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법문/냐나로까스님

사랑(하나)

Dhammarakkhita 2016. 12. 18. 11:46

사랑(하나)


 이번 법문은 사랑에 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서 너무나 중요한 삶의 주제이므로 2-3회에 걸쳐서 주요한 부분을 살펴보도록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산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삶의 주체인 ‘내’가 객체인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가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먼저 생물체로서의 ‘내’가 자기 자신의 내면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관계 맺음은, 전자의 경우는 내면적으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 그래서 얼마나 평온한가의 문제이고, 후자의 경우는 얼마나 ‘사랑’을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내적 자유와 대상과의 사랑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으로 자유로운 자만이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부분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은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서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이 없습니다. 어쩌면 애정적 사랑을 찾아 나서며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산다는 중요한 의미로 간주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참의미를 보다 깊이 살펴보려 하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것에는 매우 인색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치 그러니까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사유하고 명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랑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사랑이 무엇인지’ 나아가서 사랑이 어떤 토대 위에서 형성되는지에 대해 깊은 사고와 명상을 하여야 합니다.


 ‘어머니를 혹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이를,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왜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주고 있는가?’

 또한 ‘그 사랑을 어떻게 받고 있는가’


 이러한 면에 대해 사고하고 명상하다 보면, 사랑이란 것은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조건 지워진 것들은 영원하지 않다는 담마를 배워 알고 있습니다. 사랑 또한 내면에 있는 고정적인 어떤 실체가 아닙니다. 사랑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베풀어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끊임없이 창조되고 끊임없이 베풀어지며 존재합니다. 사랑은 베풀며 관계 맺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소유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귀속되거나 누군가를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그런 사랑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내 부모’, ‘내 형제’,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사람들’, ‘내 나라’ 이런 사고에 근본을 둔 소유적인 감성은 편견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소유양식의 의식이 바로 우리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근원입니다.


 이러한 소유양식적인 삶에서 사랑이 경험될 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목을 조르고 질식시키며 죽이는 행위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랑이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 머물면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그 날 오후에는 법정에 가 이혼 절차를 받기로 되어 있는데, 아침에 일어나 ‘Honey’ ‘Honey’하면서 상대를 부른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마음의 바탕 위에서 자식을 위한 행위를 하는가의 문제는 여전히 단순하게 결론 내려질 사항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의 결정인 그런 결혼을 바라고 있습니다만 현실에서는   사랑에 의해 결혼을 했든, 아니면 사회적인 편의나 관습과 전통에 의해 결혼을 했든, 안타갑게도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는 부부의 경우는 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결혼을 통하여 두 사람은 서로 살아가면서 사회적 편의, 관습, 전통, 상호의 경제적 이해, 자식에 대한 공동의 관심, 상호의존 또는 상호증오나 불안감, 두려움, 불신감 등을 느끼면서 상대를「사랑」하는 것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의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부정적인 부분들이 두터워지면서 결혼한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며 또 지금까지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어느 한쪽 또는 양쪽 모두가 깨달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제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이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또 거리를 둔 채 사이좋게 협동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은 아니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식에 있어서 어쩐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음에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견해는 상대를 더욱 자주 바뀌게 했지만 보다 정직해지게 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사랑의 빈도를 높인 것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전의 상대보다는 새로운 상대와 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다. 사랑에 빠지다」에서부터 「사랑을 가진다」는 환상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사랑에 빠진」 부부들의 결혼 과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상대를 만나 서로가 호감과 관심을 느껴서 연애를 하게 됩니다. 연애 기간 중에는 어느 쪽도 아직 상대방에 대해 자신이 없으므로 서로 상대방에 관심을 느끼게 하려고 대단히 노력합니다. 양쪽은 모두 적극적으로 활기를 띠어 매력적이며, 흥미를 끌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그러한 모습들을 참 아름답게 보며 사랑을 예찬합니다. 이 과정에서 각자는 상대방에게 주고, 상대방을 이해하려 하고, 상대방을 자극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이러한 양상은 ‘존재하고’ 있는 양식입니다. 이 경우에는 분명히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 동의하여 결혼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혼 후 결혼이라는 행위에 의해서 상황은 흔히 근본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들 각자는 결혼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각자에게 상대방의 육체  감정 및 관심의 독점적 소유를 인정하는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 같은 어떤 것이 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더 이상 상대방의 환심을 살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됩니다. 이제 그들은 사랑을 위하여 노력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을 주는 것이나 사랑을 받는 방식에 대해 노력하거나, 사랑을 연출하며 재창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서로에 대해 실망하고 권태를 느끼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된 책임이 자기 자신이 아닌 절대적으로 상대방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 각자는 상대방이 변한 원인을 찾아내며, 속았다는 느낌을 갖거나 상대방에 대해서 잘못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사랑할 때의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이미 아니며, 계속하여 새로이 형성되어가는 진행형의 존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소유」적인 사랑에 대한 생각이 사랑하지 않게끔 한 과오임에 대한 중요한 면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이제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대신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돈  사회적 지위와 명예  가정  자식 등을 함께 소유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자포자기합니다. 이리하여 사랑에 바탕을 두고 시작된 결혼이 서로 간의 소유형태로 변모해 버리면서 “산다는 것이 뭐 뾰족한 것이 있느냐?”고 체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 이러한 양상이 두 이기주의가 하나로 뭉쳐져 「가정」이라는 조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미충만한 삶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부부가 지난날의 사랑의 감정을 소생시키려는 희망을 가질 때, 새로운 상대가 자신의 간절한 희망을 충족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양상으로 새로운 상대를 찾아나서는 삶의 방식을 흔히 선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란 오직 사랑뿐이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그들의 존재의 표현이 아니라, 복종하기를 바라는 소유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한 삶의 양식에서 의식이 전환되지 않은 한 그들은 반드시 사랑에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유적인 사랑을 숭배하는 사람은 결국 너무나 수동적이 되어 또 다시 권태에 빠지고, 자신의 옛 매력의 나머지조차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된 이유는 모든 것이 상대방에게 있으며, 자신이 어리석게도 상대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 결혼일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결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소유 및 존재구조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에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속한 사회구조가 지닌 인식과 가치관에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인 이유는 자신의 미혹함에 기인한 무지, 즉 ‘조건 지워진 것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고이다’, ‘모든 법은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보편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사랑은 하나의 사물, 즉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여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단지 추상적 개념입니다. 실제로는 「사랑의 행위」만이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생산적인 능동적 행위입니다. 그것은 사람  나무  그림  사상 등을 이해하고, 존중하고, 긍정하고, 대응하고, 누리는 행위입니다, 그것은 그의(그녀의, 그것의) 생명력을 증대시키고, 소생시키는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기를 재생시키고 자기를 증대시키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을 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하지 말아요.”라고하면서 자신과 상대를 제한합니다. 사랑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우리를 제한하거나 구속하지 않습니다. 구속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의 방식으로 배움을 얻게 하라고 가르칩니다.

  구속을 지닌 사랑은 불안정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자신이 어떻게 느끼는지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립과 갈등만을 낳을 뿐입니다.


 그러면 상대를 제한하여 구속하지 않고 사랑을 자유롭게 우리는 것이 가능한가? 사랑을 진정으로 누리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만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면적으로 자유로워 평온을 누리는 자는 사랑을 소유의식에서 벗어나 삶의 존재로 받아들이며 상대를 제한하려 하지 않고 사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을 누린다함은 상대를 자유스럽게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인간의 지니고 있는 본성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악의보다는 사랑과 연민이 더 투명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사랑이 없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배워야 합니다. 배워서 이해해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도록 노력해야 가능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면 내가 너로부터 사랑을 받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나아가서 모든 배움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