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사랑(둘)

Dhammarakkhita 2016. 12. 18. 11:48

사랑(둘)


 지난 정기법회에서의 사랑에 대한 법문에서,

“삶이란 삶의 주체인 ‘내’가 객체인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관계맺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자기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맺는 것과 내가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내’가 자기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얼마나 자기 자신의 내면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느냐의 문제이며, 대상과의 관계맺음은 얼마나 대상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내적 자유와 대상에 대한 사랑의 실현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고,  자기 자신이 내적으로 자유로워져 있는 자 만이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고, 어떤 것이냐고 물음을 받는다면 여러분들은 사랑과 연관하여, ‘애정, 연민, 믿음, 신뢰, 용서, 관용, 배려, 헌신, 희생, 이해’ 등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요목들은 분명히 사랑을 형성하는 요소로서의 덕목입니다. 이 중에서 애정에 대하여 그 중요한 부분을 지난 법회 때 살펴보았습니다. 애정 속에는 소유의식이 도사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소유 양식적 삶에서 사랑이 경험될 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재하는 것을 뜻하며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목을 조르고 질식시키며 죽이는 행위’라고 말하였습니다.

 애정적 사랑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연상되는 것이 ‘애틋함’과 더불어 ‘성적 이끌림’ 입니다. 대상에 대하여 애정적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대상에 대하여 자연적으로 포옹, 입맞춤, 성적 관계맺음 등을 기대합니다. 그러한 바램의 내면에는 실은, ‘너’를 위함보다는 ‘너를 취하여 나의 만족’을 채우려는 의지가 근본적으로 도사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를 소유하려는 삶의 양식이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지금 그러한 성적 행위의 부당함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내면에 담겨져 있는 속성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주목해야 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애정이란 그 내면에는 ‘나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이 근본적으로 잠재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느낀 청춘 남녀가 서로 동의하여 결혼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고 난 뒤, 그들 각자는 결혼이라는 삶의 양식을 취하고 나면 쌍방은 각자에게 상대방의 육체  감정 및 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단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 같은 어떤 것이 됩니다. 결혼한 그들은 이제 각자가 더 이상 상대방의 환심을 살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랑을 새롭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이나 사랑을 받는 방식에 대해 노력하거나, 사랑을 연출하며 재창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결혼한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점 문제는 쌓여가는 것입니다.

 상대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대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즉각적으로 그것과 충돌하며 상대에 대하여 내향적으로나 혹은 외향적으로 반응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애정 심리는, 교묘한 간접적인 적이 친구로 가장해서 사랑의 마음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경계하지 않은 사랑의 마음은 때때로 소유를 토대로 하고 있는 욕망에 의해서 공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 간접적인 적은 숲 속이나 길목에 숨어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간접적인 적인 ‘슬픔, 시기, 질투, 성냄, 혐오, 소유의식’ 등은 애정으로부터 나오며, 사랑의 마음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부모들은 분명히 그들의 자식에 대한 애정을 피할 수 없으며, 자식의 부모에 대한 애정, 남편의 부인에 대한 애정, 그리고 부인의 남편에 대한 애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상호간의 애정이 토대를 이루어 성립된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그러한 애정은 일단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관계는 서로가 더불어 잘 살아보자고 계약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계약의 의미 안에는 상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암묵적인 소유의식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간은 상호간의 이러한 애정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은 평범한 애정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한 본능적인 애정은 반드시 ‘연민, 믿음, 신뢰, 용서, 관용, 배려, 헌신, 희생, 이해’의 덕성을 토대로 하여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명심하여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전혀 문제 될 것이 없고, 연민, 믿음, 신뢰, 용서, 관용, 배려, 헌신, 희생, 이해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성적 행위는 아름다울 것입니다.

 ‘연민, 믿음, 신뢰, 용서, 관용, 배려, 헌신, 희생, 이해’ 등은 모두 ‘나’를 놓아버림으로서 성립되는 덕성입니다.


이들 중 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하는 덕성은 ‘연민’입니다. ‘연민’은 매우 순수한 감정입니다. 연민은 소유적인 요소가 전혀 묻어있지 않고, 타인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가슴 아파 하며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끔 도우려는 지극히 인간애적인 본성입니다. 이러한 연민이 사랑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가장 근본적인 바탕이 됩니다.


 그이를, 그녀를, 내 아들・딸들을, 내 친구를 정말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를 내 안에서 감금해 놓는 것을 포기하십시오. 그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배려하십시오. 그것이 나의 기호, 나의 가치와 충돌한다면 어떠한 이유도 앞세우지 말고 일단은 관용하십시오.

 관용은 사랑을 실현하기 위하여 마련되어야 할 중요한 품성입니다. 관용은 ‘차이’를 받아들이고 배려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조화는 대립적인 것들에 의하여 이루어져 진행됩니다. 또한 인간이 모두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은 구조적으로 인식의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내면의 불완전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정신의 자연적인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와 나 사이의 ‘차이’는 항상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관용이 갖추어져 정착되려면 두 가지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차이가 있음으로서 질서의 세계가 성립한다는 것에 대한 앎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것들과의 평화적 공존을 전제로 하는 유사성의 질서에 대한 앎입니다.


 저는 능수화를 참 좋아합니다. 올 해 늦은 봄에 선원 화단에 어린 능수화 묘목을 세 그루 얻어다 심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지나 살펴보니 그들은 모두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난 홍수가 끝나 풀베기를 하면서 화단을 살펴보니 죽어 가던 능수화 세 그루 모두가 살아나 잘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저 능수화가 자라 꽃을 피우면 능수화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화단 주변을 화사하게 치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능수화는 결코 그 옆에 꽃을 피울 과꽃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세계의 조화입니다. 능수화는 능수화대로, 과꽃은 과꽃대로, 목단은 목단대로, 봉선화는 봉선화대로 아름다움과 향기를 각기 발휘하며 전체의 조화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차이가 곧 조화를 창조합니다. 자연은 우리를 엄청난 다양함과 무궁무진한 변화를 근본으로 하는 한없이 새로워지는  현상을 통해 풍요로움의 길로 안내합니다. 따라서 상대가 나와 다른 것을 기꺼이 포용하여 그 차이가 나타나는 것을 기뻐해야하고, 그 차이에서 도리어 나의 부족과 결함을 보충해야 합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이 조화로 나아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랑의 실현이 보다 자유를 안고 가능할 것입니다.

 이러한 관용은 마침내 평화를 가져옵니다. 이 관용이 가져오는 평화는 진리를 향한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 자체로 자기 자신과 ‘너’를 위한 구원입니다. 이 관용의 결과로 오는 평화는 우리에게 휴식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열정과 두려움을 진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열정과 두려움을 진정시키지 못하면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승화와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이 관용은 때로는 오류와 악을 인정하는 듯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이성의 발휘를 방해하는 긴장상태를 완화시켜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연민과 관용이 자리하면 배려, 헌신, 희생이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됩니다. 사랑의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연민, 믿음, 신뢰, 용서, 관용, 배려, 헌신, 희생 등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상대에 대한 앎, 즉 이해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상대를 이해한다’ 함은 상대의 내면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의 ‘앎’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상대의 내면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내면은 항상 숨겨져 있으며, 드러난다고 해도 거의 가면을 쓰고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쌍방 간에 사랑을 할 때 서로 의기투합이 잘 이루어져 긍정적이고 즐거울 때는 아무 문제가 기어들지 못합니다. 이럴 때는 서로가 상대를 잘 이해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관계가 삐꺽거리기 시작하면 문제는 복잡하게 됩니다. 상대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모르기 때문에 그는 발생된 문제의 근원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 역시 나의 내면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는 대부분이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내면을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의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나의 내면의 문제는 나의 부정적인 성향들입니다. 그 부정적인 성향에 대하여 임하는 나의 부정적인 태도까지 포함하여 들여 다 보고 그것을 분명하고, 정확하게 이해한다면 반드시 상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의 내면을 이해한다는 것 또한 상대의 내면을 이해하기 어렵듯이 매우 어렵습니다. 나의 내면 또한 항상 가면을 쓴 채 밖으로 기어 나옵니다. 때로는 가면을 쓰기도 전에 도망가 버리기 일쑤입니다. 이러한 나의 내면을 이해한 자는 ‘너’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면을 형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본질은 모두가 ‘욕망’인데, 이 욕망이 드러나는 양상은 서로가 다르나 그 뿌리는 모두가 ‘자아의식’이라는 허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의 문제를 이해한 자는 반드시 ‘너’의 내면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대한 ‘이해’에 주목하여 진정으로 실행하려는 자는 이제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가능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상대에 대하여 연민, 믿음, 신뢰, 용서, 관용, 배려, 헌신, 희생의 덕목이 자연스럽게 찾아들게 됩니다.

 그대는 언젠가는 특정한 어떤 이 만을 사랑할 수 있는 경계에서 벗어나 누구나 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안에서 아이들은 항상 온갖 것들로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양말・속옷・바지를 아무렇게나 벗어서 던져 버립니다. 어머니는 ‘벗은 것들은 반드시 세탁기에 넣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따라주지 않는 아이들에 화가 납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주입시키는 것이 교육이고, 나는 지금 아이들의 올바른 행동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들을 나무라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자신의 생각은 당연히 옳은 것이라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애들이 날이면 날마다 양말・속옷・바지를 바닥에 벗어 던져놓는다는 것이고, 아이들은 그것들이 바닥에 어지럽혀져 있어도 아무 불만이 없고,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양말・속옷・바지들이 주워지기를 바란다면, 그것들을 주워야 할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요목이 있습니다. 그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의 근본은 아이들이 어지럽히는 잘못된 습관에 대한 걱정스러움이 아니고, 어지럽혀져 있는 상황을 못 견뎌 하는 자신의 마음이며, 다음은 자기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한 속상해하는 반응입니다. 고통의 원인은 아이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삶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아이들 혹은 양말・속옷・바지들이 아니라, 바닥에 놓인 그것들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생각에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해결책이 있는가? 역시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은 객관적인 교육의 정당성에 가치를 두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자유에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양말・속옷・바지들을 줍는 것은 일차적으로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줍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양말・속옷・바지를 줍는 것에 고통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줍는 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다면, 그 순간 양말・속옷・바지를 줍는 일은 이제 속상해하고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을 한 것이 됩니다. 어지럽혀진 것들을 주운 뒤 말끔해진 바닥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이 됩니다.(여기서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집안의 무게에서 벗어남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취급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아이들의 행동에 대하여 미워하고 성내는 마음에서 벗어나면 아이들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우리들의 내면을 뒤돌아보게 하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막 출발하려는 기차에 ‘간디’가 올라탔습니다. 그 순간 그의 신발 한 짝이 벗겨져 플랫홈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기차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간디는 그 신발을 주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얼른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벗어 그 옆에 떨어뜨렸습니다. 한 승객이 간디에게 그렇게 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간디는 미소를 지으며 말합니다.


 “어떤 가난한 사람이 바닥에 떨어진 신발 한 짝을 주웠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나머지 한 짝마저 갖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순간의 간디의 마음 안에 ‘나’, ‘나의 것’에 대하여 집착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사랑의 마음은 소유의식이 근본이 되고 있는 개인적 애정도 아니고, 단순한 이웃 사랑도 아닙니다. 또한 사랑의 마음은 동물들을 포함한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포용하기 때문에 단순한 보편적인 형제애가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은 정치적인 형제애, 민족적인 형제애, 또는 국가적 형제애 또는 심지어 종교적 형제애도 아닙니다. 어떤 국가주의자들은 국가를 너무나 사랑한 때때로 죄 없는 남자와 여자, 어린이들을 단지 그들이 금발 또는 파란 눈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잔인하게 죽입니다.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이스라엘의 레바론에 대한 민간인 살인 폭격과 그것을 묵과하고 있는 미국의 야만스런 행동들이 적나라한 사례일 것입니다. 지금의 이스라엘 인들은 독일의 나치로부터 그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그들로부터 사랑의 정반대의 품성만을 배운 것 같이 보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또한 종교애도 아닙니다. 문명화되어 보이는 21세기에도 어떤 종교의 추종자들은 다른 신앙을 가진 자들을 단지 자기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서로 다른 종파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거나 냉혹하게 박해하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숭고한 사랑은 이러한 종류의 편견 있는 애정을 모두 초월합니다. 이것은 그 대상과 범위에서 무제한적입니다. 이것은 차별을 만들지 않습니다. 즐거운 것과 즐겁지 않은 것, 부자와 가난한 자, 높은 자와 낮은 자, 악한 자와 선한 자, 남자와 여자,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향기로운 사랑의 축복을 평등하게 쏟아 붓습니다.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랑의 마음은 친구, 적 그리고 중립적인 자에 대해서 똑같이 대하듯이 우리자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정도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랑을 위해서 내가 내면적으로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내적으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내가 ‘나의 자아’에서 빠져 나와야만 가능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극치는 자신을 모든 존재들과 동일화시키면서 자신과 다른 것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이른바 ‘나’란 것은 전체에서는 잃어버립니다. 구별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하나’가 실현됩니다.


 사랑의 마음과 정반대되는 것은 성냄, 악의, 미움, 혐오, 시기 등입니다. 사랑의 마음은 성냄이나 복수심, 악의, 미움, 혐오, 시기에 불타는 행위와는 함께 공존하지 못합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미움은 미움을 통하여 소멸되지 않는다. 오로지 사랑의 마음을 통하여 그것들은 사라진다.”


 사랑의 마음을 지닌 있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은 활력 있는 건강한 힘이기 때문에 적대적인 자극에 대해서 중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미워하는 생각이 이 육체에 유독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마음도 건강한 육체적 효과를 만들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 큰 깨달음을 이룬 후 고향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겨우 일곱 살 밖에 안 된 아들 라훌라는 부처님께 다가가서 말했습니다.


“오, 구도자이시여, 당신의 그림자조차 저를 기쁘게 합니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사랑의 힘을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너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는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너의 내면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내면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자만이 너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합니다.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고,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공부에 정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