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우리의 감정은 조용한 때로는 격렬한 강물과 같은 마음을 건너면서 행복과 불행의 무수한 상태들을 일으킵니다. 어떤 감정들은 우리를 환하게 피어나게 하고, 또 어떤 감정들은 우리를 시들게 만듭니다.
생각과 행동으로 상대의 고통을 내 일처럼 안타갑게 여기는 연민과 너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은 행복의 발현을 돕는 밝은 감정들입니다. 강박적인 욕망, 대상에 매달리는 집착, 그리고 증오는 형벌과 같은 불행을 야기시키는 감정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감정들은 발전시키고,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들은 치유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감정’이라는 말에 부여하는 의미를 정확히 밝혀야 합니다. 모든 마음활동은 즐거움이나 고통 그리고 중립 혹은 무관심에 속하는 감정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뇌에는 따로 ‘감정중추’가 없다고 합니다. 감정을 전달하는 신경회로는 인지한 것을 전달하는 신경회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정은 생각의 범주 안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감정은 마음을 제어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어떤 관점을 채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강화하고 타인의 행복을 지향하는 감정을 긍정적 혹은 건설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마음의 평화를 파괴하고 마음을 깊은 혼란에 빠뜨리고, 타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적 감정들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결과가 우리의 행동과 말, 생각이 우리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행복을 주느냐 고통을 주느냐 에 따라 다릅니다. 분노에도 불의를 보고 느끼는 울분인 신성한 분노와 타인에게 상처를 주려는 욕망에서 야기된 성냄의 분노는 구별됩니다. 신성한 분노는 사람들을 예속상태로부터,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분노입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상처를 주려는 옥망에서 생기는 분노는 고통만 불러올 뿐입니다.
유쾌한 감정과 불쾌한 감정은 대립되는 것들일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메커니즘에서 생깁니다. 불행하지 않다고 그것이 곧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슬픔과 불안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기쁨과 행복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통을 제거한다고 해서 반드시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부정적 감정들을 제거해야 함과 아울러 긍정적 감정・정서를 계발시켜야 합니다. 나아가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삼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이로운 행동을 하려는 단호한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기쁨, 관심, 만족, 사랑 등의 긍정적 감정은 마음을 열어주고 생각과 행동의 반경을 넓혀줍니다. 긍정적 생각들은 유연하고 호의적이며 창조적이고 포용력 있는 행동들을 이끕니다. 또한 우리의 지적, 정서적 세계를 넓혀주고 새로운 관점들과 새로운 경험들을 우리에게 열어줍니다. 더 나아가 긍정적 감정들은 내면의 힘을 길러주고 역경을 이겨내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대하여, 부정적 감정은 치욕스럽고 강박적인 욕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부정적’이라는 형용사는 행복과 통찰력, 내적 자유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번뇌를 안겨주는 모든 감정들을 가리킵니다.
‘번뇌’라는 말은 혼란스럽고 번민하는 정신상태, 마음을 괴롭히는 정신상태를 가리킵니다. 증오, 질투, 혹은 강박관념 등은 그것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에게 깊은 불안을 안겨즙니다. 게다가 그러한 것들이 부추기는 행동이나 말들은 대개의 경우 타인들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반면, 선하고 다정하고 관대한 생각들은 우리에게 기쁨과 용기를 주며, 우리의 정신을 열어 내적으로 우리를 해방시켜 즙니다. 또한 호의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더욱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은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경향이 있습니다. 집착은 그 대상을 이상화하고, 증오는 대상을 악마로 탈바꿈시킵니다. 이런 감정들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모든 사물들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믿게 만듭니다.
이와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들은 한결 올바른 사유를 강화시켜줍니다. 이를테면 이타적 사랑은 존재들 사이의, 우리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의 긴밀한 상호의존성을 반영하지만, 이기심은 자신과 타인 사이의 골을 한층 깊게 만듭니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행복으로 인도하는 긍증적인, 정신활동과 비록 순간적인 쾌락은 안겨주지만 결국 ‘불만족’을 강화하는, 부정적인 정신활동의 유형들을 판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들의 본성에 대한 세심한 판단이 요구됩니다. 이를테면 남에게 현명하지만 악의적인 지적을 할 때 우리가 느끼는 희열은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반대로 남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는 무력감 앞에서 느끼는 불만족이나 슬픔은 행복감의 추구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타심을 길러 행동에 옮기도록 도웁니다.
이 분석의 첫 단계는 감정들이 생겨나는 그 방식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감정의 전개과정을 주의 깊게 알아차려서,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또한 파괴적인 감정들과 행복을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되는 감정들을 구분하게 해주는 인식도 동반되어야 합니다. 마음상태의 변화를 위해 자기 자신의 내면의 알아차림과 통찰의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마음을 다스린다 함은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들이 분별없이 표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둑을 쌓아 물길을 만들어 주면 급류도 주변 밭을 황폐화시키지 않고 그 활력을 표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세상에 무감각해진다거나 삶의 풍요로움을 퇴색시키는 일 없이, 갈등을 일으키는 감정들의 그 못된 힘을 제거할 수 있는가?
그 감정들을 무의식 깊은 곳에 처박아두는 걸로 만족한다면 그것들은 내적 갈등을 초래하는 성향들을 점차 키워나가다가 조건이 성숙되면 즉시, 큰 힘으로 불끈 표출될 것입니다.
우선 바람직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형성되었다가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해체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과 감정들은 일어나기는 하겠지만 더 이상 성장하지는 않아 결국에는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분노, 질투, 탐욕 등의 감정들은 자연스러운 것인 만큼 받아들일 만하며, 따라서 반드시 억제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질병 역시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을 바람직한 삶의 구성요소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질병은 치료하여야만 하듯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해야만 합니다. 대부분의 내적 갈등들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 다발에서 생겨납니다.
흔히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펼칠 때 축적된 긴장이 일시적으로 풀리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분노가 폭발하도록 내버려두면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조성되며,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자주 화를 내게 됩니다. 분노가 자유롭게 표현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면 혈압이 내려가지만 화가 폭발하도록 내버려두면 혈압이 올라간다는 것에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니다.
부정적 감정들이 마음껏 표현되도록 완전히 방치되면 우리는 점점 그 습관의 먹이가 되고 말 것입니다. 더 나아가면 우리는 점점 더 쉽게 화를 내게 괴고, 마침내는 만성적 불쾌감과 더불어 ‘못된 성질’을 갖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들이 타인들의 고통을 대할 때 이타적 행위로 사랑을 실현합니다. 이에 반하여 감성이 극도로 예민한 사람들의 경우는 대개 어떤 고통을 보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적 동요에 더 몰두하는 편입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감정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내버려두면서 단지 표출되지만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임시 미봉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억눌린 감정이 심각한 정신적・육체적 장애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감정이 총부리를 우리 자신에게 겨누는 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은 과격한 감정 표현 역시 치명적인 질병들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폭력과 살인그리고 전쟁이 가장 흔한 예입니다. 분노의 폭발로 인해 뇌졸중으로 죽거나, 강박적인 욕망으로 인해 소진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가 되었건 감정과 올바른 대화를 나눌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지와 부정적 감정들이 의식의 흐름에 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일부분과 싸우는 셈이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통찰을 해보면 부정적 감정들은 일시적 정신현상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고통을 주는 감정들이 행복에 해롭다는 사실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는 선과 악에 대한 독단적 구분을 통해서는 알 수 없으며, 어떤 감정들이 장단기적으로 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 번뇌의 악영향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인 방법을 통한 수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방법으로 3가지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고통을 주는 감정들을 상반된 감정을 이용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염기를 이용해 산을 희석시키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교심리학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
「상반되는 두 가지 정신활동이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
는 점입니다.
우리는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를 해치려는 욕망과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하려는 욕망을 동시에 느낄 수는 없습니다. 이 두 가지 충동은 물과 불처럼 대립적입니다. 당신이 호의적으로 손을 내밀 때 주먹질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이타적 사랑으로 단련시키면 우리는 증오를 조금씩 없애나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두 정신상태는 번갈아 이어질 수는 있으나 동시에 공존할 수다는 것입니다.
이타적 사랑은 증오에 대해 직접적인 해독제처럼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수록 남을 해치려는 욕망은 점차 쇠약해지거나 결국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증오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여금 그것과 전적으로 상반되는 마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수행입니다. 먼저 행복을 바라는 자신의 갈망을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까지 확대하고, 나아가 모든 존재들, 친구와 낯선 이들, 그리고 적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면 이타심은 조금씩 점점 더 우리의 정신을 적셔 제2의 천성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탐욕이나 열정적 욕망은 초연함과는 공존이 불가능합니다. 초연함은 마음의 평화를 맛보게 해주고, 편온과 평정이 내면에 깔리어 휴식하게 해줍니다. 욕망과 쾌락은 매우 매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욕망이 고조되는 경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충족시키고 싶게 만듭니다. 욕망은 충복되지 않을수록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을 어지럽히는 욕망을 응시하고 마음을 초연함 쪽으로 돌리면 욕망과 결부된 강박관념은 서서히 녹을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증오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행복을 바라지만, 증오는 상대의 불행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증오’할 때는 정말로 그에게 해를 끼치고 싶어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해치고 싶다면 그 는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다만 소유하려는 집착에 속해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어떤 경우 증오할 때는, 다만 그 사람이 행동하는 방식을 견디기 힘들어서 하는 행위입니다. 그의 행동을 비난하고,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화를 냅니다.
사랑과 연민으로 향하면, 화내는 마음은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정신적 번뇌에 보다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해독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연적 활동을 구속하는 건 가능한 일도 바람직한 일도 아닙니다. 생각이 떠오르는 걸 억지로 막으려 애쓰는 것은 건전한 일도 아니며 소용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감정들을 잘 살펴보면 그것들이 고유의 실체를 갖지 않는 역동적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생각의 실체가 ‘비어 있다’고 말합니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을 그것과 상반되는 감정으로 맞서는 대신 일어난 감정을 그대로 놓아두고, 감정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살펴봅니다.
강한 분노가 덮칠 때, 그것에 휩싸이지 말고,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도 말고, 오히려 그 현상을 세심히 관찰하는 것입니다.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의 먹구름을 보면 너무도 육중해 마치 그 위에 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구름 근처를 날아보면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구름이란 한낱 수증기와 미세한 물방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성냄은 어디서 일어나서, 어디로 사라지는가? 사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생겨나며, 짧은 순간 그곳에 머물다 다시 사라진다는 것일 뿐입니다.
분노를 유심히 살펴보면 궁극적으로 확실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방식에 행사하는 절대군주 같은 실체라 할만한 것은 그 무엇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분노에 아무런 확실한 실체가 없음을 깨닫는 순간 분노는 힘을 잃고 맙니다.
생각이란 한낱 수많은 요인들과 상황들의 일시적 결합일 뿐입니다. 생각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떠오르거든 그것을 피하지 말고 그것을 그대로 들여다보아 그것이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을 잃을 것이요. 미망의 고리도 끝이 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분노가 생겨나는 순간 그것으로부터 해방’ 되는 길입니다.
수행은 우리의 주의를 분노의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분노 그 자체에 집중시키는 데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우리는 분노의 대상이 혐오할 만한 특성을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자신의 분노에 대한 변명을 반드시 찾아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분노 그 자체를 알아차려 통찰하다보면 그것은 통찰의 평온과 지혜 아래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물론 다시 솟아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같은 수행에 익숙해진다면 부정적인 감정은 점점 더 투명해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고질적 기질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가장 섬세하면서도 미묘한 방법입니다. 종종 분노는 행동을 촉구하여 장애물을 뛰어넘게 해줍니다. 또한 명료성과 민첩성, 효율성도 보여주는데,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로는 물론 나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감정에 유해한 특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 감정을 자기와 동일시하고 그것이 실재하는 것처럼 집착하는 허구적 자아입니다. 개인의 여러 습관적 성향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허구적 자아가 이런저런 반을 보이는 것입니다.
본래 감정이란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그것을 우리와 동일시하여 집착하는 순간 곧바로 그러한 것으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아보라는 것입니다.
‘순수 의식’은 모든 정신적 현상의 원천으로서 그 자체만으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며, 사념들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되는 것은 ‘고착화’ 과정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즉 우리가 감정의 대상과 그 감정을 느끼는 주체라고 간주되는 ‘자아’에 집착하는 순간부터인 것입니다.
이 같은 ‘고착화’를 피하는 데 성공한다면 더 이상 외부의 해독제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어집니다. 이는 감정들 그 자체가 그들의 나쁜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촉매제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 빠졌을 때, 떠받쳐주는 구실을 하여 육지로 헤엄쳐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물 자체인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헤엄은 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감정들의 부정적 여향에 휩쓸려 익사하지 않고 그것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정도의 테크닉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수행을 할 수 있으려면 감정들의 언어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요구되며 위험이 없지 않다. 경험 많은 선원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돛을 활짝 핀 채 항해해도 되지만 초보 키잡이의 배는 그러다간 전복되기 십상이다.
감정이 너무도 강렬해서 성찰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아 그것이 표현되는 순간에 다스리기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습니다. 분노나 혹은 모든 강렬한 감정들을 정당화하려고만 드는 ‘불응’의 시기가 있습니다.
이럴 땐 일단 감정이 진정된 후에 그 감정을 분석해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감정이 얼마나 우리를 지배했으며 잘못을 범하게 했는지 깨닫고 새삼 놀랍니다.
정신의 힘을 절대 과소평가 말아야 할 일이다.
이러한 수행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 있어서 매우 수승한 질의 삶의 방식입니다. 이것을 행하기는 실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방법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러한 삶의 방식에 습관이 전혀 되어 본 적인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해보는 것 왜에 달이 뾰족한 길이 없습니다.
정진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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