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시기
현대 사회는 경쟁의 시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쟁력 우위 확보에 혈안에 되어 가고 있는 사회 분위기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하여 겉으로는 찬사를 보내지만 내심으로는 질투・시기를 느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질투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되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냥 마음이 상하고 뒤틀립니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기까지 하는 것을 보더라도 이러한 경향이 매우 보편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질투・시기심의 반대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자기 자신의 행복으로 느껴서 그들의 느끼는 크고 작은 모든 기쁨을 함께 더불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아니겠습니까? 나아가서 그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나의 행복에도 유용하게 작용하는 것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전혀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헤어진 부부들의 경우를 보면 일반적으로 자식들이 전 남편(아내)를 찾아가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성적으로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헤어진 상대에 대하여 적대감에서 물러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 매우 잘되어 있으면 질투심이 내면에 일어나면서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욕망은 고통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이지만 조건에 따라서는 긍정성을 지닐 수 있는 매력적인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질투에는 욕망처럼 매력적인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분노처럼 정의의 호소자로 가장하고 나타나지 않으며, 자만처럼 가식으로 치장하지도 않습니다. 질투는 어떤 면에서 살펴보더라도 그저 보기 흉측스러운 마구니일 뿐입니다.
질투에는 단순한 부러움에서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격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요즘 잘 되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동료를 만나면 가벼운 부러움이 일어납니다. 이럴 경우, 상대에 대하여 부정적 분위기를 지닌 지적으로 자기 자신의 우위를 유지하려고 합니다. 이에 비하여 상대를 자기 중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가 배신당했거나,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던 영예가 경쟁자에게 돌아갔을 때, 질투심은 통제할 수 없는 분노의 폭발을 동반하고 밖으로 표출됩니다.
어떤 경우건 질투・시기심은 자기 자신이 상대보다 드러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겨납니다. 따라서 그것은 미망에서의 헤매임 입니다. 부러움의 격앙된 형태인 질투심은 곧바로 강박관념과 증오로 진행됩니다. 질투심의 결과는 질투심을 유발시킨 멸시만큼이나 비극적입니다.
이 흉측스러운 얼굴을 지닌 질투심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지 못하는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원한을 품는다 하더라도 그대가 질투하는 사람들이 더욱 더 성공하거나 돈을 벌거나 훌륭한 자질을 갖추는 걸 막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질투심에 사로잡혀 우리 자신을 학대한다고 해서 얻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상대를 더욱 잃고 맙니다. 질투의 희생자는 바로 자기 자신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자신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보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행복이 우리에게서 무엇을 앗아갈 수 있겠습니까? 결코 아무것도 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저 자기 자신의 자아가 그것에 상처입고 그것을 고통으로 느낄 뿐입니다. 다만 우리가 우울할 때 다른 사람들의 기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가 아플 때 그들의 눈부신 건강을 못 견디는 것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분노와 번뇌의 원천으로 삼을 게 아니라, 실현된 행복의 살아있는 본보기로 삼는 것으로 의식을 전환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도도한 흐름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사회 주 구성원에게는 물론이요 이제 성장을 시작한 어린 아이들에서부터 청소년들까지 오로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돋보여야만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으로 가치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떻게 질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현대의 이러한 병적인 성향에 대하여 눈 똑바로 뜨고 사회의 내적 상황을 바라볼 수 있어야만 그 도도한 흙탕물의 흐름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진정으로 의미충만한 삶을 지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불의나 배신의 감정에서 생겨나는 질투심은 어떨까요? 유난히 집착하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하지만 이 타는 듯한 고통의 원인에 대한 핵심은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질투에는 사랑은 없고, 자아에 대한 애착으로 소유욕만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하여 애착을 한 것도 사실은 그 사람 자체에게서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느끼는 감각 그 자체에 애착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남편(아내)의 배신으로 마음 깊이 고통 받고 있어. 그가 다른 여자와 행복해 하는 걸 나는 미치도록 견딜 수가 없어. 그이는 그 여자의 무엇이 그렇게도 좋은가?”
그 같은 경우에 태연함을 지키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흥분과 격정 그리고 격렬한 분노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보아야만 합니다. 이 경우, 여러 가지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사랑했던 - 실은 사랑이 아니라 소유욕 이었을 것이다 - 남편(아내)이 사랑의 정 반대인 미움과 증오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남편의 상대녀에 대하여 분노하며 질투・시기합니다. 그리고 그이로부터 소외당함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여기에서 그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내적 자유의 결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대상과 관계 없이 스스로 내적으로 평온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지니고 있다면 상대의 어떠한 행위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훨씬 덜 받습니다. 내적 평화의 주된 적은 자기애, 즉 강한 자아의식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있으면서 행복해하는 걸 보고서 기뻐하지는 못하더래도 최소한 덤덤해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하게 너의 행복을 바란다면 상대가 행복해지는 방식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일지 모릅니다. “당신의 행복은 오직 나의 행복을 통해야만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삶의 방식이 아닙니까?
여기서 지금 저는 부정을 저지런 상대에 대하여 무조건 관용을 베푸는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더불어 살 때는 공동으로 지켜야 할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존중되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이 고정불변함 속에 있으라고 내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의 가치관 또한 진행형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함과 동시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가치의 문제이며 나의 가치의 문제는 나의 내면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당신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그건 그대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그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적 소유라는 아성을 세우는 것은 우리의 자기 자신, 즉 자아에 대한 집착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우리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희생시키면서 자아라는 성을 세운 것은 바로 자아에 대한 애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핵심은 대상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자아의식이라는 부분을 절대로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질투의 대상자에 맞서 최악의 보복을 망상하도록 부추기는 이 강박관념은 대상과 관계없이 자기 스스로 내적으로 평온할 수 있는 삶의 방식과 관계 맺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자신의 내면 깊숙히 잠들어 있는 진정한 사랑과 연민의 결핍 내지는 부족에 기인하는 것임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연민의 성품은 내적인 평온의 성향을 구축하는 것을 도웁니다.
‘평온’이라는 투명하고 빛나는 본성이라고 할만한 성품은 자신의 행복을 나눌 수는 있지만 질투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평온의 투명한 성품은 그런 감정들을 활동사진에 의해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들로 지각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적인 현상일 뿐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햇빛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은 이미지일 뿐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질투에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질투에서 벗어나야 자아의 소유의식에 휘말리지 않고 내적 평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질투에서 벗어남은 질투심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이성으로 통제하는 것임이 결코 아님을 여러분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통제가 아니라 그 일어나는 질투심을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평정으로 나아갔으면 상대가 그럴 수 있게 된 연유을 초월심으로 바라보면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현실적 대체는 그 다음에 ‘유용성’이라는 지혜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결국 이러한 질투, 시기심은 수행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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