, 불안한 마음이 일어날 때, 그 마음의 상태와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마음집중을 하여 바로 그 마음을 관찰합니다. 마음은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그런데 마음은 한 순간에 한 마음 작용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여러 마음 작용이 가능하게 보이는 것은 단지 마음이 작용하는 속도가 때로는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므로 그렇게 보일 따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 작용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알아 차려서 ・ 집중하여・관찰하면 그렇게 하는 마음 작용이 강하게 역할하여 그러한 부정적인 마음의 작용은 멈추게 됩니다. 나아가서 그 부정적인 마음의 원인인 열렬한 바램 혹은 격렬하거나 미세한 화를 냄이 그쳐버립니다. 더욱 집중과 관찰로 나아가면 수행자의 마음은 중립적인 분명한 상태에 있게 됩니다. 바로 이 중립적인 분명한 마음이 안정과 평안 그리고 평온과 평화로움으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더욱 수행이 진보되면 마침내는 탐욕과 성냄 그리고 미혹의 원인인 무지의 뿌리가 점점 짤리어 매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업(Kamma, 業)을 점점 제거시켜 도덕이 갖추어진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업(業)은 빠리어로 Kamma인데, 산스크리트어로 Karma라는 용어로 더 우리에게 친숙한 말입니다마는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사람은 그렇게 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업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기술하자면 매우 많은 것들을 풀어 놓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중요 요점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 불균형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의 인간의 불공평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현대 과학자들은 인류의 불평등의 원인을 순전히 경험주의의 감각여건의 한계 하에서 파악하여 물리적 원인 ・ 유전인자 ・ 환경의 조건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 가정의 구성원은 서로 비슷하고, 특히 쌍둥이는 같은 유전자를 보유하고 똑같은 환경에서 성장하는데 기질적으로, 지능적으로, 감성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다른가? 위에서 말한 이유들로써 이러한 것들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업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업 이외도 계절의 법칙 ・ 종자의 법칙 ・ 담마의 법칙 ・ 마음의 법칙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나’ 혹은 ‘자아’라고 할 때, 사실은 오취온, 즉 색(육체적인 물질) ・ 수(감각) ・ 상(관념) ・ 행(성향,의지) ・ 식(의식)의 무더기의 쌓임 뿐임의 존재를 실재적 존재로서의 ‘나’ 혹은 ‘자아’로 간주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취온 중의 행, 즉 우리의 성향 혹은 의지적 행위가 업이며, 또한 업을 형성합니다. 다시 말하면 몸으로 ・ 말로 ・ 행동으로 지은 의지의 행위가 업이며, 업을 형성한다는 말입니다. 비자발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비의도적으로 행한 행위는 그 과보는 있을지언정 업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성향 즉 의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향과 의지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업의 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외부 대상과 접촉하면 다섯 감관이 작용하여 영수식(領受識)이라고 해서 다섯 가지 식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는 판별식의 단계라는 대상을 판별하는 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확정식(確定識)의 단계로서 분별작용이 일어나면서 가치가 부여되고 자유의지가 역할하게 됩니다. 다음에는 속행(速行)이라고 해서 여기에 의존하여 연속되는 심리적인 중요한 단계로 그 자유의지의 행위가 도덕적인가 비도덕적인가가 결정되며 이 때 업이 형성됩니다. 그리고는 보존식(保存識)이라고 해서 그것이 보존됩니다.

바로 위의 보존식이라는 속행의 단계에서 만약 올바른 견해를 가졌다면 이것은 도덕적이 되고, 옳지 못하면 이것은 비도덕적이 됩니다. 감관기관 앞에 나타난 대상이 나에게 바람직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우리는 속행 과정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것은 가능합니다. 여기에 수행의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환경 ・ 분위기 ・ 습관적 성향 같은 것들이 우리의 생각을 조건지우는 것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의 자유의지는 그것에 종속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외적인 요인들 극복하고 도덕적인 생각을 만들어서 우리 자신의 자유 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마음 통찰의 위빠싸나 수행의 몫입니다. 이 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스트레스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현대사회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갖가지 힘, 즉 스트레스를 가해오고 있습니다. 그 압력을 우리들로서는 감당해낼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두고 ‘문명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필립 짐 바르도」라는 심리학자는 그의 저서 「심리학과 삶」에서 사람이 주변 환경에서 받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에 대해 반응하는 네 가지 단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 감정적인 단계 : 슬픔, 의기소침, 성냄, 짜증, 좌절감

나. 행동의 단계 : 제대로 집중하지 못함, 건망증,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함, 생산성이 떨어짐

다. 생리적인 단계 : 주로 신체적인 긴장을 말하는데 이것이 발전하면 통증, 위궤양, 고혈압, 갖가지 질병이 된다.

라. 인지의 단계 :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과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로 자기 자신이 아무 쓸모없고 희망도 없다는 감정   에 빠져들어 최악의 경우 자살까지 하게 된다.


사람들이 이와 같은 스트레스와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은 강한 자아의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불분명해져서 균형 잡히지 않고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의식이 강하게 작용한 이유는 마음의 상태가 탐욕이라는 열렬한 바램의 집착이 있기 때문이며, 격렬한 성냄이 있기 때문이며, 미혹이라는 이해의 부족, 무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려서, 집중하여, 관찰하는 순간에는, 수행자는 어떤 것에 대한 바램을 중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열렬한 집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 통찰을 하는 동안은 절대로 성냄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 통찰을 하는 순간에는 수행자가 게을러지거나 흐릿해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정진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탐욕 ・ 성냄 ・ 무지로부터 어느 정도는 자유로워져 있기 때문에 마음이 분명해져 있으며 따라서 마음이 균형되고 안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과 질병이 치유됩니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드레나린을 만들고, 맥박과 혈압이 올라가고, 근육에 혈액이 증가됩니다. 이와 같은 반응은 어떤 신체적인 위협에 대처하거나 도망가게 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매일 계속적으로 이와 같은 스트레스를 받아야만 한다면 우리는 스트레스와 상관되는 여러 요인으로 질병이라는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위빠싸나의 통찰 수행은 하면 몸은 이와 같은 긴장에서 이완 반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는 맥박을 줄이고, 혈압과 근육의 긴장을 누그러뜨립니다. 또한 아드레나린의 분출을 그치게 하고 엔돌핀을 생성하게끔 합니다. 작년 가을에 하버드 심신 의학 센터에서는 ‘기능 가지 공명영상’을 이용해 명상 수행이 주의 집중과 자율 신경 시스템이 조정하는 뇌신경을 활동화 시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의학학술 보고들이 명상 수행의 건강효과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명상 수행은 특별히 고혈압 ・ 과민성 대장 증후군 ・ 건선 불면증 같은 스트레스와 연결되는 질병과 통증 그리고 불안증이 곁들여 있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전 세계의 각종 암치료 센터에서는 명상 수행을 이용한 치료요법은 거의 필수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보편적인 정보가 되어있을 정도입니다.

최근에 의학자들은 고혈압 환자들이 명상 수행요법을 통해서 혈압과 맥박을 낮췄을 뿐만 아니라 좁아졌던 심장동맥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고 보고했습니다. 똑같은 시간을 명상 대신 휴식요법을 사용했던 환자들은 혈압은 낮아졌으나 관상동맥에는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보고도 아울러 참고할만 합니다. 건선 환자 중 자외선 치료만을 받은 환자보다 더 빨리 피부가 깨끗해졌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또한 어떤 연구는 명상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여러 원인으로 인한 통증(특히 근육에서 오는 통증)과 불안을 적게 느꼈고 약물의 양도 적게 사용하였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신경내분비계에 대한 약물치료 영향을 조사해온 연구자들은 명상 수행은 혈액 속에 멜라토닌과 노화방지제로 간주되는 호르몬 함량을 증가시킨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수행자가 정진을 하여서 선정의 힘이 향상되어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혜’라는 단계에 도달하면 일반적인 병세는 대개가 물러가 버립니다. 그 때 여러분들의 마음챙김의 힘은 내우 강하게 되어서 관찰의 힘에 의해서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육체적 통증이 극복되며 나아가서 갖가지 질병도 치료됩니다. 약과 전문 의사에 의해서도 치료하지 못했던, 오랫동안 고통받아왔던 심각한 병들이 수행자가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선정의 힘이 매우 깊은 ‘평등심의 지혜 단계’에 도달하면 그 병이 말끔히 치유되곤도 합니다. 병의 치유가 너무나 차도가 없다가 대체적으로 위빠싸나 통찰수행을 함으로써 치유된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죽음이란 것은 고통 중의 고통입니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정말 두려움 그 자체가 몰려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죽는다는 자연의 법칙은 인정하면서도 지신이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지금 받아들이기는 주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얘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도피해 버리고 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것,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조건지어진 존재들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것을 거슬러 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신에게 기도를 하여도 이 부분에 와서는 불안함에서 완전히 벗어남에 있어서 다소 회의적임을 떨쳐버릴 수 없으며 또한 편안한 죽음의 보증장치를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부근에서 감관이 하나씩 활력을 잃어감에 따라 자극의 공급이 중단되면 억제력 역시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때 모든 가면들은 벗겨져서 완전히 발가벗은 자기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에 목격하게 되는 것이 증오, 질투, 시기, 미련, 질시, 분함, 아쉬움, 집착 등의 부정적 감정들이라면 우리는  틀림없이 죄의식, 회한, 비탄, 슬픔 등에 빠져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죽음이 말할 수 없이 싫긴 하지만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는 이상은 그 불가피성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죽음을 공부하고 이해하면 보다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마음 통찰을 익히는 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부근에서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불안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마음챙김을 합니다. 그러면 불안함은 없어지고 나아가서 계속하여 ‘일어남 사라짐’의 주 대상을 관찰하면서 평화 속에서 그대로 죽음의 과정으로 들어갑니다. 위빠싸나 수행은 남과 더불어 평화로울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며 마침내는 평온 속에서 죽음의 위대한 경험을 평화롭게 치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평소에 살아왔던 방식과 마음을 안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제의 나의 삶의 양상이 오늘의 나의 삶의 양상으로 이어지고, 오늘의 나의 삶의 양식이 그대로 내일의 나의 죽음의 양상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의 나의 죽음이라는 나의 삶은 오늘의 나의 삶의 양상과 하등에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여 오늘 내가 수행이라는 삶의 수단으로 잘 준비되어 있으면, 죽음이라는 삶 또한 아무 두려움, 회한, 미련, 집착 등에 끄달리지 않고 평온과 평화 속에서 성스럽게 진행시킬 수 있게 됩니다.


보다 상위의 지혜가 계발됩니다.

   위빠싸나를 열심히 정진한 수행자는 자기가 언젠가 높은 수준의 지혜가 계발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높은 지혜에 도달한 수행자에게는 명확한 일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하기 전에 높은 수준의 법(진리) 강의를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들도 위빠싸나 수행하여 청정의 과정과 지혜의 단계들을 경험하게 되므로, 다시 동일한 진리의 가르침의 강의를 대했을 때, 그들은 어렵지 않게 그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됨에 경이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진리, 즉 존재의 본질과 실상을 깨닫는 지혜의 계발에는 세 가지 단계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개념적 이해입니다 : 언어를 통하여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추론적 이해입니다 : 언어를 통하여 개념적으로 알게 된 내용을 이성적으로 고찰하여 논리적으로 모순을 점검하며 이해하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요가적 방법으로 실천적인 경험을 통한 이해입니다 : 이것이 가장 존재의 실상을 깨닫는 확연한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의 인식의 과정은 그 이전의 오염된 인식 경험의 축적인 심층의식의 자료에 의해서 대상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류에서 해방된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평등심, 즉 다섯 감관이 대상에 부딪쳤을 때 그 대상에 애착하지도 아니하고, 싫어하여 혐오하지도 아니한 그러고 무지는 제거된 마음의 중립 상태에서 접촉하여야만 대상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얻은 인식을 지혜라 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이란 바로 이러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수행이기 때문에 계발된 지혜를 얻게 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수련한 학생들이 그들의 학교공부를 할 때, 그들은 마음을 집중해서 공부하게 되며 아울러 존재의 실상을 아는 지혜가 계발되어 있으므로 세속 공부의 이해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더욱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닙빠나(열반)을 성취하게 됩니다.

   마음챙김 참선 수행의 최대의 유익함은 존재의 본질과 실상을 확연하게 깨달아 모든 번뇌를 제거한 대자유인이 되는 닙빠나(열반)의 성취입니다.

닙빠나(열반)은 일반적으로 「완전한 자유」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환경이나 상태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 환경과 상황에 얽매어 있는 「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완전한 자유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주의(主義), 개념의 노예가 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기심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부정적 사고, 즉 개인적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성냄, 헛된 자존심, 공포, 두려움, 조급증, 부정직, 혐오감, 증오, 인색, 시기 등의 번뇌를 타고 있는 촛불을 불어 불을 끄듯이 다 꺼버린, 그래서 아무 것도 조건지워진 것이 없는 평화. 그런 자유라고 그것의 대강의 의미를 서술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닙빠나(열반) 내용은 워낙 지고한 것이고,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기에 여기서 자세하게 서술할 수는 없고 별도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와 같은 닙빠나에는 네 가지 도(道, magga)와 과(果, phala)가 있습니다. 수다원(sotapatti)・사다함(sakkhadagami)・아나감(anagami)・아라항(araham)이 그것을 성취한 이들입니다.



이상과 같이 위빠싸나 수행의 유익함에 대한 대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열거한 이러한 항목 외에도 그 유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광대합니다. 여기서는 그 자세한 열거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