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스크랩] [혜조 스님] 죽음에 관한 첫번째 법문

Dhammarakkhita 2016. 12. 18. 11:26
 

  이번 법문은 3-4회에 걸쳐 ‘죽음’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삶에서 항상 삶의 문제만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얘기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들의 삶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삶의 주제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정확한 앎이 없이 삶을 잘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해서 죽음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우리 삶의 주변에 너무나 밀착되어 있는 말입니다. 납작한 코를 가진 사람 보고는 코가 죽었다고 합니다. 기가 죽는다 혹은 풀이 죽다고 표현합니다. 나무가 시드는 것을 우리는 나무가 죽는다고 표현합니다. 배추를 소금에 절인 후 배추가 숨이 죽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배고파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예뻐 죽겠다, 즐거워 죽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생명의 죽음, 특히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 안에 두기를 꺼려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외면함으로써, 죽음이 없는 것으로 비켜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자기기만을 보이기조차 합니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공포스러워 하고,  위험시하고, 부정하고,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업신여기는 문화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쉽게 죽음과 화해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은 그 자체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어, 삶과의 관계성, 연속성에 대한 면을 확인할 길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죽음은 분명 각자 각자의 삶인데도,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자신의 죽음을 버린 것입니다. 죽음은 생소한 타자로서 내버려졌습니다. 죽음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는 목숨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그 목숨과 함께 죽음이 더불어 시작되며 우리의 삶이 진행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며 죽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음은 삶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삶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삶이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해서 죽음 또한 삶의 완료, 종말이 아니라 삶이 진행되어 나아가는 과정의 한 부분입니다.

만일 죽음이 종말이라면 삶에 있어서 죽음의 의미에 기대하는 우리의 심각성도 덜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 세계가 모든 존재의 존재양상이 선형적으로 구성되어진 구조라면, 삶은 이 세계의 시작이고 죽음은 이 세계의 종말, 끝이 됩니다.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무, 영’이 되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럴 경우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삶의 영역의 마지막 부분에 도사리고 있는 공포감와 불안감 그리고 허무감으로부터의 약간의 ‘위안’ 외에는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무(無)・영이 된다면 차라리 죽음은 평안이며, 열반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불안과 공포로 대할까요?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 삶의 종말, 끝, 영(제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결코 아닙니다. 죽음은 삶의 주요한 주제로서, 삶의 일부분이며, 삶의 구조 부분이며,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전환을 위한 중요한 계기이기 조차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성장과 성숙을 위한 기회이며 과정입니다. 더 나아가서 죽음은 깨달음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직접 임한 자는 물론이고, 죽음에 임한 사람을 대하는 자역시 단순한 ‘위안’을 훨씬 뛰어넘어, 임종자의 삶의 죽음을, 죽음의 삶으로 해방시켜 열린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사랑의 극치를 목표로 안고 있어야 합니다. 고따마 붓다 시대 때부터 죽는 자를 보살피는 자 혹은 죽은 자의 일을 돕는 자의 공덕이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공덕의 예들이 많이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 말고 죽음의식을 맞을 것을 충고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평상시에 반드시 죽음관을 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죽음에 대한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인간이 죽음에 임하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의 태도를 보이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경고를 받고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고 한다면, 정말 하늘이 무너지고, 기가 막힐 것입니다. 이것은 속수무책이며 대체할 어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죽음을 더 이상 피할 수 없게 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실제로 죽게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서 에리자베스 큐블러 로스 박사는 「죽음의 순간」을 통하여 그 과정을 다섯 단계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 : 부인과 부정

의사로부터 사망 선고를 받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갑자기 발생된 절망적인 자신의 상황에 충격과 함께 공포와 두려움으로, “왜, 나인가? 왜, 지금인가?”라고 자신에게 말하며 죽음에 임했음을 부인하는 반응의 단계입니다. 제일 먼저의 반응은 오진이라고 의심하고 다른 의사를 찾기도 합니다. 자신의 상황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고 숨깁니다.


인간인 이상 죽음에 직면하면 비슷한 체험을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 : 분노

‘자기가 왜 지금 죽어야 하는가’ 라며 더 이상의 삶의 시간을 끌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피를 토한다던가, 머리털이 빠진다던가, 깊은 통증이 일어난다던가 할 경우 죽음이 임박했음에 공포감과 불안감이 주변의 가족이나 의사 혹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까지도 분노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고 싶지 않다. 더 살고 싶다는 절실한 희망이 형태를 바꾸어 표출된 것입니다. 이 단계에는 환자와 거의 아무런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 번째 단계 : 타협(인생을 재평가하는 시기)

이 단계는 좀더 많은 시간이 자신에게 있어 주기를 바라는 상태입니다. 환자는 의사와 운명 혹은 신과 어떤 시한부 약속을 주고받지만, 다가오는 죽음을 조금이라도 연기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싶다. 한 번만 고향의 부모 묘를 찾아가고 싶다. 그것을 마칠 때까지는 어떻게든 살 수 있게 해 달라 그 대신 고통스러운 치료도 견뎌내겠다 등의 타협을 의사나 신에게 바라고 있습니다.

좀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 생명이 연장되기를 바라는 심리에서 의사의 처방을 잘 따르고 병을 고치려고 적극적으로 치유를 합니다. 또한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종교에 의하여 기적이라도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 단계는 짧은 기간 동안 유지되지만, 환자가 주위 사람들에 대해 가장 개방적이고 협조적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한 시기입니다. 환자가 품고 있는 미해결된 문제를 정리하는 ‘인생의 재평가’를 행하는 아주 좋은 기회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관계에서 감정적 엇갈림과 원한관계가 있다면 화해하도록 이끈다든가, 가족을 대상으로 유언을 권유 혹은 정리하게 한다던가, 환자가 주변정리를 행할 수 있도록 돕기에는 최적의 단계입니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일종의 인생의 총결산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 인생의 재평가와 결산을 충분히 마무리하지 않거나, 사는 동안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발생했었던 불화, 원한, 미련 오해 등을 해결하지 않으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기가 어렵습니다.


네 번째 단계 : 우울

먼저 자신의 체력이 현저하게 감퇴하고, 식욕이 전혀 없어져, 자립의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면서, 병으로 죽게 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반응으로서의 우울’ 현상이 나타납니다. 다음으로 마침내 가까운 시일 내에 전부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하며, 우울 단계로 이행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느끼며, 다만 자기 주변의 지인들을 보기를 희망하게 됩니다. 주위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더라도 가능한 한 환자 곁에 함께 있어 주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 : 수긍과 수용

이 단계에 도달한 환자는 더 이상 회피할 길 없는 자기 자신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이때 본인의 내심에서는 일종의 담담함을 유지하고 자신의 처지가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표면적인 분노, 우울 등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오직 자신만 홀로 있다는 고독감에 싸이며, 침묵에 묻힙니다.


로스 박사는 이 다섯 단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에서 사망학의 대부로 알려진 알폰스 데켄 교수는 한 단계를 더 말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 단계 : 기대와 희망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후의 생명을 믿는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까지 희망으로 가득 차 밝은 태도를 취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수용의 단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를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재회를 크게 기대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죽음을 앞둔 자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기 전까지 공통적으로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초조 그리고 극도의 허무감으로 주체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죽음과 화해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한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초조 그리고 극도의 허무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물론 ‘유아(有我)’의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생사관의 문제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들은 누구나 다, 죽음은 무엇인가? 죽은 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은 뒤 이 생에서 삶을 심판받는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사실인가? 영혼 불멸이라고 하는데 영혼이란 무엇이며, 영혼이 영원하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윤회란 사실인가? 윤회한다면 다음 생에서 나는 무엇으로 태어나는가? 그것은 무엇이 주관하는 것인가? 이러한 생각들을 골똘히 하며 공포와 불안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인류가 존재한 이래 삶과 죽음에 대한 사고인 생사관이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것은 죽음의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청 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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