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스크랩] [혜조 스님] 수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사항입니다.

Dhammarakkhita 2016. 12. 18. 11:25

수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

 

요즘 세간에서는 웰빙이라는 말이 메스콤, 광고에서 인기 상품처럼 문화생활의 하나로 자리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웰빙'이란 '잘사는 것',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말일텐데, 이 웰빙을 위한 프로그램 중 '명상'이라는 것이 중요한 요목으로 등장하면서 '명상 편의점'이란 편의시설이 아닌 상점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현대의 산업물질문명시대에서의 삶의 양식은, 사유재산이라는 개념토대로 하고있는 소유의식이 중심이 되어 현대 사회의 특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한 의식구조에 따라서 현대인은 명상이라는 주제 또한 무슨 사유재산으로서의 소유물처럼 편의점에서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그런 품목 중의 하나처럼 일반인들을 인식시킴으로써 돈벌이를 하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웰빙이란 의미 또한 가슴, 마음, 내면, 심연의 공명으로 우러나는 행복함이 아니라 소유감으로 풍성하게 갖추어진 외형적 자아충족에 급급한 형태로 냉장고, 세탁기를 권유하듯이 그렇게 판촉 대상의 연결선상에서 전달되어지고 있는 분위기로 느껴집니다.

행복한 삶이란 소유양식에서 해방되어서 존재양식으로 살 수 있을 때 찾아드는 것입니다. 소유의식을 놓치 않은 채, 명상을 한다고 해서 웰빙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것은 출발부터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현대사회의 삶은 사유재산에 대한 의식이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재산을 어디서 어떻게 취득했느냐, 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이며, 범법을 하지 않는 한 내 권리는 무제한이며 절대적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에 토대를 둔 삶의 소유양식은 모든 것을 배제합니다. 고따마 붓다는 이런 행동양식을 욕망, 탐욕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회의 기능을 규정하는 규범은 그 구성원들의 특성을 형성하여, 그것이 그대로 사회적 특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그런 규범은 재산을 취득하려는 바램, 그것을 유지하려는 바램, 그것을 증식시키려는 바램 등이 기초를 이루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재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선비의 미덕이라고 간주되었습니다만, 현대사회에서는 재산을 가진 자들은 찬양받고 또 우월한 존재로 부러움을 받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씩이라도 늘리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가장 미천한 계급의 남자들일지라도 재산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사유재산은 다름 아니라, 아내, 자녀들, 가축 등입니다. 가부장적 사회의 남자에게 있어서는 자녀를 많이 갖는 것이 사람을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이를 낳는 고통이 여자의 몫임을 생할 때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자녀의 생산은 여성에 대한 일종의 착취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머니도 소유형태를 갖습니다. 어린 시절의 자녀들을 소유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가부장적 질서에 있어서의 남성주도는 보다 선진 사회에서는 그것이 점점 쇠퇴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정도에 따라 여성, 어린이 그리고 청소년의 해방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가부장적 소유형태가 서서히 소멸되면서, 완전히 진보된 산업사회의 중하층의 사람들은 「사유재산, 소유물, 나의 것」을 획득하고, 지키고, 또 늘리려는 그들의 열정적 욕망을 이제 어디서 충족시킬 것인가? 그들은 소유의 영역을 확장시켜 친구, 연인, 건강, 여행, 예술품, 신 그리고 자아(自我) 등을 그 속에 포함시킴으로서 충족하려 합니다.

이러한 사유재산에 대한 의식은 '개인주의'를 낳았습니다. '개인주의'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나의 것'이라는 「자기소유」를 뜻합니다. '자아'는 우리의 소유의식 중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그것은 신체, 이름, 사회적 지위, 지식을 포함한 소유물,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타인이 자기에 대해 가져주기를 바라는 이미지 등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자아가 소유의 대상으로서의 어떤 물건으로 느껴지며, 이에 따라 주체의식의 기초가 되고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자아' 나에 대한 본체적 개념으로 보아 그것을 부정합니다. 나아가서는 제법이 무아라고 보면서, 진리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그 무아사상을 가장 근본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옛날에는 소유한 물건 무엇이나 소중히 여겨졌고, 손질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물건 구입은 '소중히 간직하여 사용하기' 위한 구입이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오늘날은 소중 간직하여 사용하기 보다는 '쓰고 버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산 물건이 자동차이건 옷이건 기계이건간에 낡아 못쓰게 되어 폐기 처분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 동안 쓰고 나면 싫증이 나서 그것을 처분하고 최신형을 사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현대 산업사회는 소비형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소비를 하면 자기의 것을 빼앗기지 않으므로 소비를 통하여 자아의 소유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의식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들처럼 나도 소비를 함으로써 남들에 떨어지지 않는 존재로서의 자아 확인을 할 수 있다는 의식있기 때문입니다.

소유적 감정은 다른 관계, 예를 들면 의사, 변호사, 사장, 노동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흔히「우리」의사, 「우리」변호사, 「우리」사장, 「우리」일꾼 등의 표현을 씁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소유적 태도 이외에도 사람들은 감정까지도 사유재산으로서 경험합니다. 이외에 사람들은 「내」병, 「내」수술, 「내」약, 「내」치료하고 자기의 건강을 소유적 감각으로 얘기합니다. 그들은 건강과 병을 자기 소유물로, 즉 사유재산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상이나 신념은 물론이고 습관까지도 재이 될 수 있습니다. 사상, 신념, 습관이 나의 것, 즉 사유재산, 소유물이 됨으로써 그것을 잃게 되면 자아를 상실하여 '나'를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어 안전감이 없어져서 불안해 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현대인들의 삶의 양식입니다.

이제 '나'라는 존재와 '소유'의 관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합시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은 주체인 「」와 객체인 「대상」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가 과연 고정불변한 영원성을 가지는가?

뭔가를 영원히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체가 영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다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내 어떤 물체를 소유하고 지배한다는 것은 사는 과정에서의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나」의 정의를 객체에 대한 나의 소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체는 「내 자신」이 아니고 '나'는 「내가 가진 것」이 됩니다. 나의 소유가, 다시 말하면 내 재산이 나 자신과 나의 주체를 형성합니다. 「나는 다」라는 말의 밑바닥에는 「나는 OO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다」라는 의미가 깔려있습니다., 이때 OO는 내가 그것을 지배하고 영원히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힘과 권한을 통해 내가 나 자신과 관련을 짓는 모든 자연물과 사람들을 가킵니다.

이러한 소유양식에서는 나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 살아있는 관계는 없습니다. 그것과 나는 물건이 되어 정체되어 버리며,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반대의 관계도 성립합니다. 그것이 나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체의식, 즉 정신이 내가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소유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관계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모두 '물체'로 만들어버리며, 그 관계를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정체된 관계, 죽어 있는 관계로 만듭니다.

또한 재산과 이윤에 중점을 두는 태도인 생존의 소유양식은 필연적으로 힘에 대한 욕망을 낳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힘의 사용이 요구됩니다. 사유재산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그것을 지킬만한 힘을 사용해야 합니다. 만족하게 갖는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빼앗으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사유재산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공연연한 혹은 은밀한 방식으로 타인의 것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소유양식 안에서는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 힘, 나아가서는 정복하고 빼앗고 죽이는 자기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 소유의식을 강화하는 데는 언어도 한 몫을 합니다. 어떤 인물의 이름은 그 혹은 그녀의 그대로의 자체이며, 불후의 존재라는 관념과 환상을 낳습니다. 사람과 이름은 서로 대응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이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파괴되지 않는 실체라는 것으로 의미되고 있습니다.

'책상'이나 '시계'와 같은 물건의 이름으로서의 명사까지도 우리는 실재로 인식하여 받아들입니다. 이런 말들은 우리가 불변의 실체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물건은 우리의 생체조직 속에 어떤 감각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책상이나 시계 같은 특별한 물건의 순수한 인식 그 자체가 아닙니다. 이 인식은 다만 학습(경험)이라는 문화적 과정에 의한 어떤 감각으로 인하여 형성된 관념의 대상일 뿐입니다. 일단 그런 인식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 이름이 그 인식의 궁극적이고 불변의 실체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상명사에 대한 것도 동일합니다. 즉 사랑, 증오, 기쁨 같은 명사도 실체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이런 명사 역시 실체성이 없으며, 인간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과정에 우리가 관계하고 있다는 통찰을 흐리게 할 뿐입니다.

소유의 욕구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습니다. 즉,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살려는 욕망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건 불행하건 간에 우리의 육체는 우리로 하여금 '불멸'을 향해 노력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기 때문에, 그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불멸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믿게끔 하는 강한 자아의식을 지닙니다. 이 소망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불멸에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데는 아마 재산의 소유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큰 구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소유 지향이 그와 같은 힘을 갖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나의 '자아'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의해 형성된다면 내가 가진 물건들이 파괴되지 않는 한 나는 불멸인 것으로 착각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삶에 있어서 소유양식의 본질적인 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소유양식의 삶에 머무는 한 우리에게 행복은 요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존재양식에서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가 죽어 있는 관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활동하여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관계이므로 정체되어 있지 않고 나아가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성장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행복의 가능이 열려 있습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전환시키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소유양식으로 둘러 싸여 있는 현대인에게는
수행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입니다.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청 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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