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보시

Dhammarakkhita 2016. 12. 18. 11:44


보시


 이번에 할 법문의 주제는 ‘사랑’이었는데 지난 5월 말 우빤디따 사야도께서 우리 선원에 방문하셨을 때, 선원 회원들이 정성으로 공양을 올린 것에 대한 사야도의 보시에 대한 법문을 하신 것에 연하여 보시에 대한 담마를 전하여야 할 필요를 느껴 이번 법회에서는 ‘보시’에 대한 얘기를 할려고 합니다.


 붓다께서는 ‘야사’에게 보시의 공덕을 먼저 말하고 이어서 계율의 미덕을, 다음은 천상에서의 쾌락적인 삶의 미덕을 말하고는, 마지막으로 도와 과의 증득의 미덕을 설파하셨습니다. 붓다는 보시에 대한 미덕을 ‘야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보시행은 현생에서나 미래생에서 행복을 얻는 원인이며, 닙빠나의 기쁨을 얻는 원인이다. 보시행은 인간과 천상인에게 모든 종류의 즐거움을 얻는 으뜸가는 원인이다. 그것은 또한 물질적인 감각대상들이 풍요롭게 되는 원천이다. 불행에 의해 위험에 빠트려진 존재들에 대하여 그것은 또한 좋은 안내자이며, 안전한 장소이며, 휴식처이며, 은신처이다. 내생과 마찬가지로 현생에서는 좋은 안내자, 안전한 장소, 휴식처, 은신처로서 기대고, 바탕이 되며, 매어 달릴만한 곳이 보시만한 것이 없다.

 실로, 이 보시행은 보배로 장식된 사자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대한 지구와 같이 기댈 곳이며,  눈먼 자들이 붙잡고 갈 수 있는 밧줄과 같이, 의지할 곳이며, 매어달릴 곳이기 때문이다.

 이 보시의 공덕행은 고통의 고난을 건너기 위한 배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싸움터에서 용맹과 무용으로 무장한 지휘관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물질적인 탐욕과 인색과 같은 적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거나, 적을 물리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곤궁, 빈곤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으므로 잘 보호된 도시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질투, 인색함과 같은 불건전한 더러움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므로 연꽃과 같은 것이다. 질투, 인색함과 같은 불선의 폐물을 태워버릴 수 있으므로 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적들에게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독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공포로부터 벗어나 있으므로 사자의 왕과 같은 것이다. 보시자는 내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어떤 적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또 그것은 어마어마한 힘이므로 큰 코끼리와 같다. 그것은 또한 4가지 불행의 죄악의 곳에 처해진 사람을 네 가지 행운의 위험이 없는 곳으로 옮겨 놓아줌으로 천마의 왕과 같은 것이다.


 보시행은 또한 붓다가 걸어왔던 좋은, 진실한 길이다. 나도 바라밀을 실천수행할 때 위대한 보시행을 행하였다.

 덕의 상속인인 보디삿타로서의 생에서, 나는 불꽃더미 속으로 나 자신의 몸을 던지는 보시행으로 보시를 받는 자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었다.

 더 나아가, 보시행의 공덕은 천상의 왕, 죽음신의 왕, 브라만도 만족시킬 수 있다. 종국에는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붓다께서는 아직 귀의하지 않은 대중들에게 설법하실 때마다 늘 ‘베풂’의 덕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먼저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이 ‘베풂’의 공덕을 이해하게 된 다음에서야 붓다께서는 윤리・도덕인 계율, 인과법, 출가의 공덕과 같은 담마들을 말씀하셨고, 그들의 마음에 이런 담마들이 깊이 새겨진 다음에야 사성제를 설해 주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베푸는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인간적인 삶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인덕(人德)의 바탕입니다. 베푸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인간 됨됨이가 얼마나 깊은지 또는 자기의 한계를 얼마나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는 수행의 길로 들어선 자가 우선적으로 닦아야 할 덕목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무언가를 베풀면 그것은 바로 공덕과 선업의 바탕이 됩니다. 그것은 담마의 길로 들어선 자에게 도덕성과 선정력과 통찰력을 계발하는 데 도움을 주고,이미 담마를 보기 시작한 자에게도 경제적 안정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보시를 행한다고 해서 곧바로 지혜가 나타나거나 사성제가 깨달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시는 깨달음의 직접적인 필수 요소는 아니지만 수행인이 담마를 보기 위해 기울이는 온갖 노력을 뒷받침해 깨달음의 토대가 되고 새로운 마음의 각오를 갖게 합니다.


 베풂은 관대함입니다. 보시행에서는 보시물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행위 이전에 관대함, 즉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수행의 목표는 결국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인데, 관대한 마음을 키우면 곧 탐욕과 성냄이 누그러들면서 마음이 유연하게 되어 어리석음을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보시의 행위는 다른 선행과 마찬가지로 인과법에 따라 장차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가 그 같은 사실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보시는 금생에나 다음 생에 이로움을 가져다주지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바른 이해와 조화될 때 보시의 공덕은 훨씬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 보시의 여러 요소들을 통하여 보시의 본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보시의 동기

 가. 불편한 기분으로, 혹은 상대방의 비위를 거슬리려는, 혹은 모욕하려는 마음으로 준다.

 나. 두려운 나머지 준다.

 다. 전에 받았던 것의 보답으로 준다.

 라.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내게 주겠지’ 생각하며 준다.

 마. 주는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아서 준다.

 바. “나는 밥을 지었는데 이 사람들은 밥을 하지 않았구나, 밥을 해 놓은 사람이 밥 없는 사람에게 주지 않는 것은 온당치 못하지” 생각하며 준다. 그만큼 애타적인 동기로 베푸는 사람들이다.

 사. “이 공양을 올리면 덕 있는 사람이라는 칭찬이 자자해 지겠지” 생각해서 준다.

 아. 자신의 마음을 가꾸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보시를 한다.(A,4. 236)

 자. 집안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공양이 베풀어질 수도 있다.

 차. 사후에 천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바람 역시 보시의 동기 가운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타. 베푸는 것 자체가 기쁜 일이므로 좋은 기분을 맛보고자는 생각으로 베풀기도 한다.(A.Ⅳ, 236)


 경전에서는 그 무엇도 바라는 마음 없이 공양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받는 사람에게 집착을 가지고 베풀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나중에 쓸 것을 염두에 두고 공덕을 쌓아 두자는 생각이나 죽은 후에 보시의 과보를 누리기를 바라며 베푼다면 이는 질이 낮은 보시입니다. 보시의 동기로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욕심과 이기심의 추한 때를 벗겨내고 마음을 아름답게 닦아나가겠다는 의지입니다.

 또한 보시행에 있어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보시하는 사람이 베풀기 전과 베푸는 동안, 그리고 베풀고 난 후에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별없이 되는 대로 주는 것과 지혜롭게 베푸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데, 덕을 베푸는 모든 과정이 지혜에 입각하여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수승한 보시행이 됩니다. 지혜롭게 베푸는 데는 세 가지 경우가 있으니,


 첫째,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업의 법칙에 따라, 보시 행위는 미래에 반드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명히 이해하면서 베푸는 것.

 둘째는, 베풀어지는 물건이나 주는 이, 받는 이 모두가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베푸는 것.

 셋째, 깨달음을 향한 노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베푸는 것.


 보시의 동기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무엇보다도 열반을 성취하고자 쏟는 노력들을 북돋우기 위해 베풀겠다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시를 통해 참다운 평온과 평화 그리고 청정함을 얻고자 한다면, 완전한 베풂인 보시 바라밀을 실천해서 깨달음의 열매를 맺을 공덕의 저금통장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목표를 세우고 나갈 때 우리의 마음은 베푸는 행위 뒤에서 자연히 유순해질 것이며, 이 유연하고 푸근한 마음이야말로 깨달음을 이루는데 가장 토대가 되는 선정과 지혜 계발에 꼭 필요한 자질로 작용할 것입니다.

 만일 보시하지 않으면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좋지 않은 눈으로 볼까봐 불안해서 혹은 구걸하는 사람을 귀찮아하며 떼어버리기 위해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유지하기 위한 압력에 못 이겨 베푼다면 그 공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미미한 결과 밖에 얻지 못할 것입니다.

 외부에서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하는 베푸는 것 역시 이기심의 차원에서 행해지는 것이어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또한 단순히 상대의 호의에 대한 응답으로 베풀거나 혹은 상대로부터의 보답을 바라고 베푸는 것 역시 바람직한 것이 못 됩니다. 전자의 경우는 비겁하게 뇌물을 건네주는 것과 같고 후자의 경우는 단순하게 빚을 갚거나 빌려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하겠습니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는 이 삼독심의 첫 번째 항목인 탐욕을 무찌르는 데 있어 최상의 무기가 보시행입니다. 수행자가 마음 닦는 수련 과정에서 제일 먼저 실천해야 할 것으로 보시행 만큼 유용한 것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개체를 ‘나’라고 여기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을 ‘내 것’이라고 당연시 하며 이기심에 싸여 있으므로 그 가운데서 탐욕이 단단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보시행은 이러한 이기심을 놓는 수련으로서 탐욕이라는 독성을 치유하는 해독제가 됩니다.

 탐욕만이 보시의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과법이나 죽음 후 세계에 대해 이해가 없을 때도 베풀고 싶은 마음은 생겨나기 어렵습니다. 보시행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위대한 공덕행을 실천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방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2. 보시를 하는 자

 디가 니까야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는 맛난 것을 즐기면서 남에게는 맛없는 것을 주는 사람은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종이다. 자신이 즐겨하는 것과 같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는 선물의 친구 쯤 된다. 자신은 아무 것이나 되는 대로 만족하며 남에게는 좋은 것을 베푸는 사람, 그가 곧 주인답게 베푸는 자이며 자신이 베푸는 선물의 어른이요 주인이다”(D.1.137:kutadanta Sutta)


 베푸는 자는, 보시를 하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야 하며, 베푸는 동안에도 즐겁고, 베풀고 난 다음에도 만족스러워야 합니다. 베풀기 전이나 베푸는 동안이나 베풀고 나서도 욕심의 흔적이 조금도 없이 무언가를 베풀 때, 그 고결한 마음에 의해 행해진 보시물이야말로 실로 위대한 것이 됩니다. 고결한 마음으로 베푸는 사람은 베풀어 볼 기회가 생겼다는 생각에 보시하기 이전에 이미 즐거우며, 다른 이의 아쉬움을 충족시켜 기쁘게 해준다는 점에서 베푸는 동안에도 즐겁고, 베풀고 나서는 좋은, 의미 있는 일을 하였다고 생가하며 만족합니다.(A.Ⅳ, 220)


3. 보시를 받는 자

 보시를 받는 사람이 얼마나 청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보시의 공덕을 결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됩니다. 즉 받는 사람이 훌륭하면 할수록 보시자에게 돌아올 공덕이 큰 까닭에 가능한 한 가장 훌륭한 사람에게 보시를 행하는 것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한 번은 코살라 왕이 붓다께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할 것인지를 묻자 붓다께서는 “베풀고 나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에게 베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다시 큰 공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에게 베풀어야 되는지를 묻었습니다. 붓다께서는, 먼저 덕스러운 이에게 베푼 공양이 큰 결실을 맺는다고 답하시고, 이어서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지계, 선정, 지혜, 해탈지견을 성취한 덕 있는 출가 수행자에게 베푼 공양이 가장 수승한 공덕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에게나 엄청난 보시하는 것은 공덕을 쌓는 면에서는 큰 가치가 없습니다. 그것보다 정견을 지닌 수다원 한 사람을 공양하는 공덕이 크고, 백 명의 수다원보다 한 사람의 사다함을 공양함이 더 큰 공덕이 됩니다. 아니함, 아라한, 벽지불 그리고 정등각불에게 하는 보시 공덕이 더 큽니다. 붓다와 상가를 함께 공양하는 것이 붓다 한 분만을 공양하는 공덕보다 크며 언제 어디서나 상가가 사용할 절을 세우는 이는 큰 선행이 됩니다.

 그러나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그보다 더욱 훌륭합니다. 오계를 지키는 삶은 더욱 더 값진 일입니다. 그보다 더 나은 것은 자비관을 닦아 자애심을 계발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가장 수승한 것은 열반으로 이끌어 줄 본체가 없음을 꿰뚫어 보는 ‘무아의 지혜’를 계발하는 일입니다.

 정신적으로 그다지 향상되지 못한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에도 보시는 역시 유익함이 있습니다. 베푸는 이의 뜻이 좋으면 비록 받는 사람에게 도덕적인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보시하는 사람은 공덕을 쌓게 되며, 나아가 이런 보시행으로 인해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탐욕에서 벗어나려는 성향이 굳건하게 자리 잡힙니다.

 또한 나쁜 사람을 억지로 좋은 사람이라 여기면서 베풀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무언가를 베푸는 동안 자신이 어떤 자세로 하고 있는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4. 보시물

 무엇이든지 유용한 것이면 다 보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보시물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물질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베풂의 일반적인 형태는 물질적인 보시입니다. 이 때 보시물이 꼭 비싼 것이어야만 큰 공덕을 가져온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루에 밥 한 그릇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그날 양식의 전부인 한 그릇의 밥을 자기 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보시할 때 그는 매우 큰 보시를 한 셈이고 공덕 또한 지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부자가 스님이 탁발하러 올 것을 이미 알았으면서도 앞의 가난한 사람이 한 것과 같은 분량의 밥만을 보시하였다면 그 공덕은 지극히 빈약한 것이 될 것입니다. 미얀마 사람들이 스님들께 공양 올릴 과일은 보통 때 자기네들로서는 값이 비싸 사먹기 힘든, 시장에서 제일 좋은 과일을 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늘 볼 수 있었습니다.

 지니고 있는 것은 적으나 그런 가난함 속에서 베푸는 것이 천 배의 공덕이 있습니다. 빈곤한 살림 속에서 베풀어진 보시가 더욱 값진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근근이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바르게 살며, 분수에 맞게 가족을 부양하고,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남에게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낼 때 그의 보시는 넉넉함 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하는 보시보다 더한 가치를 지닙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깊은 신심으로 베풀 때 보시는 복된 미래를 맞게 됩니다. 보시하는 사람이 덕스러울 때 보시물은 베푸는 사람에 의하여 청정해집니다. 받는 사람이 덕이 있으면 받는 이에 의해서, 양쪽이 모두 덕스러울 때는 주는 이와 받는 이 모두에 의해 청정한 시물이 되며 만일 양쪽 모두 순수하지 못하다면 부정한 보시가 됩니다.(Dakkhina vibhanga sutta:중아함 180)


 오계를 철저히 지키는 것도  위대한 보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계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계행을 통해 모든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며 자비와 은덕을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올바른 행동을 통하여 사람들을 안심시켜 주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지켜 준다면 이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보시행이 됩니다.


5. 보시하는 태도

 보시행을 할 때는 보시물의 크고 작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베푸는 사람이 선의를 지닌 자세로 보시했느냐 아니냐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가. 공손히 베풀어야 한다.

   받는 사람이 굴욕감을 느끼거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배려하면서 베풀어야 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은 남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대부분 거북한 기분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더욱 낭패스럽게 만들거나 그의 자존 의식을 건드리거나 미안한 마음을 증가시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주는 사람이 기꺼운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 자신이 느끼도록 해주며, 따뜻한 마음으로 보시할 때,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는 서로 간격이 없고 넉넉한 정이 들어 설 것입니다.


 나. 자기 손으로 직접 베풀어야 한다

   보시행을 할 때 스스로 직접 참여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입니다. 이것은 주고 받는 사람 사이에 마음의 다리를 놓아주며, 그것이 곧 보시의 사회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몸소 나서서 따뜻한 인정으로 덕을 베풀 때 이 사회는 서로 걱정해 주고 돌봐주는 하나의 유기체로 융합될 것입니다. 베푸는 사람이 직접 나서서 보시할 때 보시 받는 사람도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며 그 의미를 더욱 깊게 간직할 것입니다.


 다. 버리기에 알맞은 것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

   받는 사람에게 유용하고 합당한 것만을 베풀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을 지도 모릅니다.


 때에 맞추어 베푼 보시는 궁지에 처한 사람의 근심을 덜어주고 긴장감을 해소시켜 주므로 그 가치는 아주 큽니다. 남들이 어려울 때 그저 돕는다는 이타적인 마음으로 베풀며, 본인이나 받는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베풀어야 합니다.


6. 보시의 가치

 보시는 사회 구성원들을 융합시키고 단결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보시는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 사이에 놓인 물질적, 경제적 간격을 없애준다기보다는 심리적 단절을 이어주는 의미에 주목해야 합니다. 보시를 통한 훈훈한 마음을 주는 자와 받는 자가 상호간에 느낄 때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어느 새 사라져 버립니다.

 보시하는 자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친한 사람이 많이 모여 듭니다. 베푸는 일은 또한 정을 돈독하게 해 줍니다.

 앙구따라 니까야에서는, 보시를 베푼 결과 누리게 되는 세간적인 복덕으로 보시하는 사람은 남들의 호감을 얻고, 담마를 얻은 자한들이 그에게 다가와 그의 공양을 받고 그에게 제일 먼저 법을 가르쳐 주며, 그에 대한 좋은 평판이 퍼지며, 보시자는 어떠한 모임에도 자신감과 위엄을 가지고 참석할 수 있으며, 죽은 후에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또 보시자는 인망을 얻고, 고결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그와 어울리며, 재가자의 도리를 다 한 것에 스스로 만족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음식물을 베푸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과 활력과 지성을 주는 것이 됩니다. 또한 남에게 그와 같은 것을 베풀면 실은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스러운 팔정도를 따르는 수행자들에게 베푼 공양은 마치 비옥하고 잘 손질되었으며 물이 충분한 땅에 뿌려진 씨앗이 많은 수확을 내듯이 놀라운 과보를 받게 됩니다.

 어떤 보답도 바라지 않고 베풀어진 고양은 보시한 사람을 범천에 나게 하고 그는 거기서 아나함과를 성취하게 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극히 얼마 안 되는 보시행과 계행을 실천했을 뿐, 수행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면, 다음 생에서 그는 인간계에 불행하게 태어납니다.

 또 상당한 정도의 보시나 지계들의 선행을 하지만 수행에 관한 이해가 없으면 인간계의 복락을 누리는 데 그칩니다.

 그리고 수행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어도 한없이 많은 보시행을 하고 계를 철저히 지킨 사람은 천상에 태어나게 되며, 그들은 수명과 미모, 복락과 명성 그리고 오관의 감각적 즐거움에서 다른 신들을 능가합니다.(A.Ⅳ, 241-43)


6. 완전한 보시(보시 바라밀)

 보시행 가운데는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들인지, 베푼 결과가 어떤 세속적 이득을 가져올 것인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보시가 있습니다. 그러한 보시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집착을 없애겠다는 생각, 즉 탐욕에서 벗어나겠다는 깊은 뜻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나 가장 주기 어려운 것을 베풀고자 애씁니다. 이처럼 보살들은 언제라도 기회만 오면 오로지 최상의 완전한 보시 바라밀을 실현하기 위해 베풉니다.


 이와 같이 보시 공덕의 위대함을 알면 우리는 수행하는 마음의 바탕에 보시하는 마음을 항상 깔아 놓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늘 보시하는 마음을 놓치 말고 인생을 삽시다. 그 마음이 여러분을 수행을 도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