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삶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삶에 있어서, 어떤 방향 없이, 목표 없이, 설정한 가치도 없이, 의미 없이, 사랑과 서로를 위한 이해 없이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무척 경이롭습니다.
‘나는 불행해’ ‘그것은 순전히 그 사람 잘못 때문이야’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세상은 엉망이야 불공평해’라고 하면서 비관과 분노 속에서 살다가 약간의 즐거움의 대상과 관계되면 그것에 빠져 모든 것을 바치기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무한정으로 어딘지도 모르고 떠나려가고 있고 있습니다. 그들은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줄기차게 동일한 시행착오를 하면서 다음의 요행을 바라며 살고 있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꽤 오래전에 건축 공부를 하는 한 수행자에게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시 설계를 공부하기 위하여 세계 각지에서 많은 도시설계자들이 서울의 경우를 연구의 모델로 삼마 모여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도시를 형성시키기 위해 서울이 자연의 바람직한 지리・환경적 요소와 역사・문화적 자원이 너무나 조화롭게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기 위하여
둘째는, 그 완전한 자연 조건과 역사・문화적 조건을 인간이 얼마나 어떻게 완전하게 무너뜨려 놓았는가를 보기 위하여
셋째는, 그렇게 완전하게 무너뜨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이라는 도시는 삶의 기본적인 기능은 경이스럽게도 그런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 이것을 분석하기 위해서 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삶이란 얼마나 묘법 속에 있습니까? 그래도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그런대로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더욱 경이롭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와 같이 사회가 끝없이 경쟁력 확보를 요구하는 현실에서 산다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자녀들까지 그 전쟁과 같은 북새통 속에 들여보내야만 하는 현실을 거스를 수 없으니 더욱 힘듭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조건들이 넉넉하게 갖춰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삶은 만만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이 어렵다고 해서 어려움의 고통을 피해 가서는 안 됩니다. 고통으로 삶을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삶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들은, 우리가 옳은 견해, 옳은 관찰하는 방법, 옳은 가치와 적절한 바램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도리어 매우 의미심장한 삶의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삶이란 ‘배우고 성장을 위한 시간과 공간의 기회’입니다. 붓다께서도 깨달음은 이 인간세상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대가 어려움,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배울 과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그 과목을 공부함으로서 삶에 대한 지혜를 향상시켜 인생에 있어서의 성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이 삶을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하게 성장하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일에 자기의 직업, 자기의 직장, 돈벌이에만 푹 빠져서 경제적인 면에서는 점점 잘 살아지고 있는 지 모르지만 청, 장년의 정신 연령을 그대로 안고 더 이상의 성장 없이 살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 흔히 봅니다.
그대가 괴로움을 당하고 있을 그 때가, 바로 새로운 인식, 새로운 사고, 새로운 가치, 새로운 인생관, 그리고 담마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뜰 수 있는 절호의 때입니다. 왜냐하면 해답은 문제를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인생의 있어서 문제입니다.
저도 많은 것에 대해 괴로워하였고,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점잖게, 때로는 고요하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채하며 위엄 속에서 괴로워합니다. 우리가 괴롭지 않다면 삶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삶에 있어서 고통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고통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고통을 극복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다만 고통을 이해하여 의미충만한 것으로 만드려고 합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담마를 배우려고 마음할 뿐입니다.
우리는 고통의 본질을 알고,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고통에 저항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고통과 삶의 관계를 명쾌하게 이해하여 지혜롭게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 삶의 성장이 찾아듭니다.
또한 고통은 놓아버리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고통은 욕망과 집착이 고통으로 이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움이 일어날 때, 그 괴로움의 본질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기 전에 그 괴로움에 대한 극복을 위한 방편을 대상으로부터 찾으려 헐떡거립니다. 문제의 핵심은 모르고 단지 해답 그 자체만을 얻으려 생각의 중첩 속에서 가슴알이와 두통의 삼중 화살을 맞고 있습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너무 애쓰지 맙시다. 단지 그냥 괴로움을 들여다 보십시요. 그래서 괴로움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한 구조를 이해하려고 하십시요. 기쁨, 즐거움은 괴로움을 수용하는 능력이 얼마나 되는가에 비례하여 증가하는 것입니다. 많은 통증, 절망, 후회를 지니고도 삶은 여전히 흥미 있고 의미 충만한 어떤 것이 아닙니까?
고통.
관계 맺음.
경험.
배움.
인생에 있어서 성장.
지혜.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삶의 가장 중요한 주제들입니다.
우리는 힘든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이 쉽게 가는 사람들 보다 인생살이에 있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고통을 통하여 고통을 느끼는 것, 고통을 통하여 고통을 보는 것, 고통을 통하여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 고통과 연관된 대상과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것 그래서 ‘나’와 ‘삶’에 대해서 더 깊이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인생을 깊이 깊이 배우는 것, 이것이 우리가 삶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입니다. 왜냐하면 그 과정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어 지혜를 얻게 되고, 우리는 성장의 통로를 통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고통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과정의 반복 속에서 무엇을 위하여 인생을 살 것인가의 해답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삶을 산다는 것은 예술입니다. 예술에는 고정적인 공식이 없습니다. 삶에도 고정적인 공식은 없습니다. 예술의 생명은 창조에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창조성을 상실할 때는 살아도 살고 있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적 삶 속에서만이 의미와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창조성을 갖고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실험적이고 모험적이다 라는 의미는 자기 자신을 알고 이해함을 향한 의식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는 바로 괴로움, 고통, 어려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삶에 있어서 실험과 모험 정신을 가진다는 것은 나의 괴로움을 깊이깊이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은 로봇처럼 살고 있습니다. 유행을 쫓아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고 있는 수동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즐기기 위해서 콜프장에 가서도 화를 내고 언짢아져 돌아옵니다. 기쁨이 없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 인생의 깊은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참다운 기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창조성이 없는 삶에 기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만 의미를 두는 곳에 어떻게 기쁨이 있겠습니까? 이기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지는 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지는 자에게 어떻게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긴 자는 그 순간은 기쁠지 모르지만 그 안에는 자만과 오만이 스며들어 삶의 독을 만들 것이며, 사랑하는 마음을 상실하여 미덕으로부터는 자꾸만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로봇처럼 살아가는 그들은 자신을 획일화 시키는데 자신의 삶 모든 것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니고 있는 것을 다 잃을 때까지 삶의 가치를 모를는 지도 모릅니다. 가치 있는 기쁨은 물질적 소유를 키워 유행의 한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데서 찾는 것 보다는 창조를 통하여 새롭게 진실을 찾아내는 데서 얻어 집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그래서 기쁘고, 즐겁고, 평온할 수 있으며, 환희와 감동으로 가슴 벅찰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고통의 본질을 통하여 자기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래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창조하기를 배우려 하기 보다는 단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고통을 외면하려고, 고통에서 도망하기에 급급합니다. 또한 대개의 경우 그 고통은 대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며 대상과 대립하고 갈등합니다. 그러한 삶의 방법에서는 진정한 기쁨・환희・평온・평화에 스며들며 감동하지 못합니다.
실은, 괴로움의 원인은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내적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진정한 기쁨・환희・평온・평화는 찾아들지 않습니다. 진실이란 사실이며,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입니다.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실상, 즉 참성품을 통해서만 진정한 기쁨・환희・평온・평화를 자신의 삶의 한가운데로 찾아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자신은 성장합니다.
삶은 변화의 연속입니다. 결론과 확실함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여기가 살 곳이다. 이것이 돈을 벌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내 친구다. 이 사람이 내 배우자이다라고 판단하여 선택하고는, 얼마 후 대상에 대해 갈등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실험은 끝나지 않고, 결론을 내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세상에는 완전함이란 없습니다. 완전한 어떤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장함에 따라, 나이가 듬에 따라, 죽음이 가까이 옴에 따라 세상에는 완전함이란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완전한 스승도 완전한 학생도 없습니다. 완전한 지도자도 완전한 수행자도 없습니다. 완전한 의사도 완전한 환자도 없습니다. 완전한 부모도 완전한 자식도 없습니다. 저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전을 기대하지도 않고, 또한 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완전해지지도 못할지 모릅니다.
삶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수많은 부정적인 요소의 문제를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을 통로로 하여 해답을 발견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를 통한 해답의 발견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장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삶이 머물지 않고 지속적으로 앞으로 진행되어 나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은 의미로 충만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부정적인 고통이라도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차리려 애쓰며, 고요함에 머문다면 상황 속의 문젯거리의 핵심이 드러날 것이며 또한 그 사건들은 분명 보다 나은 상황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안 속에서 계속 복잡하게 생각하며, 복잡하게 처신하면 상황은 더욱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맙시다. 생각으로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맙시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시다. 삶에 저항하지 맙시다. 삶은 조건들이 갖추어진 사람들에게도 힘든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되어져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 애쓰는 것을 삶의 중요한 몫으로 지니십시다.
우리는 삶에서 경쟁력의 우위 확보, 힘, 명예,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재산 등을 원하고 있고 그것을 실현시키기에 삶의 대부분을 쏟아 붓습니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때로는 참 유용합니다. 그런데 더 수승한 것은 그러한 것들의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필요로부터 자유로워져 있을 때는, 이미 필요에 대한 충족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소유하지 않은 채 행복해지는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삶에서 아무 자극도 없이 살며, 사회에 대해서도 어떠한 공헌도 없는 그야말로 소승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소 불편하게 사는 삶 속에서는 오히려 편리와 풍족함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인간적 미덕, 창조적인 사고방식, 대상과 관계를 맺는 존재적 방식과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지혜와 사랑과 연민으로 이끌어 줍니다.
물론 소유를 모두 포기하며 살기란 현대적 삶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살아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정된 소유를 통하여 만족함을 배우자는 말입니다. 한정된 소유는 무한한 소유를 얻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한정된 소유로 인한 불편함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반드시 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얻습니다. 그것을 보다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에 쏟아 부으면 무한한 가치를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면서’ 성장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 붓을 그곳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필요’에 집착하지도 말고, 또한 지나치게 도말가려고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피하지도 집착하지도 않으므로 항상 최상에 있을 수 있습니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나의 것’이 되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며, 만일 ‘나의 것’이 된다면 유용하게 되니 더욱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재 주어진 어떠한 것에서도 평온을 얻을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원함이 없는 원함’이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함’입니다.
과거에 대해서 반응하며 괴로워하지 맙시다. 현재에 것들에 떠내려 가지 맙시다.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거나 기대에 부풀어 들뜨지도 맙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나를 이해해 준다면 물론 실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나는 나의 사고, 나의 가치를 그가 동의해 주기를 바라지도 않고 제의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그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이해와 통찰과 가치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기쁨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누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해서, 조건이 주어지면 나누는 것보다는 전달할 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임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전달하려고 매어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행히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담마 안에서 더불어 환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때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나를 가지고 꽤나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하고 나머지는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슴 아파하지 않고, 그렇게 미련 두지 아니하고 남겨 놓습니다. 세상의 짐을 다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짐 없이 단순하게, 평화롭게, 평온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사랑을 위한 삶을 사는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무엇을 다하려는 것은 사랑의 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자아성이 근거하여 발동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의미있는 삶이란 악, 불선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서 성립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 불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과 지고의 가치를 꾸준히 발견하려 하고, 모색하려 하며, 이해하려 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삶은 재산, 명예, 지위, 권위 등의 획득이나 축적 보다는 올바른 앎의 지혜로 풍요로워 집니다. 올바른 앎의 지혜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이란 자기 자신의 내면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올바른 앎을 의미합니다. 그것의 실현은 수행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것이 전제되지 않고 참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경주에서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려 하는 어리석음 보다 더한 어리석일 뿐입니다.
고통을 피하지도, 비난하지도 맙시다. 오로지 고통을 해결만 하려고 서두러지도 맙시다. 고통 속에서 자기의 본질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것을 삶의 주제로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수행입니다. 그것이 삶에서 성장하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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