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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혜조스님]7월 집중수행 입재법문-수행과 삶의 의미

Dhammarakkhita 2016. 12. 18. 11:47
 

06. 7월 집중수행 입재 법문


수행과 삶의 의미


 요즘 중, 고등학교 학생 아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휴대폰, 인터넷 중독입니다. 이러한 경향은 아이들에게서 그치지 않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직장에서의 노동시간 이외는 대개 어느 한 매체, 예를 들어 인터넷, 채팅, 인터넷 쇼핑, 온라인 고스톱 포카 혹은 바둑, 온라인 게임, 텔레비전 드라마, 스포츠 중계 등에 고정되어 시간을 소비하는데 중독 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 현대적인 미디어의 막강한 영향권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러한 매체를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해서 즐긴다’ 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미디어들의 일방적인 권유에 강요당하고 있습니다. 이제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은 미디어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고아원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속의 현대인들은 이 미디어가 일러주는 삶의 방식을 충실히 복기하는, 정신의 고아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터넷 사이트 초기화면의 뉴스들을 보면 연예인들의 시시콜콜한 사생활 얘기가 기사의 톱으로 오르고, 아무 내용도 없는 대상을 선정적인 사진과 문구로 정신적 고아들의 눈을 붙잡고, 스포츠 기사로 아우성이며, 맨 구석에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대기근으로 수 만 명이 굶어죽을 위기에 놓였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이게 요즘의 뉴스의 편집 현황입니다. 이것은 실로 인간성이 말살된 가당찮은 ‘퇴폐’의 작태 아닙니까.

 이와 같은 미디어의 말초적인 포위 너머에 사회는 엄청난 문제로 병들어 앓고 있습니다. 환경파괴, 숲의 파괴, 동식물의 파멸, 자원의 보고와 같은 갯벌의 파괴, 농촌 붕괴, 폭력의 증가, 학교붕괴, 가족붕괴, 사회붕괴, 윤리의식의 무감각, 정의감의 소멸, 물질만능 심리, 자기중심주의의 이기주의, 배타주의 등등.

 특히 계급 같이 굳어져 가는 양극화 현상 속에서 뒤처진 사람들은 아둥바둥 살아봐야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아 절망합니다. 경쟁의 우위에 서 있는 사람들도 삶이 공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선진국일수록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자도 많다는 것은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우슈비츠에서 3년간을 보낸 체험을 바탕으로 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현대문명의 고질병인 우울, 중독, 막연한 공격적 성향은 모두 똑같은 원인에서 나온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별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절망감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책을 보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순간, 끌려온 유대인들의 인생은 깨끗이 사라져 버립니다. 다만 번호 매겨진 예비 주검으로서 살아 갈 뿐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절망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뺏길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자유를 깨닫습니다. 닥친 고난을 자신을 강하게 하고 가치를 만드는 계기라고 확신한다면, 시련은 오히려 축복이 됩니다. 아무리 잔혹한 독재자라 하더라도, 이 자유만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어떤 고통의 상황도 견딜 수 있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저서에서, 수용소 안에서 치료한 한 젊은 여성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나는 운명이 이렇게 엄청난 충격을 준 데 대해 감사하고 있어요. 그전까지 저는 제멋대로였고 정신의 만족 같은 것에 대해 진지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시대가 혼란스러울 때 그 혼란을 극복하게 하도록 이끄는 영웅이 태어납니다. 이와 같이 만약 시련이 닥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세상에 대한 깊은 성찰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이상과 가치에 의해서 죽을 수도 살 수도 있는 존재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 찾기를 포기한 사람은 며칠 못가서 죽음에 이르렀고, 반면에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스트예프스키 역시 “나는 나의 고통이 의미 없어질 때가 가장 두렵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자신의 모든 시련은 딛고 일어나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절대적인 고통으로 변해 버립니다.

 삶의 의미를 놓아버린 사람에게 과거는 고통입니다. 돌아올 수 없는 달콤한 추억도 마음을 아리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놓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나간 과거 세월이란 삶에 있어서 소중한 사항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창고와 같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과거는 그것 나름대로 완성되어서 순간순간 자신의 삶에 소중한 교훈과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고질화 되어버린 부정적인 성향을 뛰어넘어 새롭게 살아가기에 매우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려는 그 행위는 첫 번째 인생에서 망쳐놓았던 바로 그 행위를 되풀이하면서 두 번째 화살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패배감으로 과거를 되풀이 하지 말고 현재에 다시 충실해야 합니다. 과거는 사실, 버릴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럴 때 과거의 실패는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됩니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병을 만듭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자람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은 튼튼한 ‘나’를 새롭게 창조하여 의미 충만 속에서 새롭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자람을 피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일을 그르칩니다. 오히려 모자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을 때, 마음의 짐은 조용히 사라져 버립니다. “신경질증 환자가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고 심리치료사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건실한 이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무리 부정적인 것이라도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일은 실로, 쉽지 않습니다. 학력, 경력, 재산 등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연령대별 출세 기준표’는 너무도 견고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나이 때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채 스트레스와 절망감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기 의미를 찾기 전에 남이 혹은 사회가 부여한 의미에 치여 수동적으로 삶을 ‘살아지고’ 있습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자유’는 경쟁에 치인 우리의 숨통을 트이게 해줍니다. 적어도 우리는 아우슈비츠에서보다는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요.


 우리는 삶의 의미를 찾는 데서 물러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삶의 의미에 도달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 첫 번째는, 일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일과 행위를 단지 돈을 벌기 위해 혹은 이익을 얻기 위해 하는 것에서 단호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일과 행위 그 자체와 하나가 되면 그것을 통하여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 두 번째는, 어떤 것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일과 어떤 사건을 통해서 그것과 수평적으로 관계맺음으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 새로운 경험을 통하여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사람과 진정으로 관계를 맺어 사랑을 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 세 번째는, 자기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무력한 사람도 인식의 오류를 걷어냄으로써 존재관과 가치관의 전환으로 부정적인 자신을 뛰어넘어 의미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충분한 돈을 못 가진 그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원인은 마음에서 기인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음의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사람들은 예외 없이 마음의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과거에 골절상을 입었거나 수술한 적이 있으면 상처가 다 아물었다 할지라도 가끔은 욱신거리는 통증이 찾아옵니다. 마음의 상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오해를 풀었고, 용서해서 이제는 미련이 없다 싶던 과거의 기억이 어느 순간에 독사 대가리처럼 불쑥 고개를 들어 드러나면서 괴로움을 일으킵니다. 과거 아팠던 순간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현재의 괴로움은 배가 됩니다.

 마의의 고통이나 장애가 인생에서 불가피할 것이라면 지나치게 ‘완치’에 집착해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서 분노를 이해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평온을 되찾아야 하나에 주목해야 합니다. 또한 지금 우리가 서있는 현실에서 물러서지 않고 내면의 공포와 두려움을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생각의 많은 부분이 ‘오해나 착각이었다’, ‘나의 관점으로만 보았다’는 인식의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가 나를 우습게보거나 이용하려고 한다거나 미워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힘들었는데, 결국 착각이거나 지레짐작이었음이 밝혀져 허망했던 경험을 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착각’은 과거의 기억 속에 더욱 강하게 존재합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받아들인 세상에 대한 정보는 왜곡되어 무의식의 밑바닥에 저장되기가 쉽습니다. 부모의 이혼을 겪은 아이가 ‘나는 그들로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흔한 예입니다. 맏이에 대한 부모의 기대나 칭찬이 부러웠던 둘째가 ‘부모는 나를 미워한다’고 판단한 뒤 어린 시절을 질투와 좌절 속에서 자기 비하 혹은 저항과 반항으로 사는 경우도 흔하게 봅니다.

 아이들은 세상을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파편화된 정보들로 받아들이고 또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의 각색까지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착각을 가슴 깊이 새기고 살아가다가 연인 관계에서든 직장의 인간관계에서든 그 파편화된 정보에 의한 의식의 내용을 자꾸 적용하려고 합니다.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분노와 두려움, 차별받고 있다는 억울함, 자신은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는 비애감이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에게 정신적인 성장이란 착각과 환상으로 이루어진 과거 시절의 기억을 끌어내어서, 혹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그것과 직면한 뒤,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의 원인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을 위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우리가 하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여 수련하는 과정에서 성장이 자연스럽게 찾아듭니다.

 사실 심리치료나 자기 성찰의 궁극적인 목표는 과거 경험에 있지 않고, 현재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한 것 이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은 현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재료일 뿐입니다. 미래 또한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래의 불확실함에 대하여 너무 지나치게 불안해하지 마십시요.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자에게는 미래의 불안이 자리 잡지 못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미래 속에서 왜 고통을 느껴야 합니까? 미래를 상대로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빈곤에 대해 절망하고 있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내가 덜 가진 것 같고, 내가 능력이 없는 것 같아 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지나치게 남과의 양적인 비교에 골몰하거나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군중심리나 유행현상의 부정적인 측면도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양적인 비교에서 비롯됩니다.

 삶에서의 성공을 양적인 비교에 치중한다면, 많은 돈을 버는 것,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성공의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신뢰를 주고받는 관계, 훌륭한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 마음으로 진정으로 우러나는 존중, 늘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헌신하는 것, 무엇보다도 사랑과 연민을 계발하는 것, 이런 것들이 더 소중한 성공의 조건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진정한 의미의 비교의 대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사이에 있는 것임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과연 더 자유로워져 있는가.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는 대상을 통한 충만에서부터 자유로워져 필요가 없음에서 오는 충만과 자유 속에 있는가, 하는 것에 삶의 의미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한 삶의 방식이 수행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행은 삶의 방식일 뿐만 아니라 내면에 ‘삶의 목적, 삶의 의미’를 잉태하여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수행하기에 인색합니다. 저는, “은퇴하면 혹은 남편(아내)이 은퇴하면, 병석에 계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아이들만 결혼하고 나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수행을 하겠다”고 말하곤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여건이 형성되고 나서 열정을 가지고 수행에 임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 수행은 여건과 시간의 여유 속에서 하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가장 힘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수행입니다. 가장 힘들 때 삶의 깊은 의미와 자유에 대한 깊은 의미를 수행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식을 지니지 않는 자가 여유가 있을 때 삶의 깊은 의미와 자유에 대한 필요를 강렬하게 느끼며 수행에 열정적으로 임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기 삶에 대한 의미를 점검하십시요. 그리고 그 의미의 실현을 위하여 수행에 성실하게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싸두  싸두  싸두

출처 : 위빠사나 수행 가이드
글쓴이 : Sujat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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